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00화 (200/422)

200화 기대보다 더 (2)

아침 출근길, 메디컬 팀장 버드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은 햄버거 안 사오셨습니까?”

그러자 버드가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안 사온 지 오래입니다. 우리 구내식당이 있는데, 굳이 다른 걸 사먹을 이유가 없더라고요.”

“그런 것치고는 가끔 햄버거 봉투가 보이던데요.”

어디까지나 농담처럼 말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아주 슬쩍 그렇게 물었다. 구단주라는 입장상, 잘못하면 먹을 것 갖고 꼽주는 느낌이 들 테니까.

다행히 버드는 별다른 부담 없이 가볍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가끔 바쁠 때만요. 점심 먹으러 내려갈 시간이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과로에 시달리는 브라이언과 샐리가 드링크제나 안마의자를 이용하는 것처럼, 버드는 책상에서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는 모양이다.

나는 희주 쪽에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희주가 냉큼 대답했다.

“그러면 앞으로 샌드위치 같은 걸 언제나 준비해 두도록 협의할게요!”

“매일 바쁜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정 그러시면 바쁜 날 따로 식당에 샌드위치를 부탁하겠습니다.”

“아뇨, 바쁜 날 식당에 미리 그런 주문할 정신이 어딨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버드의 표정은 밝았다. 그 표정에 만족하며, 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해리슨의 기용이 부쩍 늘어난 것 같군요.”

“요즘 들어 감독님은, 코칭스태프의 의견을 많이 들어주시니까요. 아무래도 해리슨은 분석팀장이 좋아할 스타일 아니겠습니까? 브라이언 코치는 질색하겠지만요.”

그 반대일 거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브라이언은 물론 공격적인 축구도 쓸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수비를 단단히 하면서 역습하는 축구를 선호한다. 굳이 따지면 전성기 이탈리아의 축구와 같이 단단한 축구를 추구하는 전술가다.

그런데 대부분의 수비 축구 성애자는 해리슨 같은 타입을 꽤 선호한다. 한정된 기회와 소수의 인원만으로도 골을 뽑아낼 수 있으니까.

비록 패스의 상당수가 턴오버로 끝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수비 축구는 공을 상대에게 건네주는 게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턴오버 당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공을 넘겨주지 않는 운영을 훨씬 선호하는 샐리의 경우, 위험한 패스를 질색하는 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취향이 그렇다는 이야기고, 우리 코칭스태프들은 전부 해리슨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덕분에 해리슨의 출전 기회가 꽤 늘어났는데, 흐뭇한 한편 걱정도 되었다. 혹시라도 어린 선수를 혹사시키는 결과로 이어질까봐.

내 속내를 눈치챈 버드가 황급히 대답했다.

“컨디션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사실 과보호라는 자각은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유소년 출신 선수가 프로로 데뷔해서 선덜랜드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날뛰는걸.

어린 내가 꿈꿨던, 하지만 이루지는 못했던 꿈.

내가 절대 갖고 태어나지 못했던 재능이 무사히 피어나는 걸, 지켜보고 싶었다.

* * *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 7번 그라운드에서는 경기를 앞두고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었다.

그 안에서, 해리슨은 잠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최대한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공을 무심하게 밀어냈다.

잠시 후 깃발이 올라갔고, 오프사이드에 걸린 바스티아노가 고개를 흔들었다.

“해리, 좀 더 빠르게 패스 넣어줘. 지금 템포로는 이 친구들이 버티는 라인을 절대 못 깨.”

바스티아노의 요구에 해리슨이 대답하기도 전, 에디가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이 몸과 이고르가 버티는 라인은 원래 뚫리지 않는 법이거든.”

“얘들 못 뚫으면 빅 6 상대론 어림없지.”

“바스티아노 너 인마.”

사실은 칭찬이었을 것이다. 에디 - 이고르 조합은 빅 6의 수비라인과 동급이라는. 물론 에디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겠지만.

둘이 잠시 옥신각신하는 사이, 해리슨은 묵묵히 그라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잔디의 감촉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고쳐 밟았다.

“왜, 해리슨.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이라도?”

해리슨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크리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어차피 다음 원정 잔디 세팅이니까, 제가 최대한 맞춰야죠.”

“그래.”

크리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몸을 돌려 자기 포지션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해리슨의 귀는, 크리그의 혼잣말을 잡아냈다.

“한 템포 더 빠르게? 지금보다도?”

잠시 후 다시 연습이 재개되었고, 해리슨은 또다시 패스를 보내기 시작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레스터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 * *

경기를 앞두고, 레스터의 감독은 차분하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해리슨은 올 시즌 기대보다 더 나은 시즌을 보내고 있다는 평이지. 크리그와 함께, 선덜랜드의 초반 돌풍을 이끄는 쌍두마차로 불리는 선수야.”

감독의 신호에, 레스터 분석팀이 둘의 올 시즌 스탯을 화면에 띄웠다.

6골 2어시스트를 기록 중인 크리그, 그리고 5어시스트를 찍은 해리슨을.

기록 자체만으로도 준수한 성적이지만, 두 사람이 주로 조커로 기용되는 로테이션 멤버라는 점에서 보면 무척이나 훌륭한 편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주로 상대적 약팀과의 경기에 기용되어 스탯 쌓기 용이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요소지만, 지금까지의 모습만 보면 크리그와 해리슨이 각각 데뷔 이래 최고의 시즌을 보내는 중임은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감독님, 우리 상대로 쟤들을 낸다는 건, 선덜랜드가 우릴 호구로 보고 있다는 의미 아닙니까?”

“그런 건 아니겠지. 선덜랜드는 아직 킹 파워 스타디움에서 이긴 적이 없거든.”

그저 선덜랜드가 로테이션 주기를 철저히 지키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원칙이지만, 프리미어리그의 상위권 팀들이라면 선덜랜드의 스타팅 라인업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부작용도 있었다.

레스터 감독이 차분하게 지시를 시작했다.

“우선, 크리그에게는 항상 근접 마크를 유지할 것. 지난 EFL컵. 놈에게 멀티골을 내주고 떨어졌다는 걸, 잊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해리슨이 공을 잡고 있을 때. 오프사이드 트랩은 생각도 하지 말도록.”

레스터 선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해리슨의 패스는, 가끔 프리미어리그 기준으로도 믿기 어려운 기적을 만들어 내는 편이었다. 괜히 오프사이드 트랩을 시도하다가는, 잘못하면 본전도 못 뽑는 꼴을 겪게 된다.

“그런데 감독님, 트랩을 시도할 수 없다면, 해리슨이 공을 잡을 때마다 찬스를 내주게 되는데요.”

“그 경우에 한해, 크리그를 잠시 풀어줘도 좋다. 해리슨의 패스는, 바스티아노 아니면 요니에게 들어간다. 가끔은 마르틴에게도 들어가지만··· 크리그에게는 가지 않는다.”

“정말입니까?”

“기록이 증명하거든. 해리슨의 어시스트 목록에, 크리그의 득점은 들어 있지 않아.”

레스터 감독의 단호한 답변에, 레스터 선수들의 얼굴에 사나운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선덜랜드를 잡아내기는 어렵지 않겠군요.”

* * *

프리미어리그 14라운드, 레스터 대 선덜랜드.

레스터의 홈, 킹 파워 스타디움에 앉아서, 나는 아직 경기가 시작하지 않은 그라운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옆에서 희주가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오빠, 이거 기사 봤어? 표현 재밌네. 빅 7 결정전이래.”

기자들이란.

도대체 어디서 질리지도 않고 이런 소재를 뽑아내는 건지, 가끔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빅 7 결정전이라는 표현 자체에는 틀림이 없긴 하다. 레스터는 틀림없는 신흥 강호로, 최근 몇 년간의 성적을 따지자면 이미 빅 6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비록 구단의 인기나 자본력은 아직 밀리지만, 조만간 빅 6과 어깨를 나란히 할 팀으로 통한다.

그리고 우리 선덜랜드는···.

“솔직히 레스터 구단주 정도면 그냥 서민 아니야?”

“밖에 나가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희주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슬쩍 찔렀다··· 뭐, 아무튼 우리 자본력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그리고 리그에서는 중위권이었지만, 대신 몇 년간 컵 대회 위주로 착실하게 트로피를 추가하는 중이다.

프리미어리그에 일곱 번째 빅클럽이 나온다면, 선덜랜드 아니면 레스터가 될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선덜랜드 관계자로서는, 당연히 우리가 빅 7에 들어가길 원하고.

다만, 오늘의 레스터는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고, 마치 우리 공격 패턴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마르틴을 막기 위해 인원을 할애했고, 바스티아노의 존재감에 굴하지 않고 크리그에게 항상 근접 마크를 유지했다.

유일하게 크리그의 마크가 풀리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해리슨이 공을 잡았을 때였다. 그때마다 레스터는 압박 대신 뒤로 물러나 라인을 내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곧바로 패턴을 바꿔 크리그의 라인 브레이킹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해리슨의 발을 떠난 패스는 좀처럼 크리그에게 연결되지 않았고, 타이밍이 맞지 않은 패스는 허무하게 레스터 골키퍼의 품에 안겼다.

옆에서 희주가 발을 굴렀다.

“아니, 왜 이리 호흡이 안 맞는 거야!? 평소엔 엄청 사이좋아 보이더니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호흡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재능의 문제다.

혹독한 연습과 자기관리로 갈고 닦아온 슛 하나만을 무기로 삼은 골 사냥꾼 크리그가, 가끔 프리미어리그 수비진도 혼란하게 만들 만한 해리슨의 패스에 연동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었으니.

그렇게 경기는 지루하게 흘렀고, 후반 70분을 바라볼 때까지도 서로 변변한 유효슈팅조차 없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지금까지 해리슨이 벌써 몇 번이나 패스를 실패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이스 패스, 해리슨!]

실패할 때마다 킹 파워 스타디움을 가득 메우던 레스터 홈팬들의 조롱 속에서···.

“···지금!”

해리슨은 또다시 패스를 시도했고, 나는 펜스에 달려들듯 매달렸다. 그리고 크리그는.

크리그의 반응은 이번에도 늦었지만, 기대보다는 딱 반걸음 빨랐다.

정상적인 슛 동작으로는 닿지 않을 패스. 그 공을 따라 슬라이딩하듯 미끄러지는 선덜랜드의 유니폼, 그 22번을 바라보면서, 나는 외쳤다.

“밀어 넣어!”

* * *

여전히 레스터 수비진은 틈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저 크리그의 눈앞에 공이 저절로 나타났을 뿐.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패스에 이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크리그는 땅을 박찼다.

‘잡을 수 있을까?’

이번에도 늦었다는 걸, 크리그는 알고 있었다. 해리슨의 모든 패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 패스의 타이밍 역시 크리그에게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놀랍고 마법 같은 패스였다.

[나는, 언젠가 해리슨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패서가 될 거라고 믿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캡틴··· 아니, 단장님.’

[오늘, 정말 엄청난 패스를 봤어요.]

‘나는 매일 보는데··· 훈련장에서.’

귓가에 울리는 페르난데스, 그리고 해리슨의 목소리에 대답하면서, 크리그는 다시 한번 가속했고, 마침내 레스터의 포백라인을 완전히 통과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놓칠 줄 알고!?”

어깨에 전해지는 거친 충격에, 크리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일 공을 확보한 상태였다면 굳이 저항하지 않고 페널티 킥을 유도했겠지만, 지금의 그는 아직 공을 건드리지조차 못한 상태였다.

[싸고돌지 마. 그건 해리슨이 극복해야 할 문제다.]

‘아뇨, 제 문제입니다.’

[패스를 받지 못하는 동료를 탓하는 선수를, 나는 본 적이 없거든.]

‘해리슨도 제 탓을 하진 않았는데요.’

크리그는 알고 있었다. 이번 패스를 받지 못해도, 해리슨이 자신을 탓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임을. 그리고 동료들 또한 그를 탓하지 않을 것임을.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공을 찰 수 있는지 기억하라고 배웠어요.]

물론, 크리그 자신은 스스로에게 너그럽기 힘들 것이다. 이번 패스가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알기 때문에.

크리그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달려나오는 레스터의 골키퍼, 추격하는 수비, 어깨에 전해지는 거친 충격과 휘청이는 몸.

그리고, 딱 반 박자 늦은 자신의 침투.

이미 정상적인 슛이 불가능하다는 걸, 크리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충격에 저항하는 대신 휘청이는 몸을 그대로 던졌다. 마치 미끄러지듯이.

[트로피를 가져올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처음 선덜랜드에 이적했을 땐, 자신이 팀의 구세주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당시 선덜랜드는 리그 원 팀이었고, 그는 바로 그 리그 원의 득점왕 출신이었기에.

하지만 몰락한 팀의 구세주가 되는 운명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기대보다 훨씬 더 대단했던 새 구단주가 나타나기 전까지, 선덜랜드는 줄곧 하부 리그에서 고통받았고, 크리그 또한 침묵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완벽한 패스 하나조차 쉽게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가 필요하다고, 그를 팀의 공격수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크리그는 골을 필요로 했다. 그 고마운 사람들에게 안겨줄 골이.

I know I am. I’m sure I am.

[끝까지 싸우고 와라. 휘슬이 울릴 때까지. 우리 팬들에게 한 골을 선물할 때까지.]

아주 살짝, 앞으로 내민 발끝에 공이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제대로 발을 휘두를 수조차 없이 멀어진 패스와의 거리. 아마 그것이 재능의 차이일 거라고 크리그는 생각했다. 바스티아노나 요니가 가진, 그리고 자신에게는 없는 재능.

그래도 이번엔 발끝이라도 가져다 댈 수 있었다. 어쩌면 단 한 순간의 플레이였을지라도.

잠시 후, 킹 파워 스타디움이 조용해졌고, 다른 종류의 소음이 경기장을 메웠다.

크리그가 이미 알고 있는 소음이.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몸을 일으키려던 크리그의 시도는 잠시 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달려온 동료들이 하나둘씩 그의 몸을 덮었기 때문에.

그런 동료들의 사이에서, 마치 어린애처럼 천진하게 웃는 해리슨의 모습을 찾아낸 크리그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레스터 0 - 1 선덜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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