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90화 (190/422)

190화 동화 같은 시작 (2)

애니는 화면을 노려보았다.

“갑부 구단주 더비, 이건 좀 식상하지. 리얼부 더비? 느낌이 살짝 별로네.”

그러자 옆에서 아벨이 끼어들었다.

“팀장님. 슈가대디 더비, 오일머니 대 월스트리트는 어떠십니까?”

“너무 노골적이지 않아?”

“그럼 유에파 제소 더비, 아니면 FFP 무징계 더비는요?”

“야.”

애니가 노려보자, 아벨이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사실, 애니는 아벨의 조언에 대해 썩 기대하지는 않았다. SNS 위주로 활동하던 아벨의 문체와, 언론사에 보낼 헤드라인 스타일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뭐, 더비까지는 아직 시간 좀 있으니까 천천히 고민하자. 민자고속도로 개통이나 대대적으로 띄워야지.”

고속도로 개통 홍보 문구를 선덜랜드 프레스팀에서 고민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그 고속도로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와 뉴캐슬 국제공항을 연결하기 때문이었다.

올해 유로파를 시작으로, 앞으로 매년 유럽 대회에 나가겠다는 게 팀의 목표가 되었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해외 팬들의 유입도 늘어나리라 전망한 구단주 이희성이 개인 자금을 들여, 공항까지 직통 고속도로를 개통하고 만 것이다.

[리미트리스 하이웨이, 속도도 ‘리미트리스’]

마구 슬로건을 뽑아내기 시작한 애니를 향해, 옆에서 아벨이 히죽 웃었다.

“팀장님. 고속도로 홍보라면, 마침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SNS시대잖아요?”

“그래서?”

“영상 찍어서 SNS에 뿌리는 겁니다. 공항에서 차 두 대가 동시에 출발하고요. 목적지는 물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와 세인트 제임스 파크죠.”

“즉, 이제 공항까지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다는 걸 어필하자는 이야기지?”

솔깃한 기획이었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나을 수는 없다. 만일 아벨의 말처럼 공항까지의 시간이 비슷하다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해외 팬을 끌어들이기엔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아벨이 웃었다.

“그렇습니다. 제 계산상 120 밟으면 비슷하고, 150이면 확실히 이깁니다.”

“그거 마일이야, 아니면 킬로미터야?”

“국제공항에서 오는 기준이니까, 킬로미터죠.”

애니는 잠시 손가락을 꼽았다. 킬로미터 단위는 영국인들에게는 썩 친숙하지 않기 때문에, 마일로 바꾸려는 의도였다.

잠시 후 애니가 입맛을 다셨다.

“90마일 이상 밟아야 이기는 거면, 좀 궁색한 느낌인데.”

“괜찮습니다. 선덜랜드 로드스터는 최대 250마일도 뽑거든요.”

“그거 250마일로 몰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하고?”

애니의 질문에, 아벨이 히죽거렸다.

“우리 팀에 운전이 업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원정버스 모는 기사님들 정도면, 사실상 카레이서들 말고는 적이 없어요.”

“그 사람들은 의미 없어. 일반인이 몰아도 빨라야지.”

“그럼, 비서님한테 부탁해야겠군요.”

애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구단주 비서 희주는 선덜랜드 로드스터를 다룰 수 있는 인재였다. 심지어 구단 인수 초기엔 구단주의 운전기사 노릇까지 했을 정도다.

물론 지금은 운전기사를 따로 쓰지만.

그래서 애니는 조심스럽게 취지를 구단주실에 전달했고, 연달아 두 개의 메시지를 받았다.

[할 수 있어요! 맡겨만 주세요!]

[안 됩니다. 아직 걔 사망보험 안 들었거든요.]

그런 우여곡절 끝에, 홍보 영상의 운전자는 리지로 결정되었다. 추천자는 그녀의 할아버지 샘이었는데, 리지가 어릴 때부터 잔디깎이 카트를 다뤄 차량에 익숙하다는 근거를 내세웠다.

비록 샘이 제시한 근거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리지가 FC 선덜랜드에서 손꼽히게 뛰어난 운전자라는 사실에는 대부분 동의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리지의 미모를 고려할 때 로드스터를 모는 그림이 퍽 근사할 거라는 주장을 덧붙였다.

리지 본인은 자신이 운전을 잘한다는 이야기에도, 미녀라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어색한 표정으로 선덜랜드 로드스터에 오른 그녀는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리지는, 공항부터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까지 딱 8분 만에 도착하는 기염을 토했다.

- 솔직히 이 정도면 카레이서 아니냐?

ㄴ 140마일쯤 밟으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세인트 제임스 파크보다 빠르다고 하네요··· 지금 우리랑 장난함?

결국 홍보 영상은 재촬영되었고, 드라이버는 희주로 교체되었다.

비교적 현실성 있는 운전 끝에, 희주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로 향한 아벨과 거의 비슷한 시간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구단주실에서는, 진지하게 트램 추가 설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그때, 훈련장에서는 롱 스로인 특훈이 한창이었다.

델랍의 지도 아래 시작된 롱 스로인 특훈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베넷, 그리고 스티븐이었다. 아무래도 체격 조건이 우월하다 보니, 비거리를 뽑기도 유리했던 것이다.

“마침 레프트백과 라이트윙이니, 좌우 측면 모두에 대응할 수 있겠네. 아주 좋아.”

만족스러움을 표시하는 코치진을 향해, 바스티아노가 어필을 시작했다.

“저도 연습하고 싶습니다만··· 스티븐이나 베넷만큼 잘 던질 자신이 있습니다.”

“의욕은 알겠는데, 너는 롱 스로인을 받는 쪽이잖아. 의미 없어.”

브라이언의 단언에, 바스티아노는 살짝 시무룩한 표정으로 골마우스 쪽으로 돌아갔다. 코치진의 이야기처럼, 바스티아노는 상대 골대 근처로 날아오는 롱 스로인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연습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바스티아노 못지않게 이고르 또한 의욕을 불태웠다.

지난겨울에 계약했지만, 팀에 새로 합류한 지 얼마 안 되는 크로아티안 센터백은 팀원들 사이에서 어필하려는 의욕으로 불타는 중이었다.

“저도 잘할 수 있습니다.”

코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에디가 히죽 웃었다.

“필요 없어. 센터백이 스로인 던지러 언제 나가려고.”

“그런가?”

결국 롱 스로인은 좌우 풀백, 그리고 미드필더들의 몫이었는데, 예외적으로 어린 프랭크, 그리고 해리슨은 스로인 연습에서 제외되었다.

아무래도 아직 몸이 덜 자란 십 대 선수들이니만큼, 괜히 롱 스로인을 전담하다가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메디컬 팀의 의견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명의 유망주는, 벤치 구석에서 한창 자기들끼리의 연습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원정 버스 기사]

해리슨이 내민 카드를 바라보던 프랭크가 눈을 굴렸다.

“몇 호 차?”

해리슨이 빙긋 웃었다.

“시도는 좋았지만, 당연히 우리는 선수용 차량부터 외워야겠지? 5호 차와 6호 차 기사님 성함.”

물론 팀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프랭크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 다음은 구내 식당···.”

그때 옆에서 에디가 끼어들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쓸데없는 짓이요?”

해리슨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구단주 이희성과 로저스 감독이 부임한 이래, 선덜랜드는 늘 ‘선수와 스태프는 전부 선덜랜드라는 같은 팀메이트’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매년 크리스마스 - 신년 파티에는 선수단과 스태프가 항상 함께했었고, 새로운 스태프가 채용될 때마다 인사 영상이 경기장과 훈련장 곳곳에 흘러나왔다.

그래서 해리슨 또한 유소년 시절부터 스태프들의 이름과 얼굴을 외우려 노력하던 선수였다.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공을 찰 수 있는지 기억하라고 배웠어요.”

해리슨의 목소리는 작지만 또렷했고, 덕분에 주위의 시선이 쏠리고 말았다. 그중에는 해리슨을 가르친 크리그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에디가 웃었다.

“내 말은 디지털 시대니까 앱 쓰라는 소리였는데. 암기장 앱 많잖아. 스마트하게 해야지. 무슨 쓸데없이 카드 같은 걸 만들고 그래.”

“흐음.”

에디의 해명에도 해리슨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진중한 크리그나 차분한 요니와 달리, 에디는 평소 경박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5호 차 기사님은···.”

“항상 고마워요, 필립.”

반사적인 대답에, 해리슨 또한 피식 웃고 말았다.

“그건 이름이 아닌데요.”

잠시 후, 에디는 샐리에게 귀를 잡힌 채 스로인 방어 훈련을 위해 돌아갔다. 그리고 해리슨은 다시 프랭크를 향해 카드를 들어 올렸다.

[잔디관리 고문]

* * *

은퇴를 앞둔 잔디관리 고문, 샘은 멀찍이서 훈련장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 광경도 이제 곧, 볼 수 없게 되겠구나.’

커뮤니티 실드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조만간 그는 30년간 지켜보던 잔디와, 그 위에서 뛰는 선수들을 떠나야 한다.

미련은 없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그래도, 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썬은 절대 날 내치지 않을 테니까.’

팀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후임인 손녀딸 리지를 위해서는 이제 자신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는 걸, 샘 노인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잔디를, 그리고 선수들을 바라보면 가슴이 욱신거리고 시큰하다.

“그런 표정 지을 거라면, 뭐하러 은퇴하겠다고 말했나?”

로저스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샘은 여전히 훈련장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팀을 사랑하니까. 이 팀의 미래에, 늙은이의 자리는 필요 없을 테니까.”

“이 영감쟁이, 그 말은 꼭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은데.”

“반쯤은 그렇지. 아직도 브라이언이 못 미덥나?”

“그럴 리가 있겠나. 전술은 진작부터 나보다 나았고, 선수단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아. 아직 믹스드존에는 못 세우겠지만, 그건 금방 배우겠지.”

“뭐, 믹스드존에 서는 일은 누구도 대신 못 하니까··· 그래서, 남은 1년이면 충분하겠나?”

“그래야지. 어떻게든 가르칠 생각이네.”

로저스의 대답을 들으며 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 끝나면 여행이나 갈까?”

“어디로?”

“글쎄, 우리 팀 원정을 따라다녀도 재밌을 것 같고··· 전에 보니 그 아가씨 멋지더구만. 선덜랜드 로드스터 타고 유라시아 대륙 횡단한 사람.”

“운전은 누가 하고?”

“차 모는 거라면야 리지보다 아직 내가 낫지.”

“재미는 있겠군··· 그러려면 1년간, 브라이언 저 녀석을 좀 더 험하게 굴려야겠어. 성적도 확실히 뽑아야 하고.”

샘은 굳이 유라시아 횡단을 거론한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오래 알고 지낸 로저스에게는 이미 전달된 모양이었다.

샘의 은퇴는 로저스보다 빠르지만, 그래 봐야 1년이니 사실상 큰 차이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더는 축구단 관계자가 아닐 두 노인은 사이좋게 결승전 관중석으로 향할 것이다.

선덜랜드가 챔스 결승 무대에 서는 날.

그날이 그리 멀지 않으리라는 걸, 두 노인은 확신하고 있었다.

* * *

그때, 나는 한창 사인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팬 사인회를 열었다는 뜻은 아니다.

샘 아저씨의 은퇴식을 맞아, 초청장을 만드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30년간 일해준 스태프의 은퇴식이라면, 역시 구단에 오래 몸담았던 레전드들이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팀의 레전드를 초청하는 거라면, 당연히 내가 친필 초청장을 써야 마땅하다.

그런 내 주위를, 리지가 미안한 표정으로 맴돌았다.

“썬, 그럴 필요 없는데요. 저희 할아버지 일이니까··· 초대장이 필요하면 제가 쓸게요!”

리지의 제의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윌리엄슨의 일이 아닙니다. 선덜랜드의 일입니다. 팀에 30년간 헌신해온 스태프를 떠나보내는 거니까요.”

“그래도···.”

“뭐, 받는 사람 입장에선 시꺼먼 남자 구단주보다는, 미인 관리인이 쓴 카드를 받는 게 훨씬 기분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자 리지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변했다.

“아이, 제가 무슨 미인이라고···.”

“그래도, 이건 제가 할 일입니다.”

슬쩍 눈짓을 보내자, 희주가 곧바로 리지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자필 초청장에 몰두했다.

[존경하는 케빈, 이번에 선덜랜드의 잔디를 30년간 지켜온 샘 윌리엄슨의 은퇴식을 맞아···.]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샐리가 보낸 메시지였다.

[시뮬레이션 승률은 3할쯤 될 것 같네요. 축알못 코치님을 좀 더 들들 볶아야겠어요. 아, 그리고 우리 아빠 건 안 쓰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집에서 노는 사람, 제가 전화로 부르면 그만이니까.]

나는 짧게 답신했다.

[아버님 건 이미 썼습니다.]

그리고 다시 펜을 들었다.

만일 동화 속 이야기였다면, 우리는 반드시 커뮤니티 실드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30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팀에 헌신한 노인의 은퇴식을, 트로피로 축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동화와는 다르다는 걸 안다. 샐리의 계산처럼, 우리는 아직 맨시티 상대로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다는 것도 안다.

샘 아저씨에게 트로피를 들려 주지 못한 채 떠나보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자리를 빛내 주시길 소망합니다. 아울러 커뮤니티 실드의 관람권을 동봉하오니, 선덜랜드의 동화 같은 시즌을, 부디 함께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불리함은, 싸움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늘 그런 축구를 해왔으니까.

90분간 발을 멈추지 않을 선수들. 그 위에 팬들의 함성과 스태프의 열정이 더해진다면, 커뮤니티 실드를 동화 속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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