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기대보다 더 (1)
<축구에는 항상 문제점이 존재한다. 끝이란 없다 - 펩 과르디올라>
제니트 원정 직후, 믹스드 존에 선 로저스 감독을 향해 언론의 질문이 쇄도했다.
[이번 제니트 원정에서의 승리로, 선덜랜드의 조별리그 통과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분석인데요. 감독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흥분한 기자들과 달리, 로저스 감독은 냉정했다.
“유로파는 이제 두 경기를 치렀을 뿐이고, 앞으로 네 경기가 남아 있습니다.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경기만 봐도 그렇습니다.”
슬쩍 주위 기자들을 둘러보며 숨을 고른 로저스 감독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홈팀 제니트의 경기력은 정말 훌륭했고, 승부가 뒤집힐 뻔한 순간도 여럿 있었습니다. 이런 강팀을 이긴 건 정말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아직 2차전이 남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방심은 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자, 어쩌면 선수들에게 들려주려는 엄포였다. 축배를 들기는 아직 이르다는 의미일 것이다.
브라이언과 샐리 또한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이번 경기에서 고쳐야 할 실수들을 뽑아 체크리스트를 만들기까지 했다.
[ ] 바스티아노를 좀 더 높은 위치로 전진 @S
[ ] 잭이 우측면으로 나갈 때 스티븐과의 연계 @B
[ ] 잭을 메짤라 대신 박스 투 박스로 쓰면 해결됨 @S
[ ] 축알못 분석가 교체 @B
나는 살짝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옆에서 희주는 마냥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이면 선수들 대충 뛰고 싶어도 못 뛰겠다.”
“교관님이니까.”
덧붙이자면 우리 드레싱 룸에는 잭과 요니가 있다. 팀의 암흑기를 경험해본 두 사람은 겨우 이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잭은 ‘승리를 축하한다’는 언론의 인터뷰에 대해,
“아직 홈에서 이기지 못했는데 무슨 축하임까?”
라며 일축해 버리기까지 했다. 음, 확실히 모범적인 답변이고 팬들이 좋아할 반응이지만, 기자들이 반길 답변은 아닐 것 같았다.
결국 기자들의 마이크는 나를 겨냥하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선덜랜드는 방심이라는 것을 모르는 팀이군요.]
“그야 방심할 이유가 없죠. 세상에 방심하는 도전자가 어딨습니까?”
리그의 디펜딩 챔피언도 아니고, 유로파에서 우승해본 적도 없다. 심지어 챔스는 아직 밟아보지도 못했다.
이룬 게 있어야 방심을 하지.
물론 팬들의 기쁨과 만족은 잘 알고 있다. 얼마 전까지 하부 리그를 전전하던 선덜랜드에게 있어서, 최근 보여준 성적은 팬들의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는 성과라는 것도 안다.
“선덜랜드는 더 높은 곳에 올라야 할 팀입니다. 조금 더 마음 편히 경기를 지켜보는 날도 언젠가 오겠지만, 그건···.”
* * *
[팀의 목표를 이룬 다음에나 고려할 문제일 겁니다.]
축구 펍 ‘죽어도 맥켐즈’의 스크린에 흘러나오는 이희성 구단주의 인터뷰를 바라보며, 브라더스가 일제히 축배를 들었다.
“그렇지, 올해는 꼭 유로파 들어야지!”
“우승할 팀인데, 겨우 제니트 원정 승리로 만족하면 쓰나.”
“믿고 있었다고!”
기분 좋게 건배하는 세 사람의 귀에, 어디선가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방 쪽이었다.
“못 이길 것 같다더니.”
브라더스는 일제히 눈을 마주치며 찔끔했다. 약간의 눈치게임을 거친 끝에, 결국 맥주집 사장이 총대를 멨다.
“여보, 이게 큰 산을 넘은 느낌이라 그래. 기대했던 것보다 팀이 훨씬 잘해줬잖아. 이대로면 사실상 조별리그 진출은 거의 확정된 셈이거든.”
“맞습니다. 러시아 원정이 지옥인 이유는 거리가 멀고 일정이 빡빡해서 그런 거니까요. 즉, 제니트가 우리 홈에 올 때는 그쪽이 장거리 비행에 시달리게 된다 이거죠.”
처음에는 변명으로 시작했던 브라더스의 목소리에는 점차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러시아가 지옥이었던 것처럼, 제니트에게 선덜랜드 원정도 지옥일 거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유명한 원정 지옥이고.”
“우리가 더 지옥같이 만들 거야.”
“우리 지옥, 빨갛게 빨갛게!”
브라더스의 필사적인 변명과 이어진 개드립에, 주방에서는 마침내 피식거리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고, 맥주집 사장 또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더 붉게!”
“우리 도시, 빨갛게 빨갛게!”
린다와 에이미가 차례로 건배사를 외치자, 선덜랜드 CS팀 전원이 기분 좋은 축배를 들었다.
제니트 원정에서 팀이 기분 좋게 승리한 것도 기대 이상의 성과였지만, CS팀에게는 소소한 경사가 하나 더 있었다. 이번에 실시한 유에파 심사에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최고 등급 경기장으로 인정된 것이다.
[최고 수준 경기를 치르기 완벽한 경기장. 전문적이며 친절한 직원들. 경기장 주변의 환경 또한 완벽함. 유일한 아쉬움은···.]
“유일한 아쉬움은, 유에파의 평가 등급에 카테고리 5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음, 라고 하네요! 다들 고생했어요!”
통보서를 읽는 에이미의 환호에, 팀원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음, 사실 통과 못 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요.”
“그렇긴 하지. 우리는 리모델링 전에 이미 카테고리 4 인증을 받았던 경기장이니까.”
여유만만한 미소를 짓는 린다를 향해, CS팀 신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럼 팀장님. 우리는 왜 다시 심사를 받은 거죠?”
“글쎄, 왜일까?”
린다와 에이미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신입을 키울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덜랜드 CS팀은 세계에서 가장 친절한 서비스를 모토로 삼는 곳이었고, 직급마다 권한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매뉴얼에 없는 임기응변도 허용받는 조직이었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팀원을 키우는 것은 자율성 강한 CS팀에게는 특히 중요한 일이었다.
답변이 바로 나오지 않자, 에이미가 슬쩍 힌트를 던졌다.
“그동안 우리가 열심히 리모델링을 했었지?”
힌트를 들은 팀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알았어요! 정답은 리모델링을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린다와 에이미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곧바로 옆에서 다른 신입이 핀잔을 줬다.
“넌 멍청이냐? 리모델링을 대대적으로 했으니, 혹시 카테고리 4 인증에 어긋나는 부분이 생기진 않았는지 점검하려는 거잖아.”
에이미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저 의견이 맞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덜랜드 CS팀은 바로 저 명분으로 유에파에 재심사를 신청했었다.
다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선덜랜드 스태프라면 누구나 짐작할 일이지만, 최근에 들어온 신입들은 아직 그 정도 눈치나 판단력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모양이네요.”
“그렇겠지. 매일 훈련받는 유소년 선수들도 크려면 한참 걸리잖아.”
“에이, 유소년은 너무 가셨어요, 팀장님.”
“그런가?”
미소 짓는 린다를 바라보며, 에이미가 낮게 웃었다.
“우리 신입들도 나름 프로니까요. 해리슨과 프랭크 정도로 생각해야죠.”
“그러면 즉전력이라는 소리 아니야?”
“그렇게 키우는 게 우리 일 아니겠어요?”
대답하면서, 에이미는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CS팀이라는 보직 특성상 선수보다는 고객들과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수년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일해온 에이미는 훈련장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어린 선수의 전술 센스와 테크닉, 피지컬을 키우는 것은 코칭스태프의 일이지만, 프로로서의 마음가짐은 대부분 베테랑들이 가르치곤 한다.
때로는 한 명이 자상한 멘토 노릇을, 다른 한 명이 군기반장 역할을 할 때도 있다. 일종의 배드캅 굿캅인데, 사회 경험이 부족한 어린 선수들에게는 제법 잘 먹히는 편이었다.
‘쟤들을 해리슨이라고 치면··· 팀장님이 멘토 노릇을 하셔야겠지? 그러면 내가 군기반장 노릇을 해야 하나?’
에이미는 훈련장의 풍경을 떠올리며, 자신이 누구를 따라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크리그가 가장 적당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 * *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넘었던 제니트 원정 이후, 팀의 성적은, 시즌 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굉장했다.
비록 제니트 원정에서 복귀한 직후에는 장거리 이동의 여파로 다들 조금씩 헤매는 느낌을 받았다. 경기에서도 꽤 고전했지만, 그래도 패배하지는 않았다.
철통같은 수비, 그리고 어떻게든 한 골을 뽑아 주는 공격진의 조합 덕분이다.
그렇게 가을에 접어들 무렵, 우리는 어느새 4위까지 치고 올라간 상태였다.
[선덜랜드가 요즘 돌풍이죠. 그래서 말인데, 에디와 이고르에 대한 견해를 정정하겠습니다.]
스크린 안에서 네빌이 살짝 시무룩하게 말하자, 옆에서 캐러거가 그를 놀리듯 히죽거렸다.
[퍼디치를 연상시킨다는 내 말, 이제 동의하나?]
[뭐, 지금 폼을 몇 년 유지하면 제2의 퍼디치라고 못 부를 것도 없겠지.]
퉁명스러운 네빌의 대답에, 희주가 발을 굴렀다.
“뭐야! 너무 짜잖아.”
“나름 칭찬이야. 딱 지금의 폼만 따지면 퍼디치급이라는 이야기니까.”
“그럼 솔직하게 말해주면 얼마나 좋아서.”
츤데레 수요를 개척하려고 하는 거 아닐까? 저들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츤데레고 뭐고 그냥 선수 때처럼 행동하는 게 제일 인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에디와 이고르에 대한 평가는 미루기로 하고, 사실 선덜랜드가 요즘 어떻게든 꾸역승을 펼치는 건 역시 공격진의 활약 덕분 아니겠어?]
[하긴, 선덜랜드는 지난 시즌에도 패배는 별로 없었어. 무승부가 워낙 많아서 그렇지.]
바스티아노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프리미어리그의 무재배 명가로 통했었다. 확실히 그 부분만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올 시즌은 다르지만.
이번 시즌엔 그토록 오랫동안 염원하던 공격력에 꽃이 피었다.
베넷과 마르틴을 앞세운 왼쪽 측면은 변함없이 파괴적이고, 박스 안쪽엔 정통파 스트라이커 바스티아노가 존재감을 뽐낸다. 그리고 조커 크리그의 활약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펀딧들 또한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인지, 캐러거가 특유의 스카우저 억양을 살려 외쳤다.
[올 시즌 선덜랜드가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는, 역시 이 선수의 기여를 뺄 수 없겠죠! 바로 빌 크리그입니다.
잠시 후 화면이 크리그의 득점 하이라이트를 재생했고, 희주는 옆에서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그 선수는 현재 12경기에서 6득점 2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요. 요즘은 워낙 괴물 같은 골잡이가 많아 수수해 보이는 기록이지만, 우리 시절엔 이 정도 페이스면 우수한 공격수였어요.]
[리그 원에서처럼 득점왕을 노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알짜 활약이죠. 소속팀 선덜랜드에서도 바스티아노와 마르틴, 요니 다음가는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는 중인데요. 오늘은, 크리그 선수를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어, 크리그 언제 방송국 간 거야? 분명히 연습 중이었는데?”
“녹화겠지.”
알 만한 사람이 말야. 희주 너, 원래 아이돌 팬클럽 아니었냐?
“아,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생방송이라고만 생각했어.”
“저건 스포츠가 아니지··· 가만, 정말 아닌가?”
희주 때문에 나도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과묵한 크리그가 저런 자리에 선 이유는, 어디까지나 프로 선수이기 때문, 그러니까 우리 프레스팀이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스포츠의 연장선 같기도 한데···.
아무렴 어때. 크리그가 올 시즌, 기대 이상으로 활약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거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그렇게 시작한 인터뷰에서도, 크리그는 크리그다웠다. 그러니까 한결같이 진지하다는 의미에서.
[작년에는, 제가 팀에 어울리지 않는 스트라이커라는 의견도 많았었죠. 스스로도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팀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고, 진지하게 거취를 고민했었죠.]
[그랬군요.]
캐러거가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물론 저 양반 스타일을 고려하면, 작년 크리그의 처지보다는, 왜 작년에 자기 친정팀이 크리그를 안 샀는지로 안타까워할 가능성이 높다.
[그때, 구단에서는 이렇게 제의했습니다. 혹시라도 출전 기회 때문에 팀을 옮기고 싶다면 최대한 배려해주겠다고요. 원하는 팀을 알아봐주고, 새 팀에서의 출전도 보장받을 거라고.]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크리그가 이적을 선택할 경우, 새 팀에서의 출전 수에 비례해 이적료를 일부 깎아 주는 옵션을 준비했었다.
법률적 검토까지 마친 조항이지만 실제로 써먹을 일은 없었다. 크리그가 팀에 남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 크리그는 팀의 조커로 맹활약하는 중이다.
[그런 배려까지 들은 이상, 다른 유니폼을 입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리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녹화 방송일 텐데, 화면 속의 크리그에게, 내 얼굴을 볼 방법이 존재할 리 없는데.
[설령 서브로 밀리더라도 이 팀에 남겠다고. 팀에서 그만 뛰라고 할 때까지 뛰고, 떠나라고 할 때는 그냥 축구화를 벗겠다고요.]
화면 속의 크리그는 진지했고, 펀딧들은 하나둘씩 말을 잃었다. 옆에서 신나서 떠들던 희주도 어느새 조용해졌다.
그 고요 속에서, 크리그는 나직하게 선언했다.
[그리고, 저는 아직 팀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