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벗어던지는 순간 (1)
<밀란 더비도 물론 굉장했지만, 그래도 노스이스트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서는 멋진 태클을 성공시키면 마치 골을 넣은 것처럼 환호해 준다. - 얀 음빌바>
더비 매치가 언제나 그런 것처럼 오늘 경기는 시작부터 뜨거웠고, 우리와 뉴캐슬은 쉼 없이 서로 치고받으며 공방전을 펼쳤다.
선덜랜드의 자랑 잭과 요니가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중원 곳곳에서 뉴캐슬의 롱스태프 형제와 격돌했고, 톰슨이 언제나처럼 든든하게 뒤를 받쳤다.
우리 팬들 또한 목소리를 높여 격려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초반의 치열한 공세 속에서, 먼저 어태킹 서드로 공을 전진하는 데 성공한 팀은 우리 선덜랜드였다.
잭과 이 대 일 패스를 주고받으며 중원을 빠져나온 요니가 날카로운 패스를 오른쪽 측면으로 보냈다. 스티븐 대신 윙포워드로 출전한 베리가 기다리는 방향으로.
순간 경기장이 폭발할 것처럼 끓어올랐다.
베리는 주목받는 기대의 신인이자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역이었고, 오늘 몰려온 게이츠헤드 팬들의 아이돌이었기 때문이다.
귀가 먹먹해질 것 같은 함성 속에서, 베리는 자신을 마크하는 뉴캐슬 선수와 경합했다. 어깨를 마주한 순간 사이드라인 밖으로 밀려났지만, 그래도 베리는 넘어지지는 않았고 공 또한 앞으로 확실하게 전진시켰다.
그저 달리는 궤도가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일직선에서 반원으로.
“엄청 빨라!”
희주의 외침처럼, 베리의 질주는 빨랐다. 상대의 뒷공간이 완전히 열릴 정도로. 덕분에 불과 몇 초 전까진 보이지 않던 빈틈이, 뉴캐슬 진영에 가득 생겨났다.
정말로 인상적인 돌파였지만, 마무리는 아쉬웠다. 각을 좁히기 위해 달려나온 골키퍼를 피해 밀어낸 슛이 크로스바를 스치듯 옆으로 아주 살짝 벗어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감쌌고 희주는 발을 굴렀다.
“짜증 나! 골대를 조금 옆으로 옮겼어야지!”
“어··· 그러게. 조엘이 잘못했네.”
물론 조엘이 진짜로 골대를 옮겨놨다면 경기장 규격 위반으로 문제가 될 게 뻔하다. 뭐, 희주도 이제 이 정도는 알 테니, 방금 드립은 아쉬움의 표현이다. 첫 플레이를 골로 연결했다면 정말로 인상적인 데뷔전이었을 테니까.
한편, 위기도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눈에 띄던 선수는 뉴캐슬의 77번, 신인 앨런이었다.
톰슨의 평가에 따르면, 과격한 행동으로 주목받지만 사실은 실력으로 평가받아야 할 선수라는데, 사실은 나도 동감이었다.
앨런의 이마에는 숫자 220이 선명하다.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기에 손색이 없을 재능, ‘그 팀’ 유스 출신만 아니었다면, 한 번쯤 영입을 고려했을 정도다.
게다가, 앨런은 뉴캐슬 아카데미를 거쳐 곧바로 프로로 데뷔한 선수다. 터너나 베리와 달리, 어릴 때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뜻이다.
아마 어려서부터 재능을 꽃피우기 쉬운 스타일의 선수였겠지. 그리고 어릴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뛰면서 좋은 관리를 받았던 앨런은, 비교적 일찍부터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골은 내주지 않을 거야.”
나는 우리 진영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단하게 서 있는 에디와 이고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몇 년간 프리미어리그의 벽으로 군림할 센터백 듀오의 모습이.
* * *
유니폼 세레머니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주로 결승골에서 시도하고, 최악의 경우는 동점골이라도 괜찮지만, 아무튼 지고 있지는 않아야 한다.
둘째, 더비 라이벌 상대로, 상대팀 팬들을 향해서 한다. 바로 이 두 번째 특성 때문에, 사실상 유니폼 세레머니는 원정팀 전용 옵션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오늘 홈팀 선덜랜드의 유니폼 세레머니는 없지만, 원정팀 뉴캐슬은 할 수 있다. 에디의 생각으로는, 무척 불공평한 상황이었다.
‘무실점을 끝까지 유지하거나··· 아니면 두 골 정도 미리 넣어야겠네. 그래야 유니폼 세레머니 안 당하지.’
괜히 혼자 피식거리는 에디를 향해, 이고르가 슬쩍 물었다.
“경기중이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유니폼 벗어 던지는 상상. 그거 보면 우리 주장이 아주 미쳐 날뛸 게 뻔하거든. 덤으로 요니도.”
의미를 알아차린 이고르가 웃었다.
“그러면 선제골 먹는 것도 괜찮겠는데. 우리 캡틴은 유명한 클러치 플레이어니까.”
이고르는 일단 덩치가 좋고 표정이 사나운 데다 머리까지 완전히 밀어버려서, 겉보기엔 무슨 암살자 내지는 종합격투기 선수처럼 생긴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면 농담을 즐기는 유머러스한 성격이라, 파트너 에디와는 궁합이 잘 맞는 편이었다.
에디가 마주 웃었다.
“일단 한 골 내주고, 요니하고 주장을 돌아버리게 만들어서 세 골쯤 뽑자는 거지? 엄청 솔깃하네.”
“90분에 삼백 퍼센트. 완벽한 수익률이지.”
“완벽하긴 한데··· 그 꼴 보고 싶어? 나는 좀 싫은데.”
에디는 요크셔험버 출신으로, 프로 데뷔는 셰필드에서 했던 선수였다. 타인위어 특유의 지역 감정은 에디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몇 년째 지내다 보니, 에디는 심정적으로는 선덜랜드 출신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거, 세뇌당한 거네.”
“그럴지도. 사실 팀에선 매번 다큐멘터리 찍어서 틀어대고, 팬들은 경기마다 이렇게 소리 지르는데···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아니고?”
그때, 절묘하게도 선덜랜드 팬들은 엘비스의 곡을 응원가로 부르기 시작했다.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선덜랜드의 센터백 듀오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비슷해. 듣자니 사랑도 정신병의 일종이라더라고.”
그리고, 둘은 동시에 전방을 노려보았다. 이제 막 하프라인을 넘기 시작한 검고 흰 뉴캐슬의 유니폼을.
“이고르, 솔깃한 플랜은 취소. 오늘은 무실점 가자.”
“그럼 더 솔깃한 플랜이 있는데, 에디··· 쟤들 얼굴을 일그러지게 만드는 거지.”
* * *
희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라인이 너무 높은 거 아닌··· 가?”
베넷과 브루노가 모두 전진한 상태였고, 최종 수비라인을 이루는 에디와 이고르까지 평소보다 올라갔다. 즉, 희주의 말대로 라인이 높긴 하다.
무심코 눈썹을 꿈틀거리는 사이, 뉴캐슬의 매튜가 공을 길게 걷어찼고, 77번 앨런이 거칠게 파고들었다.
“안 돼!”
희주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을 넘겨받은 뉴캐슬의 앨런은, 터치 몇 번으로 순식간에 골문 앞에 쇄도했고, 달려나오는 하퍼의 머리 위로 침착하게 칩 샷을 넣으며 우리 골네트를 흔들었다.
“짜증 나! 하필이면 저 새··· 저거한테 골 먹히고!”
희주가 광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앨런은 세미프로팀 상대로도 페넌트를 집어 던지는 모욕적인 영상을 찍어 SNS에 올린 선수다. 더비 라이벌인 우리 상대로 득점할 경우 무슨 짓을 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실제로 앨런은 곧바로 우리 스탠드 쪽으로 달려왔고, 유니폼을 벗어 들려는 것처럼 손을 상의 아랫단에 가져갔다.
“아깝네. 빨리 벗었으면 좋았을 텐데.”
“응?”
희주의 의문과 동시에, 앨런의 몸이 마네킹처럼 우뚝 멈췄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뒤편, 부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프사이드야.”
희주의 얼굴에 안도와 당황, 짜증이 복잡하게 섞였다.
“그럼 빨리 좀 말하지!”
“확신은 없었거든. 조금 전까지는.”
그만큼 아슬아슬한 타이밍이기는 했다. 돌파당한 직후에도 무척이나 침착했던 우리 센터백 듀오가 아니었다면, 나도 이렇게 냉정함을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최고의 한 방이네.”
더비 라이벌 상대로, 수비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준 센터백 듀오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그 함성 속에서, 에디와 이고르는 지독할 만큼의 냉정함을 발휘했다. 아주 살짝 턱을 치켜들긴 했지만, 딱히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선언하는 것 같다.
[저런 애송이 한 명 속이는 게 뭐 대단하다고.]
돌이켜보면 그 장면이 오늘 경기의 분수령이 되었다.
우리 센터백 듀오의 ‘한 방’에 농락당한 앨런의 움직임이 감정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플레이하는 앨런 덕분에, 뉴캐슬의 플레이에서 조직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반면 우리 선수들은 기세를 탔고, 팬들의 외침 또한 거세졌다.
그 열기 속에서, 전반 40분 마르틴이 그림 같은 돌파를 성공시켰다. 비록 경기 초반의 베리처럼 저돌적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훨씬 화려한 움직임이었다.
특유의 플립 플랩은 물론, 마무리까지 아주 완벽했다. 굳이 칩샷을 사용한 이유는, 앨런의 플레이를 의식했던 거겠지.
[선덜랜드 1 - 0 뉴캐슬]
그리고 추가골은 요니의 몫이었다. 수비라인 뒷공간에 떨어진 톰슨의 패스를 따라 측면으로부터 파고든 요니는, 달려드는 골키퍼를 피해 공을 뉴캐슬 골대에 밀어 넣었다.
[선덜랜드 2 - 0 뉴캐슬]
득점을 성공한 직후, 요니는 심술 맞은 표정으로 뉴캐슬 진영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두 손가락으로 몸 앞에 작은 사각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박.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희주가 감탄하는 사이, 요니는 머리 위로 집어 던지는 제스처로 세레머니를 마무리했고, 경기장은 폭발할 것처럼 뜨거워졌다.
If you hate Newcastle clap yer hands.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 * *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터너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르틴과 요니의 플레이가, 그리고 골 세레머니가 가슴을 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로 대단한 팀에서 뛰게 된 거구나.’
동료들의 대단한 플레이에 가벼운 전율마저 느껴지는 한편,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과연, 자신이 이 팀에서 뛸 수 있는 선수인지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전반 초반, 베리의 슛이 빗나간 것도 원인이었다. 단순히 그냥 빗나간 게 아니라, 뉴캐슬 골키퍼의 절묘한 움직임에 휘말린 것이 컸다.
더스턴에서 함께 뛰었기에, 터너는 베리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베리가 완벽한 돌파를 해내고도 골을 넣지 못했다면, 지금의 터너 역시 같은 상황에서 득점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터너에게 가장 놀라운 건, 비슷한 상황에서 요니는 아주 깔끔하게 골을 성공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감정은···.
‘결국 우리 힘만으로 뉴캐슬에게 갚아줄 수는 없었던 거구나.’
“분한가?”
귓가에 울리는 로저스의 목소리에, 터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라운드를 응시하는 감독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는 아직 어린 선수고,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선수다.”
바꿔 말하면 지금은 전력으로 기대할 수 없는 선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터너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고, 선덜랜드 벤치에는 로저스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잘 들어라. 이 이야기는 딱 한 번만 할 테니까··· 우리는 너에게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널 데려온 거다.”
“··· 네.”
“하지만, 앞으로의 네가, 지금 저 사이드라인 안에서 뛰는 동료들과 대등해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건, 결국 네게 달린 문제니까.”
로저스는 줄곧 그라운드를 응시한 채였고, 터너와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덕분에 감독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감독은, 절대로 무책임한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는 것은.
선수로서의 잠재력에는 기대하고 있지만, 그래도 결국은 자신의 노력에 달린 문제라는 말이 터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명장의 말에는 힘이 있다는 말을 실감하며, 터너는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네.”
[바스티아노 라파, 쐐기골입니다! 그림 같은 다이렉트 발리! 선덜랜드가, 또다시 뉴캐슬을 격침하며 타인위어 더비에서 3연승을 기록합니다!]
선덜랜드는, 그렇게 뉴캐슬을 격침했다.
[선덜랜드 3 - 0 뉴캐슬]
그리고 그날, 터너는 곧바로 짐을 꾸려 크로아티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반시즌 동안의 임대만으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최대한 저 대단한 동료들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기량을 키우고 싶었다.
* * *
홈 경기를 마치자, 항상 그랬던 것처럼 메시지가 왔다. 바에 불러내는 브라이언의 메시지에,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블랙캣츠로 향했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브라이언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톰슨은?”
“쉬고 싶대. 아무래도 경기 끝낸 직후니까.”
“하긴.”
오늘의 톰슨은 훌륭했다.
눈에 띄는 활약은 공격진이 했고, 승부를 가르는 명장면은 센터백 듀오가 만들었지만, 경기가 이렇게 일방적인 결과로 흐른 건, 분명 톰슨의 공이었다.
중원을 완벽하게 장악하며, 상대의 반격을 봉쇄했으니까. 암, 이런 날은 쉬게 해 줘야지.
자리에 앉아 그놈의 ‘썬 스페셜’을 주문하며, 나는 브라이언에게 슬쩍 물었다.
“베리는 좀 어때?”
“생각이 복잡해진 모양이야. 사실은 나도 복잡하고.”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통하는 돌파력은 기대 이상이었지만, 골 결정력은 기대에 살짝 못 미쳤다. 앞으로 베리를 써야 하는 브라이언으로서는 조금 골치가 아플 것이다.
“결국 선수 본인이 한 꺼풀 벗어던져야 하는 거겠지만, 여러모로 배려해 줘.”
당분간은 전술적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베리가 잘하는 플레이 위주로 활약할 수 있도록.
그리고 강도 높은 훈련도 병행해야겠지. 베리는 세미프로 출신이고, 따라서 썩 좋은 트레이닝을 받지는 못했을 테니.
득점 감각은 어느 정도 천부적인 자질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슛 기술은 후천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영역이다. 지금의 선덜랜드라면, 베리를 충분히 잘 키워낼 수 있다고 믿는다.
브라이언이 잔을 들었다.
“그래. 모처럼 좋은 선수를 구해 줬으니 잘 키워야지. 맡겨 줘.”
웃으며 대답했지만, 브라이언의 얼굴 한구석에는 씁쓸함이 매달려 있었다. 조금 전 술을 들이켰기 때문이겠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님을, 나는 눈치채고 있었다.
잠시 후, 자신의 술잔을 비운 브라이언이 나직하게, 하지만 힘차게 선언했다.
“시즌 마지막까지, 최고의 경기력을 뽑아낼 거야. 아무튼 올 시즌의 성적은 감독님의 커리어가 되니까.”
“그래.”
나 또한 잔을 비웠다.
머지않아, 우리는 챔피언스 리그에 나가게 될 것이다. 계획대로 된다면 앞으로 반시즌 후의 일이 된다. 우리를 가리켜 빅 7이라고 부르는 목소리도 늘어났다. 그러니까···.
다음 단계를, 준비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