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동화 같은 시작 (3)
노크 소리가 났고, 잠시 후 희주의 안내에 따라 잭이 구단주실에 들어왔다.
경기장에서의 터프함과 달리, 잭은 의외로 조심스러웠고, 말을 꺼내기까지 한참을 머뭇거렸다.
“저, 구단주님. 그게,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주장의 의견이면 경청해야지. 뭔데?
“커뮤니티 실드의 징계는 시즌에 누적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슴다. 그래서 혹시··· 치즈 한 장 먹어도 됨까?”
애매한 질문이었다.
보통 경기중 ‘카드를 먹어도 되는지’ 는 구단주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경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코칭스태프의 권한이니까.
당연히 잭도 알고 있을 이야기인데, 굳이 내게 물어보러 온 이유가 짐작이 갔다. 그래서 빙긋 웃으며 대답하려는 찰나, 옆에서 희주가 숨을 들이켜고는,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살인마···.”
아무래도 희주 귀에는, 잭이 맨시티 선수 중 누군가를 작정하고 담그겠다는 의미로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희주의 혼잣말은 한국어였고, 잭은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잭을 바라보며 차분히 대답했다.
“괜찮아. 퇴장만 안 당하면.”
“물론임다. 퇴장은··· 이제 저도 사절임다.”
“그러면 혹시··· 언더셔츠는 안 필요해?”
그러자 선덜랜드 주장의 얼굴이 아주 환하게 피었다. 잠시 후 잭은 대만족 상태로 구단주실을 떠나갔다.
그리고 희주는 불만족 상태가 되었고.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혹시 나도 좀 알아듣게 말해 주면 안 될까?”
“설명은 나중에 하고, 우선 CS팀에게 연락부터 넣어. 언더셔츠에 글자 좀 넣으라고.”
“글자? 무슨 글자?”
희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사실 어려운 문제도 아닌데. 잭이 왜 굳이 나를 찾아왔는지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다.
세상에 경고를 먹고 싶어서 먹는 선수는 별로 없다.
물론 상황에 따라 팀의 패배를 막기 위해 파울로 끊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그런 건 경기 전에 미리 정할 문제는 아니다.
경기 전에 ‘팀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종류의 카드는, 딱 하나뿐이다.
“잭이 언제 퇴장당했는지 잊었어?”
“아니? 기억하는데? 뉴캐슬전이잖··· 아하!”
마침내 호기심을 해소한 구단주 비서의 얼굴도 대만족 상태가 되었다. 잠시 후 희주는 곧바로 CS팀에게 연락을 넣어, 언더셔츠를 대량으로 주문했다.
* * *
맨시티 감독 펩은 커뮤니티 실드 대진운에 만족하는 중이었다. 선덜랜드를 상대한다는 점에서, 첼시나 리버풀, 아스널, 레스터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선덜랜드는 리그보다 컵에 강한 팀으로 유명했다. 장기 레이스에는 아직 약하지만, 단판 승부에는 충분히 강력하다. 그러니 이번 커뮤니티 실드에서도 충분히 싸울 가치가 있는 상대일 것이다.
‘코치진도 재밌고.’
수석 코치 브라이언은 이제 축구계에서도 젊은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고, 머지않아 투헬이나 나겔스만에 뒤지지 않는 전술가가 될 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펩 역시 브라이언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아직 젊은데도 재미있는 전술을 쓰는 친구였지.’
물론 브라이언의 스타일은 펩 자신과는 별로 닮은 점이 없었지만, 펩은 그래서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분석팀장 샐리의 전술관은 또 브라이언과 대조적이라, 패턴이 다양하게 바뀌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번엔 4-4-2로 나올 것 같다고?”
펩은 자신의 분석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분석팀 스태프가 곧바로 대답했다.
“네. 우리 상대로 점유율 축구를 시도하진 못할 테니, 아마 두 줄 수비 위주로 역습할 것 같습니다.”
“스타팅은?”
“장담하는데 정확할 겁니다. 선덜랜드는 우리처럼 커뮤니티 실드에 로테이션 섞어 내는 여유를 부리지 못할 테니까요.”
펩의 스태프가 예상한 선덜랜드 스타팅, FA컵 결승에서 선덜랜드가 내세웠던 라인업과 거의 유사했다. 사실상 지난 EFL컵 4강에서 맨시티가 상대했던 멤버이기도 하다.
약간의 변화라면···.
“톰슨과 잭이 중원을 지키고, 전방은 바스티아노와 요니란 말이지?”
“네, 크리그는 아마 조커로 나올 것 같습니다. 에디와 이고르가 선발일 거고요.”
“골키퍼는?”
“리델일 겁니다. 선덜랜드의 골키퍼 기용 원칙은 아주 명확하니까요.”
“흠.”
고개를 끄덕이는 펩을 향해, 다른 스태프가 황급히 보고했다.
“저, 감독님··· 선덜랜드가 하퍼를 낼 것 같다는데요?”
리델의 선발 가능성을 보고하던 분석팀원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펩은 개의치 않았다.
“하퍼라고? 근거는?”
“언론입니다. 선덜랜드 데일리인데요. 선덜랜드 관련해서는 사실상 오피셜 소스 취급받는 곳입니다. 어쩌면 언플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스태프의 보고에, 분석팀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그런 언플을 누가 믿는다고···.”
펩은 짧게 대답했다.
“내가 믿는데.”
선덜랜드의 브라이언 - 샐리가 꽤 영리한 책략가라는 사실은 펩도 이미 알고 있었다. 주도권을 쥐고 휘두르기보다 상대의 수를 역이용하고 속이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라는 점도.
만일 휘슬이 울린 다음이었다면, 펩은 선덜랜드의 움직임 모두를 속임수라고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펩은 동시에 알고 있었다. 선덜랜드는, 눈길에 고립된 맨시티 원정 차량을 구출하는 그런 팀임을.
“오피셜이라면 믿어도 돼. 그 팀은, 사이드라인 밖에서만 돈을 쓰고··· 사이드라인 안에서만 사람을 속이거든.”
* * *
펩의 예상대로, 선덜랜드는 하퍼를 선발로 내세우기로 결정했다.
출전을 앞둔 하퍼는 웸블리의 풍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인연 없는 경기장일 줄 알았는데.’
퍼스트 키퍼 하퍼는 리그와 유럽 대회 담당이고, 국내 컵 대회는 세컨 키퍼 리델의 몫이었다.
그 원칙에 따르면 이번 커뮤니티 실드의 선발은 리델이어야 했다. 커뮤니티 실드는 국내 대회고, 단판 승부이니 사실상 결승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덜랜드는 굳이 하퍼를 선택했다.
내심 출전을 바라던 하퍼로서는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리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기회를 잡지 못하고 묵묵히 기다리던 세컨 키퍼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다.
“원래는 네가 뛰어야 하는 건데···.”
조심스럽게 말하는 하퍼를 바라보던 리델이 씩 웃었다.
“신경 안 씁니다. 결승에서 퍼스트 키퍼를 내는 팀도 흔하니까요. 저로서는 오히려, 지난 FA컵 결승전을 양보받은 느낌입니다.”
“그래.”
“대신, 절대로 지면 안 됩니다.”
리델의 너스레에, 하퍼는 미소로 답했다. 사실, 하퍼는 팀이 자신을 선발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
반쯤은 선전포고였다. 커뮤니티 실드에서 설렁설렁 뛸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라고. 선덜랜드는 전력으로 싸울 거고, 그래서 퍼스트 키퍼를 내는 거라고.
비록 하퍼는 자신이 리델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팀의 퍼스트 키퍼라는 긍지는 확실히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이유는···.
“샘 고문님과 사이좋으셨죠?”
“그렇지 뭐.”
하퍼가 선덜랜드에 머문 지도 벌써 7년이 지났다.
축구선수로서는 톰슨과 크리그가 더 오래 뛰었다. 그리고 선덜랜드에 머문 경력 자체는 잭이나 요니가 훨씬 길다.
하지만 1군 프로로서 보낸 시간만 놓고 보면 팀에서 하퍼가 으뜸이었고, 이제 은퇴를 앞둔 샘 노인과의 친분도 두터웠다. 그렇기에 팀은 오늘 하퍼를 리델 대신 선발로 기용한 것이다.
하퍼는 천천히 골키퍼 장갑을 착용했고, 주먹에 힘을 넣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실점이 좋은 골키퍼는 세상에 아무도 없겠지만, 오늘만은 특히 실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퍼의 그런 결의는 킥오프 직후부터 위협받기 시작했다.
* * *
“꺄악!”
희주의 새된 비명과 동시에, 맨시티의 슛이 위협적으로 날아들었다. 하퍼의 손끝을 스친 공이 그대로 크로스바를 직격한 것이다.
실점은 막았지만, 코너킥을 내줬다. 그것도 경기 시작 3분 만에.
“이제 기레기들 못 믿겠어.”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니, 커뮤니티 실드는 힘 빼고 하는 팀이 많다고 하던데!”
“··· 뭐, 확실히 오늘 맨시티는 작정하고 나왔네.”
선발 라인업에 어린 선수 몇 명을 섞어 넣긴 했지만, 사실 맨시티 정도 되는 팀은 어린 선수들도 여느 팀의 핵심 유망주 수준이다.
게다가, 어째 우리 경기 준비가 대부분 읽힌 것 같다.
“우리 포메이션부터 스타팅까지 전부 알고 나온 것 같은데.”
“그야, 갑부 오라버님이 친절하게 선언하셔서 그렇지. 하퍼 낼 거라고 언론에 오피셜 띄우는 바람에!”
“그건 필요한 절차였어. 팬들을 혼란시키지 않으려면.”
국내 컵 대회는 리델, 리그와 챔스는 하퍼라는 원칙에 반하는 선발이었으니, 만일 깜짝 선발했다면 팬들도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팬 서비스는 구단주의 최대 덕목이다. 경기에서 이기는 건 감독과 선수들의 몫이고··· 뭐, 가끔은 국내 컵 대회에 하퍼를 낼 수도 있다는 걸 보여 주면, 심리전에 도움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게다가, 우리 라인업을 들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늘 하퍼의 선발은 꽤 적절한 판단이었다. 놀라운 선방을 연달아 선보이며, 맨시티의 초반 공세를 무사히 막아냈기 때문이다.
다음은, 우리의 역습이었다.
톰슨이 걷어낸 공이 잭을 거쳐 마르틴에게 향했다. 비록 맨시티 수비에게 막혀 라인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공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었다.
어태킹 써드, 꽤 높은 위치다.
베넷이 스로인을 준비하자, 맨시티는 오히려 팀의 무게중심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마치 선언하는 듯했다. 선덜랜드는 스로인을 자기 진영 쪽으로 처리하는 스타일임을 안다고. 그러니 곧바로 압박을 가해 빼앗겠다는 의도가 너무나 투명했다.
점유율의 관점에서, 맨시티의 대응은 완벽하게 합리적이었다. 언젠가 샐리가 말한 것처럼, 스로인하는 순간의 필드에는 우리 선수가 한 명 적으니까.
그러니 스로인은, 점유율 싸움을 하기에는 썩 좋은 상황이 아니지만··· 오늘, 우리는 점유율 싸움을 하러 온 게 아니다.
사이드라인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베넷은 유니폼 상의를 끌어당겨 공을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몇 걸음의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라인 내려! 세트피스다! 골을 노리고 있다!”
맨시티 벤치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우리 선수들은 일제히 맨시티의 골대 앞까지 파고들었다. 마치 오프사이드 같은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처음부터 점유율 싸움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상대는 프리미어리그 디펜딩 챔피언 맨시티고, 영국에서, 어쩌면 세계에서도 손꼽힐 만큼 공을 잘 다루는 선수들이 모인 팀이다. 하물며 그들을 지도하는 감독이 펩이라면, 점유율 싸움은 결코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점유율에는 관심 없다. 우리는 오늘···.
“이기러 왔거든.”
상대보다 딱 한 골을 더 넣기 위해, 웸블리에 온 것이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잔뜩 달아오른 우리 팬들의 함성 속에서, 베넷이 공을 길게 내던졌다.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는 평범한 스로인이 아니라, 일직선에 가깝게 날아가는 델랍식 롱 스로인을.
그 스로인은, 보통의 경우와 달리 포물선을 그리지 않았다. 공의 궤적은 거의 일직선에 가까웠고, 머리보다는 확실히 높은 상태로 날아들었다.
기습적인 롱 스로인에, 맨시티 수비진은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당혹감을 드러냈다.
어쩌면 그들의 뇌리에는 불안감이 스쳤을지도 모른다.
베넷의 스로인은 내버려 두면 그대로 골 네트에 꽂힐 듯 빠르고 강했다. 이런 스로인은 잘못 건드리면 자책골이 되니, 차라리 건드리지 않는 게 낫지 않나 싶은 불안감이 맨시티 수비진의 발목을 잡아챘을 것이다.
그 망설임과 달리 우리 선수들의 움직임은 단호했고, 지난 한 달간 연습한 대로, 마치 벌떼같이 맨시티의 골대를 향해 쇄도했다.
공에 머리를 가져다 댄 선수는 요니였다.
요니는 축구 선수치고 단신이기에, 헤더 자체만 놓고 보면 썩 위력적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베넷의 스로인에는 던진 순간부터 충분한 위력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요니의 헤더는 스로인의 궤적을 슬쩍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잠시 후 맨시티의 골네트가 세차게 흔들렸다.
[고오오올! 선덜랜드가 선제골을 뽑아냅니다. 득점, 선덜랜드의 요나스 뮐러!]
평소였다면 곧바로 익스클루시브 박스 앞으로 달려왔을 요니지만, 오늘의 움직임은 조금 달랐다.
그는 경기에 따라온 우리 팀 스태프들이 모여 앉은 스탠드를 향해 포효하며 달렸고, 앞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상의를 벗어 던졌다.
잠시 후, 미리 맞춰 입은 언더셔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이 키운 푸른 잔디 위에서, 영원히]
웸블리의 대형 스크린이 요니와 선덜랜드 스태프의 모습을 번갈아 비췄다.
미리 알고 있었기에, 순수하게 득점의 기쁨으로 요니를 맞이하는 우리 스태프 사이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눈가를 훔치는 중이었다.
샘 아저씨의 주름투성이의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고, 옆에서 리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할아버지를 토닥였다.
정말로, 동화 같은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