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교차하는 적과 백 (1)
<전술은 중요한 것이지만 전술이 시합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시합에서 이기는 것은 인간이다. - 알렉스 퍼거슨>
브라이언은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고민해온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짧게 심호흡한 다음, 그는 열정을 가득 담아 선언했다.
“피를 붉게 만드는 물질은 피브린, 헤모글로빈, 에리스로포이에틴, 감마글로불린··· 그리고 선덜랜드다.”
“에휴, 코치님은 앞으로 그냥 전술이나 짜세요.”
샐리의 싸늘한 반응을 시작으로, 스태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브라이언은 침통하게 고개를 떨궜다. 그의 유일한 위안은 이 참혹한 연설을 선수가 듣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굳이 감독님 흉내 낼 필요 없어.”
지나가던 톰슨이 말참견한 시점에서, 그 유일한 위안마저 가루가 되고 말았다.
브라이언은 침울하게 하소연했다.
“아니, 이것도 다 감독이 해야 할 일이잖아?”
“글쎄··· 꼭 그렇지도 않다고 보는데.”
톰슨이 슬쩍 눈짓을 보냈고, 브라이언은 곧바로 의미를 파악했다.
아무리 팀에서 호텔 전체를 빌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로비는 이야기를 길게 하기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지금 톰슨에게 목격당한 것처럼, 다음에도 누군가에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브라이언은 순순히 톰슨의 인도에 따라 움직였다.
호텔 바는 그들에게 친숙한 단골 바 블랙캣츠처럼 아늑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로비보다는 나았다.
마시지 않을 술 두 잔을 앞에 올려둔 채, 둘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감독이 막 명연설을 쏟아내고 그러지는 않아. 너도 알잖아.”
“그렇긴 하지.”
브라이언은 순순히 인정했다. 챔스를 들어 올린 명장 중에는, 선수단과의 관계가 썩 좋지 못하기로 악명 높은 감독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우리 드레싱룸에는 강렬한 영향력을 미치는 리더가 있잖아. 얼마나 편해? 충성심 높지. 구단 경력 길지. 그런데도 코치에게 대드는 법 한 번 없고.”
“편하지.”
“애초에 썬이 데려온 선수들이니까, 사고 칠 일도 없고.”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한 구단주는, 선수단의 융화를 깨지 않을 만한 선수들만 골라서 데려오는 중이었다. 유일하게 튀는 선수는 에디였지만, 겪어보니 자의식이 강해서 그렇지 본성이 나쁜 선수는 아니었다.
브라이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희성이 직접 뽑고, 로저스가 평소 탄탄하게 관리해 온 선수단은 감독이 하루쯤 자리 비우는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의 선덜랜드 드레싱룸에는 잭이라는 충성스러운 리더가 있고, 노련한 부주장 톰슨도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지금의 팀에서 브라이언이 선수단 관리 능력을 발휘할 필요는 거의 없었다.
잠시 브라이언을 응시하던 톰슨이 낮게 말했다.
“그렇지만 네가 굳이 내일 선수단을 독려하고 싶으면, 그냥 네 목소리를 내. 어설프게 감독님 흉내 내지 말고.”
“어설프게···.”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남의 입에서 나오니 충격이 컸다. 브라이언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톰슨을 바라보았지만, 톰슨은 태연했다.
“솔직히 감독님은 무슨 헤모글로빈 그런 말씀은 절대 안 하시지.”
“그건 그래··· 결국 내 목소리를 내야 하는 거겠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너는 왜, 내일 선수단을 굳이 독려하고 싶은 건지.”
“의무니까.”
의무라는 단어는 반사적으로 나왔다. 톰슨이 옆에서 차분히 바라보는 사이, 브라이언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고, 대답했다.
“그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어.”
* * *
결승전이 열리는, 스타디온 포드고리차는 뜨거웠고, 만오천 석의 관중석은 순식간에 붉고 하얀 유니폼의 팬들로 가득 찼다.
선덜랜드가 팬심으로 유명한 구단이지만, 빌바오 또한 충성도 측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팀이었다. 지역색이 강한 스페인에서, 바스크 순혈주의를 내세운 빌바오는 연고지 팬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었다.
관중석의 열기는 경기 전부터 뜨거웠다. 주위를 둘러보던 브렌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유에파가 머리가 있었으면 조금 더 큰 경기장을 빌렸을 텐데··· 예를 들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그러자 핫도그 사내와 마일즈에게서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이봐, 브렌든. 유에파는 원래 머리가 없어.”
“그렇지. 걔들이 제정신이었으면 4강전 치르는 감독에게 두 경기 출전정지를 먹였겠어?”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반응해준 사람은, 수잔뿐이었다.
“그랬으면 재밌었겠네요. 원정 지옥에서 열리는 결승전! 공정한 느낌은 아니지만, 우리는 신나잖아요?”
“하지만 수잔 씨, 결승전이 열릴 경기장은 미리 정하니까, 까딱하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남의 팀 잔치가 벌어지게 될 수도 있어요.”
의외로 상식적인 면모를 보인 핫도그 사내의 반론을, 수잔은 간단히 일축했다.
“이기면 되잖아요. 이기면.”
물론 마일즈는,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라면 또 모를까, 선덜랜드는 절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용으로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전을 치르고 나면, 그 경기장에 대한 인상은 유로파 컨퍼런스급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별 의미는 없는 잡담이었다. 결승전 경기장 장소는 이미 스타디온 포드고리차로 확정되었고, 그들은 모두 몬테네그로에 왔다. 맥주집 사장만을 잉글랜드에 남겨둔 채.
그리고 이곳에서, 이제 그들은 빌바오 서포터들을 상대하게 된다.
Athletic, Athletic, eup!
벌써부터 스페인어 응원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맞은편 스탠드를 응시하며, 마일즈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하고 유니폼만 닮은 건 아니군. 열기도 비슷해.”
그러자 수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니폼이 닮았어요? 아무리 봐도 아닌데요?”
“홈킷은 닮았잖아. 얼핏 보면 관중석이 다 우리 것처럼 보일 정도로.”
오늘의 빌바오는 회색 원정킷을 입게 되었다. 양 팀의 협의에 의해 그렇게 결정했다. 아무래도 서로의 역사를 고려하면, 원조인 선덜랜드 쪽이 홈킷을 입는 게 자연스럽겠다는 의견에 서로 동의한 것이다.
물론 응원 오는 팬들은 홈킷을 입는 게 보통이기에, 관중석은 똑같은 적색-흰색 유니폼으로 가득했다.
“제 눈엔 홈킷도 달라 보이는데요.”
“다르다고? 어디가 다르죠?”
수잔의 단언에, 브렌든이 무심코 태클을 걸고 말았다. 그런 브렌든에게 마일즈와 핫도그 사내의 조언이 이어졌다.
“아마 우리는 무슨무슨 레드고 쟤들은 어쩌구저쩌구 레드라서 다르다고 할 텐데, 그냥 넘어가.”
“그걸 그냥 못 넘어가서 자네가 독신인 거야.”
그때, 통로에서 선수들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일즈가 가장 먼저 반응했고, 잠시 후 수잔과 브라더스의 목소리, 팬들의 함성이 차례로 이어졌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빌바오 팬들이 응수하면서, 경기장은 그야말로 붉게 달아올랐다.
* * *
“세상에, 여기까지··· 진짜 많이들 오셨네. 우리 팬분들로 관중석 꽉꽉 들어찬 것 좀 봐.”
잭이 벅찬 표정으로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요니가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멍청아. 절반은 빌바오 팬이잖아.”
잭은 곧바로 응수했다.
“절반이라니! 기껏해야 30%겠지. 우리 팬이 더 많아.”
그러자 요니가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네가 우리 유니폼을 잘못 알아볼 리는 없지.”
“뭐,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성골 유스 둘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발아래에서 느껴지는 잔디의 촉감은 이미 그들이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서 경험했던 것과 똑같았고, 팬들의 함성 또한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유일하게 다를 것으로 예상했던 감독의 부재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동기부여에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너희들을 믿기 때문에. 오늘은 너희가 선덜랜드의 축구를 하는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마.]
경기장 입구까지 동행한 로저스 감독의 격려에 이어, 드레싱룸에서는 감독대행 브라이언의 독려가 이어졌다.
[긴말은 하지 않을게. 그럴 말재주도 없으니까. 다만, 다들 한 가지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왜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너희들을 지휘하게 되었는지를.]
대답 대신 잇소리가 돌아왔다. 아직도 이탈리아 원정에서의 분노를 지우지 못한 브루노, 그리고 바스티아노에게서.
[감독님은, 결승이라는 가장 빛나는 자리에 서지 못하게 되셨다. 공식 기록은 출전정지. 벤치에 들어오지 못하니 경기 중엔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해.]
침묵하는 선수들을 바라보던 브라이언이 차분하게, 하지만 누구보다 뜨거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감독님뿐만이 아니야. 팀을 떠받치는 사람들, 이 순간에도 우릴 따라와 준 사람들. 그들이 이곳, 스타디온 포드고리차에 있었다고 증명해줄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
당시의 브라이언은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선수들은 증명할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알다시피, 우리 팀에는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어. 꿈을 포기한 사람도, 다른 곳으로 떠난 사람도 많았지.]
잭은 눈을 감았다.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은, 감독 대행 브라이언의 목소리를 떠올리기 위해.
그리고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그 와중 끝까지 팀을 지켜낸 사람들.”
곧바로 요니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무너졌던 팀을 이 자리까지 올려준 사람들, 그 고마운 사람들에게.”
[보답할 수 있게, 내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도와줘.]
잠시 후 휘슬 소리가 울렸다. 잭은 눈을 떴다. 그리고 센터서클에 놓인 공을, 옆으로 살짝 밀었다.
그의 오랜 파트너에게.
* * *
“오늘은 격전이 될 거라는 의견이 있던데요. 갑부 오라버님··· 어떻게 생각해?”
희주의 물음에,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뭐, 언론에서는 그렇게 포장하고 싶겠지.”
사실 우리와 빌바오는 유니폼 이외에도 공통점이 많은 팀이긴 하다. 일단 두 팀 모두 자국 컵 대회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니 유로파 컨퍼런스에 나올 자격이 생겼겠지만, 다시 말하면 상대적으로 리그 성적은 취약한 편이었다.
즉, 두 팀 모두 토너먼트와 단기 결전에 특화된 축구라는 식으로 포장할 여지가 생긴다는 뜻이다.
결승전을 앞두고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한 언론에는 미안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늘 경기가 흔히 말하는 결승전에 어울리는 경기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대를 압도할 테니까. 모든 면에서.”
“···라고 하네요. 감독님?”
그러자 로저스 감독이 옆에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실은 나도 동감이오. 지금의 우리는 그렇게 자부해도 될 만큼 충분히 강한 팀이거든. 특히 오늘이 가장 강하겠지. 내가 여기 있으니까.”
로저스 감독의 자조적인 답변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고 희주는 곧바로 호들갑을 떨었다.
“하긴, 감독님을 위해서라도 다들 죽도록 뛸 게 틀림없어요!”
로저스 감독의 발언에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최근의 우리가 충분히 강하다는 의견만은 맞다고 생각한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바스티아노를 데려온 것이 임계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적응과 재활이 필요했기에 활약이 적었지만, 정신적으로 회복한 지금의 바스티아노는 리그 어느 팀을 상대로도 활약할 수 있는 공격수다. 그리고 바스티아노가 활약할수록, 살아나는 선수가 있다.
빌 크리그.
구단을 처음 인수했던 날, 묵묵히 공을 차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가 겪었던 지독한 부진도, 당시의 우리 팀에는 차고 넘쳤지만, 프리미어리그 팀의 주전으로 뛰기엔 다소 부족한 그의 재능도.
슈팅 능력 이외에는 여러모로 평범한 크리그지만, 그래도 바스티아노라는 걸출한 공격수를 파트너로 두게 되면서 크리그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톰슨이 경기장 오른쪽 사이드에 롱 패스를 보냈고, 스티븐이 곧바로 공을 머리로 떨어뜨렸다.
마르틴과 바스티아노가 각각 수비 한 명씩을 달고 있었기에, 빌바오 수비진은 스티븐이 떨어뜨린 공을 회수하지 못했다.
잠시 후 빈 공간에 요니가 나타났고, 공은 포백라인 뒷공간에 전해졌다.
“뚫었어!?”
희주의 외침과, 한발 늦게 침투한 크리그의 다리가 휘둘러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킥은 날카로웠다. 바스티아노 못지 않은 예리함으로, 크리그의 슛이 네트를 흔들었다.
[선덜랜드 1 - 0 빌바오]
울려 퍼지는 우리 팬들의 함성 속에서, 골을 성공시킨 크리그가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평소 세레머니라고는 하지 않던 크리그답지 않은 모습에, 희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고 로저스 감독도 의아한 듯 입을 벌렸다. 그사이 익스클루시브 박스 바로 아래까지 달려온 크리그가 두 팔을 벌리며 미끄러졌다.
“오늘의 선덜랜드가 가장 강하다고 한다면, 그건 감독님 덕분이긴 하겠네요.”
크리그의 뒤를 따라 이쪽으로 쇄도하는 우리 선수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로저스 감독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평소답지 않게 가볍게 떨리는 로저스 감독의 어깨는, 틀림없이 말하고 있었다.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