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20화 (220/422)

220화 개화 (4)

꼭 자그레브 팬들의 도발 때문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오늘 공격적인 축구를 할 예정이었다. 유럽 원정에서 이 이상 공격적인 포진을 꺼내든 적이 없을 정도로.

포메이션은 4-3-3. 전방에는 마르틴과 바스티아노, 크리그를 쓰리톱으로 세웠다. 그리고 중원에는 잭과 요니, 해리슨이 출전했다.

비록 톰슨과 스티븐이 빠졌기에 선덜랜드의 베스트 멤버라고 보긴 어렵지만, 공격력 측면에서만 보면 오히려 지금 라인업이 선덜랜드 최고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공격적인 포진을 선택한 이유는···.

“감히 뭐가 어쩌고 어째? 실수의 왕!? 한 방 먹여줘야지!”

···옆에서 팔을 붕붕 휘두르는 희주의 분을 풀어주기 위한 이유는 아니었다. 선발 라인업은 경기 한 시간 전에 미리 공개하게 되어 있으니, 자그레브의 도발은 우리 선발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보다는, 팀을 다음 단계로 이끌기 위한 과정이었다.

브라이언은 내년부터 감독을 맡을 것이다. 자연히 그의 업무도 바뀐다. 매치데이 준비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선수단 전체의 관리로.

코칭스태프 경력은 이제 제법 갖췄지만, 감독으로서 브라이언은 초보자에 가깝다. 그러니 앞으로 한동안 경기 준비의 디테일까지 챙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큰 틀은 샐리가 짰다.

특유의 공격적인 포진을 내세워 점유율을 유지하고, 전방에서는 세밀한 짧은 패스로 공격을 전개하는 오늘의 경기 스타일은, 딱 샐리 취향의 전술이었다.

그 위에 브라이언의 색깔이 더해졌다. 잭과 요니를 나란히 3선에 기용해서 상대의 중원을 통제하려는 디테일이나, 후방에서 롱 패스를 날리는 에디의 존재 같은 부분이 딱 브라이언스럽다.

두 전술가의 특기 분야가 적절하게 조화된 결과물이기에, 시너지가 상당했다.

그렇게 우리는 자그레브의 홈, 스타디온 막시미르를 완벽하게 장악했고, 상대를 하프라인에 가둔 채 일방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그런데도 쉽게 점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자그레브의 포백라인이 그만큼 훌륭했기 때문에.

강인한 피지컬, 조직적인 움직임, 그에 더해 문전에서의 공중전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한 높이가 더해진 포백라인이 마치 철벽처럼 우리를 가로막았다.

그 철벽에 구멍을 낼 방법은···.

“더 빠르게.”

내 혼잣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우리 선수들이 짧은 패스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빠르고 격렬하게, 그럼에도 절대로 패스가 끊어지지 않게.

어느새 경기장이 고요해졌다.

무언가 피어나려는 순간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 * *

공을 건네받은 해리슨은 잠시 망설였다. 여전히 패스 루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 연습에서 에디에게 가로막혔을 때처럼.

그리고 골은 아직 너무 멀고 희미했다. 아무리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봐도, 점수로 이어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자그레브의 수비가 대단했던 거지만, 해리슨은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 사람들은 조금도 대단하지 않아.’

지난 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는 참패했고, 이고르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야 했다. 경기 내내 쏟아지던 자그레브 팬들의 야유와 조롱처럼.

하지만 그 실수는, 이고르가 월드컵에서 뛰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자그레브의 수비진은 그날, 출전조차 하지 않았다.

실수는 언제나 싸우는 자의 특권이다.

[항상 기억해야 해.]

프로가 된 이후 매번 교훈으로 삼아온 목소리에, 동료들의 음성이 환청처럼 섞인다.

[패스 미스? 상관없어. 해버려. 도로 공 따내줄 테니까.]

[맡겨둬. 우리 일은 점수를 주지 않는 거니까.]

‘그리고 내 일은···.’

전방에서 크리그와 바스티아노가 쉼 없이 움직여댄 탓에 자그레브의 수비진 또한 끊임없이 위치를 바꿔야 했다.

덕분에 지금, 자그레브의 철벽엔 아주 작은 균열이 일어났고, 라인 뒷공간에는 공간도 생겼다. 조금 모험적인 패스를 시도하면 단숨에 결정적인 찬스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해리슨의 발이 크게 움직였고, 자그레브의 수비수가 주춤거렸다. 어쩌면 그의 눈에는 마치 패스가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은 여전히 해리슨의 발아래 남아 있었다.

“킥 페인트!?”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해리슨은 그대로 발뒤꿈치로 공을 걷어찼다. 자신의 뒤를 언제나 받쳐주는 동료가 있다는 걸 알기에. 오늘 경기에서는 잭과 요니가 그 역할을 한다.

“나이스 패스, 해리슨.”

요니 특유의 차분한 음성에 안도하며, 해리슨은 수비를 피해 움직였다. 그가 매일 밤 에디와 하던 훈련에는 패스를 받는 동작 또한 포함되어 있었기에.

건조한 소리가 뒤를 따랐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 아침마다 울리던, 공 차는 소리가.

그 소리를 신호 삼아 해리슨은 땅을 박찼고, 잠시 후 그의 움직임은 완벽한 이 대 일 패스가 되었다.

“따돌렸어!”

자그레브 수비 한 명을 완벽하게 따돌린 해리슨이 최전방에 시선을 보냈다. 매일 아침마다 함께한 눈동자가 부드러운 빛을 발했다.

아크 정면에서 골대를 등진 바스티아노와 오른쪽 측면에서 안으로 파고드는 크리그였다.

문득, 해리슨은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경기장에 없는, 아주 그리운 소리가.

[목소리를 내. 팀원과 의사소통을 해.]

‘말을 하면, 들켜버릴 거에요. 페르난데스 단장님.’

바스티아노가 수비를 등으로 밀어내며 버텼고 크리그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마크가 달려 있었다.

크리그에게 향하는 패스 루트는 여전히 끊겼고, 바스티아노는 쉽게 몸을 돌리지 못할 만큼 강력한 밀착 수비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경기 시작 전에도, 중간에도,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계속.]

해리슨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딱 한 호흡이 지나고 나면 자그레브 선수들에게 포위당할 것이고, 간신히 찾아낸 코스 또한 모두 사라져버릴 것이다.

‘알아차릴 거야.’

그래서 해리슨은 곧바로 공을 걷어찼다. 바스티아노 쪽으로. 목표는 왼쪽 발뒤꿈치, 평소보다 훨씬 강하게.

바스티아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이스 패스.”

바스티아노는 몸을 돌리려 시도하지 않았다. 공을 트래핑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왼발을 아주 살짝 비틀었을 뿐이다.

잠시 후 패스의 궤적이 약간 뒤틀렸고, 속도 또한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렇게 공은 황급히 움직이던 자그레브 수비진을 완벽히 피해, 크리그의 발아래에 떨어졌다.

해리슨은 미소를 지으며 이어진 풍경을 기억에 담았다. 휘둘러진 발, 흔들리는 골네트, 센터서클을 가리키는 주심의 수신호. 휘슬, 이어진 환호와 함성, 온통 붉게 물들어버린 경기장의 열기까지.

[자그레브 0 - 1 선덜랜드]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또 매일 밤 함께 호흡을 맞추는 사이다. 느긋하게 대화할 시간이 차고 넘치는데, 굳이 수비에 쫓기며 절박하게 외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세상에는 목소리를 내야 전해지는 것들이 있기에, 해리슨은 목을 가다듬었다.

“나이스 어시스트. 나이스 슛.”

해리슨의 공격 포인트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조금 전의 골은 크리그의 득점, 바스티아노의 어시스트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을 만들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나이스 플레이메이킹.”

선덜랜드의 어린 플레이메이커는 동료들을 향해 팔을 벌렸고, 포옹했으며,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동료의 손길에 벅찬 미소를 지었다.

* * *

아직도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먹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의 루트는 경기장 위에 딱 한 순간만 존재했던 경로다. 내 눈에는 아주 잠깐 보였었고, 그것도 경기장 위에서 내려다봐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루트를 그라운드 안, 해리슨의 눈높이에서 찾아내는 게··· 진짜 재능이겠지.

혹은 만들어 내거나.

이후로도 우리의 공세는 계속되었고, 크리그의 선제골이 모든 걸 바꿔놓았다.

홈에서 실점한 자그레브는 공격적인 플레이를 강요당하는 상황에 몰렸고, 해리슨이 보여준 마법 같은 플레이는 자그레브 수비 사이에 당황의 씨앗을 심었다.

계속 지키는 축구에 의미가 없고, 끝까지 지킬 수도 없다는 게 분명해진 자그레브는 공세로 전환했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맞불을 놓았다.

We're Black Cats supporters.

Loyal through and through.

Over and over, We will follow you.

슬라브계 억양이 섞인 외침이 경기장에 울렸다. 오늘 경기에서 선덜랜드 서포터를 자처해준 오시예크 팬들의 함성이었다. 그 속에서 우리 선수들은 자그레브를 완전히 집어삼키려는 기세로 더욱 템포를 높였다.

이후 경기의 균형은 완벽하게 무너졌다. 원래부터 런 게임, 빠른 전환은 우리 팀의 특기였기에.

후반 49분, 완벽한 라인브레이킹으로 에디의 롱 패스를 받아낸 해리슨이 아크 정면에 컷백 패스를 보냈고, 공을 따라잡은 요니가 득점에 성공하면서 점수 차이를 벌렸다.

[자그레브 0 - 2 선덜랜드]

“그렇지, 잘한다!”

옆에서 희주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빛내는 사이, 나는 차분하게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한 방쯤 더 먹여 주면 좋겠는데···.”

“역시 그렇지? 두 번 다시 이고르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이미 무시하진 못할 거야.”

오늘의 경기는 일방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자그레브가 공 한 번 못 만져봤던 건 아니다. 그저 유효슈팅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자그레브의 날카로운 반격을 모조리 막아낸 존재는, 바로 에디와 이고르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고르를 조롱하는 외침은 자기 얼굴에 침 뱉기나 마찬가지다. ‘실수의 왕’을 운운하던 자그레브 팬들의 목소리 또한 어느새 조용해진 지 오래였다.

“어, 그럼 왜 한 방 더 먹이라고 한 거야?”

“내가 보고 싶으니까. 축구팀이 골 넣는 데 이유가 필요해?”

희주가 씩 웃었다.

“아니. 필요 없지.”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마침내 피어난 재능이라는 이름의 꽃을. 그런 내 기대에 부응하듯, 해리슨은 경기장 곳곳을 활발하게 누비며 좋은 장면을 만들어 냈다.

순간적인 센스, 팀원과 연동하는 움직임··· 오늘의 해리슨은 이미 어엿한 플레이메이커였다. 이제 겨우 열여덟인데. 더 자라면 어떨지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을 만큼.

정말로 남미에 한번 찾아가야 되겠어. 아니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도 좋을 것 같고.

위대한 플레이메이커들에게, 은퇴한 판타지스타들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조바심이 날 정도다.

후반 70분, 해리슨이 또다시 공을 넘겨받았다.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자그레브 수비를 피해, 그의 몸이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다.

해리슨 특유의 움직임이 끝난 순간, 공은 어느새 왼쪽 측면으로 향했다. 마르틴 쪽이었다.

파고드는 타이밍에 맞췄기에, 마르틴은 이미 가속이 충분히 붙은 상태였다. 이런 상태의 마르틴은 누구보다 막기 힘든 선수가 된다.

잠시 후, 마르틴을 추격하던 자그레브 센터백이 급격한 방향 전환을 이기지 못하고 제풀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르틴은 그런 상대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도발했다.

Kralj Pogreške.

비록 체코식 억양이었지만, 그래도 같은 슬라브어계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마르틴은 ‘실수의 왕’이라는 크로아티아어를 꽤 정확하게 발음해줄 수 있었다.

이윽고 자그레브의 네트가 또다시 흔들렸다.

[자그레브 0 - 3 선덜랜드]

달려나오는 골키퍼의 머리 위로 유유히 성공시킨 칩샷이, 오늘 경기의 백미였다.

정말로, 꽃처럼 환하게 피어난 경기력이었다.

* * *

화면 안에서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린 순간, 아카데미에 모여 경기를 지켜보던 선덜랜드 유소년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어!”

“역시 우리 1군 팀은 대단해.”

“완벽한 앵클 브레이커였지? 쩔더라 진짜.”

“나도 내일부터 드리블 연습할래.”

눈을 빛내며 기뻐하는 유소년 선수들 사이에서, 소년 골키퍼 짐 하워드 또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외 원정에서 3-0 대승을 거뒀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업적이었다.

그리고 다음 라운드 진출에도 청신호가 켜진 셈이었다. 홈의 선덜랜드는 패배를 모른다. 하물며 세 골 이상을 내주며 패배할 가능성은 없다. 이제 선덜랜드의 유로파 4강행은 사실상 거의 결정된 셈이었다.

그런데도 짐은 마냥 기뻐하지는 못했다.

’99, 9, 22? 그게 뭐지?’

아무렇게 되는 대로 말한 숫자 같지는 않았다. 테오가 한 말이었으니.

테오는 이마에 700이라는 숫자를 자랑하는 천재 소년이었다. 물론 구단주와 같은 능력을 갖지 못한 짐은, 자신의 숫자도 상대의 숫자도 몰랐지만, 테오의 천재성만은 짐작한 상태였다.

그런 테오가 경기를 보다 말고 불쑥 숫자 몇 개를 중얼거렸으니 신경이 쓰이는 것도 당연했다.

[99··· 9··· 22··· 좋았어!]

이후 선덜랜드의 선제골이 터져나오면서 다른 아이들은 금방 잊어버린 모양이지만, 짐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뭐지? 암호인가? 아니면 생일?’

그때 스크린은, 해리슨의 모습을 비췄다.

[오늘의 최우수 선수, 킹 오브 더 매치는 선덜랜드의 무서운 신예. 해리슨입니다. 해리슨 선수는 올해 겨우 열여덟인데요.]

‘누구 생일은 아니겠고···.’

잠시 손을 꼽던 짐이, 99의 의미를 파악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지금, 그 등번호의 주인공이 한창 인터뷰를 하는 중이었으니.

[선덜랜드의 선제골은 다시 봐도 정말 멋진 장면이었는데요.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해리슨에게서 바스티아노를 지나 크리그로 이어지는 그림 같은 첫 골 장면을 멍하게 바라보며, 짐은 덜덜 떨리는 손을 천천히 주머니에 넣었다.

[골키퍼가 떨면 모두가 불안해져. 그래서 두꺼운 장갑을 끼는 거야. 손을 떠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그것은,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소년이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가르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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