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두 개의 컵 (5)
핫도그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힘차게 선창했다.
“두 개의 컵을 위하여!”
잔을 들어 올리며, 수잔이 마일즈에게 속삭였다.
“보통 더블이라고 하지 않나요? 우승이 두 개면요.”
“그게, 리그 우승을 포함해야 더블이라고 해.”
“그러면 선덜랜드는 작년에 더블 한 거예요?”
“어···.”
마일즈는 영 대답하기 곤란해 보였다. 보통은 1부 리그에서 우승한 경우만 더블로 간주하지만, 골수팬 마일즈로서는 작년 선덜랜드가 해낸 챔피언십 우승 기록을 깔아뭉개는 발언을 차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브렌든은, 곤란해하는 마일즈로부터 시선을 옮겼다. 핫도그 사내, 정확히는 정확히는 그의 복장 쪽으로.
핫도그 사내는 정장, 그중에서도 검은색 연미복 차림이었다. 매일 선덜랜드 레플리카만 입던 친구의 변모는, 브렌든에게는 무척 충격적이었다.
‘파티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호텔 연회장 같은 거라면 이해하겠지만, 오늘의 모임 장소는 마일즈의 집이었다.
발단은 지난 FA컵 결승이었다. 승리의 축배를 들려던 ‘브라더스’ 와 마일즈 부부가 자연스럽게 함께할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펍에서 모일까 싶었지만, 런던에서 온 십 대 후반의 소년 둘이 따라붙으면서 모임 장소가 바뀌게 되었다.
‘한 명은 스퍼스, 다른 한 명은 블루스라고 했지.’
아스널의 우승을 저지하고 싶다는 의도로 경기장을 찾은 소년 축구팬들이 자연스레 마일즈, 수잔 부부와 의기투합했다는 모양이다.
집주인 부부를 바라보는 소년들의 눈빛에는 동경이 가득했고, 브렌든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원래 저 나이 무렵엔 연상의 매력에 푹 빠지는 법이지.’
마침 수잔은 꽤 미인이고, 성격도 싹싹하고 씩씩한 편이었다. 그러니 십대 소년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마일즈 대선배님!”
뜻밖의 이야기에, 브렌든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마일즈도.
“대선배? 우리가 같은 학교 나왔던가?”
“영국 축구팬이 마일즈 우드를 모르면 간첩 아닙니까? 전설적인 맥켐즈 서포터잖아요.”
“전설?”
“잭 선수 유니폼이 있으시다고 해서 조금 알아봤더니, 엄청 유명하신 분이더라고요.”
칭찬을 들었는데도 마일즈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유명’해졌는지를 따지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선덜랜드의 처참했던 암흑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년들의 표정은 천진했다.
“선덜랜드 구단 관계자 이외에, 잭 선수의 실착 유니폼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딱 두 명뿐이라고 들었거든요.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선수 부모님이라고···.”
선덜랜드의 로컬 보이, 잭은 원래 경기 끝난 다음에 유니폼 교환조차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팬들에게 가끔 유니폼을 선물한 적은 있지만, 경기에 입었던 걸 벗어 준 사례는 지금까지는 마일즈가 유일하다.
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브렌든은 입맛을 다셨다. 마침 그 역사적인 자리에는 브렌든도 함께했기 때문에.
“그건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잭 선수가···.”
“참고로 저기 걸려 있어.”
수잔이 보란 듯 거실 벽면을 가리켰다. 액자에 들어간 사인 유니폼은, 축구팬들의 눈에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를 뽐냈고, 그 모습에 소년들은 물론 핫도그 사내나 맥주집 사장의 눈빛도 초롱초롱해졌다.
“그러고 보니 축구팀을 열심히 응원하다가 미모의 아내를 얻으셨지.”
“어머, 미모는 무슨요.”
수잔이 기분 좋게 웃으며, 내숭 떠는 여자들이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처럼 옆의 남편을 살짝 손바닥으로 때렸다. 본인은 가볍게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손바닥이 살에 착착 감기는 모습을 보면 타격감이 무척 찰지게 보였다.
‘하긴, 저런 단점이라도 하나 있어야 내 배가 덜 아프지.’
언젠가 마일즈가 하소연했던 것처럼, 천성적으로 손이 매운 모양이다.
그때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마일즈를 핫도그 사내가 만류했다.
“아, 제가 나가 보죠. 전설적인 맥켐즈께서는 자리에 앉아 계셔야죠.”
“여긴 우리 집인데···.”
난처해하는 마일즈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브렌든은 히죽 미소를 지었다.
“포기해.”
잠시 후 핫도그 사내가 선덜랜드 엠블럼이 선명한 봉투를 가져왔다. 열어보니, 마일즈와 수잔 이름으로 준비된 항공권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행선지는 당연히, 결승전이 열리는 몬테네그로였다.
소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구단에서 티켓도 보내 줘요?”
실은 브렌든과 핫도그 사내 역시 똑같이 받을 혜택이었다. 선덜랜드 시즌권 보유자가 FA컵 결승전을 직관할 경우, 몬테네그로행 항공권을 선물한다는 프로모션 행사 중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런던에서 온 소년 팬들은 선덜랜드의 그런 팬 서비스를 알 리가 없었다.
소년들이 서로를 마주 봤다.
“구단에서 비행기 티켓을 보내줄 정도로 대접받는 거물이란 말이지?”
“그리고 저기 마피아 같은 형님을 막 턱짓으로 부리고···.”
브렌든은 물론, 마일즈 역시 몰랐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전설적인 맥켐즈 서포터’ 마일즈 우드에게 또 다른 전설이 추가될 거라고는.
그래서 수잔이 마냥 웃으며 티켓을 들여다보는 사이, 브렌든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만 했다.
“몬테네그로에서도 이길 수 있겠지?”
마일즈 또한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겠지. 아마, 다들 싸울 준비를 마쳤을 테니까.”
* * *
“선수단의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내 질문에, 메디컬 팀장 버드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올 그린, 완벽합니다.”
“크리그는요?”
“문제없습니다. 애초에 큰 부상이 아니었거든요.”
“다행이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향해, 이번엔 부팀장 포터가 보고했다.
“시즌 막바지의 연전이라 피로가 쌓여 있긴 합니다만, 우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선수들의 피로를 완벽하게 풀어 두겠습니다.”
이럴 때 보면 꼭, F1 레이싱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레이스 도중 피트인한 차량에, 정비팀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기름 넣고 타이어 가는 것처럼, 우리 메디컬 팀도 선수들에게 달려들어 쿨다운과 산소 캡슐, 각종 마사지 같은 걸 퍼부으니까 말이지.
마침 각종 센서와 장비들로 선수 컨디션을 수치화해서 관리하는 모습을 보니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든다.
참고로 희주는 우리 메디컬 룸을 ‘SF 영화에 나오는 우주선 조종실’ 같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버드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지금은 선수들이 훈련 중입니다. 필요하시면 훈련장을 살펴보시겠습니까?”
“아뇨,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메디컬 팀의 보고를 들은 것으로 충분하다. 굳이 선수들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내 눈에 보이는 숫자는 사람의 가치이지, 선수의 컨디션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경기 준비가 막바지에 달할 시기였다. 우리 선수들은 곧 몬테네그로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구단주가 괜히 훈련장에 들락거리는 건 오히려 방해만 된다.
그때, 마침 희주가 멀리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원정지원팀의 최종 보고! 선수단 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 따로 출입국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협의 끝났어.”
“잘했어.”
“그러면, 갑부 오라버님. 슬슬 전용기 띄우시죠.”
나는 웃으며 몸을 돌렸고, 잠시 후에는 선덜랜드 전용기, 에어버스 350의 구단주 전용석에 앉아 스크린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스크린에서는 마침 축구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이번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전은, 한마디로 자본과 낭만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게 발언한 사람은 프랑스의 펀딧, 요앙이었다. 현역 시절 국가대표로 맹활약했고, 은퇴 이후에는 코칭스태프로 잠깐 활동했었던 인물이었다.
희주가 인상을 썼다.
“자본과 낭만? 그러면 뭐, 우리는 낭만적이지 않단 소리야?”
나는 차분하게 응수했다.
“혹시라도 선수들 좌석에 이딴 영상 안 나오게 조치해.”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항공기의 영상은 기본적으로 기내에서 제공되는 것들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특정 영상을 못 보게 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알았어.”
곧바로 화면을 돌려버리려는 희주를, 나는 제지했다.
“내 자리는 놔둬. 나는 좀 더 볼 거니까.”
“굳이 들을 가치도 없는 헛소리인데···.”
희주가 곧바로 시무룩해졌다.
물론 희주 자리 앞에는 자기 몫의 소형 스크린이 있지만, 아무래도 내가 보는 대형 스크린을 같이 보는 게 훨씬 편할 것이다. 희주 자리는 기본적으로 내 옆좌석이니까.
그래도 좀 참아라. 나도 좋아서 보는 건 아니니까.
나는 스크린에 비친 요앙의 얼굴을 응시했다.
현역 시절이었더라면 상당했을 가치는, 지금은 한 자릿수 숫자까지 줄어 있었다. 펀딧으로서의 가치는 별로 없는 인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석연치 않았다.
아무리 유로파 컨퍼런스가 챔스와 유로파리그의 하위 대회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결승전에 굳이 몸값 한 자릿수 인물이 굳이 나와서 발언한다는 게 뭔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의 국적이 스페인이었으면, 자본 운운해도 딱히 신경도 안 썼을 것이다. 유럽 대회에서 자국 클럽 팀에 호의적으로 발언하는 건 축구계의 오랜 상식이니까. 그런데 지금 타이밍에 굳이 프랑스 출신이 끼어드는 모양새가 영 찝찝하다.
“찝찝하면 나중에 꼭 탈이 나더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자금 좀 추적해 줄 수 있어?]
다미에게서 답장이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은 30초를 넘지 않았다. 그리고 다미는, ‘누구’ 냐고도 묻지 않았다.
[네, 바로 처리할게요.]
떨어져 있지만, 변함없이 믿음직스러운 리미트리스의 넘버 투를 떠올리며,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일반적인 비즈니스석보다 조금 더 넓게 세팅된 좌석 시트를 뒤로 눕힌 채, 샐리는 스크린을 응시했다.
로드 투 컨퍼런스, 최종화 예고편이었다.
[이제 선덜랜드는, 빌바오를 상대하게 됩니다. 스폰서 마크를 제외하면,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아 보이는 홈 유니폼을 입은 상대를요.]
내레이션에 맞춰, 화면에는 100년 전 과거의 풍경이 스쳤다. 흑백 사진처럼.
[계기는 1910년이었습니다. 당시의 선덜랜드는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서도 손꼽힐 강팀이었고, 빌바오는 그런 선덜랜드의 유니폼을 사다 입었거든요. 어떤 의미에서, 두 팀은 서로 형제라고 할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많이 컸네. 저 당시엔 형제라기보다는 부모자식 취급이었을 텐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선덜랜드 팬으로 보낸 샐리는, 자신의 조부모조차 경험하지 못했을 시절을 상상하며 웃었다.
[하지만 지금의 두 팀은, 유니폼 이외에는 퍽 다른 팀이 되었습니다. 빌바오는 강력한 순혈주의를 내세워, 바스크 출신으로만 선수단을 구성하기로 유명하죠. 하지만 선덜랜드는 전 세계에서 폭넓게 선수를 불러들입니다.]
“한 가지는 확실하지. 순혈주의 했으면 우리는 절대 부활 못 했어. 우리 구단주님과의 인연도 없었을 테니까. 우리 아빠도 여기 못 왔겠고.”
[서로 같은 유니폼을 입었던 날로부터 백 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고, 붉고 흰 유니폼을 부르는 서로의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샐리는 물끄러미 화면 속의 유니폼을 응시했다. 비록 세세한 디자인이 서로 달라졌지만, 그래도 한때 같은 유니폼이었다는 흔적이 남은 두 팀의 홈킷 유니폼을.
[이제, 레드 앤 화이트와 로지 블랑코스가 격돌합니다!]
그 로지 블랑코스에 대해, 샐리는 이미 분석을 끝낸 상태였다. 전술은 물론, 결승전의 선발 명단까지도.
그래서 샐리는, 승리를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일한 변수는 아마 선수단의 사기라는 사실도.
순혈주의는, 때로는 강력한 결속력의 계기가 되는 법이다.
바스크만의 팀이라는 강렬한 정체성을 가진 빌바오의 결속력은 여느 축구팀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물론 선덜랜드 역시 선수단의 단결력이 좋기로 유명한 팀이지만, 그 구심점이 되었던 감독 로저스는 이번 결승전에 뛰지 못한다.
평소 브라이언이 하던 참모 역할을, 이번에는 샐리가 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수석 코치 브라이언은, 결승전 당일에는 팀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감독 대행이 되어야 한다.
샐리는 고개를 돌려, 건너편 창가에 앉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브라이언의 입은 쉼 없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설마, 저 축알못이 또 전술은 안 짜고 헛소리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조용히, 브라이언의 혼잣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우리만을 위해서 뛰는 게 아니다. 머나먼 몬테네그로까지 따라온 팬들을··· 아니, 이건 너무 식상해. 감독님 멘트는 듣고 있으면 가슴이 확 뜨거워지고 그러던데.”
샐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비록 전술 구상은 아니었지만, 결승을 앞둔 팀의 리더가 준비해야 할 내용이었다. 선수들을 독려하는 멘트만은 브라이언이 직접 말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아무리 세련된 문구라도, 자신의 언어가 아니면 가슴속의 열기를 전할 수 없고, 선수들의 투지에 불을 지피지 못한다.
하지만 그 외의 요소는 전부 도와줄 수 있다. 이 비행기에 탄 모두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빌바오의 주장을 막아내기 위해서, 우리 주장을 맨투맨으로 붙이고···.’
창밖의 풍경은 어느새, 결승전이 열릴 몬테네그로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두 개의 컵을 차지하기 위한 선덜랜드 원정대의 목적지, 포드고리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