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전설을 쓰기 위해 (2)
[선덜랜드 4 - 1 왓퍼드]
수잔이 창백한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 네 골이네? 그러고 보니 우리, 프리미어리그에서 네 골 넣은 적 아직 없었죠? 있었던가?”
수잔은 아마 정확한 답변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평소였다면 마일즈 역시 선덜랜드의 최근 경기 기록쯤은 줄줄 읊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빠가 된다는 깜짝 뉴스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러면 집에서 쉬지 그랬어.”
“우리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요. 그리고 이번 시즌은 일반석이 아니라 익스클루시브 박스니까 괜찮을 줄 알았죠.”
수잔의 대답에 마일즈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수잔 역시 더 이야기하지는 않았기에, 두 사람이 머무는 익스클루시브 박스에는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존재하는 소리는, 스타디움 라이트의 함성뿐이었다.
I know I am. I’m sure I am.
I’m Sunderland ’til I die.
평소였으면 목 놓아 따라 불렀을 구호에, 마일즈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수잔의 배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이 녀석은 평생 자기가 누군지 모를 일은 없겠군.”
“조기교육이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아들인지 딸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틀림없이 모태축덕이 될 거라며 수잔과 마일즈는 웃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선덜랜드였던 아이니까.
마일즈는 살짝 눈을 감았다.
‘축구 팬으로서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겠지.’
아무리 축구 종주국 영국이라지만, 그래도 축구 팬들은 역시 남자가 훨씬 많다. 배우자와 함께 축구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하며, 또 감사할 일임을 마일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심지어, 언젠가 태어날 아이와 함께 같은 팀을 응원할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수잔을 업고 다녀도 모자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임산부에게 해로울 수 있으니 실제로 업지는 않겠지만.
어느새 소문이 났는지, 마일즈의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대선배님!]
얼핏 보니 지난 FA컵에서 알게 된 첼시 팬, 그리고 토트넘 팬 소년들이었다. 마일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 순간,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런데 대선배님··· 그,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마일즈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불길한 예감은 사실로 밝혀졌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아이를 갖게 되셨다고··· 진짜입니까?]
정확히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온 다음,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지만, 누군가 고의로 애매하게 전달했을 것임이 뻔했다. 물론 마일즈는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수잔이 보지 못하게 폰을 반대쪽 손으로 옮기며, 마일즈는 이를 갈았다.
“브렌든 이 자식을 그냥.”
그사이, 피치 위에서는 경기가 막 끝난 참이었다. 시원하게 승리한 선덜랜드 선수들이 원정팀 왓포드 선수들과 악수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드 부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잔은 팀의 경기력에 만족했을 것이고, 마일즈는 경기가 끝났음에 만족했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따라서 브렌든을 갈아 마실 수 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아직도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적응하지 못했기에, 마일즈의 대답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네.”
잠시 후 CS팀의 에이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에이미는 마일즈와 수잔을 이어준 장본인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정작 마일즈는 그냥 친절한 선덜랜드 직원으로만 알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수잔 우드 고객님. 안색이 좋지 못하신데, 편찮으시면 의료진을 불러 드릴까요?”
수잔이 미소를 지었다.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는 의료 서비스도 제공되는 건가요? 굉장하네요.”
“아뇨, 긴급 의료 서비스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찾으신 모든 팬들에게 적용됩니다.”
“괜찮아요. 긴급 의료가 필요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그냥 입덧인데···.”
“정말 축하드립니다!”
에이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었다. 원래부터 친절함으로 이름 높은 에이미였지만, 지금의 미소는 영업용이 아니라 진짜 미소였다.
“그러시면, 지금은 움직이기 조금 곤란하시겠네요. 통로가 혼잡하니까요.”
“그렇겠죠. 그래서 여기서 조금 쉬었다 움직이려고 하는데요.”
곧바로 대답한 수잔과 달리, 마일즈는 에이미의 이야기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눈을 깜빡이는 마일즈를 향해, 에이미가 상냥하게 덧붙였다.
“네,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혼잡한 환경은 아무래도 그, 산모와 태아에게 여러모로 좋지 못하니까요.”
마일즈는 곧바로 이해했다. 사실 브렌든을 갈아 마시는 것은 천천히 해도 그만이다. 어차피 둘은 옆집이니까.
한편, 무전기를 들고 바쁘게 이야기하던 에이미가 다시 둘에게 다가왔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차량으로 직접 댁까지 모셔다드리고자 합니다.”
부부가 곧바로 서로를 마주 봤다.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나도 차 가지고 왔는데···.”
“맞아요. 그리고 사실 저희는 돈 내고 익스클루시브 박스 쓰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챌린지 이벤트 당첨인데···.”
에이미가 환하게 웃었다.
“상품으로 이용하시는 중이니까, 더 서비스해 드려야죠. 챌린지 이벤트에서 입상하실 만큼 선덜랜드를 아껴주시는 팬이신 건데요.”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렇게 마일즈와 수잔 부부는 선덜랜드 시설관리팀의 안내를 받아, VIP 전용 통로와 주차장을 이용해 경기장을 빠져나왔고, 리무진에 탑승한 채 편안하게 집에 돌아왔다.
우드 부부의 차량은 구단 측에서 따로 가져다주었기에 불편함은 없었고, 덕분에 마일즈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브렌든을 ‘갈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마일즈는 자신이 소년 팬들에게 다시 설명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덕분에 전설적인 맥켐즈 서포터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지만, 다행히 이상한 소문이 퍼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애들이 착하긴 하네.’
애초에 ‘마피아 같은 형님을 턱짓으로 다루는’ 전설적인 서포터에 대해 함부로 떠들 만큼 배짱 좋은 소년들은 아주 드물지만, 자신의 평판을 모르는 마일즈는 상황을 온전히 눈치채지는 못했다.
* * *
1라운드 승리에 이어, 우리는 2라운드 웨스트햄 원정에서도 2-1로 기분 좋게 승리하며 초반 기세를 떨쳤다.
“이번 시즌 출발이 굉장히 좋은데? 영입도 별로 안 했는데도.”
희주의 의문에, 나는 짧게 대답했다.
“시너지.”
영입은 비록 두 명에 그쳤지만, 둘 다 팀에 꼭 필요한 조각이었거든.
우선 이고르는 우리의 주전 센터백 에디에게 부족했던 투쟁심과 높이, 파워를 완벽히 채워 주는 선수였다.
한편 에디는 빠른 발과 판단력, 그리고 수비수 수준을 넘어선 발재간으로 이고르의 결점을 메우고 있다. 덕분에 우리 포백라인은 이제 리그에서도 한 손에 꼽힐 수준의 단단함을 확보했다.
게다가 우리 선수단이 대체로 젊다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우리 베스트 일레븐은 대부분 아직 전성기를 맞지 않은, 혹은 곧 전성기에 접어들 선수들로 이루어졌다. 톰슨과 하퍼를 제외하면, 앞으로 3~4년간은 계속 기량이 오를 선수들이다.
굳이 희주에게는 거기까지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수비가 좋아졌다는 건 알겠어. 이고르를 데려왔으니까. 그런데 공격진도 두 경기 연속 멀티 골이잖아?”
“그것도 시너지야.”
나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이번에는 브라이언과 샐리가 끼어들었다.
“이고르의 가세로 수비라인이 안전해졌죠. 에디에게 쏠리는 부담도 줄었고요. 덕분에 에디가 후방 빌드업하기도 좋아졌어요.”
“저 축알못 이야기를 레이디께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포백보호를 위해 톰슨을 후방에 고정시킬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톰슨을 평소보다 높은 위치로 전진시킬 수 있죠.”
“아니면 톰슨에게 휴식을 줄 수도 있고요.”
샐리와 브라이언의 친절하고 자상한 설명에도 희주는 곧바로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게 그렇게 큰 차이인가요?”
“큰 차이죠. 쓸 수 있는 패가 늘어나니까요.”
4-2-3-1을 쓸 수도 있고, 요니나 잭을 측면으로 돌릴 수도 있게 된다. 상황에 따라 해리슨이나 프랭크를 넣어서 변화를 줄 수도 있으니, 전술가 두 사람에게는 참으로 신나는 상황일 것이다.
비록 3라운드 토트넘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했고, 4라운드 리즈 원정에서도 무승부였지만, 그래도 첫 한 달간 패배가 없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그리고 5라운드.
우리는 울브스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 * *
“올 시즌 선덜랜드 일낼 것 같은데.”
“일은 마일즈가 냈지.”
핫도그 사내의 중얼거림에, 브렌든은 입맛을 다셨다. 농담 한 번 잘못했다가 단단히 곤욕을 치른 탓이다. 덕분에 한동안 팬더 비슷한 상태로 다녀야 했었거니와, 기분 탓인지 아직도 눈 주위가 시퍼런 것 같다.
핫도그 사내가 담담하게 응수했다.
“그건 자네가 잘못했어.”
심지어 맥주집 사장의 부인조차 사연을 듣고는, 브렌든의 등짝에 스매싱을 날렸을 정도다.
“나도 알아. 내 말은, 마일즈가 드디어 애 아빠가 된다는 거였는데···.”
우물거리는 브렌든의 말을, 맥주집 사장이 끊었다.
“그래서, 마일즈는?”
“본인은 보러 오고 싶었던 모양인데, 아무래도 경기장이 임산부에게 좋을 리 없잖아? 사람 북적거리고, 기본적으로 시끄러운 곳이니까.”
잘은 모르지만 아무튼 해로울 거라고 대답하며 브렌든은 어깨를 으쓱했고, 브라더스 역시 동의했다.
“그러면 오늘 경기는 오랜만에 우리 셋이 보게 되겠군.”
“맞아. 기왕이면 마일즈가 배 아프도록, 명경기가 되면 좋겠는데.”
아직도 살짝 앙금이 남은 듯한 브렌든을 흘끗 바라본 맥주집 사장이, 천천히 명단을 확인했다.
“오늘 선발이··· 어디 보자.”
잠시 후, 맥주집 사장의 경악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울렸다.
“해리슨에··· 프랭크라고? 울브스 상대로?”
* * *
‘내가 생각해도 좀 미친 짓 같기는 해.’
아마 세상에서는 자신을 미쳤다고 평가할 거라고, 브라이언은 생각했다. 실제로 옆에서 전해지는 톰슨의 시선이 따가웠다.
“울브스는 가뜩이나 중원이 강한 팀인데 말이지··· 이럴 때 못 써먹는 미드필더를 어디다 써먹나. 나 같으면 방출할 거야··· 아, 혹시 나 재계약 안 하려고 이러나?”
일부러 낮게 구시렁대기 시작한 톰슨을 외면하며, 브라이언은 경기장에 시선을 맞추려 노력했다.
이제 다음 주로 다가온 유로파리그 본선에 대비한 고육지책이었다. 톰슨을 빼고, 마르틴과 베넷까지 뺀 것은.
‘모처럼 유로파 톱시드니까 말이지.’
프리미어리그에서 4위 안에 들어가는 것과 유로파리그에서 우승하는 것, 챔스 진출권을 가져오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이었다. 그런데 둘 중 어느 게 더 쉬운 목표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결국, 선덜랜드의 코칭스태프는 무척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당분간 리그와 유로파를 둘 다 노리고, 이 외의 대회는 전부 후순위로 미룬다.]
그런 이유에서 내린 결정이었는데, 정작 톰슨에게는 살짝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브라이언의 옆자리에 앉은 톰슨이, 시선을 경기장에 고정한 채 늦게 속삭였다.
“마음은 알겠는데, 이건 둘 다 노리는 게 아니잖아?”
“둘 다 노리는 거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 건데?”
“과대망상, 혹은 착오겠지.”
브라이언은 대답 대신 경기장을 응시했다. 긴장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상대와 대치하는 선덜랜드의 영건, 해리슨과 프랭크에게 시선을 맞췄다.
톰슨도 선수로서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아직 폼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체력과 활동량이 필요한 포지션 특성상 톰슨은 선덜랜드의 1옵션 미드필더라고 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여전히 팀에서 제일가는 패서이자 1순위 페널티 키커지만, 이제 종합적으로는 잭과 요니가 톰슨보다 좀 더 낫다는 게 브라이언의 판단이었다. 아마 톰슨 자신도 동의할 명제다.
물론, 톰슨은 아직 어린 해리슨보다는 훨씬 나은 선수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두 사람의 기량이 교차하게 되겠지만, 아직 교차점은 오지 않았다.
울브스의 핵심, 네베스에게 휘둘리는 해리슨을 응시하며, 브라이언은 혼잣말처럼, 차분하게 말했다.
“맞아. 누군가는 과대망상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어.”
“이봐.”
“유로파, 혹은 리그 4위. 둘 중 하나라도 확실히 가져오는 게 팀의 목표지··· 그런데 말야.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거든? 확실하게 챔스에 나가기 위해서는 둘 다 노리는 게 좋겠다고.”
“맞아. 그래서 당분간 둘 다 노리기로 한 거잖아?”
“톰슨, 나는··· 당분간이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톰슨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에 만족하면서, 브라이언은 나직하게 덧붙였다.
“울브스는 지난 시즌 우리와 중위권 경쟁하던 팀이지··· 알아. 해리슨과 프랭크로는 힘들다는 걸··· 그런데, 중위권 팀 상대로 베스트 일레븐을 내야 한다면, 어차피 이 리그에서 4위를 노릴 수 없어.”
톰슨이 침묵하는 사이, 브라이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리그 4위, 유로파리그 우승, 둘 다 힘들고 어려운 목표라는 걸 알아. 그래서 감독님도, 브로도 둘 중 하나만 챙기자고 했지. 그런데 나는, 둘 다 갖고 싶어졌어. 과대망상인가?”
“세상에선, 과대망상이라고 부르겠지··· 실패로 끝난다면.”
“성공한다면?”
“정말로 몰라서 묻냐?”
마침내 톰슨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톰슨을 흘끗 바라본 브라이언 또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입으로 담기엔 조심스러운 이야기다. 어느 정도 결과를 낸 다음에 말해도 늦지는 않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대답 대신 입가에 손을 대고, 목에 힘을 주었다.
“고개 들어! 발 멈추지 마!”
그런 브라이언의 외침 위에,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이 더해졌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이 경기장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뜨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