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벗어던지는 순간 (2)
리미트리스 본사에 전화를 넣자, 곧바로 친숙한 음성이 들렸다.
[보이스피싱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네 생일은 모른다니까.”
[슬슬 알아주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이렇게 나오면 내가 너무 무심해 보이겠지만, 사실은 이유가 있다. 다미에게는, 민증에 적힌 생일과 전혀 무관한 날짜가 자기 생일이라고 우기는 버릇이 있거든.
하다못해 뭐 음력이라거나, 아무튼 연관성이 있는 날짜여야 외우든가 하지.
가벼운 한숨 소리가 났고, 언제나처럼 우리는 영상통화를 시작했다.
“리미트리스 명의로 스폰서를 맡을 거야.”
용건을 꺼내자 다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정말 멋진 생각이세요!]
그렇게까지 환호할 일인가 싶어서 살짝 고민하는 사이, 다미의 입이 속사포처럼 움직였다.
[테슬라와 넷플릭스도 좋은 기업이지만, 그래도 리미트리스처럼 펑펑 돈지랄 해줄 회사는 아니죠. 전에는 구단주가 소유한 회사라서 피하시는 느낌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레스터도 어차피 마찬가지 조건인 거잖아요? 이제는 유에파가 시비 걸 일도 없고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선덜랜드 유니폼 스폰서 계약 건으로 연락하신 것 아니었나요?]
“아니.”
고개를 저은 다음, 재빨리 덧붙였다.
“테슬라에도, 넷플리스에도 아무 불만 없어. 우리 유니폼 스폰서는 앞으로도 계속 두 회사와 계약하고 싶어.”
다미의 성격을 고려하면, 혹시라도 내가 유니폼 스폰서에 불만을 품었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리미트리스의 넘버 투가 넷플릭스나 테슬라를 박살 내겠다고 날뛰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 슬쩍 못을 박아 두었다.
[네. 그러면··· 리미트리스는 어느 스폰서를 맡게 되는 거죠?]
“대회. 축구 대회의 스폰서를 맡으려고.”
[리미트리스컵이 생기는 거군요. 멋져요!]
“그보다는 리미트리스 리그가 아닐까 싶은데.”
다미의 눈이 영상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반짝이기 시작했고, 상체는 마치 전화기 안으로 다이빙이라도 할 것처럼 기울어졌다.
[역시 사장님이세요. 그래서 미리 유에파를 때려잡으신 거군요!?]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마침 월가 쪽에서 자기들 멋대로 무슨 축구 리그인가를 만들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라고요. 슬슬 손 좀 봐 줄까 싶던 참이었어요. 그쵸, 하려면 우리가 해야죠. 당장 추진할까요?]
“아니, 그런 거 하려는 거 아니야.”
나는 다미를 제지했다. 아니, 슈퍼 리그 안 한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건지.
[그러면요?]
“유소년 대회에 투자하고 싶은데.”
[아하.]
내 의도를 파악한 다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회가 여러 개 필요하겠네요. 브라질, 아르헨티나··· 또 축구 잘하는 나라가 어디 어디죠?]
“여기저기 있겠지.”
[사장님이 가장 잘하시는 투자는 사람 키우는 거였죠.]
“뭐,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묻히는 선수가 없었으면 해서.”
이번에 우리가 영입한 베리, 그리고 터너는 하마터면 그대로 묻힐 뻔한 재능이었다. 더스턴이 FA컵 3라운드에 올라오는 기적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이 프리미어리그 팀의 눈에 띄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정도 실력자가 8부 리그 세미프로로 평생 머물지야 않겠지만, 눈에 띄는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어린 나이부터 체계적인 관리를 받을 수 있을 테니.
[믿어요. 사장님은 그런 분이니까··· 다만.]
통화를 끝내기 전, 다미는 무척이나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장 뛰어난 재능을··· 선덜랜드가 확보하는 것도 잊지 않으시겠죠.]
“그건 그렇지.”
순순히 시인한 다음, 슬쩍 덧붙였다.
“리미트리스가 널 확보한 것처럼.”
다미는 퍽 행복해 보였다.
* * *
한편, 뉴캐슬과의 데뷔전 이후 베리는 꾸준히 기용되며 기회를 받았다. 라이트윙, 레프트윙, 처진 스트라이커까지 포지션을 옮겨 다녔고, 인상적인 돌파 장면도 여러 차례 만들어 냈다.
- 지난번엔 스티븐 대신 오른쪽으로 뛰더니, 이번엔 왼쪽이네? 이래도 됨?
ㄴ 베리는 양발잡이니까.
ㄴ 대박이네.
대부분의 선수가 양발을 능숙하게 쓰는 한국과 달리, 유럽 선수들은 대부분 한쪽 발만 쓰도록 훈련받는다. 단점을 메우는 것보다 장점을 키우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유럽 특유의 육성 철학 때문이었다.
단, 베리는 유소년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었기에, 양발을 능숙하게 쓸 수 있게 스스로 연습했던 모양이다.
- 도대체 이런 선수가 그동안 왜 빛을 못 본 거야?
ㄴ 기회의 문제 아니었을까?
하긴, 대부분의 프로 축구 선수는 어린 시절부터 주목을 받고, 유소년 아카데미를 거쳐 프로 선수로 데뷔하는 게 표준 코스다.
그 과정에서 밀려난 선수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색안경을 끼고 보기 마련이다. ‘축구를 못하니까 밀려난 거겠지.’ ‘걔가 그렇게 잘했으면 진작에 1부 리그에서 뛰었겠지.’라는 식으로.
- 이런 선수를 한 번에 발굴하다니, 역시 투자의 신.
- 이런 안목이 있으니까 투자를 하는 거구나.
물론 호의적인 의견만 있었던 건 아니었고, 비판적인 이야기도 많았다.
- 돌파력은 인상적이지만 좀 더 지켜봐야 할 듯?
- 공격수가 공격포인트 제로라는 건 아무래도 좀···.
“한국에서는 빠쓰 확정이라고 하던데··· 빠쓰? 맛탕 말하는 거야?”
SNS 반응을 체크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한 희주를 향해, 나는 떨떠름하게 덧붙였다.
“어··· 대충 그렇지.”
실제로는 맛탕과 아무 상관이 없지만, 굳이 내 입으로 우리 선수를 비하하는 단어를 해설하고 싶진 않았다.
아쉽게도 내 연기력은 희주를 속여먹기엔 조금 부족했고, 희주의 검색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의미를 알아차린 희주가 울상을 지었다.
“빠른 쓰레기라니··· 너무해.”
유일한 위안은, 구단 내에서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 최소한 베리가 이 멸칭을 알아들을 리 없다는 것뿐이었다.
* * *
구단주의 나라,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생겨난 멸칭을 베리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공격 포인트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미드필더라면 혹시 또 모르지만, 베리는 공격수였고, 결과로 평가받는 포지션이었다. 득점을 올리는 게 일이고, 하다못해 어시스트라도 만드는 게 업무였다.
공격 포인트를 만들지 못하면 계속 저평가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공격 포인트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 또한.
‘나는, 기본기가 너무 부족하구나.’
8부 리그에 머물 때, 베리를 막아낼 선수는 많지 않았다. 세미프로 골키퍼는 베리의 슛에 쩔쩔맸고, 센터백은 감히 코스를 가로막지도 못했다. 득점을 위해 별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뉴캐슬의 골키퍼는 베리에게는 마치 산과 같은 존재감을 뽐냈고, 일 대 일 찬스에서도 빈틈을 내보이지 않았었다.
팀에서는 곧바로 대책을 마련했고, 전담 코치를 붙여 주는 식으로 대응했다.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하는 베리의 곁에서, 마르틴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베리 드리블, 이미 훌륭하다. 베리 베스트.”
정작 그렇게 말하는 마르틴 본인의 개인기는, 베리와 달리 무척이나 깔끔했다. 마치 축구 교본을 만든다면 모범으로 실릴 법한 동작을 본 베리는 제대로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옆에서 샐리가 끼어들었다.
“마르틴은 그냥 다른 세계 선수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해. CG 내지는 게임 캐릭터 같은 거라고.”
“하긴, 선덜랜드의 10번이니까요.”
유럽 축구, 특히 클럽 축구에서는 등번호의 의미가 점차 퇴색되고 있지만, 그래도 축구에서 10번은 아직까지 에이스의 번호로 통한다.
선덜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번호는 9번이지만, 10번의 의미 또한 가볍지는 않았다. 실제로 마르틴 이전에 10번을 쓰던 선수는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가 낳은 최고의 재능으로 꼽히는 헨도였다.
“11번을 쓰는 너도 꽤 기대받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이적 직후 세 경기 연속 선발이잖아?”
샐리의 위로를, 베리는 조금 다른 쪽으로 해석했다.
11번은 전통적으로 발 빠른 측면 공격수의 상징이고, 선덜랜드는 그를 좌우 윙포워드로 한 차례씩 기용한 적이 있다.
‘나를 주로 측면에서 쓸 생각이구나!’
비록 익숙한 역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측면은 베리에게 꽤 합리적인 위치처럼 보였다.
일단 발이 빠르고, 프리미어리그 수비수들 상대로도 종종 드리블 돌파를 성공시키는 돌파력을 가졌지만, 대신 골 결정력은 떨어지는 선수였기에.
그날부터 베리는 팀 훈련이 끝나자마자 분석실로 향했고, 마르틴과 스티븐의 영상을 마르고 닳도록 돌려 보기 시작했다.
‘저런 플레이는 도저히 못 하겠는데.’
마르틴과 스티븐 양쪽 모두 베리가 따라하기엔 쉽지 않은 선수들이었다. 마르틴의 깔끔한 개인기는 물론, 스티븐의 피지컬 또한 베리가 갖추지 못한 요소였기에.
그런 베리에게, 브라이언 코치의 조언이 이어졌다.
“사실, 네게 가장 어울릴 스타일은 따로 있는데··· 선덜랜드의 9번.”
“바스티아노··· 선수 말입니까? 터너라면 몰라도, 제게는 불가능해 보이는데요.”
베리가 말한 것처럼, 사실 베리와 바스티아노는 타입이 전혀 다른 공격수였다. 바스티아노는 만능형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발이 아주 빠르지는 않은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거구이기 때문이다.
반면 베리는 스피드를 무기로 삼는 돌파형 포워드다. 필연적으로 바스티아노와 베리의 스타일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적하자, 브라이언의 얼굴에 쓴웃음이 피었다.
“바스티아노 말고, 지금은 은퇴한 선수인데, 레프트 윙포워드였지.”
“마르틴의 포지션이군요.”
“하지만 마르틴과는 다른 타입이었어. 화려한 드리블은 하지 못했거든.”
조금 그립다는 표정을 지은 브라이언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쓸 줄 아는 페인트 동작은 딱 하나였고, 테크닉은 수비 한 명을 제치기에 필요한 만큼만 익혔지. 하지만 양발 모두를 능숙하게 썼고, 문전에서는 여느 스트라이커 못지않게 침착했어.”
“그건···.”
베리는 침을 삼켰다. 순간적으로 수비를 딱 한 명 제치는 정도의 돌파력이라면, 지금의 그에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베리 자신 역시 양발 모두를 능숙하게 쓰는 선수였다. 유일하게 갖지 못한 건 마무리 능력이지만···.
바꿔 말하면, 마무리 능력만 갖추면 된다는 뜻이었다.
“포지션과 상관없이, 나는 네가 그런 플레이스타일을 갖추길 원해. 너한테 가장 어울릴 스타일이라고 믿어.”
베리 또한 주저 없이 대답했다.
“꼭 배우고 싶습니다. 혹시 그 선수의 영상을 구할 수 있을까요?”
“미안하지만 이제는 영상을 구할 방법이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베리는 브라이언의 입가에 떠오른 웃음기를 확인했다. 장난스러운, 동시에 그리움과 아련함이 공존하는 미소를.
“아침 연습에 나가 보면 도움이 될 거야.”
그런데도, 브라이언 코치의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슬퍼 보였다.
* * *
여느 때처럼 새벽같이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 들른 나는, 무심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갈수록 사람이 늘어나는 것 같은데요. 기분 탓이길 바랍니다만.”
크리그와 요니가 주로 차지하는 1번 그라운드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은 2번, 3번 그라운드에도 사람이 보였다. 이쯤 되면 정규 훈련 시간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런데도 리지는 뭐가 좋은지 해맑은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하핫. 그만큼 다들 부지런하다는 증거 아닐까요?”
“부지런한 건 좋지만, 오버워크는 곤란합니다.”
“그러진 않을 거예요. 요즘은 메디컬 팀에서도 관리하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한쪽 구석에 메디컬 팀 스태프의 모습이 눈에 띈다. 무심코 쓴웃음을 짓는 나를 향해, 리지가 웃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베리 선수는 브라이언 코치의 허가를 받았다고 했고요.”
이 인간이 진짜. 예전 크리그 때는 그래도 말리는 척이라도 하더니만.
“그럼 오늘은 돌아가야겠군요. 선수들의 훈련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뇨, 썬. 가능하면 9번 그라운드를 이용해 달라고 하던데요. 브라이언 코치가요.”
“9번이요?”
영문 모를 이야기에 나는 무심코 턱을 쓸었다. 3번 그라운드 이후부터는 특수 세팅이라서, 아침 연습 때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9번에는 이미 베리가···.”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브라이언의 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에. 동시에 리지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글쎄요, 썬. 저는 선수 육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 베리를 윙포워드로 쓰고 싶어진 거 아닐까요?”
“아니, 프로 데뷔도 못 한 사람보고 1군 선수 연습을 도와주라는 게 대체 말이나···.”
“그래도 슈팅 솜씨는 상당하던데요.”
이번 대답은 등 뒤에서 들렸다. 부드러운 저음, 내게는 너무나 친숙한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골키퍼 장갑을 낀 페르난데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실은 저도 브라이언 코치님께 부탁을 받았습니다. 원래는 하퍼나 리델을 투입하고 싶었지만, 컨디션 관리 문제가 있어서 대신 제게 부탁한다더군요.”
“브라이언, 이 인간이 정말···.”
핸드폰을 꺼내, 조용히 메시지를 보냈다. 이따 보자고.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야근을 밥 먹듯 하는 브라이언의 특성상, 아직 자고 있을 게 뻔했다··· 혹시 일어났더라도 아마 시치미를 떼겠지만.
조심스럽게 오른발에 힘을 넣어 잔디의 감촉을 확인하면서, 나는 대답했다.
“어쩔 수 없군요. 조금 어울려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