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 (4)
사실 선덜랜드의 FFP 징계 여부는 다른 팀 팬들에게도 초유의 관심사였다.
- 이대로 선덜랜드 징계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 @MU_Tom
ㄴ 징계받겠냐? 전부터 맨시티 고생하던 거 뻔히 봤을 텐데? 자료 준비 엄청 철저히 했더만. @CHE_Joe
- 그래도 혹시 징계받는다 치면? @MU_Tom
ㄴ 글쎄. 선수들이 매물로 나오지 않을까? @ARS_Rob
닉네임 앞에 응원하는 축구팀 아이콘이 붙었기에, 어느 팀 팬인지는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마일즈는 커뮤니티 게시글을 노려보았다.
- 선덜랜드에 탐나는 선수 엄청 많지. 대표적으로 마르틴? @NU_KingofTyneWear
ㄴ유럽 대회 출전정지 먹으면 베넷은 이적할 것 같은데? 딱 봐도 커리어 욕심이 있는 선수잖아. @LIV_hendoholic
- 나는 잭이 제일 탐나더라. @ARS_Rob
ㄴ 징계고 뭐고, 우리 주장은 절대로 안 판다 이놈들아! @SFC_Miles
ㄴ 그래도 에디는 매물로 나오지 않을까? 수수해 보이지만 사실 스티븐도 되게 알짜 선수고. @LIV_hendoholic
마일즈를 비롯한 선덜랜드 팬들은 절규했고, 다른 팀 팬들은 군침을 흘렸지만, 아주 잠깐의 해프닝이었다.
며칠 뒤 유에파 스폰서가 무너지고 중계권이 모조리 날아갔으며, 다우존스와 나스닥이 날뛰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유에파 회장의 자진사퇴에는 ‘그럼 그렇지’ 같은 반응을 보였으며···.
- 그렇게 마침내 유에파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R.I.P 유에파. @SFC_BeerKing
- 어··· 선덜랜드 징계 안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ARS_Rob
ㄴ 어떻게 되긴. 이렇게 되는 거지. @SFC_Miles
마일즈는 신나는 손길로 링크를 찍었다. 3년 전의 크리스마스, 잭의 이적설 당시 이희성 구단주가 직접 인터뷰한 영상이었다.
[요즘 선덜랜드 선수를 돈 몇 푼으로 사갈 수 있다고 믿는 이상한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아서··· 진짜 돈지랄이 뭔지 보고 싶어진 거 아니면, 그냥 선수 피규어나 사가세요.]
당시에는 그냥 ‘패기 넘치는 젊은 구단주’답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 사람들이 많았지만, 올여름의 축구팬들은 이희성이 말하던 ‘진짜 돈지랄’을 기어이 보고 말았다.
커뮤니티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 우리 선수 탐난다고 하던 사람들 다 어디 갔지? @SFC_MrsWood
- 우리는 선덜랜드가 FFP 잘 지켰다는 걸 알아. 아주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내 말 뜻은··· 앞으로도 FFP 잘 지켜주기 바란다는 거야. @LIV_hendoholic
마일즈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마주치자 수잔도 아주 흡족한 표정이었다.
물론 두 부부는 아직 서로의 아이디를 모른다. 설마 순진하게 자기 실명을 그대로 썼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기도 하고, 아직 서로의 휴대폰을 검사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말 다행이야, 그렇지?”
“그러게요. 뭐, 우린 썬을 믿고 있었지만요.”
잠시 서로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본 다음, 마일즈가 웃었다.
“당분간은, 발 뻗고 축구만 볼 수 있겠네.”
이희성이 온 이후부터 선덜랜드는 선수를 뺏길 일 없는 구단이 되었지만, 올여름은 특히 더한 상태가 되었다.
구단주의 압도적인 무력시위,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재력시위 직후라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당분간 선덜랜드 선수는 루머로도 집적거리지 말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수잔이 마주 웃었다.
“발 뻗고 보고 있긴 힘들 것 같아요··· 나이얼 스탠드 준공식 보러 오라는데요?”
* * *
팬들과 달리, 선덜랜드 스태프들은 FFP 무혐의 판결에도 크게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나이얼 스탠드의 준공식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브라이언과 샐리까지 일손을 돕겠다며 잠시 참여했을 정도다.
“테이프는 이렇게 묶으면 됩니까?”
“아뇨··· 브라이언 코치님은 들어가서 전술이나 짜세요. 분석팀장님!? 지금 뭐 하세요!?”
“스탠드 이름이 잘못 표기된 것 같아서요.”
샐리의 명랑한 대답에,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스탠드에 이름이 붙은, 선덜랜드의 레전드 나이얼은 샐리의 친아버지였다. 따라서 샐리의 ‘이름이 잘못된 것 같다’는 의견은 상당히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어디가 틀렸습니까?”
“전부 다요. 이 스탠드는 언젠가 샐리 스탠드가 될 스탠드잖아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표기를···.”
“···분석팀장님은 들어가서 분석이나 하세요.”
약간의 소동 끝에,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축잘알 전술가 두 사람은 축구 이외에는 완벽하게 무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말았다.
에이미는 손수 둘을 현장에서 끌어내, 집무실과 분석실에 각각 격리 수용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유일하게 느긋하게 움직이는 스태프의 모습이 들어왔다. 구단주 비서, 이희주였다.
샐리나 브라이언과 달리, 희주의 바지런한 일 처리 솜씨는 스태프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래서 에이미는 반가움과 서운함을 반씩 섞어 희주를 불렀다.
“뭐 해요?”
그러자 희주가 곧바로 대답했다.
“아, 미안해요. 지금 벌레 퇴치 중이라···.”
희주가 말하는 ‘벌레’의 의미를, 에이미는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은 쫓겨난 유에파의 옛 회장을 뜻하는 것이다.
이희성의 복안으로, 유에파 옛 회장은 두 번 다시 축구계에 발 들이지 못하도록 완벽히 쫓겨났고, 세력까지 잃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부활할지 모른다며, 희주는 요즘 그들의 동향을 무척 민감하게 점검하는 중이었다.
“벌레 잘 잡으면 용돈이 오르거든요.”
“구단주님이 주시나요?”
“아뇨. 다른 사람이요. 철저한 방역을 좋아하는··· 리미트리스의 부사장님.”
“그럼 마저 벌레 잡고 와서 빨리 도와주세요.”
에이미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선덜랜드를 적대했던 옛 회장 본인은 물론, 그 추종 세력까지 완전히 쓸려 나갔다. 그리고 지금 희주의 설명에 따르면, 리미트리스에서는 그들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철저히 끝장낼 모양이었다.
그래서, 문득 재밌는 생각이 에이미의 머릿속을 스쳤다.
“조엘 팀장님! 준공식 테이프 뒷면에 사진 좀 넣어도 될까요?”
* * *
나이얼 스탠드의 완성으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이제 육만 석짜리 경기장이 되었다. 규모로만 따지면 안필드, 에티하드를 넘어선 것은 물론, 세인트 제임스 파크와의 격차도 더욱 벌어졌다.
“당분간 티켓 구하기 힘들다는 소리는 쏙 사라지겠지.”
내 반응에, 희주가 혀를 찼다.
“조금 아깝네. 이렇게 금방 경기장 확장할 거면, 풋볼 스퀘어는 뭐 하러 만들었던 거야?”
“풋볼 스퀘어 덕분에 지을 수 있었던 거야.”
경기 날마다 풋볼 스퀘어에 몰려들던 사람 중에, 공짜니까 와서 본다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표를 구하지 못해 풋볼 스퀘어에 몰려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새 스탠드의 준공에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으며, 늘어난 시즌권 배정에 곧바로 참여했다.
만일 풋볼 스퀘어가 없었다면 이들 중 상당수는 축구로부터 멀어져 관심을 끊었을 수도 있다.
가뜩이나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대도시가 아니다. 이곳에서 육만 석 규모의 축구 경기장을 운영하려면, 팬의 충성도를 최우선으로 신경 써야만 한다.
설명을 들은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미 언니 말이 맞구나.”
“다미가 뭐라고 했는데?”
“비밀이야. 나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 했어··· 그럼, 갑부 오라버님. 슬슬 준공식 참여하실 시간인데요.”
“그래.”
나는 희주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공식이라고 해도 사실 특별할 건 없었다. 팬과 구단 관계자 앞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동상에 씌운 천을 벗기는 작업에 불과하다.
블랙캣츠 스탠드 때는 생략했던 이벤트를 이번에 굳이 팬들 앞에서 대대적으로 시행하는 이유는, 역시 선덜랜드가 FFP 징계를 벗어났다는 걸 과시하고, 팬을 안심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잠시 후 경기장 주변에 바글바글 몰려든 팬들 앞에서, 나는 천천히 테이프 앞에 섰다.
[나이얼 스탠드 준공식. FC 선덜랜드]
테이프에는 친절하게 절취선까지 붙어 있었다. 일 잘하는 우리 스태프들. 어디를 잘라야 가장 그림이 되는지 계산했던 모양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테이프를 자르기 위해 왼손으로 절취선 옆을 잡았다.
그때 테이프 뒷면에 붙은, 친숙한 얼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유에파의 전임 회장 얼굴이다.
위치는 절묘하게도 절취선 바로 뒷면이었다. 어린애 장난 같은 느낌에 피식 웃으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혹시 희주 짓인가 싶어서 두리번거리자, 의외로 에이미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뭐, 이 정도 장난은 괜찮겠지. 뉴캐슬 팬들은 내 사진을 다트판으로 쓴다는데.
나는 곧바로 테이프를 잘랐다.
그것은 코앞으로 다가온 새 시즌에 대한 선언이자, 우리 선덜랜드와 유에파 사이의 문제가, 우리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는 선포이기도 했다.
* * *
“오늘 여러분을 불러 모은 이유는.”
잭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의외로 엄숙했고, 주장다운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며칠간의 연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면 됨까? 어렵슴다.]
[표정은 대충 비슷해졌는데, 말투가 도로 원상태다?]
[무리임다. 말투까지 신경 쓰면 표정은 도저히 못 챙김다.]
전 주장 페르난데스에게 따로 코칭까지 받는 피나는 노력 끝에, 잭은 비교적 근사한 주장 코스프레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잭이 보여준 뜻밖의 변모에, 선덜랜드 선수들의 시선은 온통 주장에게 쏠려 있었다. 물론 옆에서 부주장 톰슨, 그리고 성골 유스 요니가 함께 무게를 잡고 있었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우리 선덜랜드가 누명을 벗고, FFP 관련 무혐의가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잭의 선언을 신호로, 선덜랜드 선수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FFP?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 우리 이적료 보면 알잖아?”
물론 공식적으로 다른 선수의 이적료나 주급 같은 정보는 다른 선수에게는 서로 비밀로 하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선수들끼리는 어느 정도 감이라는 게 있다.
예컨대 에디와 스티븐은 서로의 이적료를 정확히 아는 사이고, 잭과 요니는 상대의 주급을 정확히 안다. 옵션 계약조건은 물론, 실제로 통장에 얼마가 꽂히는지까지도.
이 정도 정보가 모이면, 누가 얼마를 받는지 추측할 수 있게 된다. 덕분에 선수들은 CAS의 판결 이전부터 선덜랜드가 FFP를 어기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도 확신과 실제 판결은 또 별개 문제다. 그래서 일부는 불안감을 나타내기도 했었다.
[우리가 FFP 안 어겼다는 건 아는데, 애초에 아무것도 어기지 않은 팀을 징계하려고 덤빌 정도면 유에파도 작정한 거 아닌가?]
[유럽 대회 못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래서 선수들은 FFP 혐의로부터 자유로워진 사실을 무척이나 반겼는데, 특히 이고르가 가장 기뻐했다. 아무래도 마음고생이 가장 심했던 선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현 소속팀은 물론, 친정팀까지 휘말려들 위기였으니.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이고르의 친정팀 오시예크는 징계 위기를 완벽하게 벗어났고, 마르틴의 친정 프라하와 함께 선덜랜드의 핵심 파트너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잭이 다시 호기롭게 선언했다.
“내일부터 우리는 다시 시즌 준비에 들어간다. 마음 편히 보낼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러니 하루쯤은 다 같이···.”
잠시 연설을 중단한 잭이, 톰슨을 곁눈질하며 낮게 물었다.
“꼭 건배해야 하는 검까?”
“응.”
톰슨의 반응은 단호했고, 잭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블랙캣츠 바텐더가 선수단에게 술잔을 건넸다. 톰슨은, 아직 어린 해리슨을 위해서는 무알콜 칵테일을 준비했지만, 그 외의 성인 선수들을 위해서는 딱히 배려가 없었다.
잠시 후, 모두의 손에 잔이 들린 것을 확인한 잭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올해 우리는 유로파에 간다. 그것도 톱시드로. 아, 물론 이 자리에는 챔스를 가본 선수도 여럿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챔스에 나가본 적 있는 마르틴과 베넷, 이고르가 차례로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톰슨은 변함없이 무표정했지만, 사실 좌중의 시선은 톰슨에게 가장 많이 향해졌다. 톰슨이 과거, 첼시와 함께 챔스를 우승해본 사내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유로파조차 썩 만족스럽지 않은 대회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 팀은 계속 성장 중이다. 챔스 진출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손으로··· 손으로···.”
“···쟁취하자.”
“땡큐 요니.”
요니를 향해 낮게 속삭인 다음, 잭은 표정을 고쳤다.
“우리 손으로 쟁취하자. 우리는 FA컵과 유로파 컨퍼런스 챔피언 선덜랜드다!”
잭을 시작으로, 선덜랜드 선수들이 술잔을 쭉 들이켰다. 목을 지나 몸속에 퍼져나가는 알콜의 화끈함에도 다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들의 몸은 이미, 훨씬 더 뜨거운 열기를 알고 있기에.
유럽 축구의 개막이 어느새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웸블리에서 열리는 커뮤니티 실드를 시작으로 이제, 선덜랜드는 또다시 새로운 시즌을 치르러 돌아갈 것이다.
팬들의 함성과 경기장의 열기가 기다리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