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인생의 낭비 (2)
“아무리 생각해도 그동안 인생을 많이 손해 본 느낌이야. 이런 걸 왜 안 봤을까.”
경기가 끝난 직후, 빌리는 경기장을 두리번거렸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모습은, 젊었을 때 한두 번 방문했던 경기장과는 모든 면에서 퍽 달라 보였다. 아무래도 세상이 좋아졌기도 하겠지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그만큼 좋은 경기장이기 때문이었다.
매년 증축을 했고, 그때마다 내부 리모델링도 함께했다. 외관 이외의 모든 게 바뀌어, 지금은 웸블리나 핫스퍼 스타디움 이상의 최첨단 경기장으로 통한다.
“이런 데서 축구를 보면 정말 근사하겠어.”
그러자 수잔이 웃었다.
“어머, 그럼 같이 보시겠어요? 마침 내일도 FA컵 경기가 있는데요. 선덜랜드 경기요.”
“어··· 말씀은 고맙소만, 나는 티켓이 없어서.”
영국 대부분의 지역이 그렇듯 이곳 노스이스트 타인위어에서 축구는 문화이자 삶이었고, 경기 하루 전에 티켓을 구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빌리가 축구 팬이 아니라지만, 하루 전에 티켓을 구할 수 없다는 정도는 영국인에게는 상식이었다. 유일한 해법은 암표겠지만, 선덜랜드의 경우 암표상을 완전히 뿌리 뽑아버린 팀으로 유명했다.
그런데도 수잔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상관없어요. 저희, 익스클루시브 박스 쓰거든요.”
“어··· 말씀은 고맙소만, 신혼부부가 다정하게 경기 보는데 괜히 방해되는 건 아니오?”
“전혀 방해가 아닙니다.”
“음, 가끔은 괜찮아요.”
마일즈와 수잔의 빠른 답변에, 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은 신세 지겠소이다 우즈 부인. 마일즈, 고맙네.”
“내일은 더 뜨거울 거에요. 스크린이 아니라, 진짜 축구니까요.”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은 가슴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빌리는 고개를 돌려 그라운드를 내려다보았다. 경기를 하루 앞둔, 푸른 잔디를.
Stand up if you hate Newcastle.
If you hate Newcastle clap yer hands.
환청처럼 아스라이 들리는 목소리에, 빌리는 천천히 일어났고, 박수를 쳤으며···.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내일 하루는, 선덜랜드가 되기로 했다.
* * *
웰링턴 로드.
경기 종료 직후, 홈팀 드레싱룸에 돌아온 더스턴의 공격수 베리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프리미어리그 팀 뉴캐슬 상대로 1어시스트, 폭풍 같은 질주를 선보이며 주목의 대상이 되었는데도, 그는 시무룩했다.
어시스트로는 연결했지만, 결국 직접 골을 넣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팀은 참패했으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지난 1, 2라운드도 순탄하진 않았지만. 계속 연장전에, 승부차기까지 갔었지.’
이번 FA컵에서, 더스턴은 약간의 운이 따라 꾸역꾸역 이기고 올라왔다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이겼으면, 언론에서 동화 같다고 했을 텐데.”
“동화는, 애들을 재울 때나 필요한 거야. 이 양반아.”
“그래도 잘 싸웠지?”
“프리미어리그 팀인데도, 우리를 진지하게 대해준 게 기뻤어.”
선수들의 이야기처럼, 오늘 경기의 더스턴은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이 어울리는 팀이었다. 게다가 소득 또한 적지 않았다. 한 경기로 20년 치 운영비를 뽑아냈고, 스폰서 문의도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물론 운영비는 선수들보다는 단장 찰리의 관심사에 가깝다. 선수들로서는, 오늘의 대전 상대인 뉴캐슬과 자신들을 지원해준 선덜랜드가 더스턴을 진지하게 대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물론, 베리는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지만.
“아직 매치데이다. 베리, 어깨로 숨 쉬지 마.”
“네.”
어깨로 숨 쉬지 말라는 건, 베테랑 글렌의 입버릇이었다. 어깨가 들썩이면 지쳤다는 뜻이니, 상대에게 나 잡아 잡수라는 제스처가 된다는 것이었다.
“프로가 되고 싶다면, 집에 갈 때까지 긴장 풀지 마.”
“네.”
베리는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어깨 움직임을 통제했지만,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도저히 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상대한 그런 선수들이 프로가 되는 거겠지. 우린 아니고.’
뉴캐슬의 주전은 물론, 신인들에게서도 프로다운 포스가 느껴졌다. 딱 한 번 발을 맞댄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재능이.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나이 든 선수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베리를 비롯한 젊은 선수들 표정은 어두웠다.
“뉴캐슬 77번 기억나냐? 완전 괴물이던데.”
“걔가 베리랑 동갑인 거잖아··· 그런데도 1부 리그 프로로 뛰는 거지.”
동료들의 이야기에, 자꾸만 다른 이야기가 섞였다.
[언제까지 불안정한 파트타임으로 일할 거냐? 그렇게 어영부영하다가, 금방 나이 먹는다.]
[감자는 엄청 잘 튀기는데··· 공은 그렇게 못 차나 봐? 그냥 지금이라도 식당 일에 전념하는 게 어때?]
질리게 들어온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같은 멘트로 끝난다.
[축구는 취미로나 계속하는 게 나아. 제대로 된 직업을 찾아. 인생 낭비 그만하고.]
꿈을 인생 낭비로 취급하는 주위 사람들보다, 반박할 수 없는 자신에게 더 분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매치업 상대였던 뉴캐슬의 77번의 모습을 상기했다.
역습당하는 순간에서조차 여유롭고 당당했던 프리미어리거를.
그때, 글렌이 새된 소리를 냈다.
“어, 이게 뭐야?”
원인은 SNS 영상이었다. 뉴캐슬의 77번이, 더스턴 페넌트를 턱 밑까지 들고 미소 짓는 모습이 올라온 것이다.
“이야, 이게 프로지. 상대에 대한 존중. 너희도 보고 배워라. 솔직히 좀 멋지···.”
다음 순간, 글렌은 말을 잇지 못했고, 베리는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영상 속의 그가, 더스턴 페넌트를 등 뒤로 내던졌기 때문에.
* * *
[FA컵 3라운드, 선덜랜드 대 반즐리]
다음 날, 경기 두 시간 전부터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그야말로 ‘미어터졌다.’ 린다가 행복한 비명을 지를 정도로.
“구단주님, 이러다 기록 세우겠는데요!?”
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우린 대부분 만석 아니었어요? 세울 수 있는 기록이 있나···?”
“오만 삼천 석과 육만 석은 느낌이 다르지··· 게다가.”
나는 린다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풋볼 스퀘어겠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게이츠헤드에서 잔뜩 몰려왔나봐요. 플래카드 흔들고 아주 난리 났어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대형 스크린에, 풋볼 스퀘어 쪽 영상이 떠올랐다.
[우리는 어제를 잊지 않았다.]
[같이 갑시다.]
보고만 있어도 든든하다. 동맹 느낌이 들어서. 옆에서 희주도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계산했던 대로네.”
우리는 지난 2주간, 최선을 다해 더스턴을 서포트했다. 게이츠헤드 지역의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그사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설비를 체험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게이츠헤드 사람들은 고마워서라도 한두 번 우리 경기를 찾을 거고···.
눈이 마주치자 린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우리 골수팬으로 만들겠습니다.”
나 또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부작용도 있었는데, 평소에 비해 챈트의 종류가 다채롭지 않았다. 아무래도 새로 몰려온 팬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게이츠헤드에서 새로 유입된 팬들이 선덜랜드의 응원가가 뭐고, 구호가 뭔지 어떻게 알겠어. 그냥 소리 지르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Stand up if you hate Newcastle.
If you hate Newcastle clap yer hands.
아니, 이게 오늘 경기에 왜 나와? 그리고 게이츠헤드 팬들이 이걸 어떻게 알아?
“게이츠헤드 팬들이 이 구호를 어떻게 압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서 물었더니, 린다도 희주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즉시 원인을 파악해보겠습니다.”
“아뇨. CS팀은 스퀘어관리팀과 함께 고객 대응에 집중해 주세요. 아무튼 경기장에 왔으면 우리 고객이고, 저 구호를 외치면 맥켐즈니까요.”
가뜩이나 평소보다 많은 고객이 몰려온 마당에, CS팀장이 원인 파악이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일단 최고의 서비스를 하고, 이유는 나중에 천천히 찾아야지.
“그리고 원인 파악에는 훨씬 더 나은 인재가 있습니다.”
옆에서 희주가 키득거렸다.
“21세기의 명탐정 이희주 님 말씀이시군요. 탁월하신 생각입니다. 갑부 오라버님.”
21세기의 등골 브레이커가 아니고?
실제로 희주는 금방 원인을 찾아냈다. 어제의 FA컵 3라운드 경기 직후, SNS에 뉴캐슬 선수가 더스턴 페넌트를 ‘치워버리는’ 움짤이 퍼진 것이다.
페넌트가 잘 보이도록 양손으로 눈높이까지 들었다가, 등 뒤로 휙 던져버렸는데, 그 짓을 심지어 도촬도 아니고 자기 계정으로 저질러 줬다.
“SNS는 정말··· 인생의 낭비네.”
“그러게.”
중립 지역 게이츠헤드를 품에 안아야 하는 선덜랜드 구단주로서는 나중에 돈이라도 입금해주고 싶을 정도로 고마운 노릇이었다··· 뉴캐슬 관계자들은 미칠 노릇이겠지만.
[혹시 선덜랜드 페넌트를 내던졌다면, 칭찬받을 행동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더비 라이벌이니까. 하지만 이번 행동은 존중도, 품격도 없었다. 프로답지도 않았다. @전직_뉴캐슬_9번]
매 글자마다 격분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뭐, 우리 팀에선 일어날 리 없는 종류의 사고라 공감은 안 가지만.
우리 팀이면 아마 일단 톰슨이 제지했을 것이며, 페넌트를 내던지는 순간 잭과 요니에게 죽도록 욕을 퍼먹었을 게 뻔하다. 폰카는 하퍼나 크리그에게 뺏겼겠지.
주장단 배리어를 뚫고 SNS에 영상을 올리면, 곧바로 프레스팀 아벨이 대응했을 거고.
그러고 보니 축잘알 아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기 지인 계정을 빌려, 영상 두 개를 나란히 편집해서 풀어버린 것이다.
해외 원정마다 항상 마지막까지 경기장에 남아서 그 나라 말로 인사하는 잭과, 페넌트를 집어 던지는 뉴캐슬 신인의 영상을.
코멘트가 방점을 찍었다.
[이 지역에는 축구 팀이 두 개 있다··· 선덜랜드와 더스턴]
“이 정도면 게이츠헤드 팬들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넘어오겠는데? 축하해, 오빠.”
히죽거리는 희주를 향해 나는 곧바로 물었다.
“찰리 씨하고는 언제 보기로 했지?”
“이번 주말. 리그 경기 끝나고 나서.”
주말이면 너무 늦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앞당겨. 오늘 3라운드 경기 끝나고 보자고 해.”
“어,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 어?”
“그럼.”
물들어올 때 노 젓는 건 기본 아니냐? 이럴 때 더스턴 선수 영입하고 오피셜 띄워야지.
게다가···.
더스턴 선수들은 이번에 꽤 활약했었다.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독 들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마침 FA컵 3라운드가 열린 1월은, 겨울 이적 시장이다.
빨리 끝내야지. 노리는 선수를 하이재킹당하는 건 질색이니까.
그런 내 희망대로, 우리 선수들은 반즐리 상대로 손쉬운 승리를 거두며 경기를 신속하게 마무리했다.
[선덜랜드 3 - 0 반즐리]
* * *
[더스턴 단장님, 왜 저희 구단주 전화를 계속 끊으십니까? 좋은 소식 있는데요. @맨시티_오피셜]
SNS 메시지를 보고, 찰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피셜이라는데? 요즘은 이런 것도 사기 치려나?”
일전에 맨시티 구단주를 사칭하는 전화를 몇 번 끊은 기억이 나서, 기분이 영 찝찝했기 때문이다.
“설마 진짜 맨시티 구단주였겠어? 아니겠지?”
그러자 찰리스의 캐셔이자 더스턴의 센터백, 필립이 키득거렸다.
“뭐, 이제 와서 진짜면 어떻겠어요. 어차피 선덜랜드 도움 받았는데요. 세상 어느 팀도, 이번에 선덜랜드가 해준 것처럼은 못 도와줄걸요.”
“그건 그래.”
찰리는 곧바로 인정했다. 이번 선덜랜드의 도움은 단순히 돈이나 설비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조건 더스턴이 이겼으면 좋겠다는 성의가 듬뿍 느껴졌다.
뉴캐슬과 더비 라이벌이고, 더스턴과 같은 동네 팀이라는 특수한 관계이기에 성립되는 관계라서, 맨시티는 절대 해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때 벨 소리가 울렸고, 캐셔를 보던 필립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볼턴이라는데요. 혹시 센터백 파냐고···.”
“미친, 우리는 식료품점이라고 전해··· 가만, 센터백?”
찰리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축하한다. 필립!”
“아니, 볼턴은 리그 투 팀 아닙니까? 그런 팀에서 저를··· 일단 제가 그 수준에서 먹힐 리가 없잖아요.”
“그런··· 가?”
“일단 중요한 스케줄부터 해결하시죠. 선덜랜드 구단주님 오신다면서요.”
필립의 핀잔에, 찰리는 정신을 수습했다. 지금의 더스턴에게 선덜랜드는 은인이자 최우선 파트너고, 구단주 이희성은 귀빈 중의 귀빈이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모셔도 되는 걸까?”
“청소 깨끗하게 해놨으니 안심하시죠. 솔직히 그분한테는 어딘들 안 누추하겠어요?”
“그건 그래··· 그래서 우리 마트 사무실은 너무 좁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던 찰리를 보다 못한 필립이 결국 근처 식당을 빌렸는데, 별로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칩스피쉬는 하필이면 베리가 일하는 식당이었기 때문이다.
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희성은 더스턴의 의전에는 아무런 불만을 표시하지 않은 채···.
“베리를 영입하고 싶습니다.”
···라고만 말했다.
기절할 것 같은 찰리를 내버려둔 채, 필립이 재빠르게 주방으로 달렸다. 잠시 후 더스턴의 주전 스트라이커이자 칩스피쉬의 주방 보조 베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끌려나왔다.
계약 당사자를 극적으로 대면시킨 필립이 짧게 하소연했다.
“썬 리 구단주님. 저희는 그제까지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 있었습니다. 영입 이야기는 미리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희성은 대답 대신 넋이 나가버린 찰리 쪽을 눈짓해 보였다. 의미는 명백했다.
[그랬으면 헤드코치 없이 경기를 치르셨겠죠.]
필립은 곧바로 수긍하는 것처럼 보였다. 찰리로서는 무척 슬펐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베리가 차분하게 말했다.
“뉴캐슬과의 경기에서는. 꼭. 뛰고. 싶습니다.”
베리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발음은 또렷했다. 그런데도, 찰리의 귀에는, 마치 꼭 찢고 싶습니다와 같은 발음으로 들렸다.
‘아니, 베리 이 미친놈아. 구단주님께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야.’
라고 꾸짖기에는, 너무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 팀 싫어합니까?”
“아뇨. 아주 좋아합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20번째로요.”
그러자 이희성이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잘 지낼 수 있겠네요. 그나저나··· 그 팀 상대로 뛰고 싶은 거면 꽤 열심히 해야 할 겁니다. 우리 팀 선수라면 누구나 그날 출전을 원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