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Passed Away (1)
<오늘 피치에서 내려왔을 때, 이 셔츠를 위해 모든 걸 바친 상태이길 - 올레 군나르 솔샤르>
이후 뉴캐슬은 결사적인 반격에 나섰고, 우리는 육탄 방어로 응수했다. 중원의 잭과 요니, 톰슨은 말할 것도 없고, 최전방의 베리까지 수비에 가담했다.
그렇게, 경기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고 최우수선수는 당연하게도 베리의 몫이었다.
[뉴캐슬은 베리 선수와 인연 깊은 상대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번에 셔츠 세레머니를 선보이셨습니다. 특별한 의도가 있습니까?]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온 질문에, 인터뷰를 지켜보던 나와 희주까지 살짝 움찔하고 말았다. 이전에 애니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베리는 세미프로 출신이고, 세련된 인터뷰 기술 같은 것을 따로 배운 적이 없는 선수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퍽 능숙하게 대처해 왔지만, 이런 곤란한 질문을 받고 보니 살짝 불안하다.
베리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향했다.
“그저, 앞으로 이 셔츠에 모든 걸 바치고 싶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럼, 언더셔츠의 메시지는···.]
“팬분들이 걸개를 준비하셨길래, 통일감을 주기 위해 급하게 준비한 것입니다.”
급하게 준비하긴 했지. 시설관리팀이.
아무튼 생각보다 훨씬 능숙한 대답이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곁에서, 희주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컨닝 페이퍼 준비했나봐.”
그러고 보니 오른손에 쪽지 같은 걸 들고 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애니가 윙크를 보냈다.
하긴, 지금은 프레스팀장이지만, 애니는 원래 기자 출신이었다. 그러니 기자들이 어떤 질문을 퍼부을지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
그리고 제일 까다로운 질문 몇 가지만 원만하게 대처하고 나면, 나머지는 베리가 알아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기량이 급성장했다는 의견에 대해서···.]
“선덜랜드는 최고의 설비와 스태프를 갖춘 팀입니다. 이곳에서 제 약점을 많이 보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자들은 조금 심심하다는 반응이었지만, 신인에게는 이 정도가 딱 좋다. 괜히 나중에 물어뜯기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인터뷰를 마치려던 베리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른 분들에게도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 *
이번 뉴캐슬전 승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겼다. 더비 라이벌에게 따내는 승리야 늘 새롭고 짜릿하지만, 이번에는 유로파리그를 앞두고 전력 누수를 최소화한 것이 가장 기뻤다.
컵 대회, 그리고 유로파를 주중에 하는 특성상, 우리는 이레 동안 세 경기를 치르는 피 말리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었는데, 심지어 그중 두 경기가 원정이라는 점도 부담스러웠다.
메디컬 팀이 선수들의 컨디션을 세심하게 살폈고, 브라이언은 일곱 번이나 라인업을 고쳐 가며 대비했다. 그리고 오늘 출전한 우리 선수들 또한, 교체 없이 90분을 소화하는 투혼을 보였다.
덕분에 우리는, 올 시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대회 유로파를 최상의 전력으로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곧바로 원정지원팀의 출동을 지시하자, 희주가 명랑하게 답했다.
“이미 리스본에 출동했지··· 이번엔 일하기 꽤 편하다던데?”
“리스본이니까.”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벤피카의 홈, 리스본은 지금까지 우리가 찾은 모든 해외 원정 장소 중에서도 가장 대도시에 속하는 곳이었다. 일국의 수도이니 숙박시설이나 인프라의 편의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근처에 훈련장을 구하기도 쉬울 것이다.
이스타디오 다 루스는 포르투갈 대표팀의 홈이니까.
“그것도 그건데, 벤피카가 생각보다 협조적인 모양이야. 숙소도 알선하고, 훈련장도 추천해 줬대.”
“흠.”
뜻밖의 이야기에 턱을 쓸어올리는 사이, 희주가 곧바로 덧붙였다.
“처음엔 원정지원팀도 의심했나봐. 밤에 숙소 근처에서 부부젤라 불거나, 훈련장에 몰카라도 설치한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런데 아직까지는 아무 이상 없다는 것 같아.”
그래도 혹시 몰라서 숙소와 훈련장을 따로 구해두는 게 우리 원정지원팀이 일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도대체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네. 경기 직전에 훈련장 침수시켜서 연습 못 하게 하려는 계략인가?”
“설마 그러기야 하겠냐.”
지나치게 상상력이 풍부해진 동생을 향해 슬쩍 태클을 걸었더니, 희주가 곧바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오빠는··· 순수한 호의로 이러는 거라고 믿어?”
“반쯤은. 벤피카 단장은 사람 좋기로 꽤 유명한 편이거든.”
벤피카의 단장 코스타는, 적어도 희주가 말하는 것 같은 저질 꼼수를 부릴 인물은 아니다.
그는 과거, 자신과 같은 포지션의 신인 카카를 애지중지 아끼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팀에 새로 합류한 후배에게 갖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이적 초반의 부진과 비난에도 ‘인내심을 가지라’며 실드를 친 적이 있다.
그 결과, 카카에 의해 본인이 벤치로 밀려나는 운명을 겪었지만, 코스타가 불만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대단찮은 선수에게 벤치로 밀렸다고 기억된다면 얼마나 한심스러운가? 어차피 날 밀어낼 선수라면, 활약하는 게 낫다. 팀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런 호인이, 행정가 노릇을 몇 년 했다고 인품이 크게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머지 반은?”
“우리가 2차전이니까. 혹시라도 얄팍한 수작을 시도하면 곧바로 갚아줄 수 있지.”
“어, 하지만 그러면 저쪽에선 우리가 권하는 숙소나 훈련장을 무시하지 않을··· 아, 우리는 굳이 권유할 필요가 없구나. 오빠가 리미트리스 사장이니까.”
“알면 원정 준비나 마무리하고.”
벤피카 단장이 아무리 훌륭한 인품으로 유명하다지만, 승리까지 양보해주진 않을 거다. 그건 축구가 아니니까.
따라서, 1승은 우리 손으로 챙겨와야 했다.
* * *
[유로파리그 16강 1차전. 벤피카 대 선덜랜드]
이스타디우 다 루스는 정말 훌륭한 경기장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외에서 마주한 어떤 경기장보다 아름답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하긴, 지난 시즌까지 유로파 컨퍼런스에서 뛰던 우리는, 딱히 네임밸류 있는 상대를 만나지는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피오렌티나와 빌바오였지만, 두 팀 모두 경기장이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빌바오와는 중립 경기장에서 격돌했고, 피오렌티나 원정은··· 경기장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아니,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벤피카의 대응은 선녀 같았고, 우리 원정지원팀이 혀를 내두를 만큼 신사적이었다.
무엇보다 인상이었던 건,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나를 안내한 벤피카 스태프였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벤피카 단장님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는 벤피카의 단장, 코스타를 향해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못 알아보면 문제가 있는 거죠.”
포르투갈의 마에스트로. 내가 축구를 막 시작했던 어린 시절에 세계를 주름잡던 선수 중 하나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도 아니고, 벤피카 스태프들 사이에서 알아보지 못하면 바보겠지.
“솔직히 입장만 아니었으면 사인받고 싶을 정도입니다.”
슬쩍 농담을 섞어서 말하자, 코스타 역시 유머러스하게 응수했다.
“그러시면 이따 경기 끝나고 해 드릴까요? 대신, 저희 유니폼 한 벌 사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익스클루시브 박스까지 나를 안내한 코스타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작년, 아르테미오에서 있었던 일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코스타의 태도는 진지했다. 그래서 나는, 벤피카가 제공한 각종 호의 - 숙소와 훈련장을 알선하겠다는 - 가 어떤 이유였는지를 깨달았다.
만에 하나라도, 피렌체에서 일어났던 일이 리스본에서 재현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거겠지. 홈 팀이 원정 상대를 이렇게 배려하는 모습은, 팬들에게 명확한 제스처가 된다.
축구로만 싸울 거니까, 괜히 집적거리지 말라는.
“입장상 응원은 못 해드리지만, 즐거운 관람 되시길.”
안내를 마친 코스타가 떠난 다음, 희주가 슬쩍 귓속말을 했다.
“오빠, 아르테미오는 피오렌티나 홈이잖아? 근데 저 사람이 왜 사과해?”
“저 사람은 피오렌티나에서 전성기를 보냈거든.”
“흐음, 친정팀의 실수를 사과한다는 거구나. 좋은 사람이었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희주를 흘끗 바라본 다음, 나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반쯤은. 그리고··· 무서운 사람이기도 하고.”
“무섭다고?”
“벤피카가 지금 우리와 무슨 경쟁을 하고 있지?”
“유로파 16강이요··· 농담이야. 챔스 결승전 유치를 놓고 다투고 있습죠.”
“그래서야. 만에 하나 피렌체에서 일어났던 인종차별 이슈가 리스본에서 재현되는 순간···.”
“아, 이해했어.”
“그리고 내 경험상··· 사이드라인 밖에서 신사적인 상대일수록 라인 안에서 무섭더라고.”
* * *
실제로 그날, 벤피카는 사이드라인 안에서 우리를 무섭도록 몰아붙였다.
예전 맨시티나 첼시에게 당한 것처럼 우리 수를 미리 읽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대신 우리가 준비한 수에 곧바로 최선책으로 응수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전반 내내 우리는 하프라인조차 몇 번 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얻어맞아야 했다.
“크리그에 해리슨, 바스티아노까지 모두 냈는데···.”
희주가 안타깝게 중얼거렸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유럽 대회는, 원정에서는 소극적으로 운영하면서 딱 한 골만 챙기는 게 일반적이다.
애초에 브라이언도 역습 위주로 경기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저, 역습 시도가 완벽하게 틀어막혔을 뿐.
그렇게 경기는 정해진 마지막을 향해 흘러갔고, 후반 85분, 우리는 마침내 찬스를 잡아냈다. 잭에게서 요니에게, 요니에게서 다시, 해리슨에게.
그리고 해리슨이 공을 잡은 순간 바스티아노와 크리그가 동시에 침투를 시작했다.
“제발···.”
옆에서 희주가 손을 모은 순간, 해리슨의 발이 움직였다.
다음 순간, 아직 어린 티가 남은 소년의 모습은 그라운드 위 어디에도 없었다. 앞으로 10년 이상 선덜랜드를 이끌어갈 마에스트로만이 보였을 뿐이다.
해리슨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보여준 재능의 편린이 또다시 빛을 발했고, 마법 같은 로빙 스루가 벤피카의 최종 수비라인을 완전히 돌파했다.
그리고 패스는 바스티아노 쪽을 향했다.
“조금 길어!”
희주의 절규처럼, 해리슨 패스는 조금 길었고 바스티아노의 위치 또한 조금 깊었다. 아무리 봐도 골대를 노릴 각도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수비를 따돌릴 수 있었던 거겠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 득점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루트는 바스티아노 쪽이었을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중이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바스티아노가 그대로 몸을 반쯤 돌리며, 발뒤꿈치로 공을 슬쩍 건드렸다.
그렇게 공은, 골대 정면의 크리그에게 향했다.
“나이스 패스!”
희주가 절규처럼, 비명처럼 외쳤고,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바스티아노의 백힐 패스가 조금 길다는 것도, 크리그의 위치에서 받기엔 영 어정쩡하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루트여야 했다.
“때려.”
바스티아노의 패스가 크리그의 무릎에 닿았다. 당연히 슛은 아니었고, 트래핑이라기에는 살짝 애매한 자세 탓에, 공은 힘없이 위로 떠올랐다.
“때려!”
크리그가 공을 그대로 걷어찼다.
* * *
[때려.]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무척이나 친숙하지만, 동시에 낯선 음성이었다. 이 경기장 위에서는 들릴 리 없는 소리이기에.
‘구단주님이 무슨 초인도 아니고, 여기까지 어떻게 목소리가 닿겠어.’
그래서 크리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후, 그가 기다리던 소리가 났다. 툭- 공 차는 소리. 그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소리, 해리슨의 패스 소리다.
바스티아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둘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미리 정하지도 않았는데 두 공격수는 서로 반대쪽으로 흩어졌다.
등 뒤에서 공이 날아들었다. 벤피카 수비진을 넘긴 그 패스의 행선지는 바스티아노 쪽이었다.
‘나이스 패스.’
스스로도 몇 번이나 말한 적이 있었다. 바스티아노라면, 반드시 해리슨의 패스를 골로 이어가 줄 거라고.
만족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가슴 한구석이 쿡쿡 쑤셨다. 그래서일까. 크리그는 어째서인지 며칠 전, 베리와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말았다.
[나는 저니맨이니까. 그러니까 선덜랜드에서 보여준 모습으로만 기억되겠지.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
선수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그래도 괜찮아. 이 팀에는 이제 네가 있고, 바스티아노가 있으니까. 그리고 해리슨도.]
누군가를 밀어내고 프로가 된 다음, 인생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은 찰나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자기보다 열 살쯤 어린 누군가에게 포지션을 내주고 물러나는 것. 축구는 항상 그런 식으로 계승된다.
하지만, 크리그는, 자신이 남겨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고 느꼈다. 발재간은 평범하고 투박하며, 신체조건 또한 특출나지는 않았다.
그러니 남겨줄 수 있는 건, 함께 달리던 기억들.
‘발을 멈추진 않을 거야. 나는 선덜랜드 선수니까.’
크리그는 그렇게 다짐했고, 계속 빈자리를 찾아 뛰었다. 기회를 노리기 위해, 혹은 수비의 주의를 바스티아노에게서 돌리기 위해.
[나이스 패스!]
환청처럼 들리는 울림과 동시에, 바스티아노의 발이 뒤로 휘둘러졌고, 공의 궤적이 바뀌었다.
[때려.]
예상 밖의 궤적에, 크리그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살짝 움츠렸다. 둔탁한 느낌과 함께, 살짝 튀어오르는 공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때려!”
크리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크게 휘두른 발끝에 확실히 공이 감기는 느낌이 들었고, 그의 눈앞에서 벤피카의 골네트가 힘차게 흔들렸다.
[벤피카 0 - 1 선덜랜드]
리스본까지 따라온 팬들의 거친 함성, 환호하는 동료들과 벤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달려드는 해리슨과 미소 짓는 바스티아노를 바라보던 크리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다들 집중해. 끝까지 지키자.”
마지막으로 사이드라인을 넘게 될 때, 이 셔츠를 위해 모든 걸 바친 상태이길.
그렇게 다짐하며, 크리그는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