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04화 (204/422)

204화 인생의 낭비 (1)

한편,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는, 게이츠헤드 토박이들이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싸우는 것 같은데. 1부리그와 8부리그의 대결 아니었나?”

빌리의 혼잣말에, 옆에서 수잔이 재빨리 응수했다.

“네, 그러니까 대단한 거죠. 훌륭한 팀이라고 생각해요.”

빌리는 요즘 축구를 아주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더스턴을 훌륭한 팀이라 평가한 수잔의 칭찬은 마음에 와닿았다. 경기 내용을 떠나 스코어 자체는 호각이었고, 수잔의 태도에서도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리가 슬쩍 미소를 지었더니, 이번엔 브렌든과 마일즈가 곧바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저 영감님 알고 지낸 게 이십 년이 넘는데, 저렇게 자상하게 구는 건 처음 봐.”

“그러게.”

둘의 속삭임은 빌리의 귀에도 들어왔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이런 이야기는 못 들은 척해 주는 게 어른의 미덕이기에.

대신 빌리는, 경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식료품점 청년이 아주 제법이구먼.”

비록 더스턴이 분전했지만, 아무래도 경기 자체는 시종일관 뉴캐슬의 페이스로 진행되었다. 상대적으로 더스턴 수비진이 포커스를 받을 일도 늘어났다.

그 점에서, 더스턴의 센터백 필립의 활약이 놀라웠다. 골로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국면을 결정적인 태클로 걷어낸 모습만 벌써 세 번, 덕분에 필립이 스크린에 잡힐 때마다 함성이 커졌다.

“빗자루로 쓸어버리는 것 같군. 하긴, 매장에서도 청소 잘하더니만.”

“옛날엔 저런 수비수를 스위퍼라고 불렀대요. 요즘은 잘 안 쓰는 용어인 모양이지만요.”

옆에서 할 말 많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브렌든과 마일즈를, 빌리는 이번에도 무시했다. 기껏해야 이탈리아가 어떻고 독일식이 어떻다는 이야기를 잔뜩 떠들 것이 뻔해서다.

빌리의 생각에,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처음에 여기 경기장에 축구 보러 오자고 했을 때, 이게 대체 뭔 소린가 했었네. 어차피 스크린으로 볼 텐데··· 그럴 거면 집에서 보는 거나 뭐가 다른가 싶어서.”

“영감님 댁은 축구 안 나오잖···.”

까불거리는 브렌든의 옆구리를, 마일즈의 팔꿈치가 사정없이 찔렀다. 그 모습을 잠시 곁눈질한 빌리가, 부드러운 미소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펍에서 보거나 해도 그만인데··· 그래도 뭐, 일단 한번 와 보기로 했어.”

“더스턴을 후원하기 위한 거였죠?”

“반쯤은.”

나머지 반은 이웃과의 친선교류 같은 이유였지만, 굳이 밝히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기에.

“축구장에 온 건 오랜만이지만, 그래도 느낌이 꽤 괜찮군. 그냥 스크린인데도 집에서 보는 것과 느낌이 아주 달라.”

혼잣말처럼 말하는 빌리를 향해, 수잔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훨씬 더 굉장해질 거예요, 이 경기장은요.”

그사이 필립은 또다시 결정적인 태클을 성공시키며 뉴캐슬의 공격을 저지했고, 공은 사이드라인 밖으로 나갔다.

스로인을 위해 뉴캐슬 선수가 천천히 라인에 서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야유로 들끓었다. 스크린 너머에 있는 선수들에게는 절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힘차게 외치는 관중들을 바라보며, 빌리는 잠시 숨을 삼켰다.

“소리가··· 정말 대단하군.”

“이 경기장은 항상 그래요. 이 앞, 풋볼 스퀘어에도 모여 있을 테니까요··· 선덜랜드 팬들이요.”

“선덜랜드? 아아, 뉴캐슬과 라이벌이었지.”

If you hate Newcastle clap yer hands.

경기장 밖에서 울리는 함성과 박수가, 어느새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안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게이츠헤드의 웰링턴 로드까지 전해지도록.

* * *

문득 박수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럴 국면이 아니었는데도.

If you hate Newcastle clap yer hands.

나는 문득 선덜랜드 서포터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는 구절을 떠올렸다. 옆에서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희주가 입을 삐죽거렸다.

“박수 소리가 작네··· 여긴 뉴캐슬··· ‘그 팀’ 싫어하는 사람 얼마 없나 봐?”

“더스턴의 홈이니까.”

웰링턴 로드를 찾아 줄 사람이면 당연하게도 더스턴의 핵심 팬이다. 이곳의 관중은 뉴캐슬이 싫어서가 아니라, 더스턴이 좋아서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뉴캐슬을 싫어하는 마음이 더 큰 사람들은 다른 곳에 있겠지.

나는 슬쩍 고개를 들었고, 오늘 경기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곳에 비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모습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리 유니폼, 혹은 더스턴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다 같이 어우러진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비록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다들 열성적으로 응원한다는 것쯤은 이곳 웰링턴 로드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났다.

“이봐, 다들 목소리 높여! 원격으로 경기 보는 놈들보다는 우리가 더 날뛰어야지!”

잠시 후 웰링턴 로드는 무질서한 환호로 뒤덮였고, 더스턴 선수들의 발놀림이 소리에 비례해 빨라졌다.

희주가 미소를 지었다.

“다들 진짜 열심히 뛰네.”

“그렇겠지. 꿈만 같은 무대일 테니까.”

모든 세미프로가 프로 축구 선수를 꿈꾸는 건 아니겠지. 예컨대 더스턴의 베테랑 미드필더, 글렌은 이미 프로로서는 은퇴한 선수고, 아마 프로 팀의 제의에 별 관심이 없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축구를 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순간을 꿈꾸기 마련이다. 프로와 함께 공식전에 서는 순간을.

힘차게 뛰는 더스턴 선수들을 바라보며, 목에 힘을 주어 외쳤다.

“달려!”

웰링턴 로드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경기장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선수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훨씬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아마, 내 목소리가 선수들에게 닿겠지.

그래서일까, 더스턴의 벤치에서 찰리가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달려! 더 빨리! 이놈들아, 보름 동안 대체 뭘 배웠냐!”

찰리의 질타에 모여든 팬들의 목소리가 덮이기 시작했다.

“필립 이 망할 놈, 벌써 힘 빠졌나? 뭐 해, 가게 앞 바닥 쓸듯 착착 쓸어버리지 않고!”

“글렌 아저씨! 힘내세요!”

우리 홈에 울리는 것처럼 조직적인 챈트는 아니지만, 더스턴 선수들은 다소 투박한 응원에 오히려 힘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의 더스턴 선수들은 끈질겼고, 맞은편의 뉴캐슬이 점점 조급해질 때까지 버텨냈다. 전반 내내 단 한 골도 주지 않았던 분투가 후반까지 이어졌다··· 후반 60분, 뉴캐슬의 기습적인 중거리 슛이 골네트를 흔들 때까지는.

[더스턴 0 - 1 뉴캐슬]

“아악, 하필 저 자식이!”

뉴캐슬의 4번, 매슈의 득점에 희주가 발을 굴렀다.

매슈는 뉴캐슬의 로컬 보이로, 나이대가 비슷한 잭과 종종 라이벌로 엮이는 선수였다.

충성스러운 잭의 득점이 우리 팬과 동료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것처럼, 로컬보이 매슈의 득점 역시 ‘그 팀’ 관계자를 고무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아오, 저것들 이제 엄청 신나서 떠들 생각 하면 진짜···.”

곧바로 스마트폰을 확인한 희주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내용은 안 봐도 뻔하다. ‘그 팀’의 자랑질, 아니면 ‘그 팀’ 팬들의 반응에 눈이 뒤집힌 거겠지.

“진정해. 아직 경기 안 끝났어.”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답하려 노력했다. 사실, 오늘 이길 수 없다는 건 양쪽 선수단의 가치를 보면 자명했기에.

[우리는 오늘 최선을 다할 것이고, 유소년이나 후보들로 스쿼드를 채우는 짓은 하지 않겠다. 그게 우리가 같은 지역 팀, 더스턴을 존중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뉴캐슬_오피셜]

경기 전에 올린 오피셜 계정의 반응처럼, 오늘의 뉴캐슬은 꽤 탄탄한 전력을 준비했다. 비록 베스트 일레븐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롱스태프 형제, 생막시맹, 윌슨을 비롯한 주요 선수들 대부분을 출전시켰다.

몸값이 가장 낮은 선수가 두 자리, 주전 대부분은 당연히 세 자릿수 숫자의 가치를 자랑한다. 아무리 봐도 8부 리그를 상대하는 스쿼드라기에는,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그에 맞서는 더스턴 선수단의 가치는 대부분 0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기껏해야 5에서 10 정도였다. 예외라면 전성기가 이미 한참 지난 노장 글렌, 그리고 공격진의 투톱뿐이다.

아마 이길 수 없겠지. 축구에는 종종 기적이라는 게 일어나고 공은 둥글지만, 그래도 절대적인 재능의 격차를 뛰어넘을 정도의 변수는 아니니까.

그래도···.

“지금은 응원이나 계속해. SNS 그만 보고.”

더스턴 선수들이 정말로 축구를 하고 싶어 목이 마른 사람들이라면, 고작 한두 골 내줬다는 이유로 발을 멈추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 끝까지 응원할 것이다.

* * *

팽팽하던 경기의 균형이 무너지자 더스턴 선수들은 순간적으로 집중력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전반 내내 철통같던 수비가 순식간에 허물어졌고, 추가골을 내주기까지는 단 5분이면 충분했다.

[더스턴 0 - 2 뉴캐슬]

스코어보드를 노려보던 빌리가 무겁게 신음했고, 수잔은 배 위에 손을 올려둔 채 눈을 질끈 감았으며, 마일즈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나마 넷 중에서는 브렌든의 반응이 가장 양호했는데, 아마 그가 오랜 세월 조르디였던 탓에 뉴캐슬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더스턴 0 - 3 뉴캐슬]

하지만 전직 조르디조차, 자기 지역 축구팀이 10분 사이에 세 골을 허용한 순간만은 참지 못했다.

“이런 빌어먹을!”

브렌든이 으르렁거리는 사이, 옆에서 마일즈는 입술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빌리가 보기에는 F의 함량이 무척 높은 입 모양이었다. 태교를 의식한 모양이다.

빌리가 한숨을 쉬었다.

“뭐, 결국 이렇게 되는 거겠지. 못 이길 경기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온 거 아닌가?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꽤 대단하구먼.”

그러자 수잔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야, 가상 티켓을 사줄 정도의 팬이니까요.”

“아니, 내 말은··· 저 바깥쪽 선덜랜드 사람들. 아무리 이번에 도움을 주면서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지만, 그래도 저 사람들한테는 남의 팀 경기잖소. 이미 경기가 기울었는데··· 참 열심이구먼.”

Stand up if you hate Newcastle.

여전히 그치지 않고 들려오는 풋볼 스퀘어의 함성을 배경음 삼아, 수잔이 웃었다.

“별수 없을 거예요. 저 사람들이 응원하는, 선덜랜드라는 축구팀이 원래 그렇거든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팀이요.”

“그건 멋지구려.”

열없이 대답하며, 빌리는 늙은 몸을 시트에 파묻었다. 그리고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내겐 이제 그럴 열정이 없는 것 같지만.’

그때, 지난 70분간 가장 큰 함성이 경기장을 메웠고, 스크린은 전력으로 달려나가는 더스턴의 유니폼을 비췄다.

등번호 11, 베리의 질주는 매서웠다. 이미 기울어버린 전황이나 이길 수 없다는 느낌조차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더스턴의 11번이 질주할 때마다 뉴캐슬 수비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빌리 노인은 눈을 깜빡였다. 온 사방에 가득한 함성, 그가 줄곧 잊고 있었던 함성, 외면했던 경기장의 열기 속에서.

[우리 지역은 축구팀도 없잖나?]

있었다. 그가 몰랐지만, 아주 가까이에 계속.

[난 축구 관심 없네.]

일부러 외면할 필요가 있는 거였나. 축구를, 이렇게 가슴을 뛰게 하는 스포츠를.

‘그동안 인생을 손해 보고 있었어.’

“달려!”

어느새, 빌리는 자신이 일어나 있음을 눈치챘다. 수잔도, 마일즈도, 브렌든도 같이.

Stand up if you hate Newcastle.

“달려!”

* * *

휘슬이 세 번 울렸고, 경기는 뉴캐슬의 완승으로 끝났다.

[더스턴 2 - 5 뉴캐슬]

하지만 상대적으로 뉴캐슬 선수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뉴캐슬 감독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두 골이나 내줘!? 네놈들이 그러고도 프로냐!? 야, 쟤들하고 너희들 주급 차이가 얼마인 줄 알아?”

찰리와 짧은 악수를 마치고 돌아선 뉴캐슬 감독이, 자기 선수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와 대조적으로 더스턴 선수들의 표정은 밝았다. 졌는데도, 마치 모든 것을 털어낸 것처럼 후련해 보였다.

하긴 8부 리그 팀이 FA컵 본선 3라운드에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례적인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대회, FA컵의 역사 전체를 놓고 봐도 극히 드물 정도로.

더스턴은 충분히 잘했다. 3라운드에 선 것만으로도 이변의 주인공일 텐데, 프리미어리그 팀 상대로 두 골까지 뽑아냈으니 뿌듯할 만도 하다.

동시에, 자신들의 한계 또한 확인했을 것이다.

나는 안다. 자신의 모든 걸 털어낸 사람만이, 끝났을 때 저런 표정으로 웃을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저 미소가 가셨을 때 무엇이 찾아오는지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보기 좋은 미소네.”

흐뭇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는 희주를 향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도 않아.”

“응?”

“우리 진행요원들한테 연락해서, 드레싱룸 근처에서 전부 철수하라고 해. 저쪽에서 부를 때까지 절대로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알았어.”

그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리 씨한테 연락 넣어 놔. 진정되고 나면 이야기 좀 하자고.”

“무슨 이야기?”

“선수 이적 이야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