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벗어던지는 순간 (3)
구단주에게 한때, 선수였던 과거가 있었음은 베리도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 출신으로, 13년 만에 돌아와 팀을 구해낸 선덜랜드 구단주의 일화는 영국 축구계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나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거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축구선수로서 둘의 커리어는 180도 달랐다. 이희성은 해외로 축구 유학을 와서,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 들어갈 정도의 엘리트였지만, 끝내 프로가 되지는 못한 채 선수의 꿈을 접어야 했다.
반대로 베리는 유소년 시절에는 쓰라린 실패를 겪으며 하부 리그를 전전했지만, 마침내 프로가 된 케이스에 해당한다.
이렇게만 써 놓으면 베리의 인간승리, 그리고 조숙한 천재의 흔한 실패담처럼 보이지만, 구단주의 사연에는 조금 특별한 점이 있음을 베리는 알고 있었다. 팀에 몸담고 난 다음에 비로소 보이게 된 것들이지만···.
유소년 시절의 일이지만, 눈앞의 사내는 9번 등번호를 쓴 적이 있다. 구단 최고 레전드가 쓰던 번호를 유소년 선수에게 달아주는 의미는,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덜랜드의 프레스팀장 애니는 자신이 만나본 모든 선수 중 가장 모범적인 인물로, 유소년 시절의 이희성을 꼽았다. 애니가 페르난데스, 톰슨과도 같이 지내봤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고평가였다.
정작 구단주 본인은 떨떠름한 반응이었지만.
“프로 데뷔도 못 한 처지에, 1군 선수 앞에서 공 차려니 긴장이 되네요··· 그래서 뭘 보여주면 되겠습니까?”
구단주의 질문에, 베리는 곧바로 대답했다.
“슈팅을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 지금 페르난데스 상대로 페널티킥 차라는 소린 아니죠? 선수도 아닌 사람한테 너무 가혹한 요구인데.”
그러자 옆에서 페르난데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괜찮습니다. 구단주님. 저도 이제 선수 아니니까요.”
“···얼마 전까지는 선수셨죠. 현역 시절엔 월클이었고요. 아, 페널티킥 자신 없는데.”
베리는 곧바로 대답했다.
“꼭 PK는 아니라도 좋습니다. 자신 있는 동작이라면 뭐든지 괜찮습니다.”
그러자 구단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베리는 머지않아 이 구단주가 유소년 시절 관계자 사이에서 고평가받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잘하시네요. 깔끔한데요.”
구단주의 유일한 개인기는, 안쪽으로 한 번 접으며 슛, 흔히 윙포워드 매크로라 불리는 동작이었다.
다른 개인기는 하지 못한다며 선을 그었기에 확인하지 못했지만, 베리가 보기에 매크로 슛 하나만은 프로 수준에 가까웠다. 축구를 그만둔 요즘까지도 기량이 별로 녹슬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대체 예전에 얼마나 빡세게 연습했던 거야.’
게다가, 구단주는 선수를 그만둔 지금까지도 이른 새벽부터 훈련장에 나와 자발적으로 연습을 하는 인물이다. 그러니, 기량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구단주님은 축구를 정말로 좋아하시는군요.”
그러자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구단주를 하고 있는 거죠.”
그렇게 삼십 분쯤 공을 찼을 무렵, 구단주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폰을 확인하자마자, 구단주는 좀 처리할 문제가 있다고 말하며 철수했다.
처리가 어째 ‘처리’처럼 들린다는 부분이 살짝 신경 쓰였지만, 그것만 빼면 베리에게는 퍽 완벽한 시간이었다.
그날부터 베리는 매일, 아침 연습에 참여했다. 비록 구단주는 본업에 바빴기에 빠지는 날도 있었지만, 다른 선수들에게도 배울 점이 많았다.
크리그의 예리한 슛이나 바스티아노의 탁월한 기량, 해리슨의 패스나 요니의 오프 더 볼 움직임은 베리의 기량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골키퍼가 페르난데스라는 점도 베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진작에 은퇴한 골키퍼 상대로 일 대 일 찬스라면, 당연히 넣어야지. 다시 차 봐.”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페르난데스 상대로 득점을 노리는 것은, 슛에 자신이 없는 베리에게는 퍽 가혹한 미션이었지만, 동시에 소중한 자산이 되기도 했다.
페르난데스는 틀림없이 역사상 손꼽힐 레전드에 속한다. 비록 은퇴한 지금의 기량은 전성기 시절보다 쇠퇴했지만, 월드클래스 골키퍼 특유의 아우라와 존재감만은 여전했다.
그래서일까.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프리미어리그 골키퍼들이 조금 만만해 보이는데.’
여전히 골을 넣지는 못했지만, 베리의 움직임에는 점차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 * *
요 며칠은 정말로 숨 가쁘게 지나갔다. 처리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아서.
프로젝트의 규모로만 따지면 리미트리스 유스리그 준비가 가장 큰 일이었지만, 사실 그쪽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다미에게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사실, 규모는 작아도 내가 직접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훨씬 번거롭다. 예를 들면, 베리의 아침 연습 문제로 브라이언을 ‘처리’하는 업무 같은 게.
그리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챔스 결승전을 유치하는 문제도 남았고.
흔히 챔스 결승전을 치르기 위한 조건으로 유에파 회원국 40개국, 리그 내 15개 팀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조건 자체는 공식적으로 선덜랜드가 채우는 게 아니다. 축협이 채우는 거지.
즉,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챔스 결승전 경기장으로 신청하는 주체는 우리 선덜랜드가 아니라, 축협이다.
물론 축협 내부에서는 당연히 여러 팀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칠 테니, 15개 팀의 동의가 필요한 것도 맞는 말이다. 일종의 내부 경선 형태가 되겠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리모델링을 주관한 파퓰러스 수석 건축가, 타일러가 턱을 쓸었다.
“웸블리를 논외로 치면, 결국 우리 경기장이 에미레이츠, 핫스퍼, 그리고 올드 트래포드를 능가하는 후보인지가 관건이겠군요.”
카테고리 4 인증을 받은 경기장은 영국에도 여러 개가 존재하지만, 흔히 챔스 결승을 치를 만한 규모의 기준이 된다고 알려진 ‘육만 석 이상’의 잣대를 덧붙이면, 남는 경기장은 손으로 꼽을 정도가 된다.
언제나 정답인 웸블리를 논외로 치면, 타일러가 거론한 에미레이츠, 핫스퍼, 올드 트래포드 정도가 남겠지. 현시점에서,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경기장 리스트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밀레니엄 스타디움도···.”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희주를 향해, 슬쩍 고개를 저었다.
“거긴 웨일즈야. 관할이 다르다고.”
타일러 또한 내 의견에 찬성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리그는 같이 뛰지만, 적어도 축협이 굳이 웨일즈의 경기장을 밀어줄 이유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이번에 문제가 되는 곳은 저 셋이겠죠. 저는 특히 에미레이츠나 핫스퍼가 신경 쓰이는데요.”
타일러가 왜 이렇게 에미레이츠나 핫스퍼 스타디움을 의식하는지는 명확했다. 그 두 경기장은, 전부 파퓰러스에서 지었기 때문이다.
“에미레이츠나 핫스퍼에 밀리면 인사고과 깎일까봐 염려되는 거면, 내가 파퓰러스 지분을 좀 더 사죠.”
슬쩍 농담하자, 타일러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밀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파퓰러스의 수석 건축가입니다. 저보다 축구장 설계를 잘하는 사람은, 적어도 파퓰러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정하지만, 타일러가 수석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우리 담당자로 지명하기 전에 이마를 전부 확인했거든.
“다만, 그렇다고 지금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에미레이츠나 핫스퍼 스타디움을 압도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타일러 씨 말이 맞아. 입지조건이나 네임밸류가 더해지면, 불리하다고 생각하는데.”
“신경 안 써도 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에미레이츠나 핫스퍼는 우리보다 나을 게 없는 후보니까.”
눈이 물음표 상태가 된 타일러와 희주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덧붙였다.
“축협 가는 날, 시장님 일정을 좀 맞춰달라고 해.”
* * *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챔스 결승전 유치 문제를 놓고, 축협은 당연히 프리미어리그의 각 팀을 전부 소집했다.
대부분은 사장이나 단장이 참석했지만, 우리와 뉴캐슬의 경우는 사이좋게 구단주가 출석했다. 이것도 혹시 타인위어 전통인가 내심 의심하는 사이, 뉴캐슬 구단주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내 찬성표를 받을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 안 하시겠지.”
예상했던 반응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네, 기대도 안 했습니다.”
보란 듯 여유롭게 웃어준 다음, 슬쩍 덧붙였다.
“그나저나, 챔스 결승전은 관광객 유치 효과가 상당하죠. 몇천만 유로의 경제적 효과가 생긴다고 할 정도로요. 시티 오브 선덜랜드가 소화하기엔 너무 큰 규모라 뉴캐슬어폰타인으로도 흘러갈 것 같지만···.”
뉴캐슬 구단주의 표정이 재미있어졌다. 희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솔깃함과 난처함이 반반무마니.’ 같은 느낌이다.
“어··· 그러니까···.”
“물론 구단주님이라면 이 정도는 이미 알고 계셨겠죠.”
“그래, 이미 알고 있었다구.”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려는 뉴캐슬 구단주를 향해, 슬쩍 덧붙였다.
“그리고 더비 라이벌을 겨우 돈 몇 푼으로 살 수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경제적 효과요? 당연히 거절하시겠죠. 암요.”
그러자, 옆에서 희주가 곧바로 한국어로 덧붙였다.
“···라고 거절하기엔 너무 큰 돈이었다.”
“시끄러워.”
나 또한 희주에게 한국어로 핀잔을 줬다. 그러니 알아들을 리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뉴캐슬 구단주의 얼굴은 볼만해졌다. 오죽하면 그가 대동한 구단주 비서가 낮게 속삭였을 정도로.
“아 진짜, 구단주 차이 심각하네.”
그렇게 내가 뉴캐슬 구단주를 침묵시키는 사이, 다른 쪽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아름다운 경기장이죠. 그리고 최근에는 공격적으로 증축했고, 내부도 파퓰러스에서 리모델링을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무척 완벽해졌다고 들었죠.”
혹시 아군인가 싶어서 솔깃해하는 희주와 달리, 내 표정은 냉담했다. 저 이야기를 꺼낼 팀은 정해져 있거든.
아스널 아니면 토트넘 관계자에 십 파운드 걸지.
“하지만, 그런 조건은 에미레이츠도 똑같습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파퓰러스가 시공했죠. 그리고 인지도도 훨씬 높고요.”
역시 아스널이네. 여기 오기 전부터 예상했던 반격에, 희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우월한 설비는 같은 건설사를 내세워 퉁치고, 상대적으로 부족한 인지도 싸움을 시도하는 것은 우리에겐 일종의 가불기에 해당하는 공격이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내용이기도 했기에, 나는 느긋하게 답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세상에는 에미레이츠와 마찬가지로 파퓰러스에서 지었고, 훨씬 더 인지도가 높은 경기장이 있습니다.”
참고로 핫스퍼 스타디움 아니니까 가만 좀 계세요. 토트넘 회장님.
“웸블리죠. 마침 에미레이츠와 같은 런던에 있고요.”
경기장의 인지도, 네임밸류라는 측면에서 웸블리를 능가하는 경기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축구의 성지이자, 런던의 경기장이 넘어야 할 산이다.
“웸블리는 이미 몇 번이나 챔스 결승을 유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면 잉글랜드에서, 챔스 결승은 오직 런던에서만 열린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맨체스터 정도가 예외였지만, 벌써 2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죠.”
눈치 빠른 인물 몇 명은, 슬슬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스널, 그리고 토트넘 관계자들이 차례로 입술을 깨물었고, 축협 회장··· 케임브리지 공작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지금 여러분께 묻고 있는 겁니다. 런던 이외의 다른 도시는 챔스 결승을 유치할 자격이 없는 거냐고요.”
순간적으로 주위가 조용해졌다. 오직 희주만이, 한국어로 속삭였다.
“이런 수법을 쓰다니··· 역시 공갈의 신.”
“공갈은 무슨.”
“아무튼, 근데 이러다가 괜히 올드 트래포드에 힘 실어주는 거 아니야?”
“맨유가 챔스 결승전 유치에 관심이 있다면 말이지.”
맨유의 홈, 올드 트래포드는 처음부터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쪽 구단주는 구단 재정을 곶감 빼먹듯 하기로 악명 높은 인물이다. 굳이 챔스 결승을 유치하겠다는 야망이 있을 리가 없다.
챔스 결승전을 홈에서 치르겠다는 야망이 있을 쪽은 따로 있지만, 적어도 오늘은 반대하지 않을 테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야망이 있을’ 팀 쪽에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구단주를 대신해서 나온, 맨시티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맨시티 사장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맨시티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지지합니다.”
그 시점에서 사실상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영국 축협의 후보로 확정된 셈이었지만, 우리는 나머지 절차도 착실히 수행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유에파에서 공식 인증한 카테고리 4 경기장으로, 완벽한 설비를 자랑합니다.”
희주의 브리핑에 맞춰, 화면에는 유에파의 공문이 떠올랐다.
[유일한 아쉬움은, 유에파의 평가 등급에 카테고리 5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음]
그래, 이러려고 카테고리 인증을 다시 받은 거지.
“또한, 선덜랜드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팀으로서··· 블라블라.”
희주는 침까지 튀겨가며, 우리가 얼마나 근본 넘치는 팀인지를 열렬히 설파했고, 그 과정에서 자료를 보지도 않은 채 술술 읊는 유능함을 과시했다. 요 며칠간, 거의 세뇌에 가까웠던 에이미의 교육 덕분이다.
“그리고 타인위어 지역의 기반 설비가 런던이나 맨체스터에 비해 부족하다는 우려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점은 꼭 지적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이 자리에는 시티 오브 선덜랜드 시장님을 모셨습니다.”
희주의 코멘트에, 축협 회장이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도시를 비판하면 곧바로 시장 귀에 들어간다는 시스템입니까?”
“아뇨, 왕세손 전하. 그보다는 절차의 편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건축 승인을 따로 요청하면 번거롭거든요.”
“즉, 뭐가 부족한지 지적하면···.”
“저희 오빠··· 흠흠, 저희 구단주가 즉시 건설할 겁니다. 그게 뭐 어렵다고요.”
시장의 표정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당혹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챔스 결승 경기장 후보로 무사히 선정되려면 당연히 지적을 받지 않아야겠지만, 지적을 받으면 심시티 치트 찬스가 생기니 고민스럽겠기도 하겠지.
“지적 안 받아도 투자는 할 테니 안심하시죠.”
슬쩍 귓속말해 두자, 시장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그렇게 우리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2년 뒤에 열릴 챔스 결승전 경기장으로 신청했다. 우리의 신청 소식에 다른 경기장은 대부분 자진사퇴를 고려했고···.
···유일하게 남은 경쟁 상대는, 포르투갈의 이스타디우 다 루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