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동화 같은 시작 (5)
[오늘의 KOTM은 선덜랜드의 수문장, 하퍼입니다.]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기자들 앞에 선 하퍼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평소보다 얼굴이 살짝 상기된 채였다. 결승골의 흥분이나 승리의 기쁨 같은 감정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퍼 선수는 뛰어난 선방으로 팀을 여러 차례 위기에서 구했고, 마침내 결승골까지 꽂아 넣으며 오늘의 최우수 선수, 킹 오브 더 매치로 선정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소감 한 말씀 먼저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기자들의 질문에, 하퍼는 몇 번의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투적인 대답처럼 들리겠지만, 우선 팀의 승리가 가장 기쁩니다. 제가 KOTM으로 선정된 것보다 훨씬요.”
그렇게 운을 뗀 하퍼는, 다소 느릿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골키퍼가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는 의미는, 그만큼 오늘 경기가 힘들었다는 뜻입니다. 프리미어리그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강적을 맞아, 열심히 해준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모범적이다 못해 다소 심심한 답변에 기자들의 반응이 둘로 갈렸다. 덕분에 목걸이 태그를 확인하지 않아도 소속을 알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기자들은 비교적 점잖고 포멀한 기사를 쓰는 쪽이고, 아쉬워하는 부류는 가십 위주의 기사를 싣는 쪽이겠지.
아, 가십의 끝판왕인 ‘그 언론’은 오늘 못 왔다. 취재거절 먹였거든.
얼마 전까지는 취재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찾아왔다가 강제로 쫓겨나는 식이었지만, 유에파 사건 이후에는 우리의 통제를 잘 따르는 중이다.
그사이, 하퍼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하지만, 혹시 오늘의 ‘킹’으로 불려야 할 사람을 딱 한 명만 꼽으라고 한다면···.”
하퍼는 미소와 함께 천천히 가슴팍에 손을 올렸는데, 물론 자기 자신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유니폼 상의 대신 티셔츠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30년간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기자들이 곧바로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요니 선수도 득점 직후 탈의 세레머니를 했었고, 하퍼 선수는 종료와 동시에 스탠드로 달려갔죠?]
“네, 이번에 선덜랜드의 잔디 관리 책임자인 샘 윌리엄슨 씨가 정년을 맞기 때문입니다.”
[잔디 관리 책임자요?]
기자들의 혼란이 느껴졌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선수들이 스태프까지 챙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네, 우리를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분들이죠. 선덜랜드의 가족이자, 같은 팀이고요. 사실 이번에 무척 어려운 상대를 맞아 잘 싸울 수 있었던 건, 선수단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퍼는 단호한 표정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간의 노고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요.”
* * *
[한편 선덜랜드 구단주 희성 ‘썬’ 리는, 30년간 팀에 머문 스태프의 헌신은 마땅히 보답받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와 선덜랜드 진짜 근본이네. 하긴, 구단주가 유스 출신인 것부터가 근본 쩔긴 하지.
ㄴ 보니까 저 영감님도 근본임. 30년간 쉰 적도 없다던데?
ㄴ ㄹㅇ? 무슨 초인임?
ㄴ 딱 두 번 쉰 적이 있긴 함. 아들 결혼식하고, 아들 부부 장례식.
ㄴ 와 진짜 근본··· 오진다.
- 저 영감님 중간에 해고당한 적 있다던데?
ㄴ 그거 이전 구단주 짓임. 참고로 썬이 구단 인수하고 제일 먼저 한 업무가 이전 구단주가 쫓아낸 스태프들 다시 데려오는 거였음.
“진짜임. 내가 같이 일해 봐서 아는데.”
스마트폰을 전투적으로 두드리는 희주를 향해 나는 한숨을 쉬었다.
“구단 관계자 티 내지 말랬지.”
“하지만 구단에 관한 오해를 바로잡는 것도 관계자의 중요한 일 아닐까요 갑부 구단주님?”
“관계자의 중요한 일은 따로 있고요. 동생님아.”
“중요한 일? 월급 도둑질?”
“뭐, 그것도 나름 중요하긴 하지만··· 보통 그 소리는 고용주 앞에선 안 하지 않냐?”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벽에 걸린 달력을 손으로 탕탕 두들겼고, 희주는 시무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오늘은 커뮤니티 실드 다음 날, 다시 말해 샘 아저씨의 은퇴식이 있는 날이다. 구단주인 내가 직접 주관하고 구단 직원과 선수는 물론, 팀 레전드들까지 불러 모은 행사다.
은퇴식 시작이 이제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온 채였으니, 구단주 비서로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정상이다.
희주가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의자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신문 기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제 우리는 안다. 축구에서 낭만은 이제 사라졌고, 자본의 논리만 남았다는 걸. 하지만 세상에는 아직도 낭만을 따르는 팀이 존재한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는, 30년간 딱 두 번의 휴가를 쓴 노인이 있다. 그리고 이제 팀은 그를 최고의 예우로 떠나보내려 한다.]
[축구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그라운드로 칭찬받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잔디를 지켜낸 장본인, 샘 윌리엄슨이 그 주인공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갓 승격한 팀이 FA컵을 차지하는 이야기가 동화 같다고. 혹은, 디펜딩 챔피언 맨시티를 극적인 라스트 미닛 골로 잡아낸 게 동화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우리 생각은 다르다. 진짜 동화는 평생을 바친 헌신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헌신이 마땅한 보답을 받게 하려고 싸운 사내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시리도록 푸른 잔디 위에, 낭만은 아직 존재했었다. 그리고 이들의 동화 같은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 리타 @ 선덜랜드 데일리]
* * *
축구 펍, [죽어도 맥켐즈] 에서는 브라더스 셋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온통 스크린에 쏠려 있었다. 풋볼 스퀘어에서 공급받는 영상, 커뮤니티 실드 결승전 하이라이트였다.
[마지막 플레이가 될 것 같습니다. 코너플래그의 요니, 올립니다. 하퍼··· 들어갔습니다! 하퍼! 하퍼가 결승골을 꽂아 넣었습니다!]
마치 절규하듯 외치는 캐스터의 목소리가 펍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브렌든은 속으로 생각했다. 격한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캐스터는 높은 확률로 속옷을 갈아입어야 했을 거라고.
핫도그 사내가 흐뭇하게 웃었다.
“인생 절반 손해 볼 뻔했어. 저 경기 직관 못 했으면 말야.”
브렌든은 재빨리 핫도그 사내의 옆구리에 팔꿈치를 찔러 넣었다. 이번 커뮤니티 실드에, 맥주집 사장은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맥주집 사장의 부인은 결승전에는 웸블리에 보내준다는 원칙에 암묵적 동의를 표했지만, 그래도 시즌 오픈을 앞두고 사장이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곧 다가올 리그 개막전은 축구 펍의 대목 중 대목이기 때문이다.
핫도그 사내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맥주집 사장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괜찮아. 대신 인생의 반쪽을 얻었거든.”
브렌든은 친구의 대응을 높이 평가했다. 대답 직전 주방 쪽을 한번 흘끗거린 것만 빼면 완벽한 대응이었거니와, 사실 시선처리는 주방에서는 보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메모했다가, 나중에 마일즈에게도 알려줘야겠군.’
그렇게 하이라이트가 끝나고, 잠시 후 영상이 바뀌었다.
화면은 리지의 모습을 비췄다. 원래부터 홈 팬들에게 미녀 잔디관리인으로 알려졌던 그녀는, 얼마 전 선덜랜드 챌린지를 계기로 유명세를 탔다.
브렌든 또한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잠시 후 화면 속의 리지는 마치 영상을 역재생하는 것처럼 뒷걸음질 쳤고, 그녀가 다루던 잔디 카트가 후진했다. 경기장의 시계 또한 거꾸로 돌았고, 광고판의 내용도 조금씩 바뀌었다.
그렇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조금씩 과거의 풍경으로 바뀌어 갔고, 영상 속의 잔디 관리인 또한 미모의 젊은 여성에서 노인 남성으로 변했다.
핫도그 사내가 그립다는 듯 탄식했다.
“샘 아저씨구나.”
“아저씨라긴 너무 연세가 있어 보이는데?”
선덜랜드 팬질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브렌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영상 속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브라더스 둘이 웃었다.
“보면 알아.”
브렌든의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역재생되는 영상 속에서, 늙은 노인의 모습 또한 장년, 그리고 중년으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90년대의 영상까지 박박 긁어모은 선덜랜드 영상팀의 집념 속에서, 마침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처음 지어질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샘 윌리엄슨 또한 ‘샘 아저씨’라 불리던 나이를 되찾았다.
잠시 후, 화면에 자막이 떠올랐다.
- 1997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완공 -
[기억하시나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처음 열린 날을. 그날, 당신이 키운 잔디 위에서 우리 선수들은 아약스를 맞아 싸웠답니다.]
어느새 화면은 클럽 박물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타임라인 패널 앞에서, 팀 유니폼을 입은 에이미가 선덜랜드 CS팀 특유의 친절한 미소와 함께 안내를 시작했다.
[잔디 위에서, 우리는 때로는 아팠고, 때로는 행복했죠. 우릴 중위권이라 비웃던 팀들을 모조리 꺾어버리고, EFL컵 결승까지 오른 적도 있었습니다.]
팀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을 천천히 걸으며, 에이미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지난 30년간 선덜랜드가 겪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비록 팀을 응원한 역사가 짧은 브렌든은 그녀의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언급하는 사건들이 선덜랜드라는 팀에 무척 중요한 순간이었음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클럽 박물관을 걷던 그녀가 진열대 앞에 멈춰섰다.
리그 원 우승, 챔피언십 우승, EFL컵, FA컵, 유로파 컨퍼런스 트로피가 차례로 놓인 진열대에는, 딱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린이 팬들이 크레파스로 그린, 커뮤니티 실드 트로피의 손그림을 바라보던 에이미가 조금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과 함께한 마지막 경기에서, 트로피를 가져올 수 있어 기뻤습니다.]
에이미의 멘트를 마지막으로 화면이 멀어졌고, 빈 진열대 앞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핫도그 사내가 무릎을 쳤다.
“이거 생방송이었어!?”
그러자 맥주집 사내가 곧바로 자리를 박찼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브렌든을 내버려 둔 채, 핫도그 사내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안 늦었을 거야. 잠깐 나갔다 올게!”
“결승은 놓쳐도 괜찮아. 언젠가 또 갈 테니까. 하지만, 은퇴식은 한 번뿐이야··· 이거 놓치면 진짜로 인생 절반 손해본다고.”
* * *
- FA 커뮤니티 실드 -
크레파스로 그린 아이들의 손그림, 우리가 트로피를 진열하는 자리다. 우리는 기어이 이 자리에, 커뮤니티 실드 트로피를 가져왔다.
하지만, 오늘 트로피를 넣을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조심스럽게 옆으로 물러났다.
잠시 후 샘 아저씨가 진열대 앞에 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트로피를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트로피를 그림 앞자리에 올렸다.
일제히 울린 스태프들의 박수 소리에, 한 박자 늦게 다른 소리가 섞였다. 환호, 휘파람, 함성 같은 것들이.
밖에서 들려온 그 소리에 샘 아저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옆에서 리지가 곧바로 속삭였다.
“할아버지, 풋볼 스퀘어에 생중계되는 중이라 그래요.”
평소 늘 명랑하고 씩씩한 리지였지만, 오늘만은 평소와 달리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슬쩍 눈짓하자 희주가 재빨리 다가가 손수건 두 장을 건넸고, 클럽 박물관 밖에서 들리던 팬들의 박수가 더욱 커졌다.
잠시 후, 희주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은 할아버지와 손녀는, 에이미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풋볼 스퀘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자리에 모인 선덜랜드 가족 여러분, 팬 여러분··· 오늘은 저희 할아버지의 은퇴식에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이 팀을 위해 일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이제 팀을 떠나, 한 사람의 팬으로서 선덜랜드를 계속 응원하려 합니다.”
그 말에 호응하듯, 풋볼 스퀘어에 모여든 팬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가장 상징적인 구호를, 매치데이와 똑같은 열기로.
Sunderland 'til I die.
경기가 있는 날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울리던 함성.
그것은, 일평생 선덜랜드인이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선덜랜드인으로 남을 노인을 위한 최고의 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