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동화 같은 시작 (1)
<동화 같은 시작을 기대하지 마라 - 위르겐 클롭>
[썬의 첫 번째 프리시즌? 레, 바, 뮌을 불렀지.
두 번째 프리시즌엔 클럽하우스와 메가스토어를 지었어.
세 번째 프리시즌엔 스페인-라리가 올스타를 초청했고.
···네 번째는 뭘 할까? @전직_조르디]
조금 늦게 시작한 네 번째 프리시즌을 맞이해, SNS는 다시 뜨거워졌다. 대체 이번엔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기대하는 우리 팬들과, 제발 살살 해달라는 다른 팀 팬들의 반응으로.
- 선덜랜드 선생님들. 이미 엄청 파격적인 거 하셨잖아요. 유에파 격침.
ㄴ 네 번째 프리시즌엔 FFP의 소중함을 모두에게 알렸지. 징계 타이밍 때문에 프리시즌 시작이 좀 늦어지긴 했지만, 자금력 차이를 생각하면 하이고 의미 없다 수준임.
ㄴ 치타는 지금 뒤에서 웃고 있다. 빠르다고 하는 경주견이라고 해 봐야···.
선생님은 혹시 한국에서 오신 분입니까?
- 선덜랜드는 올여름엔 대체 누굴 영입할까?
ㄴ 비싼 선수 펑펑 지르지 않을까? 솔직히 지금의 유에파가, 선덜랜드에 FFP 지키라고 눈치 주기도 좀 그렇잖아?
안타깝게도 새 유에파 회장은 꽤 강직하고 공정한 타입이고, 선덜랜드는 규칙을 준수하는 축구단이다. 외부의 룰도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타입이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원칙은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 무조건 싼 가격에만 투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영입 전략이 크게 달라질 이유는 없다.
그래서 선덜랜드의 네 번째 여름 영입은, 꽤 수수한 느낌으로 시작했다.
[FC 선덜랜드, 18세 신성 프랭크 호킨스 영입]
- 이고르는 그렇다 치고, 추가로 어린 수비수 하나··· 이게 다라고? 평범한데?
그렇게 평범할 리가 있나요? 선생님들.
추가로 데려온 수비수, 프랭크의 가치는 450, 마르틴을 넘어 베넷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아직 어린 선수라 제 기량을 발휘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최고 수준의 유망주임에는 변함이 없다.
아직 18세 수준이긴 하지만, 일단 풀백과 센터백을 모두 볼 수 있는 귀한 인재이기도 하다. 심지어 양발잡이니, 키우기에 따라서는 좌우 풀백 모두를 땜빵할 수 있다.
실제로 유망주를 사랑하는 로저스 감독은 한없이 흐뭇한 반응을 보였으며, 브라이언은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뻐했다.
“이제 우리 수비진에게 가끔 휴식을 줄 수 있다는 뜻이지?”
FC 선덜랜드는 구성원의 휴식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수석코치와 전력분석팀장만 제외하면.
아, 구단주 비서도 빼주세요. 여동생은 굴리는 게 제맛이거든.
샐리도 군침을 흘렸다.
“센터백 겸직이니 적극적인 측면 오버래핑을 권하기보다, 인버티드 풀백으로 키우는 게 어떨까요?”
“그래, 잘 키우면 3선의 빌드업 리더 역할도 가능하겠지.”
“양발잡이고, 풀백이니까 전담 마크를 붙이기 까다롭겠죠.”
쓸 수 있는 패가 늘어날수록 전술가의 즐거움도 커지기 마련이다.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인재의 영입에, 브라이언과 샐리는 벌써부터 토론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선수 영입에 더해, 티 나지 않는 다른 방향의 영입도 추진했다. 현역 시절 인간 투석기로 이름을 떨친 인물, 델랍을 스로인 전담 코치로 영입한 것이다.
델랍은 한때 스토크의 수석 코치였지만, 스토크에 그 감독, 라일 파커가 임시로 고용되면서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상태였다. 살면서 라일 파커에게 고마워할 일이 자꾸 생길 줄은 몰랐는데.
물론 수석 코치를 한번 맡아본 사람은 일반 코치로는 잘 오지 않는 법이지만, 이번에는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돈, 그리고 명분을 만들었다.
“영입에는 샐리가 동석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내 요구에, 브라이언이 눈을 깜빡거렸다.
“브로, 혹시 미인계 같은 걸 시도하려는 건 아니지? 원래 아저씨들이 젊고 예쁜 여자의 부탁에 약하다는 속설이 있긴 한데···.”
“그럴 목적이었으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겠지.”
“하긴, 저 축알못은 미녀라긴 좀 그러니까.”
진심이라면 브라이언 너, 안과 가야 할 것 같은데.
샐리는 어떤 기준을 가져다 대더라도 완벽한 미녀다. 흔히 선덜랜드 삼대 미녀 - 다시 말하지만, 구단주 비서는 빼주세요 -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미모의 소유자다.
다만, 샐리는 빈말로도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다. 그러니 브라이언의 의혹처럼 미인계로 낚고 싶었던 거라면, 상냥하고 사교적인 에이미나 싹싹한 리지를 동원했겠지.
애초에 내 의도는 미인계도 아니고.
“델랍이 저와 같은 아일랜드 출신이라서 그런 건가요?”
“그렇습니다. 덧붙이면, 델랍은 현역 시절 선덜랜드에서 뛴 적이 있고요. 당시 그를 선덜랜드에 영입한 사람은 아버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델랍과 잘 모르는 사이인데요.”
“그렇겠죠. 하지만 상대가 아마 기억할 겁니다.”
실제로 델랍은 우리가 제시한 계약 조건보다도, 협상 자리에 샐리를 동석시킨 배려에 더 큰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나이얼 단장님의 딸이었지? 이야, 그때 그 코흘리개 꼬마가 이렇게 컸을 줄이야!”
감개무량하다는 표정을 짓는 델랍을 향해, 샐리가 새침하게 응수했다.
“코 흘린 적 없거든요.”
샐리의 반응에 호탕하게 웃던 델랍이 표정을 바꿨다.
“이거 실례했군. 그러면 옛 은인의 따님이 아니라, 1군 프로 팀의 코칭스태프로 대하도록 하지.”
“그게 서로 좋겠군요.”
“좋아. 그러면 하나 묻겠어. 선덜랜드는 롱 스로인을 하지 않는 팀으로 알고 있어. 자기 진영 쪽으로 짧고 정확하게 연결하는 타입 아니었나?”
델랍의 질문에, 샐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죠. 스로인 상황에서 전진 패스와 후진 패스의 성공률 차이는 굉장히 크거든요. 게다가 논리적으로 따져봐도 자명하고요. 스로인을 하는 순간, 피치 위에는 우리 선수가 한 명 적어요. 전진 패스는 불리하죠.”
“그럼 선덜랜드엔 내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롱 패스를 할 수 없는 팀의 숏 패스는 무섭지 않거든요. 언제든지 길게 던져넣을 수 있는 팀이어야 해요. 그래야 상대가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라인을 내리겠죠.”
“그 어르신이 꽤 무서운 딸을 키우셨군.”
“어릴 때부터 줄곧 축구만 보고 자랐으니까요. 하지만, 무명인 저를 발탁한 사람은, 우리 구단주님이고요.”
“그리고 그 구단주께서는··· 이제 날 데려가려고 한다?”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델랍의 시선을 맞받으면서,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팀에 꼭 필요한 분이라고 확신하니까요.”
“전직 수석코치에게 스로인 코치로 와달라는 제의는 따지고 보면 꽤 무례한 건데.”
“이해합니다.”
나는 대답과 동시에 종이를 내밀었다.
유럽 주요 리그의 1부 프로팀 수석 코치나 감독으로 옮길 경우, 위약금 없이 계약을 종료할 수 있다는 계약 조항을.
“감동적이긴 한데, 내가 정말로 옮기면 어쩌려고?”
“그럼 박수 쳐 드리죠.”
“진심인가?”
“네. 그리고 사실 나쁜 조건은 아닐 겁니다. 우리 코칭스태프는 일류니까요. 특히 전술가로서는 초일류입니다. 그것도 두 명 모두가요.”
“즉, 선덜랜드의 전술을 곁에서 보면서 배워 가라는 뜻인가?”
“그리고 스로인을 가르치고요.”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내 제안은 물론 그에게도 이득이지만, 선덜랜드에도 결코 손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델랍이 떠나더라도, 그가 지도하는 스로인 기술은 팀의 노하우로 남을 것이다.
그러자 델랍이 샐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나이얼 단장님이 자기 딸을 3부 리그 팀에 보냈는지 알겠어.”
“지금은 1부 팀인데요? 그리고 아빠가 보낸 게 아니라, 제 발로 왔어요.”
“구단주가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다는 뜻이야.”
그렇게 말하며, 델랍은 내가 내민 옵션 조항을 찢었다. 그러자 곧바로 샐리의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시는···!”
나는 옆으로 손을 뻗어 당장에라도 델랍에게 달려들려는 샐리를 제지했다.
델랍이 웃었다.
“이런 조항은 필요 없어. 수석 코치고 감독이고 뭐고, 계약 기간 동안에는 먼저 팀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 *
델랍의 가세로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훈련에 새로운 활기가 돌았다.
시범 삼아 던진 그의 스로인이 마치 무슨 프리킥같이 날아들자, 선수들이 일제히 혀를 내둘렀다.
“궤적 실화냐?”
특히 파워에 약점이 있는 요니 같은 선수는 쓴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내가 발로 차는 것보다 멀리 나갈 것 같은데···.”
놀라운 스로인을 선보인 코치 델랍이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마흔이 훨씬 넘은 나도 이 정도로 던질 수 있지. 여러분은 현역이고, 아직 젊으니 훨씬 멀리 던지는 것도 가능할 거야.”
한편, 델랍의 롱 스로인을 바라보던 우리 골키퍼들, 리델과 하퍼가 번갈아 난색을 표했다.
“이거··· 프리킥보다 훨씬 처리하기 까다로운데요.”
“내 말이. 프리킥이야 앞뒤 잴 것 없이 쳐내면 그만이지만, 스로인은 특수하잖아?”
손으로 던진다는 규칙상, 스로인은 곧바로 골대에 들어가도 실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의 몸에 닿고 들어간다면 확실히 점수로 이어진다.
그러니 수비하는 입장에서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괜히 자살골이 될 리스크를 짊어지게 되는데, 그렇다고 가만 놔두다가 상대 공격수가 머리를 가져다 대기라도 하면 곧바로 실점이다.
“가만, 이거 오프사이드도 없지?”
브라이언이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전술적으로 써먹을 방법을 찾아낸 모양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연습장을 떠났다.
* * *
새로운 인물이 팀에 자리 잡은 한편,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잔디 관리 고문 ‘샘 아저씨’가 마침내 은퇴 의사를 밝힌 것이다.
“나도 이제 슬슬 정년이라 해도 좋을 나이고, 리지도 이제 제 몫을 할 수 있는 관리인이니, 괜히 고문이 붙어 있으면 좋을 게 없지 않겠소?”
샘 아저씨가 밝힌 입장은, 내게는 마치 흔히 말하는 가불기처럼 느껴졌다. 리지가 선덜랜드의 잔디 관리인을 맡은 지도 벌써 4년 차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리지에게 고문이 필요하다면, 그건 리지의 능력 문제가 된다. 하지만 고문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샘 아저씨의 은퇴를 만류할 명분이 없어진다.
침묵하는 나를 향해 샘 아저씨가 빙긋 웃었다.
“이 팀이 다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것도 보았고, 트로피도 여럿 차지하는 걸 봤소. EFL컵, FA컵, 유럽 대회 트로피까지··· 지난 30년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니, 이제 정말로 남은 미련이 없소이다.”
샘 아저씨의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눈빛만은 단호했다. 그를 붙잡을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선, 은퇴식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허허, 선수도 아니고 은퇴식은 무슨···.”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30년을 채우셨습니다. 30년간 팀에 헌신한 스태프를 그냥 퇴직하게 두면 앞으로 누가 선덜랜드에서 오래 일하겠습니까? 이게 다 팀을 위해서입니다.”
“으음. 구단주께서 그렇게 말한다면···.”
“그리고 은퇴식 날짜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그러자 샘 아저씨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혹시 그래놓고 다음 시즌 오프에 은퇴식 잡으려는 것 아니오?”
“무척 솔깃하지만, 그건 반칙이죠.”
나는 달력의 한 날짜를 가리켰고, 샘 아저씨가 신음했다.
“커뮤니티 실드 다음날이구려.”
“그렇습니다.”
커뮤니티 실드는 지난 시즌 리그 우승팀과 FA컵 우승팀이 서로 맞붙는 경기로, 영국 축구계에서는 사실상 새로운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는 커뮤니티 실드에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한다.
사실 커뮤니티 실드는 일종의 이벤트 매치처럼 취급될 때가 많고, 축구계 관계자들이 썩 중요시하는 대회는 아니다.
리그나 FA컵 우승을 밥 먹듯 하는 빅클럽에게 커뮤니티 실드는 그다지 무게감 있는 트로피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힘 빼고 가볍게 출전하는 팀도 적지 않고, 때로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컨디션 조절 목적으로 사용하는 팀도 많다.
그래도 우린 다르다.
가볍게 포기할 수 없다. 이제 은퇴하려는 노인, 30년간 쉼 없이 팀과 함께 한, 살아있는 역사에게 커뮤니티 실드는 최고의 선물이 될 테니.
잠시 눈을 깜빡이던 샘 아저씨가 고개를 저었다.
“나 같은 늙은이를 떠나보내기 위한 목적이라면, 트로피는 너무 과한데.”
“팀을 위해서입니다. 클럽 박물관에 커뮤니티 실드 트로피 자리가 하나 비었거든요.”
“그러시다면야.”
샘 아저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몸을 돌려 구단주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희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 하냐?”
“음··· 메모? 오빠가 팀을 위해서라고 하는 건, 경제적으로 이득이라는 표현과 똑같은 의미 같아서.”
“무슨 소리야?”
“핑계라는 뜻이지.”
피식 웃으며, 나는 차분하게 답했다.
“하다못해 명분이라고 해라.”
사실, 명분도 나쁘지 않다. 우리가 커뮤니티 실드를 차지한 해는, 193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 우리 클럽 박물관에 커뮤니티 실드 트로피도 하나쯤 놔둘 필요가 있다. 21세기 버전으로.
나는 스케줄을 다시 확인했다. 달력에 선명하게 붙은 우리와 상대 팀의 로고를.
마침 우리에게도 꽤 반가운 상대였다. 지난 시즌, 우리에게 리그 첫 패배를 안겼던 상대이자, 우리를 EFL컵 4강에서 탈락시킨 팀.
프리미어리그 디펜딩 챔피언, 맨시티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