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 (3)
선덜랜드의 법무대리인, 리미트리스 SM&C 법무팀은 마침내 국제스포츠분쟁재판소, 일명 CAS에 유에파를 제소했다.
몸값 비싼 순서대로 선임한 호화로운 변호인단에 맞선 유에파의 대응 전략은, ‘재판을 최대한 연기하자’ 는 것이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수, 유에파 최후의 발악에 희주는 입술을 깨물었고, 오빠 이희성을 향해 애타는 시선을 던지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안마의자에 파묻힌 구단주는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희주는, 다미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오빠가 왜 이리 느긋한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저는 희주 씨가 왜 그렇게 조급한지 이해를 못 하겠지만요.]
“왜 조급하냐고요? 이제 머지않아 시즌 개막이잖아요? 어영부영 시간 끌다가 개막 직전에 우리 징계 확정하면요? CAS의 판결이 나와도 우리 시즌은 망가진다는 건데···.”
축구단 비서 노릇도 벌써 3시즌을 채우면서, 희주는 축구단의 운영 일정에 누구보다 빠삭한 편이 되었다.
선덜랜드는 아직 징계 여부가 확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선수를 영입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팀의 위상이 유로파리그 톱시드부터 그냥 영국 내수용 클럽 사이를 오갈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세상엔 가처분소송이라는 것도 있고··· 애초에 질 낮은 협박이잖아요?]
“질 낮은 협박이긴 한데, 뼈아프잖아요. 이럴 거면 우리도 그 자료 풀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언니가 조사한, 회장 측근들 비리 자료.”
[걱정 마세요. 실행 불가능한 협박이니까. 그리고 자료는 사장님이 적당한 시기에 적절하게 쓰실 거예요.]
단언하는 다미를 향해, 희주는 시무룩하게 응수했다.
“다미 언니. 유에파는 그런 짓을 할 충분한 권한도 있고, 염치나 양심은 없는 애들이에요.”
그러자 화면 너머의 다미가 부드럽게 웃었다.
[못 해요. 사장님이 왜 하필 스폰서를 끊었겠어요? 설마, 그냥 무력시위라고 생각한 거··· 생각했군요.]
잠시 후 희주는 얼굴을 붉혀야 했다.
[시즌 개막 전까지 선덜랜드 문제를 매듭 못 지으면 유에파는 올 시즌 아무 스폰서도 없이 유럽 대회를 치러야 할걸요? 그거 감당되겠어요? 징계를 주든 말든 그쪽 마음이지만, 시간은 못 끌어요.]
“설마 안마의자에 드러 누워서 드라마나 보는 사람에게 그 정도 선견지명이 있었을 줄이야···.”
[남매 사이는 다 그렇다지만··· 희주 씨, 사장님이 왜 느닷없이 드라마를 보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어? 그러네요? 평소 같으면 축구를 봤을 텐데?”
특히 지금처럼 선덜랜드가 유로파리그에 나가는 시즌이라면, 지난 시즌 유로파 경기를 주구장창 재방송으로 돌려 봤을 것이다.
남매 사이라 가끔 티격태격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같은 피가 흐르는 사이다. 그녀의 입버릇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이희성의 여동생이었던 희주는 자신의 오빠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스크린 너머에서 다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희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설마···.”
그녀가 아는 이희성은, 축구를 볼 수 없을 경우에만 축구 말고 다른 걸 본다. 그리고 작년 유로파리그 경기를 ‘볼 수 없는’ 유일한 경우의 수는, 한 가지 뿐이었다.
방송에서 중계하지 않는 경우.
[네, 유에파는 절대 못 버텨요. 이대로는 중계권료 수입도 얻지 못할 테니까요.]
“오빠에게는 다 계산이 있었던 거군요.”
[사장님은 투자의 신이니까요.]
다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가 이희성에 대해 말할 때 늘 그런 것처럼.
[투자자의 일은 기다리는 거에요. 한번 뿌려놓은 돈이 결실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거든요. 네, 인내할 줄 모르는 사람은 좋은 투자자가 되지 못해요.]
희주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그녀의 오빠는 안마의자와 일체화된 상태였고, 희주를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반쯤 감은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오빠의 시선을 따라, 희주는 창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우리는 선덜랜드를 지지한다.]
[우리는 유에파를 규탄한다]
경기장 주변에 몰려든 팬들의 플래카드를 바라보며, 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생각을 잘못할 뻔했음을.
선덜랜드가 징계를 받느냐 마느냐, 유럽 대회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선덜랜드가 FFP를 어기지 않았음을 전 세계에 명명백백히 밝히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징계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임을, 희주는 간신히 깨달을 수 있었다.
FFP 징계는, 지난 3년간 선덜랜드가 해낸 성과에 대한 문제였다. 그것이 팬들의 함성이나 선수들의 피와 땀, 스태프의 노력으로 얻어낸 결과물인지, 아니면 룰을 어기고 돈으로 사들인 것인지.
“징계 문제가 아니었어요. 징계가 없더라도, FFP 위반이라는 말 자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거였어요.”
실제로 재판은 정확히 보름 뒤에 이루어졌다. CAS의 압력도 있었지만, 유에파 또한 무한정 시간을 끌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선덜랜드는 승소했다. 그리고 함께한 오시예크 또한.
* * *
[FFP 위반 혐의를 완벽하게 벗었는데요, 만족하십니까?]
[아뇨. 이제 겨우 출발선인데요.]
화면 안에서, 이희성은 기자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물론 그와 적대하는 유에파 회장과 그 측근들의 눈에는 악마의 미소로 보였을 뿐이지만.
[출발선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군요.]
[특별한 의미는 없고, 그저 조금 늦어진 출발을 바로잡으려는 것뿐입니다. 시즌 준비, 팬들과의 소통 같은 것들요. 스탠드 준공식도 해야 하고요. 이번에 증축한 나이얼 스탠드 말인데, 완성하고도 테이프를 줄곧 못 끊었습니다.]
[어, 준공식을 미루신 이유가 있나요?]
[그야, FFP 위반했다고 떠드는 상황에서 스탠드 준공식을 할 수 있습니까? 오해만 사겠죠.]
[경기장 리모델링은 원래 FFP 규제 대상이 아닌데요.]
[네, 하지만 애초에 룰 어긴 적 없는 클럽도 징계하려는 판국이다 보니 조심스럽더군요.]
방송에서 화기애애하게 떠드는 이희성의 모습에, 유에파 회장은 그만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거친 손길로 채널을 돌렸지만, 소용없었다.
이번에도 이희성의 모습이 보였다. 채널 종류가 달라서 방송 내용도 달랐지만, 사람은 거짓말처럼 똑같았다.
[투자판에는 손절이라는 개념이 있죠. 잘못 매매한 대가를 치르는 행위이자,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희생이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혹시 썬도 손절한 적이 있나요?]
[신이 아닌 이상 누구나 손절을 경험하죠.]
[말 돌리지 마시고, 본인의 손절 경험을··· 표정 보니까 없군요?]
[······.]
[지금까지 투자의 신과 함께했습니다!]
겉보기엔 평범한 주식 방송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유에파를 겨냥한 내용이었다. 워낙 명확한 암시에 유에파 회장도 곧바로 눈치챘다.
안 그래도 마침 SNS에서는 그의 입장문이 조리돌림당하는 중이었기에.
[이 자리를 걸고 선언합니다. 반드시 저지할 겁니다. 저는 그러기 위해 유에파의 회장이 된 겁니다.]
- 자리 걸었다가 졌으면, 옷 벗어야지.
세간의 조롱과 이희성의 도발에 잠시 분노로 몸을 떨던 회장은 곧바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잡았다.
[이번에 리미트리스가 스폰서를 내세워 유에파를 압박한 행위는 축구계에 자본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회장은 글을 끝마치지 못했다. 옆에서 누군가 스마트폰을 탁, 가로챘기 때문이다.
“회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그런 소리를 해버리면 스폰서가 돌아오고 싶어도 못 옵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그저 가만 앉아 있으란 이야기인가?”
“그건 아닙니다.”
단호히 부정하면서도, 정작 측근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고 자꾸만 시선을 피했다.
회장이 혀를 찼다.
“옷을 벗으라는 뜻이겠지. 품위라곤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우리 유에파를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측근들의 관심은 이미 ‘우리 유에파’ 가 아니라, ‘우리’ 유에파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회장은 이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회장은 자진 사퇴를 발표해야 했다.
* * *
회장의 사퇴 당시, 나는 드라마를 보던 중이었다. 조선, 세종대왕 시대를 배경으로 한글 창제에 얽힌 비화를 픽션으로 다룬 사극이었다.
옆에서 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마나 볼 게 없었으면 벌써 10년도 지난 드라마를···.”
볼 게 없긴 했다. 본의 아니게 축구 중계 재방송을 끊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정말로 볼 게 없다는 이유만으로 10년 전 드라마를 굳이 찾아본 것은 아니었다.
“너도 봐. 교훈이 될 거야.”
“교훈?”
“이미 물러난 상왕이 여전히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건, 측근이 현역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종류의 교훈이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희주가 눈을 빛냈다.
“그게 무슨 상관··· 아, 알았다! 그래서 다미 언니 자료를 지금까지 들고 있었구나!
다미의 자료에는 회장 본인의 비리는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자료를 폭로하면 회장의 측근을 자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회장 본인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한다.
처음에 자료를 입수한 시점에서, 회장은 여전히 힘이 있었다. 자신의 비리면 모를까, 측근의 비리 정도는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인이 사퇴를 선언하고, 차기 유에파 회장 선거를 앞둔 지금에 와서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이제 내가 풀어놓을 자료는 새 회장에게 절호의 칼자루가 될 것이다.
전임 회장 세력을 완전히 쳐내기 위한.
전임 회장 본인은 물론, 그 측근들까지도 축구계에 발 못 붙이게 만들어놓을 것이다.
* * *
[선덜랜드의 FFP 관련 의혹은, 전적으로 오해와 불행한 착오, 일부 구성원의 일탈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유에파는 관련자를 엄벌하고, 공정한 축구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TV에서 새로 선출된 회장의 입장문이 한창 흘러나오는 사이, 나는 신임 회장의 얼굴을 실물로 확인하는 중이었다. 유에파 신임 회장의 첫 업무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찾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성명문이 지금 한창 TV에 흘러나오는 데서 알 수 있듯, 이번 방문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일정이기는 했다.
“사과드리러 왔습니다. 유에파의 일원으로서, 전임자의 폭주를 저지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합니다.”
나는 잠시 새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미의 조사로도 딱히 걸리는 구석이 없었다. 적어도 돈 문제로는 아주 깨끗하다는 뜻이었는데, 전임자와의 차이점은 측근들도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축협 의장은 유에파의 새 회장을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다.
[상대하기 피곤한 친구지만, 절대로 불공평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인물입니다.]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관계를 이어나갈 사이에서는, 사과를 주고받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스폰서 말인데요.”
슬슬 스폰서 관련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신임 회장이 말을 끊었다.
“잠시만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감사합니다··· 혹시 구단주님께서 힘으로 유에파를 선덜랜드 앞에 굴복시킬 생각이라면, 그냥 스폰서는 계속 끊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꽤 단호한 반응에, 나는 오히려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누군가를 굴복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유에파가 앞으로 공정하길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유에파 또한 공정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스폰서는 곧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며, 중계권 협상을 재개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새 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혹시 슈퍼리그, 그러니까 빅클럽끼리만 모여서 해먹겠다는 그런 리그에 대해서는···.”
이해가 간다. 혹시라도 내가 앞장서서 그런 리그를 추진한다면, 유에파의 힘으로는 막지 못할 테니.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일을 계기로 완벽하게 입증된 사실이다.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원하는 축구와는 정반대의 흐름이기도 하다.
“축구가 모두의 것이길 원합니다. 그리고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가급적 사이드라인 바깥에서나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프로 축구가 완전히 돈과 무관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운영 자금 때문에 선수를 팔 때, 다른 구단은 거액의 자금으로 선수를 산다는 걸 알기에.
그 선수들의 합이 결국, 사이드라인 안에서 팀이 얼마나 강한지를 결정한다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나 또한 조금이라도 더 뛰어난 선수를, 한 푼이라도 더 저렴한 가격에 데려오려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알고 있다. 팀의 강함은 단지 선수들의 몸값이나 주급 총액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선수들의 시너지, 결속력, 사기와 충성심··· 때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축구단의 강함을 좌우하기 마련이다.
지난 3년간, 우리 선덜랜드가 입증했던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누가 더 돈이 많은지로 단순하게 결정되는 일들은, 경기장 밖에 남겨두고 싶다.
사이드라인 안에서는 역시.
그냥, 축구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