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 (1)
<진정한 부를 보여주겠다 - 술레이만 알 파힘>
[확인했어요··· 순 억지라고 생각하는데요.]
스크린 너머에서, 대답하는 다미는 한없이 무표정했다.
여름인데도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침 예전에 스노클링 장비를 놓아두던 위치에, 지금은 무슨 히말라야 등반 장비처럼 보이는 물건이 보이는 것도 수상하고.
가만, 저건 혹시 야삽 아닌가? 유에파 회장을 어디 산에다 묻어 버리겠다는 결의의 표명?
그 시점에서 나는 확신했다. 아, 다미 얘 진짜 빡쳤구나.
하긴 빡칠 만도 하다. 축구판에서야 유에파는 유럽 축구의 정점으로 통하고, 어떤 의미로는 피파 이상의 힘을 가진 막강한 협회지만··· 투자업계의 시선으로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니까.
축구단은 대부분 중소기업이고, 세계적 빅클럽이라고 해 봐야 중견기업 수준의 매출을 올린다. ‘자본’의 관점에서, 유에파는 그냥 덩치 좀 큰 상인연합회 수준, 한마디로 아마추어들이다.
그런 아마추어들이 리미트리스에서 검토한 장부에 생트집을 잡은 셈이니, 다미가 극대노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아뇨, 저는 그런 이유에서 화가 난 게 아니에요.]
“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일단, 리미트리스 SM&C 쪽 통해서 소명자료 준비할게요.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작정하고 트집 잡으려고 덤비는 게 뻔하잖아요?]
“그래도 보내. 아직 징계가 발표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검토 중인 상태인 모양이니까.”
다미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미트리스 법무팀을 선덜랜드에 파견해 두길 잘했네요.]
“그 단계로 가기 전에 마무리하고 싶지만 말이지.”
앞으로도 축구단을 계속 운영하려는 이상, 유에파와 너무 척지는 것도 좋지 않다. 싸움을 피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되도록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그럼 자료 보내드리고, 마저 준비할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통화를 끝냈다.
유에파의 이야기에서, 딱 한 가지는 공감할 수 있었다. 축구는 돈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세상에는 분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팬들의 뜨거운 함성, 가슴 뛰는 경기의 감동, 그리고 사이드라인 안에 설 자격이 있는 재능··· 사람들이 축구를 사랑하는 진짜 이유들은, 돈으로는 살 수 없다.
공 차는 소리, 매치데이의 소음, 길거리 노점의 음식 냄새, 푸른 잔디 위에서 90분간 공 하나를 두고 다투는 사내들의 뜨거움, 같은 유니폼을 입고 목이 터져라 부르는 응원가, 팀의 승패에 울고 웃는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이 그냥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였으면 얼마나 편했을까?
어쩐지 무릎 한편이 욱신거리고 시큰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라도 비가 오려나 싶어 확인한 하늘은 너무나도 맑았는데.
“정말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였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 * *
리미트리스 SM&C를 통해 발표한 우리 선덜랜드의 소명 자료를, 유에파 회장은 곧바로 일축했다.
[편법으로 점철된, 응답할 가치도 없는 자료.]
밸류리스? 운율 좋네. 내가 혀를 차는 사이, SNS에는 유에파 회장의 성명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는 예전부터 선덜랜드의 행보가 우려스러웠습니다. 예컨대 구단주가 사비로 비행기 티켓을 뿌린다거나. 굿즈. 해외배송비가 무료라는 부분 말이죠.]
“규정상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
[이런 것들을 금지하는 규정은 물론 축구계에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구단주는 없으니까요.]
절묘한 타이밍으로 올라온 메시지에, 희주가 옆에서 냉소했다.
“오빠, 혹시 구단주실에 도청기 붙은 거 아니야?”
[누군가는 묻겠죠. 다른 팀들도 다 하는 거 아니냐고. 혹시나 해서 말하자면, 항공권 뿌리는 구단주는 없었습니다. 해외배송비가 무료였던 적은 있죠. 예를 들면 맨시티. 그리고 우리는 그들 또한 제소했죠.]
그리고 패소했지. 국제스포츠분쟁재판소에 끌려가서.
[이고르 사태도 그렇습니다. 크로아티아의 재능이 순식간에 팔려 나갔죠. 네, 프르바리가의 챔피언조차 팀의 기둥을 허겁지겁 팔아치워야 했던 겁니다. 프라하의 에이스, 마르틴도 마찬가지고요.]
나는 스마트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긴,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에파 회장은, 예전부터 빅클럽이나 4대 리그에 썩 호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돈이 축구를 망치고 있습니다. 자본이 들어오면 축구판은 결국 이렇게 됩니다. 일부 부유한 클럽들 외의, 다른 모든 클럽이 셀링 클럽으로 전락하고, 선수를 빼앗기며, 말라 죽을 때까지 착취당할 겁니다.]
[이 자리를 걸고 선언합니다. 반드시 저지할 겁니다. 저는 그러기 위해 유에파의 회장이 된 겁니다.]
어떻게든 우릴 때려잡겠다는 의욕이 아주 넘쳐흐른다. 텍스트만 읽었는데도 귓가에 웅변이 자동재생될 정도로.
“오빠, 혹시 유에파 회장한테 죄지은 거 있어? 세상은 호혜적이라면서?”
그러게, 애들 교육에 나쁘겠네.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때, 스마트폰이 살짝 떨렸고, 누군가 날 멘션이라도 한 것처럼 알림이 떴다. 확인하자, 이고르의 친정팀 오시예크 단장이 SNS에 메시지를 올린 참이었다.
[FFP 관련은 제3자가 거론할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를 언급한 부분은 매우,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선덜랜드의 오퍼로, 이고르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중소 클럽을 지키겠다며 만들어둔 족쇄에 묶여 말라죽어가던 우리는 숨통이 트였다.]
[그 단비 같은 자금이, 현재 프르바리가 여러 팀에 흘러 나갔다. 우리들은 그 돈으로 유망주를 발굴해, 프로가 될 수 있도록 키워낼 것이다.]
[선덜랜드가 FFP를 어겼는가? 우린 모른다. 그 판단은 유에파의 몫이다. 하지만 그들이 축구를 망치고 있다거나, 프르바리그를 착취했다는 의견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프라하 단장 또한 가세했다.
[그러면 앞으로 선수 이적료는 스위스 니옹에 청구하면 됩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스마트폰을 멍하게 바라보는 희주를 다독이며, 나는 숨을 골랐다.
“두 구단에 전화 넣어 줘.”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다. 유에파에 밉보인다는 건, 일개 클럽으로서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기에.
그래서 나는 곧바로 소명 자료를 보내고 법무팀을 준비시키면서도, 법정 공방은 최후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 일처럼 나서주는 클럽들이 있다. 비록 구단 오피셜은 아니라지만, 단장 개인 계정으로 발표된 메시지는 사실상 구단의 공식 입장문에 버금가는 무게가 있다.
잠시 후 희주가 전화를 내밀었고, 나는 곧바로 인사부터 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오시예크 단장이 애써 명랑하게 화답했다.
[뭘요. FFP 징계를 막아드리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FFP 안 걸려서 계속 돈 써 주시라고 이러는 겁니다. 하하!]
그리고 프라하 단장은, 훨씬 무뚝뚝하게 응답했다.
[프라하인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잠시 후 SNS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회계보고서 올라오는 거 봐도 크게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ㄴ 원래 그 바닥은 걸고 넘어지면 일단 다 걸 수 있기는 함. 걸고 나서 뒷감당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지.
- 유에파는 슈퍼리그 하겠다고 쑥덕거리는 애들부터 때려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 만만한 선덜랜드가 아니라.
ㄴ 선덜랜드가 만만한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구단주는 전혀 안 만만할 텐데.
- 회계는 모르겠고, 선덜랜드 다큐멘터리 보니까 진짜 눈물 나더라. 저런 구단이 축구를 망쳤다고? 솔직히 동의 못 하겠음.
ㄴ 근데 보통 구단 같으면 저렇게 다큐멘터리 펑펑 못 찍어내긴 함. FFP 위반인지는 별개로.
- 징계 먹으면 언제 적용되는 거임?
ㄴ 유에파가 그나마 공정한 시늉이라도 내려면 올 시즌부터 적용일 거고, 제대로 엿 먹일 거면 지난 시즌부터 소급하겠지.
“···그렇게 하면 유로파 컨퍼런스 트로피도 날아가거든. 뭐!? 이것들이 정말!?”
SNS 반응을 생중계하던 희주가 그만 분을 못 이겨 또 자기 업무용 스마트폰을 패대기쳤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반갈죽 나지 않았다. 밀스펙이라 꽤 튼튼하단 말이지.
그사이, SNS에서는 계속 메시지가 올라왔다. 우리를 지지하고, 힘이 되어주는 이들의.
[우리는 썬을 믿는다. 우리는 선덜랜드를 믿는다. 부당한 징계에 싸울 것이다. @맥켐즈 서포터즈]
[아, 우리 손으로 밟아 놓을 거니까 괜한 트집 잡지 말고 가만 놔두라고! @조르디 서포터즈]
[붉고 하얀 유니폼의 격돌, 그 아름다웠던 결승전의 기억을 정치 논리로 더럽히지 마라. @로히블랑코스 소시오]
우리 팬들, 혹은 다른 축구팬들의 격려가 쇄도하는 와중, 스마트폰이 다시 울렸다.
[FA는, 선덜랜드로부터 FFP 관련 위반점을 발견하지 못하였음.]
이번 메시지는, 축구협회 공식 계정이었다.
* * *
축협 의장과 통화한 건, 다음 날이었다.
[아마 원인은 두 가지 같은데요··· 이번에 인종차별 이슈가 있었잖습니까?]
“그랬죠.”
꽤 요란하게 터트리긴 했다. 아마 그 건이 기폭제가 되었을 거라고, 축협 의장은 전화로 그렇게 조언했다.
[너무 대대적으로 퍼트렸기 때문에 배알이 뒤틀렸을 겁니다. 선덜랜드가, 미디어까지 동원해서 유럽 축구계의 치부를 드러냈다고 생각했겠죠.]
“···네?”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빡이는 사이, 의장이 나직하게 조언했다.
[월가 자본이다 보니, 슈퍼리그 같은 거 하려는 거 아닌가도 의심스러웠을 거고요.]
축협 의장의 이야기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슈퍼리그 같은 시도는, 축협 눈에도 결코 좋게 보이지 않을 테니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저는 부자들만의 리그에는 관심 없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그 친구는 동의하지 않겠지만요. 사실 그 친구는 정말로 빅클럽을 싫어하거든요. 부유한 리그도.]
뭐, 그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동유럽권 국가는, 선수를 항상 서유럽 리그에 빼앗겨 왔다. 피해 의식 같은 게 쌓여 있는 거겠지.
그래서 유에파 회장은, 임기 내내 유럽 대회의 문을 변방의 약소 리그에도 열겠다고 공언했고, 실제로 유로파 컨퍼런스를 새로 만들면서 자신의 공약을 지켰다··· 그러고 보니 하필 ‘돈 많은 잉글랜드 팀’이 유로파 컨퍼런스 먹어버린 것도 열받았겠네.
“근데, 그러면 맨시티나 파리는 왜 못 건드리는 겁니까?”
[그 팀들은 아마, 뒤에 사실상 국가가 붙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 아닐까요?]
아 예··· 기름국은 무섭고, 세계 최대 투자회사는 우습다는 거네요. 진짜 재밌네.
뭐, 맨시티는 한 번 건드리긴 했··· 나?
[그리고 사실 우리는 위반점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세상에 완벽한 회계 장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구단주님이 더 잘 알겠지만요.]
“네, 극단적으로 말하면, 비용이 어느 비목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트집 잡기 시작하면 끝도 없죠.”
[아무튼, 현재는 승점 삭감 계획이 없습니다. 우리 기준으로는 딱히 트집 잡을 비목은 없었거든요. 다만 유럽 대회 진출권은, 유에파 소관이니···.]
“그 말씀만으로도 힘이 됩니다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유에파가 우리를 FFP 위반으로 징계한다면, 당연히 FA도 우리를 징계해야 한다. 만일 같이 징계하지 않는다면, 유에파의 처분이 틀렸다고 대놓고 선언하는 꼴이 된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축협 의장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우리는 그냥 ‘축구협회’라고만 표기하는 유일한 단체고, 협회장은 영국 왕실에서 맡고 계십니다. 아무리 유에파 회장이 급진적이라도, 함부로 굴진 못할 겁니다.]
“다행이군요.”
나는 살짝 안도했지만, 너무 일렀다. 이어진 축협 의장의 이야기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뭐, 크로아티아나 체코 축협하고는 사이즈도 위상도 다르니까요.]
“···그쪽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오시예크의 승점 삭감을 검토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명분은요?”
어렴풋이 짐작했던 내용과 똑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FFP 위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오시예크는 바로 그 FFP 때문에 자금난에 허덕이던 팀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갑부 구단주도 없다.
[선수는 올여름에 이적했는데, 돈은 지난겨울에 주고받은 부분을 문제 삼으려는 듯하더군요. 뭐, 이 또한 걸고 넘어가려면 끝도 없는 문제겠죠.]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오시예크 단장, 그리고 이고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처럼의 우승에 어린애처럼 기뻐하던 모습이.
승점 삭감 처분이 몇 점짜린지는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지난 시즌 크로아티아 프르바리가의 승자는 딱 1점 차이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승점 삭감 징계가 소급 적용될 경우, 오시예크는 즉시 트로피를 빼앗긴다.
“조언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다미가 보내 준 자료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유에파가 기어이 우릴 징계하겠다면, 우리도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터트릴 무기도 있고, 여차하면 국제스포츠분쟁재판소에 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맨시티가 그곳에서 승소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승소할 것이다. 완벽하게 편파적인 시선만 아니라면, 우리 장부에 아무 문제 없다는 정도는 알 테니까.
그리고 법정에는 FFP도, 스쿼드 제한도 없으니 나는 전 세계 변호사를 몸값 비싼 순서대로 백 명이건 천 명이건 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오시예크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럴 돈도 없고, 의미도 없다. 자국 축협과 척지는 건 클럽에겐 자살행위나 마찬가지기도 하고, 애초에 크로아티아 축협도 유에파에 끼인 상태일 뿐이다.
“일단 회장은 사퇴시켜야겠네.”
스포츠는 룰을 지키면서 하는 싸움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유에파가 만든 룰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런데도 먼저 룰을 어긴 건 유에파 회장이다. 특히 우릴 감쌌다는 보복으로 오시예크까지 건드리는 건 반칙이고, 선도 세게 넘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원한다면, 진정한 부를 보여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