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동화 같은 시작 (4)
한편, 웸블리의 VIP석에서는 이번에 초청받은 선덜랜드 레전드들이 경기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뭐 하세요?
“아니, 눈이 침침해졌나 싶어서.”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누르는 나이얼의 곁에서, 토마스 쇠렌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단장님도 이제 나이가 드셔서 그래, 나이가. 늙어서 눈물만 많아지는 거지.”
“그러는 자네도 눈이 아주 시뻘건데.”
“저도 늙어서 그렇겠죠.”
전직 골키퍼 토마스는, 목소리까지는 비교적 잘 통제했지만, 표정까지 온전히 관리하지는 못했다.
[당신이 키운 푸른 잔디 위에서, 영원히]
웸블리의 대형 스크린에 떠오른 요니의 언더셔츠는 샘 노인뿐 아니라, 선덜랜드 레전드 또한 눈물짓게 만든 것이다.
벌써 20년도 넘은 과거, 선덜랜드에서 맹활약했던 그들은 당연하게도 샘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틈만 나면 너 같은 놈이 밟기엔 우리 잔디가 아깝다고 하셨죠. 다음 시즌 35골을 넣은 뒤로는 인정해 주셨지만.”
과거, 선덜랜드 선수 중 한 시즌 최다 골 기록을 세웠던 레전드 필립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옆에서 토마스가 눈물을 닦은 다음 명랑하게 대꾸했다.
“나는 볼 때마다 종종 카트에서 음료수 같은 거 꺼내 주고 그러셨는데.”
“그야 토마스 너는 이적할 때부터 기대치가 높았잖아. 나는 아니었고··· 아저씨 진짜 많이 늙으셨다.”
“그렇겠죠, 손녀가 벌써 저만큼 컸으니··· 단장님, 샘 아저씨가 잔디 깎을 때 수시로 들락거리던 꼬맹이 기억하죠? 그 꼬맹이가 지금 선덜랜드 잔디 관리인 해요.”
“아, 기억나. 엄청 부러웠지. 우리 샐리는 내가 축구 보러 오라면 질색하고 그랬는데.”
“아, 그거 순 거짓말입니다. 실은 경기 날마다 왔어요. 단장님한테만 비밀로 했을 거고요.”
“그랬었나.”
나이얼은 쓴웃음을 지으며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벤치에 앉은 샐리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릴 때의 비밀이 자기 아버지에게 전부 들켰다는 사실도 모른 채, 샐리는 특유의 새침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단장님은 종종 축구 보고 그러셨겠네요. 따님이 이제 선덜랜드에서 일하니까요.”
“그렇지도 않아. 얼마 전까지는 축구를···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순간 침묵이 흘렀다. 사실 이 자리에 모인 레전드들 대부분이 마찬가지 이유로 축구를 보지 않던 중이었기에.
팀의 레전드였던 그들로서는, 몸담았던 팀의 처참한 몰락을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그들이 쌓았던 커리어까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어두워지는 분위기를 감지한 토마스가 다시 분위기를 명랑하게 바꾸려 시도했다.
“그래도 앞으론 축구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요즘 분위기 엄청 좋잖아요.”
나이얼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 새 구단주 덕분이지.”
응원하는 팀에 갑자기 갑부 구단주가 나타나는 것, 축구 팬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만한 상상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그 구단주가 구단 유소년 출신이라면?
솔직히 지금도 무슨 몰래카메라 같은 게 아닌가 약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혹은 꿈이거나.
“고마운 일이야. 세상에 축구단을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뭐, 구단주 덕분에 재정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죠. 그러니 우리 팀은 앞으로 강해질 겁니다. 사실 우리가 뛰던 시절에도 축구판이 재정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잖아요?”
“하긴, 토마스 자네는 팀의 재정난을 해결하려고 스스로 이적을 선택했지.”
“그리고 단장님은 구단에 돈을 대고 보드진으로 취임했고요.”
선덜랜드를 사랑했던 사내들, 팀에 헌신했던 레전드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축구계가 정말로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시절을 논하려면, 그들이 뛰었던 시대보다도 2, 3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구단주의 적극적인 투자, 튼튼한 재정의 힘이 뒷받침되면 얼마나 강력한 축구단이 생겨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맞은 편 스탠드의 하늘색 유니폼이 손수 보여준 사실이었기에.
몇 년간 계속된 압도적인 투자, 탄탄한 스쿼드, 그리고 선수단 운영의 전권을 넘겨받은 명장의 조합은 수많은 트로피를 맨시티 구단 장식장에 가져다 진열했다.
그래서 레전드들은 선덜랜드 또한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과 동시에, 불안감을 느꼈다.
사이드라인 밖에서, 선덜랜드는 이제 어느 축구단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팀이 되었다.
근본 넘치는 구단주, 압도적인 자금력이 뒷받침된 세련된 경영 수완은 최고 수준의 팬서비스로 이어졌고, 축구단을 넘어 시티 오브 선덜랜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이었다.
하지만 사이드라인 안에서, 선덜랜드는 아직 빅 6에 맞먹는다고 보기엔 부족하다. 하물며 프리미어리그의 정점, 맨시티를 상대하기에는 더더욱.
잠시 후, 그들의 눈앞에서 하늘색 유니폼이 일제히 전진했다.
프리미어리그 디펜딩 챔피언에 어울리는 당당함으로.
* * *
이후, 경기는 처절하게 흘렀다.
선제골을 허용한 맨시티가 변화무쌍한 전술을 앞세워 반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로는 숏 패스 위주로 차근차근 공을 돌리더니, 때로는 수비라인에서 곧바로 우리 포백라인 앞까지 롱 볼을 넘기기도 했다.
그런 맨시티의 다채로운 반격에서, 한 가지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주로 좌우 측면을 노렸다는 점이었다.
“오빠, 우리 아픈 데 찔린 거 맞지?”
희주의 말처럼, 확실히 아픈 데를 찔리긴 했다.
맨시티가 이렇게 나오면, 우리는 풀백을 전진시킬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풀백의 공격 가담 없이 측면 전진은 어렵고, 롱 스로인으로 골대를 노리는 플레이 또한 써먹기 힘들어진다.
세트피스는 패턴과 약속, 연습으로 이루어진다. 오늘의 맨시티는 아직 우리의 롱 스로인을 막아낼 연습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롱 스로인 시도 자체를 막는 방식으로 깔끔하게 대응했다.
“뭐, 애초에 만만할 거라고 생각도 안 했지만.”
저들은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리그, 프리미어리그의 디펜딩 챔피언이다. 지금의 우리보다 좀 더 강한 팀이기도 하다.
맨시티의 맹공에 우리 선수단은 최선을 다해 저항했지만, 점차 슛을 허용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그리고 후반 70분에는, 마침내 동점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선덜랜드 1 - 1 맨시티]
불리한 전황, 마침내 따라잡힌 스코어.
유일한 위안은 우리 선수 중 누구도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 *
동점 골을 허용한 직후에도 선덜랜드 선수들은 흔들림이 없었고, 관중석에서 바라보던 스태프들 또한 작은 탄식도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괜찮아. 아직 시간 많아. 뿌리칠 수 있어!”
에이미의 선언에 이어, 리지 또한 미소로 응답했다.
“할 수 있어요. 우린 토너먼트의 왕, 단판 승부의 강자니까요.”
서로를 격려하는 스태프 사이에서, 오직 샘 노인만이 말이 없었다. 자꾸만 시야가 흐릿해져서, 샘 노인은 눈을 깜빡였다. 주름진 눈가에서 눈물을 짜내기 위해서였다.
‘이젠 충분해.’
혹시 트로피를 따지 못한다고 해도 이 팀을 부끄러워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샘은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울 거야. 이만큼 대단한 팀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지난 30년간, 그는 팀의 영광과 몰락을 전부 지켜봤었다. 비록 선덜랜드의 진짜 전성기는 샘 노인의 시대보다도 훨씬 앞선 과거였지만, 그래도 지난 30년간 선덜랜드는 가끔 대단한 시즌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예를 들면 강팀들을 연달아 잡아내며 결승에 올랐던 13/14시즌 EFL컵처럼.
‘그때도 상대는 맨시티였지. 경기장은 이곳 웸블리였고.’
그 결승전에서 선덜랜드는 맨시티에 역전패했다. 당시 현역 관리인이던 샘은 분함과 아쉬움에 치를 떨었고, 선수들과 함께 복수를 다짐했다.
하지만 복수의 기회는 찾아오지 못했다. 맨시티가 날아오르는 사이, 선덜랜드는 짧은 영광을 끝내고, 오랜 부침과 마침내 찾아온 몰락을 맞이해야 했기에.
‘이제 충분해. 정말로.’
3부 리그에 갇혀 허우적거리던 4년 전만 해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팀이 다시 웸블리에서 맨시티와 맞설 수 있으리라고는.
백투백 강등, 연속 승격 실패··· 정말로 참혹한 비극이었지만, 이어진 이야기는 동화 같았다.
선덜랜드는 백투백 강등을 연속 승격으로 만회했고, 두 시즌 만에 컵 대회 세 개를 차지하며 팀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빅 6이 아니라 빅 7이라 불러야 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올 정도로.
그리고 이제, 그가 30년간 몸담았던 팀은 또다시 웸블리에 섰고, 또다시 맨시티와 트로피를 놓고 격돌하는 중이다.
‘이제 충분해.’
더 바란다면 욕심이라는 걸, 샘 노인은 알고 있었다.
I know I am. I’m sure I am.
그런데도 자꾸만 입이 멋대로 움직인다. 동료들의, 손녀딸의 외침에 호응하는 것처럼.
I’m Sunderland ’til I die.
자꾸만 갈라지려는 늙은 목에 힘을 주었다. 당당하게 맞서는 선수들에게 들리도록.
경기 종료를 앞두고, 마침내 주장 잭이 마르틴에게 천금 같은 패스를 전달한 순간 샘 노인은 마치 10년 전과 똑같이 환호했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비록 마르틴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선덜랜드의 롱 스로인을 경계한 맨시티가 공을 사이드라인 대신 골라인 쪽으로 걷어낼 때는 통쾌함마저 느꼈다.
그래서 샘은 목 놓아 외쳤다. 코너킥을 준비하는 선수들에게.
“올라가!”
시계는 어느새 93분을 가리키는 중이었다.
커뮤니티 실드는 연장전을 하지 않는다. 아직 승부차기가 남아 있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승부차기는 경기 종료 이후의 이벤트다. 따라서 선덜랜드의 이번 코너킥이 아마도 오늘 경기의 마지막 플레이가 될 가능성이 컸다.
동시에 이번 코너킥은, 샘 노인이 선덜랜드 스태프 자격으로 지켜볼 수 있는 마지막 플레이이기도 했다.
“전부 올라가!”
30년간 잔디 관리인으로 근무했던 노인의 외침에, 선덜랜드 스태프들이 하나둘씩 호응하기 시작했다.
* * *
- 올라···
환청이 들린 것 같아서, 하퍼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기장은 뜨거웠다. 어쩌면 오늘 경기의 마지막이 될 세트피스 공격을 앞두고, 웸블리가 한없이 달아오른 것이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올라가!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 사이에, 자꾸만 환청 같은 목소리가 섞인다.
하퍼는 조금 더 귀를 기울였고, 올라가라는 목소리의 출처가 경기장 곳곳에 흩어져 있음을 눈치챘다.
관중석에서, 스태프 쪽 스탠드에서, 혹은 익스클루시브 박스와 벤치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하퍼가 공격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하퍼는 시계를 흘끗 확인했다.
경기는 이제 93분을 갓 넘긴 상태였고, 로스타임이 3분이라는 특성상 아마 이번 선덜랜드의 코너킥은 높은 확률로 오늘의 마지막 플레이일 것이다.
유일한 예외는 맨시티가 거짓말처럼 깔끔하게 공을 따내 곧바로 역습을 성공시키는 경우지만, 높은 확률은 아닐 것임을 하퍼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대로 뒤에 머무르면··· 승부차기인가?’
마침 페널티 킥 선방에는 강한 하퍼였다. 설령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발돋움한 맨시티의 에데르송을 상대하더라도, 승부차기에서는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만, 골키퍼가 아무리 잘해도 승부차기 자체의 도박성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퍼는 고개를 들어 목 놓아 외치는 팬들과, 그 옆에 모여 있는 선덜랜드 스태프들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경기를 바라보는 샘 노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하퍼는 확신했다. 처음부터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음을.
이번 커뮤니티 실드 트로피는, 11미터짜리 러시안룰렛에 걸 수 있는 상품이 아니었다. 내일의 은퇴식에 ‘반드시’ 필요하기에.
하퍼는 곧바로 페널티 박스를 빠져나와, 하프라인을 넘어 달렸다. 그런 하퍼를 격려하듯, 목소리가 그의 등을 밀었다.
“올라가! 전부 올라가!”
* * *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웸블리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 우리 팬들의 함성 속에서 마침내 요니가 손을 높이 들어 신호를 보냈고, 우리 선수들이 자신에게 붙은 마크를 떼어내기 위해 일제히 움직였다.
맨시티 역시 수비진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대응했다. 우리의 주요 선수들, 특히 장신인 바스티아노나 이고르, 스티븐, 에디나 톰슨 같은 선수들을 꼼꼼하게 마크했다.
클러치 능력이 뛰어난 잭을 철저히 붙잡은 것은 물론이다.
잠시 후 요니가 코너킥을 처리했다.
센스 좋은 요니치고는 특이하게도, 이번 코너킥의 궤적은 조금 높고, 길었다. 니어포스트에서 기다리던 바스티아노는 물론, 골대 정면 이고르의 머리도 살짝 넘기고 말았다.
옆에서 희주가 안타까운 소리를 낸 순간, 이고르의 뒤에서 선덜랜드의 골키퍼 유니폼이 솟구쳤다.
마치 스트라이커처럼.
나는 어느새 홀린 듯 일어났고, 의자 넘어지는 소리에도 개의치 않았다. 아마 희주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잠시 후 하퍼의 머리가 공을 그대로 강타했고, 요니의 크로스를 골대 쪽으로 바꿔 놓았다.
득점을 알리는 휘슬이 울린 순간, 난간에 매달린 채 나는 포효했다.
[선덜랜드 2 - 1 맨시티]
잠시 후,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 세 번이 이어졌다.
극적인 결승골을 성공한 하퍼는 그대로 광고판을 넘어 스탠드로 돌진했고, 그곳에서 샘 아저씨와 격하게 포옹했다.
우리 선덜랜드 선수들이 하나둘씩 뒤를 따랐고, 잠시 후 우리 스태프들 쪽 스탠드는 환호와 눈물, 서로 얼싸안는 감격으로 어우러졌다.
맨시티가 아직 우리보다 강하다는 걸 안다. 열 번 싸우면, 아마 예닐곱 번쯤은 우리가 질 거라는 것도 안다.
세상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안다. 헌신의 대가가 무조건 존중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노력이 반드시 보답받지도 않는다. 은퇴를 앞둔 스태프를 위해 싸운다는 명분이, 승리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런 것들은 전부 동화 속에서나 있는 이야기라는 걸, 나는 안다.
그래도 세상에는 가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날 때가 있다. 오늘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모습처럼.
“고맙다.”
그렇게 우리 선덜랜드는 팀의 전설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커뮤니티 실드 우승컵을 차지했다.
은퇴를 앞둔 샘 아저씨에게 줄 선물이자, 새 시즌의 출발에 어울리는 최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