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79화 (179/422)

179화 두 개의 컵 (4)

[EFL컵, FA컵, 이제 뭐가 남았지? @선덜랜드_오피셜]

SNS에 올라온 메시지를 응시하던 희주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마치 선생님 질문에 대답하는 유치원생처럼.

“유로파 컨퍼런스요!”

확실히 FA컵 우승의 여파가 크긴 한가 보다. 아무리 희주가 평소 정신줄 놓고 산다지만, 저렇게까지 까불거리는 모습은 보기 드물거든.

뭐, 유로파 컨퍼런스도 먹긴 해야지.

- 그래도 선덜랜드는 아직 양심은 있네. ‘리그 원, 챔피언십, 이제 뭐가 남았지?’라고는 안 하잖아.

ㄴ 벌써 프리미어리그 우승 노리긴 선 넘었지.

- 근데 선덜랜드가 FA컵 버렸다던 언론은 지금 어디 감? 템즈강 갔음?

ㄴ 몬테네그로 갔겠지.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은 취재해야 할 거 아니야.

아닙니다. 정답은 시티 오브 선덜랜드입니다.

FA컵을 차지한 데 이어,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도 치르는 상황이다. 당연히 언론을 불러다 특집 기사를 마구 실어야지. 프레스팀장 애니가 직접 나설 예정이다.

물론 프레스팀만 열일한 건 아니다. 우승의 기쁨을 팬들과 나누기 위해, 당연히 CS팀과 풋볼스퀘어 관리팀 또한 바쁘게 움직였다.

메가스토어에서는 또다시 기념 할인을 시작했고, 아드리안은, 피규어 제작사를 갈아 넣은 희대의 역작을 준비했다.

“이번엔 새로운 경기장이군요··· 모습이 조금 특이한데요?”

그라운드 바닥에 ‘FA컵 챔피언, FC 선덜랜드.’가 선명하게 새겨진 경기장 모형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친숙한 느낌이지만, 바로 알아보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와는 분명히 생김이 다르다. 그런데, 당연하겠지만 ‘FA컵 챔피언’ 선덜랜드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이외의 다른 경기장 피규어를 팔 이유가 없다.

아드리안이 대답했다.

“로커 파크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옛날 선덜랜드의 홈이죠.”

그래서 친숙했었구나. 로커 파크의 실물은 본 적 없지만, 클럽 박물관에는 사진이 걸려 있으니까.

동시에, 나는 아드리안의 의도를 이해했다.

가뜩이나 우리 피규어는 고가의 상품이고, 그중에서도 경기장 피규어는 특히 비싸다. 우리는 그런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피규어를 잔뜩 팔아먹었다.

이제 와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FA컵 챔피언 문구만 새로 박아서 판매하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거고, 그렇다고 잔디 부분에 들어갈 문구만 팔고 말자니 아쉬웠겠지.

그래도 30년 전에 철거한 옛날 경기장 피규어는 좀···.

“의도는 알겠지만, 이번 상품은 안 되겠습니다. 부속물 퀄리티로 보면 이번에도 가격이 상당할 텐데, 로커 파크는 조금 뜬금없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아드리안은 내 대답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다른 피규어를 내보였다. 마찬가지로 ‘FA컵 챔피언, FC 선덜랜드’라는 문구가 그라운드에 새겨진 경기장이었다.

이번 경기장은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웸블리군요.”

웸블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FA컵 결승은 원래 웸블리에서 열리니 뜬금없지도 않고, 기존 경기장 피규어와 다르니 수집욕도 채울 수 있다.

무엇보다, ‘FA컵 챔피언, FC 선덜랜드’ 문구가 들어간 그라운드 위에 우리 선수들의 피규어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내 가슴이 다 두근거릴 정도다.

이건 팔린다는 확신이 들었다··· 법적인 문제만 없다면.

“우리가 웸블리 피규어를 팔아도 됩니까?”

그러자 아드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단주님, 이 피규어는 ‘공식적으로는’ 로커 파크인데요? 이건, 조립을 잘못했을 때 생기는 실패작입니다.”

말문이 막힌 나는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고, 아드리안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작년, EFL컵 우승 직후 바로 팔고 싶었는데, 개발에 시간이 걸려서···.”

“오래 걸릴 만했겠네요.”

두 가지 버전으로 조립할 수 있는 경기장 모형이라니, 제작사를 얼마나 들볶았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로커 파크를 선정한 이유는, 아무래도 현존하지 않는 경기장이다 보니 고증을 깐깐하게 따질 필요가 적기 때문이겠지.

“구단주님, 그래서 이 제품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로커 파크고, ‘다른 조립법’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 루트로 전파할 계획입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 피규어를 로커 파크 버전으로 조립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명분은 될 것 같다. 로커 파크는 과거, 선덜랜드의 홈이었던 경기장이었으니.

“추진합시다. 설마 FA가 이런 거 가지고 소송 걸진 않겠죠.”

정 안되면 리미트리스 법무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뭐, 웸블리 측에 로열티 물어주고 말지.

다른 걸 다 떠나서 내가 보고 싶었다. FA컵 챔피언이라는 문구가 쓰인 웸블리 스타디움과, 그 위에 당당히 선 우리 선수들의 모습을.

나는 곧바로 ‘로커 파크’ 경기장 피규어 양산을 허용했다.

* * *

프레스 팀장 애니는, 기자들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오늘 여러분을 이곳에.”

모조리 소집한 이유는, 라는 멘트를 입안으로 삼킨 다음, 애니는 표정을 살짝 누그러트리며 웃었다.

“모신 이유는, 우선 저희 선덜랜드가 FA컵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루머에 대해서 해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권위 있는 언론 관계자 여러분께서는 그런 루머를 믿지 않으셨겠지만요.”

루머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애니는 ‘권위 있는’ 언론 관계자들이 일제히 침묵하는 모습을 즐겼다.

‘이것도 다 우승했으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한때 언론에서도 들고일어났던 사건을 단순한 ‘루머’로 지칭하는 의도는 명백하다. 앞으로 선덜랜드와 척지기 싫으면 이번 FA컵 관련 기사를 협조적으로 쓰라는 의미였다.

물론 일방적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것은 애니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소재도 잔뜩 준비해 두었다.

예를 들면 승부차기의 열쇠가 된 선덜랜드의 데이터 분석 능력이라거나, 우승을 확정한 순간 여과 없이 기쁨을 드러내는 구단주의 사진 같은 것.

매년 검열당했지만, 올해는 괜찮을 것이다. 아마.

애니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사이, 유일하게 루머에 휘둘리지 않았던, 그리고 권위는 별로 없는 지역 일간지, 선덜랜드 데일리 담당 기자가 손을 들었다.

“축하드립니다! 이로써 다음 시즌 유로파리그 진출을 확정하셨는데요. 선덜랜드로서는 무척 만족스러운 시즌이겠죠?”

“기왕이면 톱시드를 받으면 더욱 만족스러울 것 같은데요.”

애니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실 선덜랜드의 클럽 랭킹 포인트는 높지 않은 편이었다. 올 시즌 유로파 컨퍼런스에서 결승에 향하면서 포인트를 쌓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유로파리그 3포트를 넘기 어렵다.

하지만 유로파 컨퍼런스 우승팀이 되면, 랭킹 포인트와 상관없이 유로파리그의 톱시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애니의 답변은, 대답이라기보다는 선포에 가까웠다.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에서도 반드시 우승하겠다는 선덜랜드의 결의를 가득 담은.

애니의 태도에서 진심이 전해졌는지, 기자들이 하나둘씩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아무튼 이들은 영국 언론이고, 당연히 영국 팀이 유럽 대항전에서 승리하는 것을 바랄 사람들이기에.

“몬테네그로와의 거리 문제도 있고, 5일밖에 안 되는 경기 간격을 고려하면 꽤 가혹한 원정이라는 평가가 뒤따릅니다. 선덜랜드의 대책은 어떤 게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원정지원팀을 운영하여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결승 일정이 빡빡하다고는 하지만, 이미 한 달 전에 결정한 일이라 갑작스럽지는 않습니다.”

“일정이 촉박하여 로테이션을 돌릴 거라는 의견도 나오던데요.”

“선수의 선발은 제가 답변드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선덜랜드의 미디어 책임자로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답하기 전, 애니는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프레스 룸은 조용했고, 이따금 자판 두드리는 소리 이외에는 어떤 잡음도 섞이지 않았다.

“선덜랜드가 FA컵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FA컵 챔피언입니다.”

할 말이 없어진 기자들 대부분이 침묵했지만, 끝까지 포기를 모르는 사람도 섞여 있었던 모양이다.

“선덜랜드가 FA컵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의혹이 제기되는 건데요. 유로파리그 진출권을 이미 확보하지 않았습니까?”

애니는 대답 대신 스크린에 미리 준비한 자료를 틀어놓았다. 특집 다큐멘터리, ‘로드 투 컨퍼런스’의 영상을.

넷플릭스와 제휴까지 맺으며 촬영한 이 다큐멘터리야말로, 선덜랜드가 작정하고 시즌 초부터 유로파 컨퍼런스에 올인했다는 증거였다.

‘로드 투 컨퍼런스’는 이제 결말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리고 결말의 내용은, 5일 후 벌어질 결승전이 좌우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상식이 있으면, 선덜랜드가 유로파 컨퍼런스 대충 뛸 거란 생각은 도저히 할 수가 없겠군요.”

* * *

FA컵을 소홀히 여긴다는 이야기는 말끔히 사라졌다.

애니의 활약으로 언론이 완벽하게 돌아선 것도 있지만, 사실은 사진도 한몫했다. 톰슨이 마지막 킥을 성공한 직후, 열렬히 환호하는 나와, 바로 옆에 매달린 희주의 사진이.

- 애인 아님?

상식이 있으면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다행히 아래쪽에는 정상적인 댓글도 달려 있었다.

ㄴ 남매임. 여동생이 옆에서 달려드는데도 마냥 좋다고 환호하는 거 보면 어지간히 기뻤나 봄.

선덜랜드 하나만 기억해주세요. 진심이 느껴지길 바랍니다··· 빌어먹을.

덕분에 우리가 FA컵을 가볍게 여겼다는 여론은 완벽하게 가시긴 한 것 같은데, 내 정신건강에는 썩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 최악이었던 건, 한국 언론에 사진이 쫙 풀렸다는 것이다. 시치미를 떼고 있긴 한데, 아무리 봐도 범인은 다미가 분명하다. 우리 부모님은 변함없이 남매가 사이가 좋다며 기뻐하신 모양이지만.

내게도 메시지가 왔다.

[우승 축하한다.]

오랜만에 아버지께서 보내신 메시지를 보니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원래 축구라면 진절머리를 내던 분인데, 그래도 아들이 하는 일이니 기뻐해 주시는구나 싶어서.

참고로 희주는, [오빠 일하는데 너무 방해하지 말고]라는 메시지를 받았다며 잔뜩 심통이 났다.

“오히려 포상이라는 의견이 있던데요.”

정어리 파이에 장어 젤리 비벼 먹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그런 끔찍한 소릴 합니까?”

“브라이언 코치님이요.”

장난기 넘치는 표정을 지은 리지를 바라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걔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축구 말고는 전부 무시하는 게 속 편합니다.”

식성만 보더라도, 브라이언은 정상인의 감성과는 거리가 멀잖아?

“그래도 가끔은 정상적인 이야기도 하시잖아요?”

“하긴, 이번에 감독님을 위해서 FA컵을 차지하자는 이야기는 꽤 괜찮았죠.”

그러자 리지의 얼굴에 더욱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보람과 만족, 성취감과 행복이 적당히 섞인. 평소의 리지는 주로 잔디 세팅을 마무리한 직후 저런 표정을 짓곤 한다.

“감독님은 기뻐하셨나요?”

“물론입니다.”

선수나 스태프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나는 안다. 클럽 박물관에 트로피가 들어간 순간, 로저스 감독의 주름진 눈에 글썽거리던 눈물을.

“썬도 기뻤··· 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네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사진이라는 강력한 물증이 남아 버렸으니까. 그래서 나는, 리지에게 슬쩍 물었다.

“만족하셨습니까?”

리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머, 눈치채셨어요?”

“브라이언은 거짓말에 영 소질이 없거든요.”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서 결승이 끝난 직후에 브라이언을 살짝 추궁했더니, 곧바로 줄줄 불었다.

내게는 감독님을 위해, 그리고 감독님에게는 날 위해 트로피를 차지하자고 말했다는 작전, 그리고 발안자가 누구였는지까지.

리지의 주근깨투성이 얼굴이 붉어졌고, 나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기뻤습니다.”

“두 개의 컵을 전부 들면 더 기쁘시겠죠?”

발그레한 얼굴로 웃는 리지에게, 힘주어 대답했다.

“그럴 겁니다. 첫 유럽 대회의 트로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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