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전설을 쓰기 위해 (3)
전반, 선덜랜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원인은 단순했다. 신예 해리슨이 울브스의 네베스에게 완벽하게 농락당했기 때문이었다.
브렌든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되는 매치업이긴 한 거야?”
평소엔 해리슨이 출전했다는 이유만으로 네베스에게 이렇게까지 휘둘리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선덜랜드의 중원엔 노련한 톰슨과 에너지 넘치는 잭, 그리고 공간의 마술사 요니가 있다.
그런데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코앞으로 다가온 유로파리그 일정 때문에 톰슨은 벤치에 앉았으며, 그에 더해 선덜랜드가 자랑하던 왼쪽 핫라인도 휴식을 취했다.
레프트백 베넷 대신 프랭크가 출전했고, 마르틴의 빈자리는 요니가 메웠다. 그리고 잭 또한 평소보다 측면지향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덕분에 중앙에서 네베스를 상대하는 막중한 업무는 오롯이 해리슨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축구를 오래 본 브렌든의 견해로는, 이건 안 되는 매치업이었다.
‘아직 스물도 안 된 선수가, 포르투갈 국대 미드필더를 어떻게 상대한다고.’
이럴 거면 하다못해 톰슨을 냈어야 했다고, 브렌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잭이나 요니 중 한 명은 중원에 남겼어야 했다고 믿었다.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JJ 듀오라면, 네베스에게 이렇게까지 휘둘리진 않았을 게 분명했기에.
“설마 또 의적모드인가? 유쾌한 선덜랜드 발동은 아니겠지?”
브렌든이 탄식하는 사이, 마침내 네베스는 해리슨을 완벽하게 따돌렸고, 선덜랜드 수비라인 뒤쪽에 그림 같은 패스를 떨어뜨렸다.
오프사이드 깃발은 올라오지 않았다. 1군 경기에 처음 출전한 프랭크의 위치가 다소 애매했기 때문이다.
울브스 원정 팬들에게는 마법 같았을, 그리고 선덜랜드 팬에게는 저주와도 같은 어시스트였다.
침투하는 울브스의 노란 유니폼, 필사적으로 몸을 날리는 하퍼, 그럼에도 흔들리는 선덜랜드의 골네트에 브렌든은 침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선덜랜드 0 - 1 울브스]
“빌어먹을!”
이를 가는 브렌든은, 문득 브라더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음을 눈치챘다. 맥주집 사장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핫도그 사내는 그의 눈가를 가리켰다.
“브렌든, 자네는 도대체···.”
브렌든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안 그래도 얼마 전, 괜히 개드립 치다가 마일즈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던 처지다.
“알았어. 내가 입만 열면 사고 나는 것 같으니, 당분간 조용히 있을게.”
하지만 브렌든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빨리 톰슨이나 마르틴을 내야 할 텐데··· 이대로 두면 또 먹힐 것 같은데.”
그 순간, 네베스의 패스가 또다시 선덜랜드의 포백라인 뒤를 유린했다.
울브스의 슛이 선덜랜드의 골대에 꽂히는 사이, 브라더스의 시선 또한 브렌든에게 싸늘하게 꽂혔다.
[선덜랜드 0 - 2 울브스]
경기장을 찾은 선덜랜드 팬 대부분이 같은 심정이었겠지만, 브렌든에게는 특히 최악의 전반이었다.
* * *
우리 스태프 대부분이 같은 심정이겠지만, 희주에게는 특히 최악의 전반이었던 모양이다.
“아, 여기 익스클루시브 박스 1호실인데요. 소시지 주문 좀요!”
보아하니 스트레스 지수가 아주 한계치에 달한 것 같다. 씹을 게 필요해진 모양이니까.
“오빠는 어째 태연하다? 홈에서 울브스한테 두 골이나 내줘 놓고.”
“뭐, 속이 쓰리긴 하지.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어.”
나는 우리 벤치를 응시했다. 선수들보다 먼저 경기장에 나와서, 굳은 표정으로 피치를 응시하는 브라이언의 모습이 보였다.
사실 브라이언은 오늘 경기를 앞두고, 주전을 빼고 싶다는 내용을 내게 전달한 적이 있다.
[유로파를 앞두고 체력을 보존하겠다는 건 알겠는데, 유로파 조별 첫 경기 상대가 그렇게 빡셌던가?]
[그렇지는 않아, 브로. 솔직히 말하면 시옹보다야 울브스가 몇 배는 어렵지. 그렇지만···.]
잠시 망설이던 브라이언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원정도 아니고, 홈에서 울브스 상대로 주전을 내야 하는 팀이라면 어차피 이 리그에서 챔스권에 올라갈 수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리그에서 챔스권을 차지할 수 없다면 유로파에 올인하는 게 맞고.]
예전의 브라이언은 저런 판단까지는 하지 못했다. 경기 단위로는 훌륭한 전술가였지만, 시즌의 운영까지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오랜 친구의 모습이, 무척 듬직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오빠, 지금 웃음이 나와?”
“내가 웃었어?”
“아주 흐뭇하게. 누가 보면 울브스 구단주로 착각할 정도로!”
만일 정말 웃었다면, 아마도···.
“믿기 때문일 거야.”
우리 선수들을. 원정 지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열기를. 그리고 몇 년이 지나면 틀림없이 축구계 최고의 전술 천재라 불리게 될, 내 오랜 친구를.
후반에도 선수 교체는 없었다.
톰슨은 여전히 벤치에 머물렀고, 마르틴과 베넷도 쉬는 중이었다. 그리고 해리슨은 여전히 네베스의 마크였다.
“사람 안 바꿀 거면, 하다못해 마크를 바꿔야 하는 거 아니야? 잭이나 요니를 붙이면 간단하지 않아?”
도착한 소시지를 물어뜯으며, 희주가 이를 딱딱거렸다.
“마크는 일부러 놔두는 거야.”
해리슨이 아직 네베스를 혼자 제어할 수준이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다만, 이 매치업은 네베스의 마크를 해리슨에게 붙이는 효과가 있다.
우리에겐 점수가 필요하고, 잭과 요니는 자유로워야 한다.
“아니, 그래도 이건 무슨··· 우틀않도 아니고.”
어느새 소시지 한 개를 깔끔하게 소멸시킨 채 발을 구르는 희주를 흘끗 바라보며, 나는 짧게 덧붙였다.
“괜찮아. 디테일은 다 바꿨으니까.”
레프트백 프랭크가 전반보다 높은 위치로 전진했다. 얼핏 보면 쓰리백처럼 보일 정도로.
만회골이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아직 라인 컨트롤이 서툰 프랭크 대신, 에디 - 이고르 - 브루노 셋이서 오프사이드 라인을 형성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러니 설령 해리슨이 네베스를 막지 못하더라도, 전반처럼 일방적으로 뒷공간을 공략당하진 않겠지.
실제로 우리 선수들은 후반 들어 꽤 탄탄한 경기력을 보였고, 경기는 점차 일진일퇴의 공방으로 팽팽하게 흘렀다.
그렇게 지나간 후반 70분, 마침내 해리슨이 공을 잡았다.
“패스! 왼쪽 비었어!”
희주의 외침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나쁘진 않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그러면 요니가 뛰어 들어갈 거야. 그러니까··· 지금!’
생각과 동시에, 공은 해리슨의 발을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공은 요니의 발아래에 도착한 상태였다.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수비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는데도.
완벽한, 진짜로 마법 같은 패스다.
“달려!”
다시 날뛰기 시작한 희주의 외침, 우리 팬들의 함성, 가속이 붙은 채 뛰어 들어가는 요니와 추격하는 울브스의 노란 유니폼들이 푸른 잔디 위에 선을 그었다.
순간, 무릎에 힘이 들어간다고 느꼈다. 그 꿈틀거림과 동시에, 요니는 공을 그대로 뒤꿈치로 흘렸다.
자신의 등 뒤를 따라오던 잭에게로.
“나이스 패스!”
달려온 기세 그대로, 세상에서 추격골을 가장 잘 넣는다는 선덜랜드의 주장이 공을 걷어찼다.
[선덜랜드 1 - 2 울브스]
그렇게 울브스의 골네트가 흔들린 순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 * *
잭이 추격골을 성공시킨 순간 브라이언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지만, 기쁨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직 한 골 뒤지고 있다. 승점을 위해서는 한 골이, 그리고 승리를 위해서는 두 골이 더 필요하다.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부를 라인업이었다. 아무리 홈이라지만, 울브스 상대로 선덜랜드가 주전을 셋이나 뺀 채 경기에 나선다는 것은.
브라이언은 굳이 그 무모함에 도전했다.
‘포치의 말처럼, 하늘에서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항상 달과 함께 꿈꿔야 하는 법이니까.’
그들에게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챔스 결승 무대로 만든 다음, 바로 그 결승전에 진출하겠다는 꿈을 꾸는 구단주가 있다. 그에 비하면, 리그 4위와 유로파 우승을 동시에 노리겠다는 브라이언의 꿈은 차라리 소박할 정도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며 지금이라도 톰슨을 내자는 말을 삼키기 위해 노력했고, 선수를 교체하는 대신 쉼 없이 전술을 바꿨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언제나 변함없이 울리는 홈 팬들의 함성 속에서, 브라이언은 90분간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선덜랜드 선수단 역시 코치의 목소리에 호응하듯 끝까지 발을 멈추지 않았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마침내 휘슬이 세 번 울렸다.
영원할 것만 같던 홈 팬들의 함성이 그치고, 선덜랜드 선수들이 천천히 발을 멈춘 순간.
[선덜랜드 3 - 2 울브스]
브라이언은, 올해 들어 가장 크게 포효를 내질렀다.
* * *
뜨거웠던 경기가 끝난 밤, 로저스는 은퇴한 샘 노인과 나란히 마주 앉았다.
“자네답지 않은 과감한 운영이던데.”
“보러 왔었나? 쓸데없이 부지런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이제 나는 일반 팬이니까··· 사실 심장 건강에 썩 좋은 경기는 아니었어.”
샘 노인의 핀잔에, 로저스는 껄껄 웃었다.
“자네야 이제 충분히 살았으니 가도 상관없겠지만, 리지 양이 상심할 것 같으니 조금 더 버티게.”
로저스의 농담에, 샘 노인 또한 웃음으로 답했다.
“고맙구먼.”
“요즘 우리 잔디 상태가 아주 좋아. 솔직히 말하면 예전보다도 훨씬 나을 정도야. 아마 족쇄가 사라져서 그런 거겠지?”
“그렇겠지. 알면 자네도 족쇄 노릇 그만하고 슬슬 물러날 준비하게.”
호탕하게 웃은 샘 노인의 얼굴에 진지함이 돌아왔다.
“리지의 실력은 예전부터 충분했고, 재능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어.”
“손녀 자랑인가?”
하긴, 자랑할 만한 성과라고 로저스는 생각했다. 아들 내외를 불행한 사고로 잃은 샘 노인은 하나뿐인 혈육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그리고 샘 노인의 손녀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잔디 관리인이 되었고, 솜씨만 보면 자기 할아버지보다도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자기보다 나은 후계자를 키웠다는 것은, 은퇴를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찬사다.
‘나는, 내 제자들을 나보다 낫게 키워낼 수 있을까?’
로저스는 브라이언의 재능을 아주 예전, 유소년 시절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축구 보는 눈이 남다르던 유소년 풀백은 비록 선수로 대성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코칭스태프로서는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로저스는, 자신이 브라이언에게 가르칠 것은 별로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기껏해야 자립하는 방법 정도일 것이다. 그걸 아는데도, 로저스는 쉽게 브라이언을 품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다.
이유가 뭔지도, 로저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한 명의 재능을 망가뜨렸던 적이 있다.
샘 노인이 웃었다.
“아까 우리 잔디가 예전보다 훨씬 좋다고 자네가 그랬잖나? 정말이라면, 아마 내가 사라져서 그럴 게야··· 의지할 구석이 없다는 책임감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법이거든.”
“자네가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리지 양은 뭐라던가?”
“믿고 맡겨 달라고 하더군. 사실 처음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어. 슬퍼하는 것 같기도,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했지.”
“그야, 그만큼 자네가 늙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런 얼굴은 아주 잠시뿐이었어. 내 손녀라서 편드는 게 아니라, 정말 늠름하게 대답하더군. 왜냐면···.”
이어진 샘 노인의 말이, 로저스의 가슴을 푹 하고 파고들었다.
다음 날, 로저스는 출근과 동시에 브라이언을 호출했다.
“이제, 리그 운영은 전부 자네에게 맡기겠네. 선수 선발부터, 훈련까지. 물론 테크니컬 에어리어에는 내가 계속 서겠지만··· 나머지는 자네 몫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나?”
그러자 브라이언의 눈동자는 퍽 슬퍼 보였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네. 맡겨 주십시오.”
로저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귓가에, 샘 노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편드는 게 아니라, 정말 늠름하게 대답하더군. 왜냐면··· 보내는 사람이 마냥 울상 짓고 있으면, 떠날 사람 발길이 떨어지지 않잖나?]
* * *
유로파리그 조별리그 첫 경기, 선덜랜드는 시옹 원정에서 곧바로 1승을 따냈다. 베스트 일레븐을 전부 내보냈기에 경기력은 시원했고, 스코어 또한 화끈했다.
언론의 찬사가 이어졌다.
[선덜랜드, 톱시드의 품격 보여··· 시옹 대파!]
[쾌조의 출발? 선덜랜드, 리그 무패행진 이어가.]
유로파 조별리그에서 보인 압도적인 모습, 그리고 프리미어리그에서 고전하면서도 끝내 패배하지 않는 팀의 모습은 언론을 자극했고, 팬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으며, 선수들과 스태프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쏟아진 찬사에, 언제나처럼 선덜랜드 데일리의 코멘트가 방점을 찍었다.
[어쩌면, 우리는 선덜랜드의 전설적인 시즌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