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19화 (219/422)

219화 개화 (3)

“아 맞다. 이제부터 코치님을 축알못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샐리 특유의 새침한 미소를 바라보던 브라이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불길하게 왜 그래?”

“불길하다뇨?”

“사람이 갑자기 안 하던 짓 하면 좀 그렇잖아···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싶어서.”

“갑자기는 아니고요. 그냥.”

사실, 샐리는 얼마 전 따로 집에서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나이얼의 의견이었는데, 브라이언은 차기 감독이 될 사람이니 권위를 신경 써 주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예전에 로이를 엄청 싫어했었어. 하지만 로이를 팀의 감독으로 데려온 다음에는, 그에 맞는 대우를 했었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지?]

“알았어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샐리가 듣기에도 일리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저 라떼 이야기를 좀 뺐으면 어떨까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하면 아버지 나이얼이 슬퍼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샐리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구단주님이 시켰죠?”

[무, 무, 무슨 소리냐? 나는 썬하고 통화한 적 없어.]

털어놓은 거나 마찬가지라, 샐리는 기분 좋게 깔깔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확실히 구단주님은 꼼꼼하단 말이지.’

브라이언은 조만간 감독이 될 사람이지만 아직 감독은 아니고, 샐리와 브라이언이 서로를 축알못으로 매도한 지는 햇수로 벌써 4년째에 접어든 유구한 전통이었다.

자칫하면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는 지적이기에, 구단주는 샐리에게 직접 말하는 대신 그녀의 아버지를 이용한 모양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오히려 더 기분 상할 수도 있겠지만, 샐리에게는 배려로 느껴졌다.

‘구단 사람들 앞에서 내 권위를 존중하려고 그러신 거잖아.’

“왜 웃어?”

브라이언의 목소리가 샐리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샐리는 황급히 표정을 관리했고, 평소의 새침함을 되찾았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 이야기나 하죠.”

선덜랜드 코칭스태프에게 최대의 관건은, 유로파리그 8강. 자그레브 원정 경기였다.

“분석은 끝냈어?”

“네. 완벽하게요. 데이터는 이따가 넘겨드리겠지만, 자그레브는 우리보다 피지컬이 강한 팀이에요.”

높이 싸움은 승산이 적을 거라는 간접적인 표현에, 브라이언이 턱을 쓸었다.

“크로아티아 전통의 강호였지?”

“작년 오시예크에 밀려 리그 2위를 차지했지만, 홈에서는 무척 강한 팀이죠. 그러니까 좋아하시는 선수비 후역습 하고 오셔도 축알못이라고 하지 않을게요. 어차피 유럽 대회는 다들 그렇게 운영하니까요.”

샐리가 속사포처럼 떠들자, 브라이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상 축알못이라고 까고 있는 거 알아? 흠, 아무튼 이번 경기는 공격적으로 나갈 거야.”

“공격적으로요?”

샐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저절로 입꼬리가 움직이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공격 축구는, 스트라이커의 딸로 태어난 그녀의 취향에 딱 맞는 키워드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히 세밀한 패스 앤 무브와 연계 플레이를 가장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가만, 이 축··· 잘알 코치님이 새삼 원정에서 공격 축구 하겠다고?’

측면의 스티븐을 향해 뻥뻥 지르는 공격도 일단은 ‘공격’이 된다는 사실을 떠올린 샐리의 눈이 가늘어지려는 찰나, 브라이언이 황급히 덧붙였다.

“이번엔 스티븐을 쉬게 할 거야. 톰슨도 마찬가지고.”

“그거 참 흥미로운데요. 그렇다면 쓰리톱이군요. 중원에는 잭과 요니가 메짤라 역할을 맡을 거고요.”

“맞아. 그리고 키플레이어는···.”

“해리슨이죠.”

여느 때라면 서로를 축알못이라 매도했을 타이밍이었지만, 반박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샐리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웃었다.

하지만 샐리는, 그런 두 사람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던 로저스 감독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 * *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는, 로저스가 축구 지도자로서 평생을 보낸 장소였다. 이곳에서 그는 유소년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이제 1군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마치려 하는 중이었다.

정문을 통과하기 전, 로저스는 잠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풍경을 시야에 담기 위해서였다.

[Be the light]

입구에 선명하게 내걸린 슬로건처럼,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의 훈련장 곳곳에는 불이 켜졌고, 여기저기서 공 차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선덜랜드 특유의 새벽 자율훈련이다.

자칫하면 오버워크로 이어질 수 있기에 메디컬 팀은 아주 질색하는 중이었고, 로저스 역시 썩 권장하지는 않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하겠다는 선수를 차마 말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로저스는 이렇게 새벽마다 먼발치에서 연습을 지켜보곤 했다.

“감독님! 좋은 아침이에요. 일찍 나오셨네요?”

환한 미소로 자신을 반기는 리지를 향해, 로저스 또한 미소를 돌려보냈다.

“좋은 아침이오. 샘 영감··· 할아버지께선 건강하시고?”

“말도 마세요. 엄청 심심하신가 봐요. 집에서 매일 정원 잔디 깎고 그러세요. 그럴 거면 뭐 하러 은퇴를 하셔가지고는···.”

로저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잔디 관리 고문, 샘이 어째서 은퇴를 선택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남아 있으면 언제까지고 리지가 한 사람 몫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샘의 말에, 로저스는 깊이 동의하고 공감했다.

그리고 이제, 로저스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썬, 브라이언···.’

미련은 없었다.

부서진 무릎을 안고 떠나갔던 애제자 이희성은 투자자가 되어, 업계에서는 신이라 불릴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축구판에 돌아온 지금까지도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구단을 인수한 초반엔 미숙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이제는 누구보다 구단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브라이언 역시 마찬가지다. 은퇴를 앞둔 로저스는 올 시즌, 브라이언에게 더 큰 권한을 넘겼다.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고, 팀의 성적은 지난 시즌보다 훨씬 좋다.

선수의 영입이나 유망주의 성장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역시 코칭스태프 차이라는 게 로저스의 견해였다.

“감독님, 썬을 불러 드릴까요?”

“그 친구, 오늘도 나왔나 보군. 선수들에겐 오버워크하지 말라더니···.”

“자기는 이제 선수가 아니니까 상관없다던데요.”

“그런가··· 아, 썬을 부를 필요는 없소. 그냥 구경 온 거라서.”

“네, 그럼··· 특등석으로 모실게요.”

리지는 ‘특등석’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렇다고 별도의 자리를 따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저 훈련을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알아냈을 뿐.

대를 이어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잔디를 관리해온 윌리엄슨 가문의 노하우였다.

그곳에서 로저스는 리지와 나란히 앉아 훈련장을 내려다보았다.

공간 침투 연습에 여념이 없는 요니와 베리, 언제나처럼 묵묵히 공을 차는 크리그, 베테랑 스트라이커에게 감화된 것처럼 함께하는 바스티아노와 해리슨···.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이제는 선수가 아닌 옛 제자의 모습을.

* * *

이번 아침 훈련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시간을 들였다. 크로아티아 원정이 코앞으로 다가온 일정상, 당분간은 연습 못 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원정 준비로 바쁘기도 하거니와, 일단 출국하면 아무래도 환경 문제가 걸린다. 물론 원정지원팀이 훈련장을 섭외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수용이지 구단주가 몸 푸는 용도의 공간은 아니거든.

그렇게 느긋하게 연습을 마치고, 구단주실에 출근한 나는, 자기 책상에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진 희주를 쿡쿡 찔러 깨웠다.

“너 혹시 훈련장 왔었냐?”

“아니··· 그럴 시간에 잠을 더 자겠죠, 갑부 오라버님.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이야기도 몰라?”

그 명제가 참이라면 너는 평생 안 자도 될 텐데.

“이상하다. 꼭 누가 지켜보고 있었던 기분인데··· 정말 너 아니라고?”

원래 희주는 나보다 아침잠이 많은 편이지만, 오늘따라 유독 맥을 못 추는 게 살짝 수상하다. 그래서 캐물었더니, 딱 잘라 잡아뗀다.

“난 아니야. 오빠가 착각한 거 아니면, 다미 언니겠지.”

“걔가 얼마나 바쁜데.”

아무리 다미가 유능해도 영국과 한국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단 말이지. 실은 다미와는 어제 연락했는데, 리미트리스 본사에 있는 걸 확인했었다.

뭐, 아무렴 어떻겠어.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일 이야기나 해야지.

“원정 준비는 어때?”

그러자 희주는 살짝 하품한 다음 보고를 시작했다.

“역대급으로 순조로워. 크로아티아 원정이니까. 오시예크는 우리 위성 구단이잖아?”

“자매 구단.”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못마땅하게 혀를 찼더니,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자매 구단에 별 기대를 안 했어. 오시예크에서 자그레브는 엄청 멀거든? 거의 서울에서 부산 정도야. 그래서 도움 못 받을 줄 알았는데···.”

[걱정 마시죠. 저희는 자그레브를 아주 잘 압니다. 자그레브 원정을 매년 다녀오니까요.]

“덕분에 숙소는 어디가 좋은지, 훈련장은 어디가 괜찮은지 정보를 얻었고, 소개도 받았어.”

“그건 고마운 일이네. 나중에 내 명의로 감사 인사 넣어야겠다.”

사실상 업무 지시에 가까운 내 소감에, 희주가 곧바로 대답했다.

“이미 보냈습죠··· 그래서 졸린 거야. 평소보다 한 시간 빨리 업무 시작하느라고.”

한 시간?

크로아티아와 영국의 시차가 딱 그만큼이라는 걸 깨닫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구체적으로는 여동생이 두 번쯤 하품할 시간이.

피식 웃고 나서, 나는 머신에서 커피를 뽑아다 희주의 앞에 내려놓았다.

“수고했다.”

그러자 희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불길하게 왜 이래. 사람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그럼 내놓던가.”

“싫거든?”

희주는 재빨리 폰으로 사진까지 찍은 다음 커피를 단숨에 원샷했다··· 사진 찍을 정도로 잘 뽑은 건 아닌데 말이지.

“그거 다 마시면 일해. 이번 원정도 바쁠 테니까.”

이후 희주는 커피가 쓰다고 불평하면서도 한 잔을 순식간에 비워버렸고, 잠이 확 깬 것처럼 오시예크 - 자그레브 사이의 교통편을 대량으로 확보하기 시작했다.

“오빠, 왜 웃어?”

“그냥.”

이쯤 되면 누가 봐도 어엿한 프로 비서라서 웃었지만, 그런 여동생이 대견하다는 소리는··· 입이 찢어져도 못 하지.

* * *

[유로파리그 8강 1차전 자그레브 대 선덜랜드]

선수 입장을 기다리면서, 해리슨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자그레브 맞죠? 오시예크 아니죠?”

해리슨이 그렇게 물어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기장에 선덜랜드의 함성이 제법 크게 울렸기 때문이었다.

비록 홈팀 자그레브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경쟁할 정도는 되었다. 아마 비율로 따지면 4 : 6은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선덜랜드가 이번 8강전에, 지역 팬들을 대량으로 동원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척 놀라운 성과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자그레브까지 몰려온 오시예크 팬들이었다.

“이고르! 이고르! 프르바리그의 왕!”

이고르에게 쏟아지는 뜨거운 함성은, 같은 선덜랜드 선수들조차 얼떨떨하게 만들 정도였다. 작년, 플젠 원정에서의 마르틴조차 이런 대접을 받지는 못했을 정도다.

아무리 자그레브와 오시예크가 리그에서 순위 경쟁을 벌이는 라이벌이라지만, 사백 킬로에 달하는 장거리 응원에 나선 오시예크 팬들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머러스한 이고르조차 눈가를 살짝 훔치고 말았다.

“반드시 보답한다.”

한편 선덜랜드와 이고르에게 쏟아지는 오시예크 팬들의 함성은 홈팀 자그레브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Kralj Pogreške. Kralj Pogreške.

자그레브 팬들이 일제히 외치기 시작한 함성에, 오시예크 팬들이 반응하면서 경기장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뭐라는 거야? 무슨 왕이라는 거 아니야?”

“응, 대충 비슷해.”

크로아티아어를 아는 유일한 선수, 이고르가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사이, 눈치 빠른 요니가 재빨리 번역기를 돌렸다.

“실수의 왕···.”

선덜랜드 선수들 얼굴이 볼만해졌는데, 특히 가장 분노한 선수는 마르틴이었다.

이고르의 ‘실수’라면 당연히 지난 카타르 월드컵을 말하는 것이었고, 마르틴은 당시 체코 대표팀을 이끌고 크로아티아를 격파한 장본인이었다.

“자그레브 센터백, 실수 없다. 월드컵 선발 실패.”

마르틴의 영어는 언제나처럼 서툴렀지만, 선덜랜드 선수들에게 의미가 전달되기엔 충분했다.

잠시 후, 선덜랜드 선수들이 천천히 원진을 짜기 시작했다. 주장 잭을 시작으로, 요니와 에디가 양쪽에서 이고르의 어깨를 감싸듯 움직였고, 바스티아노와 크리그, 마르틴이 나란히 섰다. 마치 동료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래서 해리슨 또한 침묵했다. 목소리를 내라고 배워왔지만, 지금은 굳이 필요 없다고 느꼈다.

세상에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게 있기 때문에.

잠시 후,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선덜랜드 선수들은 천천히 그라운드를 향해 걸어 나갔다.

행동으로 보여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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