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교차하는 적과 백 (4)
- 유로파 컨퍼런스로 향하던 선덜랜드의 도전이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축구는 계속됩니다. 한 시즌이 끝나면 언제나 다음 시즌이 열리고, 새로운 대회가 이어지죠. 선덜랜드 또한 그럴 것입니다.
내레이션과 함께, 화면은 끝도 없는 러시아 평원을 달리는 로드스터의 모습을 줌인했다. 선덜랜드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차량, 선덜랜드 로드스터 한정판 2호기였다.
선덜랜드 챌린지의 1등상이던 그 차량은, 지금 한국인 팬의 소유가 되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중이었다.
차량 안에 설치된 카메라가 운전자의 모습을 비췄다.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입은 여성이 명랑하게 떠들었다.
[모처럼 유라시아 횡단이니까, 유명한 경기장은 한 번씩 지났어요. 올랭피크 리오네, 야코프 파르크, 스타디온 에네르가 그단스크, 그리고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도요.]
- 전부 유로파 결승이 열린 경기장들이군요.
[네, 이제 곧 선덜랜드가 향할 목표니까요.]
잠시 후, 로드 투 컨퍼런스 다큐멘터리는 마지막 마무리 멘트와 함께 막을 내렸다.
- 선덜랜드 로드스터는, 챔스 결승이 열린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나, 블라디보스톡에서 멈췄다. 육로가 막힌 대한민국의 특성 때문에, 그녀는 이곳에서 차를 화물로 옮겼다.
[당분간 일을 해야죠. 또 여행 경비를 모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준비가 되면 또 유럽에 돌아올 거에요. 선덜랜드가 챔스 결승에 서기 전까지, 부지런히 벌어놔야겠어요.]
“···뭐 하냐.”
고개를 돌린 잭을 향해, 요니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진 찍는데? 우리 주장이 질질 짜는 사진. 에디한테 보내주면 아주 좋아하겠어.”
그러자 잭은 눈가를 팔뚝으로 슥슥 문지른 다음, 곧바로 스마트폰 카메라를 요니에게 들이댔다.
왜냐면, 요니의 눈 또한 시뻘겋게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선덜랜드 유스 출신의 두 사람은 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편이었고, 팀이 하부 리그에서 빌빌거리던 시절을 직접 겪어보기까지 했다.
요즘 선덜랜드의 달라진 위상을 체감할 때마다 가슴이 웅장해지거나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현상은, 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생리적 현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다큐멘터리가 끝난 다음에도 한참 동안 여운에 잠겨 스크린을 응시하기만 했다. 잭이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그래서 휴가 안 가냐?”
“휴가? 지금 하고 있잖아.”
“어, 그래.”
그의 친구가 휴가 내내 자신의 집에 눌러앉을 생각임을 짐작한 잭이 피식 웃었다.
불만은 없었다. 애초에 둘은 절친이고, 가족끼리도 가깝다. 특히 잭의 어머니 사라 여사는 요니를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낀다.
게다가···.
“그럼 잠깐 나가자. 몸이나 풀게.”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같은 그라운드 위에서 뛰어온 동갑내기 잭과 요니는, 서로에게 최고의 매치업 상대였다.
잠시 후 잭의 집 정원에서 선덜랜드의 자랑거리 둘이 격돌했다. 정원용 잔디 위에서, 파라솔 기둥을 골포스트 대용으로 삼아서.
유소년 시절에는 자주 하던 짓이었다. 그러다 가끔은 유리창을 깨먹고 사라 여사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하기도 했지만.
“다음 시즌엔 센터백이 합류하지? 에디가 기대 많이 하더라.”
“부려먹을 기대 말이겠지. 에디는 육체적으로 터프한 타입은 아니니까.”
대화는 평화로웠고 얼굴은 평온했지만, 둘의 발놀림은 그렇지 않았다. 매치데이 못지않게 뜨겁게 달아오른 축구선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넛맥을 시도하거나 공을 커트하려 달려들었다.
“아마 새로운 영입 한두 건 정도 더 추진될지도 몰라. 리그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려면 로테이션은 필수잖아.”
“구단주님이 고생 많이 하시겠네.”
“우리도 힘내야지.”
이야기하면서도 치열한 공방을 펼치던 둘은, 그만 너무 힘을 내고 말았다.
두 사람의 발 사이에서 튀어오른 공이 유리창을 박살 냈고, 둘은 찔끔하는 표정으로 거실 쪽을 바라본 다음, 사라 여사가 눈치채기 전에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 * *
선수단이 휴가를 맞이한 이후, 내 첫 업무는 크로아티아 센터백, 이고르를 데려오는 일이었다.
계약 자체는 지난겨울에 마무리했지만, 실제로 선수의 소속이 바뀌는 일이다보니 신경 쓸 부분이 있었다. 행정적 절차나 메디컬 체크 같은.
실무는 희주를 비롯한 우리 스태프들의 몫이지만, 그래도 선수를 데려오는 것 자체는 내 일이다.
다시 만난 이고르의 표정은 밝았다.
“FA컵, 그리고 유로파 컨퍼런스 우승 축하합니다. 다큐 정말 잘 봤습니다. 이제부터 정말 좋은 팀에서 뛰게 되는구나 싶어서 기뻤습니다.”
이고르를 향해 나 또한 미소로 화답했다.
“리그 우승 축하합니다.”
이고르가 속한 오시예크는 마침내 우승을 따냈다. 오랜 라이벌이자 리그 최강자 자그레브 상대로 마지막 라운드까지 이어진 경쟁은 딱 1점 차이의 아슬아슬한 결말이었다.
이고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유로파 컨퍼런스 때문에 정신없으셨을 텐데···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자 옆에서 희주가 가슴을 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리그 우승 경쟁 때문에 올여름에 이적하기로 했던 거니까요.”
감격하는 이고르의 옆에서 오시예크 단장 또한 감사를 표했다.
“사정을 많이 봐주신 덕분에 저희는 물론, 프르바리가의 다른 팀들도 숨통이 트였습니다.”
잉글랜드 클럽 눈에는 오시예크가 셀링 클럽이겠지만, 크로아티아 리그 내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그레브나 오시예크 정도 명문 강팀은 같은 리그의 약팀에서 선수를 사온 다음 상위 리그에 선수를 파는 역할을 한다.
오시예크가 이고르를 팔아서 번 수입은, 결국 크로아티아 리그 하위 구단들에게도 돌아갈 금액이다.
옆에서 희주가 오시예크 사람들에게는 안 들리게,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이래서 너무 빡빡하게 깎지 않겠다고 말했던 거구나.”
“기본적으로 세상은 호혜적이거든.”
이적료 천만 유로를 에누리 없이 지급하고, 이적 시기를 여름으로 늦춰 준 덕분에 이고르는 소속팀에 거액의 이적료와 값진 우승컵을 안겨주게 되었다.
선수가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했기에 오시예크 팬들 역시 팀의 스타를 기분 좋게 떠나보냈다. 어쩌면 이들 중 누군가는, 오시예크 경기가 없는 날 선덜랜드 경기를 챙겨보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소속팀 오시예크 역시 이적이 확정된 이고르를 험하게 부리는 대신 소중히 관리해 주었다. 우리와의 관계를 앞으로도 좋게 풀어나가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오시예크 단장과 악수하고, 이고르 이적을 마무리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이고르의 합류로, 우리 포백라인은 남다른 중량감을 갖췄고, 언론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마침내 이고르가 선덜랜드에 왔다. 이로써 선덜랜드는 크로아티아와 잉글랜드의 젊은 국가대표로 센터백 듀오를 꾸렸다.]
애니의 주도 아래 스포츠 신문 기사 1면이 이고르의 이적, 그리고 선덜랜드가 갖게 될 시너지를 다루기 시작했고, 그 추세는 금세 방송으로 이어졌다.
해설자로 탈바꿈한 전직 축구선수, 네빌과 캐러거 듀오가 곧바로 이고르 이적을 다뤘다.
[마침 서로의 장점이 절묘하게 상대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사이죠. 발재간이 좋고 영리한 에디, 터프하고 강인한 이고르, 이 관계는 모든 면에서 과거 프리미어리그를 호령했던 조합, 퍼디치를 연상하게 하는데요.]
캐러거의 호들갑에, 네빌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하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네빌은 현역 시절, 바로 그 ‘퍼디치’와 함께 맨유에서 뛰던 레전드니까.
“퍼디치에는 못 미치지. 아직 아무것도 보여준 게 없으니.”
“연상한다고. 연상. 못 알아듣나, 개리?”
“제이미, 네 사투리를 어떻게 알아듣겠어.”
잠시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본업으로 돌아왔다.
“올 시즌도 선덜랜드 영입 괜찮게 하네. 역습 잘하는 팀이니까 중량감 있는 센터백이 필요하지 싶었는데.”
“맞아.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는 어떨까? 설마 한 명 데려오고 끝! 은 아니겠지.”
“내 생각엔 서브 센터백 한 명 정도를 더 데려오지 않을까 싶은데. 선덜랜드 메디컬 팀이 우수하지만, 그래도 부상이 없는 축구팀은 존재할 수 없잖아?”
캐러거의 상식적인 반응에, 네빌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하긴, 반다이크 마팁 고메즈가 순서대로 드러누우니 리버풀도 별수 없었지.”
“아니, 갑자기 리버풀 이야기는 왜 꺼내. 이 축알못아. 그보다 중원이 급하지 선덜랜드는. 톰슨도 이제 노장이잖아.”
친정팀 리버풀의 아픈 곳을 찔린 캐러거가 발끈했다. 전직 레전드, 현직 아저씨 두 사람의 만담을 지켜보던 나는, 스크린을 향해 대답했다.
“축알못이라고 하시는 것치고는, 두 분 모두 꽤 예리하신데요.”
다음 영입 타겟은 3순위 센터백이었다. 로테이션을 받아들일 어린 선수로.
그리고 중원의 중량감을 위해, 미드필더에도 로테이션 한 명쯤 데려올 생각이긴 했다.
톰슨, 잭, 요니 트리오는 변함없이 강력하지만, 이제는 톰슨의 나이가 슬슬 신경 쓰일 시기가 되었다. 물론 해리슨에게도 기회를 주겠지만, 수비적인 역할을 해줄 선수도 한 명쯤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다.
슬슬 과로사가 예상되는 베넷과 브루노의 서브도 필요할 테지만, 스쿼드가 너무 많이 바뀌면 선수단의 결속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종합적으로는 한두 명만 영입할 생각이었다.
그때 옆에서 희주가 불쑥 끼어들었다.
“내 생각엔 그리스 선수가 좋을 것 같아. 어쩐지 유망주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네 꿍꿍이에 있는 건 유망주가 아니라 관광지 같은데.”
아무리 휴양지에 어두운 나라도, 희주가 모니터에 띄워 놓은 사진이 그리스의 산토리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거든. 예쁘긴 한데, 사진으로 봐서는 공 차기 좋은 동네처럼 보이진 않는다.
요 녀석, 아직도 휴가를 포기 못 했구만. 슬쩍 바라보자 희주가 낮게 웃었다.
“선덜랜드의 팀 컬러는 포기하지 않는 정신···.”
“그리고 철통같은 수비.”
절대 뚫릴 생각 없다는 의사를 표현하자 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잠시 후, 희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깐만··· 오빠, 올 시즌 영입 못 하겠는데? 강제 파업이야.”
“왜, 아버지한테 이르기라도 하려고? 남매 싸움에 부모님 소환은 반칙 아니냐?”
그렇게 웃어넘기는 동안에도, 희주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 이거 좀 봐.”
희주가 곧바로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렸다.
조금 전까지 띄워 놓던 휴양지 목록은 어느새 사라졌고, 화면에는 온통 신문 기사가 가득했다.
[FC 선덜랜드, FFP 위반? 징계 확정 시 유럽 대회 출전 금지]
기사를 바라본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휴가 나간 선수들하고, 스태프들에게 연락 돌려.”
“응. 휴가는 취소니까 전부 돌아오라고 전하면 되지?”
“그 반대야. 우리는 아무것도 위반한 적 없으니, 루머에 휘둘리지 말고 휴가를 즐기라고 전해 줘.”
“루머라고?”
“루머일 거야.”
힘주어 대답하자, 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 루머가 될 거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징계 운운하는 협박은 있는데, 막상 어떤 점에서 FFP를 위반했는지, 그래서 구체적으로 우릴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공문 하나 온 게 없잖아.”
만일 우리가 정말로 FFP를 위반했다면, 유에파 주관 대회 출전 금지는 물론, 영국 축협에서도 징계를 먹였을 것이다. 대표적 사례는 승점 삭감인데, 잘못 맞으면 강등도 가능하다.
그런데 유에파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영국 축협이 잠잠하다. 우리에게 씌워진 FFP 위반 혐의 자체가 애매하다는 증거다.
[축구는 돈으로 하는 게 아니다. 선수들의 피와 땀으로, 팬들의 함성으로 하는 것이다. @유에파]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에파 회장이 나를 좋게 보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월드컵에서의 짧은 조우로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를 어떻게든 FFP 위반으로 몰아가고 싶은 거겠지만··· 얌전히 맞아줄 생각은 없다. 애초에 우리는 FFP를 철저하게 지켰고, 회계 장부를 봐도 어떠한 문제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지극히 동의한다. 그래서 선덜랜드 역시 선수들의 피와 땀, 그리고 팬들의 함성을 존중해 왔다. 밀실에서 정치질이나 하시는 분들은 모르겠지만, 축구장에 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선덜랜드_오피셜]
평소보다 훨씬 날 선 아벨의 메시지를 시작으로, 우리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선덜랜드는 철통같은 수비와 날카로운 역습이 특기인 팀이니까.
곧바로 나는 리미트리스 본사에 연락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