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 (2)
스위스 니옹, 유에파 본부.
“선덜랜드의 움직임은?”
회장의 질문에, 측근 한 사람이 재빨리 대답했다.
“조용합니다. 다만··· 리미트리스 법무팀이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리미트리스라는 단어에 진저리를 내며, 회장은 내뱉듯이 말했다.
“CAS까지 가겠다는 뜻이겠지. 그럴 거야.”
그들은 예전 맨시티를 FFP 위반으로 징계한 적이 있다. 맨시티는 국제스포츠분쟁재판소에 항소했고, 결과는 유에파의 패배였다. 덕분에 유에파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땅속 깊이 처박히고 말았다.
이제 유에파는 두 번째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있다. 어쩌면 맨시티 이상으로 강력할 상대를.
‘선덜랜드는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리미트리스지.’
그렇지만 도전해야만 한다. 회장에게 있어, 자본의 횡포를 막는 것은 일종의 사명이자, 유에파의 존재 이유와도 연결된 일이었기에.
“언론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매일 드나든다고 합니다. 특종이니까요. 요즘은 유럽대회 출전 제한을 소급 적용할지 여부가 관건인 모양인데요. 결과에 따라 트로피의 주인이 바뀔 테니까요.”
가볍게 반응하는 측근을 바라보며, 회장은 혀를 찼다.
‘정말로 가십이나 퍼나르려는 거면 얼마나 편하겠어.’
리미트리스 정도면, 친한 언론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선덜랜드에 우호적인 기사는 물론, 유에파의 권위나 도덕성을 문제 삼는 기사도 쏟아질 게 뻔했다.
“혹시라도 언론에 빌미 주지 않게 행실에 각별히 주의들 해.”
“네··· 문제없습니다.”
대답하는 측근들의 눈동자가 옆으로 슬쩍 움직였다.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회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머저리들 데리고 큰일 하려니 정말 미치겠네.’
그래도 할 수밖에 없다. 회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책상 위에 올려진 자료에 시선을 돌렸다.
서류는 두 개였다.
왼쪽의 서류는 유에파가 어렵사리 입수한, 빅클럽들이 물밑에서 준비 중이라는 슈퍼리그 프로젝트의 계획과 그 전망에 대한 보고서였다.
슈퍼리그는 축구계의 오랜 떡밥이자, 유에파가 막아내야 하는 사명이었다. 언젠가는 빅클럽들이 시도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진짜 문제는, 그 언젠가가 ‘언제’냐는 것이었다.
회장은 오른쪽 서류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슈퍼리그의 임계점>
오른쪽 보고서는 심플했다. 프리미어리그에 7번째 빅클럽이 생기는 순간, 유에파가 슈퍼리그를 저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가설이긴 하지만, 회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다.
잉글랜드의 7개 빅클럽에,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명문팀 3개씩이 더해지고, 독일의 뮌헨, 프랑스의 파리가 연합할 경우··· 그것만으로도 15개 구단이 나온다. 자기들만의 리그를 돌리기 위한 조건이 완벽하게 성립하는 것이다.
조만간 선덜랜드는 7번째 빅클럽이 될 게 분명하다. 게다가 그들은 미국 자본, 리미트리스를 등에 업고 있는 팀이기도 하다.
회장의 눈에는 벌써부터 슈퍼리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이 선덜랜드를 밟을 유일한 기회겠지.’
회장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실패가 두렵지는 않았다. 그의 유일한 불안은,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 * *
다미가 보낸 자료에는 회장 측근들의 비리, 구체적으로는 뒷돈 받아먹은 정황이 가득했다.
“다미 언니 진짜 장난 아니다. 혹시 부업으로 흥신소 같은 것도 하려나?”
“다른 스캔들은 모르겠지만, 돈 문제면 쉽지.”
사람 심리는 단순하다. 돈이 생기면 더 불리고 싶은 법인데, 그렇게 어딘가에 투자를 하다 보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다미라면 이 정도는 간단하게 털어내겠지.
법적 물증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론에 폭로할 정도는 된다. 회장 본인이 걸려들지 않은 건 아쉽지만, 회장 측근들은 줄줄이 비엔나 확정이다.
“언제 터트릴 거야? 오늘? 내일?”
호들갑을 떠는 희주를 밀어내며,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당분간 안 터트려. 그 전에 쇼핑부터 해야 하니까.”
“쇼핑?”
나는 대답 대신 챔스 홍보 영상을 응시했다. 구체적으로는, 영상 곳곳에 모습을 드러낸 스폰서들을.
콜라 회사, 자동차 회사, 게임기 회사··· 세계 유수의,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기업들이 챔피언스 리그를 후원하고 있었다.
유에파의 돈줄이 바로 저런 회사들이다.
“따지고 보면 웃기는 이야기지. 축구는 자본논리로 움직이면 안 되지만, 자기들은 계속 돈 벌어야 하고···.”
“어? 그거 완전···.”
“내로남불도 정도가 있어야지.”
슬슬 내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희주가 낮게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 * *
- 저기, 혹시 펩시 주가가 갑자기 왜 미쳐 날뛰는지 아는 사람 있음?
ㄴ 글쎄? 여름이라서? 거기 음료회사라 계절 이슈 말고는 무슨 이슈도 없을 텐데··· 근데 아무리 여름이라고 이렇게 급등하나?
- 리미트리스가 움직인 거 같다던데?
ㄴ 리미트리스? 거기는 주로 첨단산업만 투자하지 않나? 음료 같은 전통 소비재는 잘 안 만지잖아.
- 리미트리스가 뭐 하는 회사임?
ㄴ 일반인은 안 받는 투자회사. 사실상 거의 조폐공사나 마찬가지인 회사 있음. 수익률 보면 그냥 돈 복사기임.
- 리미트리스 사장이 영국 축구팀 구단주잖아. 이번에 FFP 위반으로 징계한다는 둥 시끄럽던데. 그래서 펩시겠지.
ㄴ 그게 펩시랑 무슨 상관?
ㄴ 넌 앞으로 주식 하지 마라.
처음으로 이변을 눈치챈 건, 눈치가 아주 빠른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FFP 분쟁 덕분에 리미트리스는 유에파의 스폰서를 하나씩 끊어놓고 싶어졌을 테고, 따라서 스폰서 기업 경영진과 ‘혀업상’하기 위한 지분이 필요해졌다는 것을.
그 시작이 펩시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발 빠르게 대응한 이들은, 제법 짭짤한 차익을 벌었다.
[펩시는 다음 시즌부터 챔스 스폰서 계약을 중단하겠습니다.]
하루 만에 발표된 펩시의 보도 자료에, 전 세계에서 몰려든 나스닥 개미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 챔스 스폰서가 또 어디 어디였지?
* * *
“투자가 그렇게 쉬우면 얼마나 좋겠어?”
어떻게 자동차회사 주식이 하루 사이에 -44%를 찍냐며 아우성치는 게시글을 바라보며, 다미는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리미트리스의 넘버 투, 일명 투자의 신의 오른팔로 통하는 다미에게조차 투자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아는 한, 세상에서 투자를 쉽게 하는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다. 그녀의 고용주, 투자의 신, 그리고 지금은 선덜랜드의 구단주이기도 한 바로 그 사람.
이번에 유에파가 건드린 상대이기도 하다.
챔스 스폰서도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
다미의 통보에 곧바로 반응한 기업은 대량의 매수세로 인한 주가 상승이라는 당근을 얻었고, 통보 전에 알아서 눈치껏 빠진 회사는 경영권에 대한 외압 없는 자유를 누리겠지만, 미적거린 회사는 곧바로 주가가 반 토막이 났다.
그때, 그녀의 책상에 설치된 전화가 울렸다.
“리미트리스의 최다미입니다.”
다미가 전화기를 들자, 건조한 남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미와 달리 상대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유창한 영어에 섞인 동유럽계 억양과 이어진 용건에서,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유럽 축구에 도전하고 계신 겁니다. 축구판의 질서를 무너뜨리려 하시는 거라고요.]
“축구가 언제부터 주식이나 선물 같은 데 관여하는 종목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신 말대로면 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축구를 잘하는 사람이겠네요? 칭찬 고마워요!”
신랄하게 비아냥거린 다음, 다미는 상대가 반론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덧붙였다.
“저기, 나한테 전화할 시간에 우리 회사 이름이 왜 리미트리스인지 생각부터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계속 돈으로 횡포를 부리시겠다, 이겁니까?]
“어, 돈으로 횡포? 재밌는 표현이네요. 우리에게 돈지랄이라는 건 그런 거죠. 숏칠 나라를 하나 정한다. 그 나라 종합주가지수를 반 토막 낸다. 해볼까요? 돈지랄? 슬로베니아 정도면 하루도 안 걸릴 것 같은데.”
[이보세요.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사람이 신사적으로···.]
“그래서 신사적으로 했잖아. 뭣도 아닌 너희들 눈치봐가면서 룰 다 지켰잖아. 바보같이, 우직하게. 그게 스포츠라면서.”
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다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면계약서라도 몇 장 쓰면 끝나는 건데, 그렇게 안 했잖아. 경기장 고쳐 짓고, 사비까지 털어가며 지역에 돈 바르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축구 보게 만들었잖아. 그 팬들이 써준 돈으로만 선수 샀잖아!”
평소 냉정한 다미로서는 드물게도, 그녀는 무척 흥분한 상태였다.
“우리 사장님은 룰 지키는 거 좋아하는 분이야. 스포츠맨 출신이라 그런 거겠지. 축구를 하던 사람이니까, 룰을 이용하긴 해도, 절대로 어기지는 못하는 분이니까!”
전화기를 향해 다미는 으르렁거리고, 울분을 토했으며, 분노를 쏟아냈다.
“그렇게 너희가 정한 룰 전부 지켰는데, 그래도 편법이라며? 그래서 이제부터 보여주려고. 진짜 편법이 뭔지. 돈으로 교란한다는 게 어떤 건지.”
그리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전화기를 내던지듯 끊어 버렸다.
그녀의 집무실은 조용해졌다. 유에파라는 이야기에 재빨리 전화부터 연결했던 그녀의 비서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눈치를 살펴야 했다.
잠시 후 전화가 다시 울렸고,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사장님, 유에파라는데요. 그냥 끊을까요?”
“돌려.”
다미는 약간 호흡을 가다듬은 후, 전화기를 다시 들었다. 사내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공손해 보였다.
[바이스 프레지던트? 제 말은···.]
“제 이야기부터 들으세요.”
그렇게 상대의 말을 일축한 다음, 다미는 조금 전과 달리 비교적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우리 사장님은 진짜 투자를 해요. 재능이라는 게 있다면 그런 분이겠죠. 난 달라요. 창조적인 투자 같은 거 하지 못해요.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미 존재하는 정보를 취합해서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굴리는 것 정도거든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다미는 만족했다. 의미가 전달되었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리미트리스 정도 되는 투자회사는 정말 어마어마한 자금을 굴릴 수 있고, 그 정도 자금을 효율적으로 굴리기 시작하면 유에파의 모든 스폰서를 끊어놓는 데에는 썩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조차 이득을 남기면서.
상대의 침묵에 만족하면서, 다미는 환한 미소에 달콤한 목소리를 더했다.
“앞으로 우리 사장님 계속 건드려도 괜찮아요. 나도 건드릴 테니까.”
* * *
며칠이 지나지 않아, 유에파 주관 대회에 스폰서라고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챔스부터 유로파, 유로파 컨퍼런스는 물론 내셔널 매치까지 모조리.
간혹 빈 자리를 노리고 스폰서 자리를 노리는 눈치 없는 기업이 없지는 않았지만, 희주식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넌씨눈’ 들은 적절한 대가를 치렀다.
트로피는 돈으로 살 수 없지만, 주식은 돈으로 살 수 있거든··· 반 토막 낼 수도 있고.
유에파 본부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이대로라면 올여름 대회를 스폰서 없이 치를 판이라,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지 몇 번이고 내게 연락이 왔지만···.
“구단주님이요? 아 지금 자리 비우셔서···.”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희주는 정말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텅 빈 구단주실 의자를 응시했다.
아, 참고로 나는 그 옆의 안마의자에 몸을 맡긴 채 드라마 보는 중이다. 이것도 꿀잼이네.
잠시 후 통화를 마친 희주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빠, 사과하고 싶다는데? 한번 찾아오겠다고.”
희주의 목소리에 점점 리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눈이 아주 초롱초롱하다. 아주 신난 모양이다.
“스케줄 잡고 기자들 쫙 부를까? 마침내 유에파 회장이 굴복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상대적으로, 나는 차분했다.
“너는 나중에 회사 경영이나 축구단 운영은 하지 마라.”
“굳이 그런 걸 운영할 생각은 없지만··· 왜?”
“유에파 회장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무릎 꿇으면 당장 속은 시원하겠지만, 길게 보면 우리한테 안 좋아. 선덜랜드가 자본의 힘으로 유에파를 굴복시키는 모양새가 되니까. 현대판 아비뇽 유수 같은 거지.”
“요즘 사극에 심취하신 모양이군요. 오라버니.”
“생각보다 재밌더라고.”
“그럼 우리는 앞으로 사과 못 받는다는 소리야?”
시무룩해진 희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사과받을 필요도 없고.”
사과라는 건, 앞으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의 회장을 축구계에 남겨둘 마음이 없다.
유에파 측의 연락은 이후로도 이어졌고, 희주는 그때마다 노골적인 핑계를 댔다.
“구단주님이요? 아 지금 자리 비우셨는데요. 아무래도 이번 일로 충격이 크셨는지 쓰러지셔서···.”
쓰러지긴 했지. 안마의자에.
“구단주님이요? 아 지금 자리 비우셨어요. 네? 무슨 총회를 소집한다고 하시던데··· 축구단 업무가 아니라 잘 모르겠어요.”
나 말고 드라마 주인공이.
“구단주님이요? 아 지금 자리 비우셔서··· 항, 소, 장, 쓰러 가셨어요.”
빙긋 웃으며, 희주가 스피커폰을 켰다. 잠시 후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실 필요는 없다고 전해 주십시오. 저희는 선덜랜드를 징계하지 않겠습니다.]
어째 꼭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처럼 들리는데? 이게 무슨 도박 만화냐?
축구엔 무승부가 있지만, 인생에는 무승부가 없다. 심지어 축구조차 토너먼트에서는 승부차기까지 동원해서 어떻게든 결판을 낸다.
설마 유에파 회장씩이나 하면서 그런 룰도 모르진 않을 텐데, 새삼스레 왜 그래.
게다가, 저 이야기에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 나는 희주를 향해 흥미진진한 시선을 던졌다. 잠시 후 희주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냥 문제 생긴 김에 재판으로 깔끔하게 해결 보시죠. 저희가 잘못한 게 있으면 징계받으면 되는 거니까요.”
전화를 끊은 희주를 향해, 나는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보단 조금 나아졌네.”
희주도 미소로 답했다.
“법정 드라마가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지금 유에파가 ‘없던 일로 덮어준다.’는 형식으로 매듭지으면, 나중에 언젠가 반드시 문제가 된다. 내년쯤에 ‘다시 살펴봤는데 역시 FFP 위반이네요.’라고 나올지도 모르거든.
지금의 유에파는,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게다가 유에파는 지금, 자기들이 건드린 오시예크 이야기는 쏙 빼버렸다.
이번 징계는, 이미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우릴 돕기 위해 함께한 팀들까지 휘말려든 이상, 협상은 없다.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