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기대보다 더 (3)
레스터는 곧바로 대응하지는 못했다. 예상외의 실점에 흔들렸던 모양이다.
마침 레스터 감독은 예전부터 임기응변에 능한 타입은 아니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눈에 띄게 동요하는 레스터 벤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도 혼란이 아주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레스터는 곧바로 강팀의 저력과 뚝심을 되찾았고, 경기 종료까지는 눈을 뗄 수 없는 공방··· 아니, 일방적인 공세와 결사적인 방어로 흘렀다.
그렇게 경기는 90분을 향해 달렸다.
몸을 던지는 악착같은 수비 끝에, 우리 선수들은 휘슬이 세 번 울릴 때까지 버텨냈다. 그렇게 크리그의 골이 그대로 결승점이 되었다.
그렇게 프리미어리그 14라운드는, 우리 선덜랜드의 깜짝 승리로 끝났다.
“최선을 다해 준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레스터와의 빅 7 결정전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저보다는 우리 구단주의 관심사 같군요.”
기자의 질문에 가벼운 농담으로 응수한 로저스 감독이, 낮게 덧붙였다.
“물론 기쁘긴 합니다. 이런 경기는 승점 6점짜리 경기로 통하니까요.”
우리가 빅 7인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우리와 레스터가 유럽 대회 진출을 놓고 다투는 팀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순위권 경쟁자와의 맞대결은 사실상 승점 6점의 가치가 있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우리 코칭스태프는 인터뷰를 비교적 짧게 마무리했다.
반면 레스터의 인터뷰는 훨씬 길었다. 홈에서 허용한 일격, 승점 6점짜리 패배에서 팀을 추스르고, 비난으로부터 선수들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해리슨과 크리그 사이를 비운 건, 어디까지나 제 전술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자세한 근거는 내부적 문제라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만···.”
레스터 감독은 대략 그런 느낌으로 15분을 떠들었다. 요약하면 이런 느낌이 되겠네.
크리그는 능력 없는 교체 요원, 해리슨은 아직 어린 선수로 생각했었다. 바로 그 두 사람이 결승골을 만들었으니, 패인은 전적으로 감독 탓이다. 레스터 선수들은 최고의 플레이를 펼쳤다··· 라고.
“오빠, 더 줄일 수 있지 않아? 감. 독. 차. 이.”
너어는 정말.
한편 결승점을 터트린 크리그는 오늘의 최우수 선수, KOTM으로 선정되었고, 어색한 표정으로 단독 인터뷰 자리에 섰다.
[예전 EFL컵 4강전에서도 멀티골을 만들어 내셨고, 이번에도 결승골을 넣으며 레스터 킬러로 등극하셨는데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말씀하신 EFL컵 4강전 말이지만, 당시 저는 1차전에서 완벽히 침묵했었죠. 그리고 오늘도 쉽지 않은 경기였습니다. 제가 정말로 레스터 킬러라면 그렇게 고생하진 않았을 텐데요.”
잠시 망설이던 크리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레스터 킬러라는 칭호는 관심 없습니다. 칭호에 가산점을 주는 규칙은 축구에 없으니까요. 누가 넣어도 골은 똑같이 한 골이고, 이기면 승점 3점을 가져갑니다.”
인터뷰하는 기자의 말문이 순간적으로 막힌 것처럼 보였다. 그사이, 크리그는 변함없이 어색한 표정으로, 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물론 저는 스트라이커고, 골을 넣는 것은 제 임무입니다. 하지만 제 득점 기록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 팀의 성적이 훨씬 중요합니다.”
크리그의 인터뷰는 여러모로 큰 파장을 불렀다.
- 크리그? 작년까지만 해도 프리미어리그급 공격수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냐?
ㄴ 그런 애들 죄다 템즈강 수온 재러 갔을 듯.
- 크리그 요새 물올랐네.
ㄴ 걔는 불붙었다고 해야지. 응원가가 온 파이어니까. 그래도 빅클럽 공격수는 아닌 것 같지만.
ㄴ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선덜랜드가 빅클럽이 아닌데.
“아니, 우리가 왜 빅클럽이 아니야!? 빅 7 결정전에서 이겼잖아!”
SNS 반응을 확인하다 말고 갑자기 부루퉁해진 희주를 향해, 슬쩍 덧붙였다.
“크리그가 그랬잖아. 칭호에 가산점 주는 규칙은 축구에 없다고.”
그러자 희주가 피식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그렇겠네. 아직 챔스도 확정 못 지은 상태에서 빅클럽 운운해봐야, 괜히 선빅아 같은 소리밖에 더 나오겠어?”
“선빅아는 너무 갔고.”
아무튼, 그 밑으로는 대충 선덜랜드가 빅클럽인지 아닌지로 치열한 키배가 벌어진 모양이라, 스크롤을 쭉 내렸다.
- 그래도 요즘 크리그 하는 거 보면 조커로는 아주 쏠쏠하던데? 중하위권 팀에선 에이스 노릇 할거임.
ㄴ 근데 중하위권 팀이 선덜랜드 선수 살 수 있긴 함?
ㄴ 프리미어리그는 중계권료가 빡세서, 중하위권 팀도 돈 쓰면 장난 아님. 크리그 몸값 정도는 충분히 댈 듯?
ㄴ 근데 선덜랜드는 구단주가 빡세잖음. 여름에 돈 쓰는 거 보니까 중계권료는 돈도 아니겠던데.
* * *
실제로 레스터전 직후, 몇 팀에서 문의가 들어오긴 했다. 크리그를 올겨울에 넘길 생각이 있느냐고.
물론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크리그 본인이 이적을 희망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 팀을 떠나느니 축구화를 벗겠다.’는 선수를 돈 몇 푼에 팔아치울 생각은 전혀 없다.
내 속내를 눈치챈 희주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오빠, 그냥 피규어나 많이 사가라고 회신할까? 마침 크리그 피규어 요즘 세일 중이잖아?”
“무척 솔깃하긴 한데, 공식 문의니까 그냥 NFS라고만 보내.”
“알았어!”
잠시 후 희주가 손을 신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 움직이는 모양새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NFS보다는 조금 더 길게 회신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크리그를 처음 봤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구단을 인수하던 날 잔디 위에서 홀로 묵묵히 공을 차던 그의 모습을.
그의 재능이 리그 원에서는 독보적인 공격수임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챔피언십에서도 충분히 통할 선수라고도 믿었다.
그래도 프리미어리그에 올라온 이후에도 활약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재능의 벽이란, 그만큼 가혹한 것이기에.
내 기대보다 훨씬 더 좋은 모습으로, 팀에 필요한 선수로 자리매김해가는 크리그를 떠올리며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 *
레스터전 이후에도, 팀의 행보는 기대 이상으로 흘렀다. 도저히 여력을 낼 수 없던 EFL컵은 32강 탈락으로 그쳤지만, 리그와 유로파 양쪽 모두에서 맹활약했다.
유로파 조별 4차전, 시옹과의 홈 경기.
“크리그다! 크리그를 막아!”
올 시즌 기대 이상으로 활약해준 크리그는, 그만큼 상대에게 집중 견제를 당했다. 수비에 완벽하게 틀어막혔고, 변변한 유효슈팅 하나 못 날리며 침묵했다.
뜻밖의 상황이었지만, 우리 벤치는 물론 크리그 본인조차 태연했다. 애초에 프리미어리그 팀들이 크리그에게 집중 마크를 안 붙이는 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니까.
오죽하면 희주도 한마디 했을 정도다.
“오빠, 쟤들은 학습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쟤들, 1경기에서 마르틴하고 바스티아노한테 골 먹히지 않았어?”
그랬지. 그것도 사이좋게 두 골씩.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크리그가 마크를 끌고 다니는 동안, 마르틴과 바스티아노가 사이좋게 두 골씩 멀티골을 넣어버렸다.
[선덜랜드 4 - 0 시옹]
그렇게 우리는 유로파 조별리그에서 4연승을 기록하면서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했고, 유로파에서 한동안 숨을 돌릴 수 있게 되면서 리그에서도 순조로운 활약을 이어갔다.
16라운드, 노리치에게 승리한 우리는 17라운드, 에버튼 원정에서도 도합 다섯 골을 주고받는 난타전 끝에 3-2로 승리했다.
비록 18라운드 리버풀 원정에서는 1점 차의 패배를 기록했지만, 19라운드에는, 맨시티를 홈으로 불러들여 무승부를 기록했다.
[아쉽더라. 무승부.]
전화기 너머에서 조용조용하게 들리는 헨도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째 꼭, 너희 팀 입장에서 아쉽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리버풀로서는 우리가 맨시티를 잡아주길 바랐을 테니까. 그렇게 지적하자 헨도가 낮게 웃었다.
[아예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어설픈 팀에겐 기대도 안 하잖아.]
“하긴.”
[만일 지난 시즌 초에 너희가 맨시티와 비기면 축하했을 거야. 발목 잡아줘서 고맙다고도 말했을 거고.]
“그랬겠지.”
헨도는 예의상 지난 시즌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올 시즌 초만 해도 우리가 맨시티와 비기고 아쉽다는 평가를 받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커뮤니티 실드에서 이기긴 했지만, 그때는 단판 승부라는 특수성에 더해, 샘 아저씨의 은퇴를 축하한다는 동기부여가 붙어 있었다.
실제로 지난 19라운드, 우리는 맨시티의 일방적인 공세를 힘겹게 버텨내야 했다. 스코어는 무승부였지만, 경기력을 보면 아직 맨시티에 맞서기는 부족한 점이 보였다.
뭐, 그래도 비겼지만.
[유로파도 힘내고.]
“···그래. 내년에 챔스에서 보자.”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 * *
“메리 크리스마스!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네요. 3위라니, 너무 기뻐요.”
순위표를 바라보며 감격하는 수잔을 향해, 마일즈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서 브렌든이 눈치 없는 소리를 냈다.
“기뻐하긴 아직 좀 이릅니다. 크리스마스 순위에서 거짓말처럼 미끄러지는···.”
수잔과 마일즈 부부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기 때문에, 브렌든은 말을 끝까지 잇지는 못했다. 일단 이곳은 우드 부부의 집이었고, 브렌든은 어디까지나 이웃집에 초대된 입장이었다. 즉, 굳이 따지자면 원정 멤버다.
물론 수잔과 마일즈 또한 기껏 손님을 초대해 놓고 면박을 줄 의도는 없었기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흘렀다.
“FA컵 말인데,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우리가 디펜딩 챔피언인데, 특혜도 없고.”
가볍게 불평하는 수잔을 향해, 브렌든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크리그가 말했죠. 축구에는, 칭호에 가산점을 주는 규칙이 없다고요. 디펜딩 챔피언이라도 가산점은 못 받습니다.”
“그건 아는데, 보니까 ‘그 팀’은 꿀 빨겠던데요.”
이번 FA컵 3라운드에는 기대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8부 리그의 세미프로, 더스턴이 64강전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거둔 것이었다.
그리고 더스턴은, 마침내 64강전에서 프리미어리그 팀을 만나고 말았다··· 다름 아닌 뉴캐슬을.
“우리가 더스턴 만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쉬워요!”
불평하는 수잔을 향해, 이번엔 마일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긴 한데, 어쩌면 오히려 잘된 걸지도 몰라. 우린 게이츠헤드 주민이니까.”
더스턴은 타인 위어의 게이츠헤드를 연고지로 삼는 팀이었다. 물론 프로도 아닌 세미프로다 보니 지역 내에서도 인기는 별로 없었고, 대부분의 게이츠헤드 주민들은 뉴캐슬 아니면 선덜랜드를 연고지 팀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래도, 동네 팀과 싸우는 상대를 대놓고 응원하기는 역시 좀 껄끄러운 일이다. 차라리 더스턴과 뉴캐슬이 만나서 다행이라는 게 마일즈의 의견이었고, 옆에서 브렌든 역시 열렬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물론 게이츠헤드 출신이 아닌 수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프로팀도 아닌데 꼭 응원해야 한다는 법 있어요?"
“그런 법은 없지만, 대놓고 상대 팀 응원하기도 입장이 좀 껄끄럽잖아. 당장 요 앞 찰리스에도 더스턴 선수가 있으니까.”
“어머, 거기 사장님이 선수였어요? 보기보다 젊으시네.”
“···그 양반은 코치고, 선수는 캐셔 보는 젊은 친구. 듣자니 더스턴 주전 센터백이라던데.”
수잔은 잠시 식료품점 찰리스의 캐셔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가게 앞에서 캐셔 청년이 공을 발로 다루는 모습을 봤던 기억이 났다.
[와! 리프팅 스무 번이요!? 잘하시네요!?]
당시 수잔은 진심으로 칭찬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평범한 아마추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미프로라는 걸 알았다면 조금 다른 평가를 했을 것이고, FA컵에 출전할 선수라면···.
‘우리 마르틴은 예전에 한 시간 내내 리프팅하고 그러던데.’
아무리 생각해도 더스턴이 뉴캐슬을 이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에, 수잔은 뉴캐슬의 대진운이 못내 부럽기만 했다.
“어차피 ‘그 팀’ 상대팀이면 더스턴 아니라 미들즈브러라도 응원하겠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선덜랜드가 더스턴과 붙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 * *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FA컵 대진운은 정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옆에서 희주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게, 어떻게 더스턴을 뉴캐슬에 붙여 줄 수 있지?”
“내 말이··· FA에 절이라도 하고 싶네.”
“저주가 아니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희주를 바라보며, 나는 낮게 웃었다.
“고액 용돈 수령자님. 더스턴 연고지는 어디지?”
“게이츠헤드입죠. 갑부 오라버님.”
“게이츠헤드의 위치는?”
“시티 오브 선덜랜드와 뉴캐슬어폰타인 사이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중립 팬··· 아!”
뒤늦게 내 의도를 눈치챈 희주가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8부 리그가 썩 인기가 없다지만, 그래도 게이츠헤드 지역 주민에게는 외부 팀이 더스턴을 두들겨 패는 모습이 그다지 유쾌하게 보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더스턴을 피한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대진운인데, 심지어 고맙게도 뉴캐슬과 붙는단 말이지.
희주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우리는 팝콘 뜯으면 되겠구나. 어차피 올 시즌 FA컵은 버리는 대회니까.”
“아니지. 더스턴에 연락해서 훈련장과 영상 자료를 제공하겠다고 전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