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Passed Away (3)
그때, 나는 언제나처럼 구단주 사무실에서 업무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면접을 보실 시간인데요.”
비서 자리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평소보다 텐션도, 톤도 1옥타브쯤 높고, 상냥함 함유량도 높은 목소리가.
그래서, 마침내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여긴 선덜랜드 구단주실인데.”
그러자 다미가 곧바로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 스케줄은 ‘티엠씨’ 입점 기업 투자니까, 따지고 보면 리미트리스의 업무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챙겨드려야죠.”
그렇게 말하며, 다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의자에 앉은 채 빙글빙글 돌았다. 감정을 글씨로 나타낼 장치가 있다면, ‘이 의자는 이제 제 겁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라고 쓰여 있겠지.
“아, 맞다. 사장님! 동상 잘 나왔던데요?”
젠장. 하필 다미가 그걸 봤다고?
리미트리스의 넘버 투, 최다미는 머리로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완벽하고, 기억력 또한 반영구적인 수준이다. 지우는 방법은 딱 하나, 망치로 내려치는 것밖에 없다··· 그건 알파고도 마찬가지겠지만.
게다가 더 곤란한 부분은, 다미 얘 성격과 재력이면 동상을 그대로 복제해서 여의도 리미트리스 본사 앞에 세워버릴 수도 있다는 거였다.
“눈독 들이지 마라. 복제품도 만들지 말고.”
“안 그래요. 구.단.주.님. 피규어는 이미 많이 있거든요. 사장님 동상이라면 혹시 또 모르지만요.”
리미트리스 사장과 선덜랜드 구단주는 둘 다 나지만, 다미는 철저하게 구분해서 표현하고 있었다. 하긴, 다미는 예전부터 공사 구분이 철저한 편이었다.
“유니폼도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저는 역시 정장 입으신 모습이 좋아요. 슈트 간지가 아주···.”
그런 이유였냐. 나는 입맛을 다셨고, 다미가 배시시 웃었다.
“그럼 슬슬 업무를 시작해볼까요? 서류는 1차적으로 제가 컷했어요.”
“잘했는데, 그래도 리미트리스 부사장을 날아오게 할 정도로 중요한 업무는 아닐 텐데.”
이번에 티엠씨에 투자하는 금액은, 리미트리스 운용자산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굳이 다미까지 동원할 업무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다미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사장님이 직접 평가하고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기업보다 수익률 좋은 투자처는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그리고 본사 업무에도 아무 지장 없을 거고요. 전세기 띄웠고, 오는 길에도 계속 작업했거든요.”
“···다음부턴 그냥 전용기 타고 다녀. 전세기는 무슨.”
“네!”
그렇게 내 허가를 받아내자, 다미는 거침이 없었다.
희주에게 미리 정보를 입수했는지 마치 탕비실을 제집 드나들듯 척척 음료와 다과를 꺼내 깔았고, 오늘 만날 사람들의 이력서를 내 자리에 쭉 올렸다.
“우후후, 옛날 생각이 나네요. 처음에 리미트리스 차렸을 때··· 회사 직원이라곤 사장님하고 저 둘뿐이었죠?”
“그러게.”
그렇게 말하니 조금 그리운 느낌이 든다. 그때, 내 스케줄을 관리하거나, 찾아온 손님에게 다과를 내주는 잡무는 전부 다미가 했었다.
지금처럼 말이지.
“어, 그런데 여기서 면접 보려고?”
다시 말하지만, 여기는 선덜랜드 구단주실이고, 투자 상담을 하기에 썩 적절한 장소는 아니었다.
“사장님 시간이 리미트리스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판단했어요. 따라서, 리미트리스는 선덜랜드 구단 시설을 오늘 하루 대관하여 사장님의 시간 소비를 최소화할 계획이에요.”
거래는 공정가치에 의한 적정한 가격으로 진행될 것이며, 따라서 FFP 룰에도 아무 문제 없게 처리하겠다는 다미의 설명에,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네. 그래서 준비했어요.”
다미가 공손하게 결재판을 내밀었다. 보니까 서류 네 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리미트리스와 선덜랜드의 기안 서류, 그리고 계약서 두 장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네 번 서명했고, 다미는 계약서에 간인을 찍은 다음 둘로 나눠 보관했다.
그리고 5분 후, 첫 번째 면접자가 들어왔다.
* * *
다미가 한 차례 걸러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대 이하의 아이템이 많았다. 예를 들면 소셜 언론 BM이나 SNS 중고장터 같은 것. 일단 2010년에나 준비했어야 할 모델이고, 무엇보다 창업자의 가치가 너무 낮다.
몸값 10억 내외, 샐러리맨이라면 아주 우수하다는 평가를 들었겠지만, 다루려는 아이템의 시장 사이즈를 고려하면 턱도 없다.
물론, 괜찮은 업체들도 제법 있었다.
우선 머신러닝을 활용해 챗봇 만들겠다는 한국인 청년 두 명. 아이템은 살짝 뻔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가치가 아주 높고 서로 사이도 좋아 보인다. 이런 팀은 아이템을 바꿔서라도 성공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다미가 맛있다고 극찬한 마카롱 가게에도 투자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마카롱 맛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창업자의 몸값이 100억이나 되는 곳이면 프랜차이즈 차릴 정도는 나오겠지.
그렇게 미팅을 마치자, 중간중간 안내를 돕던 에이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구단주님··· 지금 하시는 일이 본업이신 거죠?”
“그런 셈이죠.”
“구단주이실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
“그렇습니까?”
“구단주님은 원래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시기로 유명한데··· 투자자로서는 가차 없으신 것 같아서요.”
오해 없도록 말해두자면, 에이미가 상담 내용을 엿들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대기자 안내를 도왔을 뿐이다.
다만, 선덜랜드 CS팀의 에이스라면, 투자 상담을 마친 사람들의 표정을 간단히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축구 선수가 실패하면, 보통 자기 인생 계획의 문제가 됩니다. 물론 구단도 헛돈을 쓰게 되겠지만, 그 정도의 손실은 운영 계획에 이미 포함된 금액입니다.”
그리고 FC 선덜랜드는 실패할 선수에게 돈을 쓰지는 않는다. 거침없는 굿즈 - 티켓 수익과 함께, 낭비 없는 이적 예산이 선덜랜드의 비결이지.
“그런데 투자까지 받는 창업자가 실패하면, 그땐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렇군요.”
에이미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이번엔 다미가 옆에서 물었다.
“투자는 헬리오스랩과 마카롱컴퍼니, 두 곳이면 되겠죠?”
“응. 둘 다 투자금 대비 수익률이 괜찮을 것 같아.”
“엑싯 목표치는요?”
“헬리오스랩은 홀딩하고, 마카롱컴퍼니는 100억 정도에 엑싯하지.”
“그 정도면 출장비는 충분히 뽑았네요. 사장님이 홀딩이라고 하신 기업은, 전부 데카콘이 되었으니까요.”
다미는 한국어를 이용했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알아들을 유일한 직원, 구단주 비서 희주가 임시 휴가를 얻었기에 리미트리스의 정보 보안에는 아무런 차질이 없었다.
환하게 웃는 다미를 바라보며, 에이미가 슬쩍 물었다.
“구단주님. 그런데 저 미인은 누구죠?”
“아, 제 파트너죠.”
“파트너···!”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업무상 파트너입니다.”
영국 사람은 아무래도 한국인 외모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예전에 나와 희주가 모종의 관계라는 불쾌한 찌라시가 돌기도 했었다.
물론 에이미는 그런 기레기들과 질이 다르다고 믿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순간, 다미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일.단.은.요.”
“구단주님, 저분은 저렇게 말씀하시는데요. 게다가 투자회사 직원이라고 하기엔··· 너무 엄청난 미녀 아닌가요?”
이해한다. 나도 다미 얼굴 볼 때마다, 얘는 직업을 잘못 고른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거든. 솔직히 이마의 숫자만 아니었으면 그냥 연예인 시켰을 거야.
그리고 CS팀의 에이스가 빌드업까지 깔면서 시도한 ‘희대의 미녀’라는 칭찬에, 다미는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혹시 이번 시즌 새 피규어는 나왔나요?”
“죄송합니다. 유로파에서 우승하면 기념 피규어를 출시할 계획이지만, 아직까지는 피규어 신제품이 없습니다.”
다미의 질문에 정중하게 응대하면서, 에이미는 곧바로 태블릿 PC를 꺼내 들었다.
“이번 달 신제품은 선덜랜드 체스 세트입니다. 체스판은 잔디밭을, 그리고 체스말은 구단 관계자를 모티브로 삼아 디자인했는데요.”
“정말 멋져요! 체스 세트, 한정판으로 두 개 주문할게요.”
“감사합니다. 혹시 멤버십 아이디는 필요 없으신가요? 누적 구매 금액에 따라 혜택을 드리고 있는데···."
“이미 있어요··· 여기 로그인하면 되나요?”
태블릿을 받아든 다미가 꾹꾹 화면을 눌렀고, 에이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 @da0_0mi 님이셨군요! 항상 감사합니다.”
···항상?
최다미 씨, 도대체 그동안 우리 굿즈를 얼마나 사들인 겁니까?
* * *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지역 언론, 노스이스트 저널의 사무실에서는 토론이 한창이었다.
“이번에 티엠씨 프로젝트 취재 다녀왔는데요. 투자받은 회사가 두 곳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어딘데?”
기자의 말에 편집장의 눈이 반짝였다. 따지고 보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선덜랜드 구단주 이희성은, 사실 세계적인 투자자로 좀 더 유명하고, 투자의 세계에는 FFP 같은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발 굵직한 빅뉴스, 1면 단독감이길 빈다.”
“어··· 아쉽게도 무슨 머신러닝 연구소랑, 마카롱 가게라고 하던데요.”
“글렀네. 기삿거리 안 되겠다.”
아쉬워하는 편집장을 향해, 기자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기삿거리가 안 되니까 취재 허용해준 거 같긴 해요. 거기 원래 비서는 그래도 친절한 편이었는데, 이번에 만난 사람은 눈빛부터가 아주 장난 아니더라고요.”
“눈빛?”
“사람의 눈빛을 글씨로 쓰는 장치가 있다면, 틀림없이 이런 내용일 겁니다. 우리 구단주님 건드리면 가만 안 둘 거라는.”
언제 준비했는지 기자는 최다미의 사진 옆에 문구를 배치해서 내밀었고, 편집장은 생각에 잠겼다.
“미인이라 그런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그리고 부편집장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이 비서는 그래도 여동생은 아닌 거지? 그러면 선덜랜드 구단주와 미모의 여비서 스캔들···.”
기자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최다미 옆의 문구를 손으로 짚어 보인 순간, 편집장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생각났다. 이 여자, 비서 아니야!”
“그럼 뭔데, 구단주 애인? 연예인?”
“···리미트리스 부사장이잖아! 작년에 유에파 상대로 칼춤 췄던 장본인!”
세 사람의 눈빛이 일제히 최다미의 사진, 정확히는 그 옆의 문구로 향했다.
기자가 반쯤 장난으로 편집한 ‘가만 안 둘 거야.’라는 문구가 갑자기 사형 선고처럼 보였고, 연예인 뺨치는 얼굴은 마치 악마처럼 보이기 시작해서, 셋은 몸을 떨었다.
“그냥 크리그 특집이나 낼까? 요즘 핫하던데.”
“덕분에 선덜랜드 데일리가 핫하지. 선덜랜드 선수 관련 소식은 그쪽이 모조리 단독 먹잖아.”
“하긴, 선덜랜드 데일리는 사실상 구단 어용지니까요.”
나름대로 공정하게 운영 중인 애니, 그리고 전 편집장을 내주고도 ‘어용지’가 되지 못한 리타가 들으면 피꺼솟할 발언이겠지만, 노스이스트 저널 관계자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선덜랜드 데일리가 버티고 있는 한, 선수 특집은 힘들어··· 스캔들이면 모를까.”
“그런데 선덜랜드 선수 스캔들 내도 되나? 리미트리스 부사장이 와 있다면서.”
리미트리스 부사장이라는 단어를 마치 마피아 히트맨 같은 어감으로 발음하는 부편집장을 향해, 기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제 느낌인데, 구단주만 안 건드리면 아무 탈 없을 겁니다. 게다가 리미트리스라면서요. 선수는 관심 없겠죠.”
“그럼 다행이네.”
관계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음험해졌다.
“확실히 크리그가 핫하긴 핫하죠··· 크리그 스캔들 없을까요?”
“없겠냐? 사람 심리 다 똑같거든. 예전에야 3부에서도 빌빌대니 스캔들이고 뭐고 없었지만, 지금은 훨훨 날잖아. 부와 명예··· 다음은 뭐다?”
“유흥, 틀림없이 여자 문제가 있을 거야.”
그렇게 노스이스트 저널 취재진은, 크리그의 뒷조사에 나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