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휘슬이 울린 뒤 (1)
<감정이 차이를 만든다 - 위르겐 클롭>
휘슬이 울린 직후, 스타디온 막시미르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물론 전지적 선덜랜드 시점에서의 이야기지만, 따지고 보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홈 팬들이 경기가 끝나기도 전 일찍부터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반면 머나먼 오시예크에서, 그리고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서 몰려온 선덜랜드 팬들은 상대적으로 느긋한 반응이었다. 애초에 장거리 원정이라는 특성상, 조금 서두른다고 달라질 게 없기도 하고.
그래서 관중석은 대부분 붉은 유니폼의 팬들이 장악했고, 가장 큰 환호를 차지한 선수는 아무래도 크로아티아 출신, 이고르였다.
광고판 너머에서 프르바리그의 왕을 연호하는 팬들을 향해 이고르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먼 거리 마다 않고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거니까 당연히 와야지. 거기 가서도 잘하더라!”
“사실 별로 힘들지도 않았어. 선덜랜드 스태프가 도와줘서, 단체로 버스 타고 왔거든.”
“그렇군요.”
팬들에 대한 감사와 소속팀에 대한 뿌듯함이 섞인 뭉클함에 이고르가 표정 관리를 위해 노력하는 사이, 선덜랜드의 주장이 재빨리 그 옆에 섰다.
Hvala na posjeti. Ovo je kapetan Sunderlanda Jack.
컨닝 페이퍼까지 동원해 크로아티아어로 소통하려는 잭의 등장에, 팬들의 환호가 더욱 커졌다. 뜨거워진 분위기는, 잭이 광고판 너머로 손을 내밀어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시작했을 때 정점에 달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고르의 곁에서, 요니가 농담 투로 속삭였다.
“너무 좋아할 필요 없어. 저거 지금 네 팬 뺏으려고 저러는 거야.”
“뺏겨도 나는 상관없는데. 어차피 선덜랜드 팬이 되는 거잖아?”
이고르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최고의 팀이라고 생각해. 최고의 스태프, 최고의 팀메이트, 그리고 최고의 주장까지.”
크로아티아 출신 센터백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동료들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던졌다.
경기 전 자신이 당했던 조롱을 갚아주기 위해, 굳이 도발을 감행했던 마르틴은 지금, 별 일 아니라는 것처럼 구석에서 크로스워드 퍼즐을 푸는 중이었다.
하지만 마르틴은 팀의 에이스 드리블러고, 필연적으로 팀에서 가장 많이 태클에 노출되는 선수다. 자칫하면 흥분한 상대에게 보복성 태클을 얻어맞을 위험을 감수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에디는 오늘, 카메라 밖에서 수많은 트래시토크와 도발을 퍼부었다. 물론 평소에도 에디는 상대 공격수를 무척 잘 긁는 선수였지만,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에디가 평소와 명백히 다르게 행동한 이유는 뻔했다. 그는 이고르의 파트너, 센터백 듀오이기에.
‘정말로 최고의 팀이지. 내게는 과분할 만큼 좋은 동료들이 있고···.’
이고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라운드 위에서 인터뷰에 여념이 없는 해리슨 쪽으로.
‘그리고 재능도.’
조금 전까지 경기를 지배했던 천재 플레이메이커는, 카메라 앞에서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이고르는 해리슨이 이제 겨우 열여덟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쉴 때요? 음··· 경기가 없을 때는 공을 차고요. 아, 그리고 집 인테리어를 고쳐요.”
[직접요? 위험하지 않나요?]
인터뷰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보통 운동선수는 시즌 중에는 못질 하나라도 직접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칫 다치기라도 하면 그대로 결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물론, 이고르는 알고 있다. 해리슨이 말하는 ‘집’ 이 레고이며, 따라서 해리슨의 취미는 인테리어가 아니라 ‘블록 조립’이라고 불러야 정확하다는 것을. 시즌 중에 즐기기에도 꽤 안전한 취미다.
이고르의 옆구리를 에디가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헤이, 버디. 이번 휴식일에 뭐 할 거야?”
“쇼핑이나 가려고.”
인간 관찰을 취미로 가진 크로아티아 청년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 * *
귀국 직후, 선덜랜드 선수들은 전원 휴식일을 부여받았다. 물론 휴식일이라고 해도 곧바로 쉴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메디컬 체크와 마사지, 쿨다운은 거쳐야 했지만.
그래도 다들 모처럼의 휴식에 들떠 보인다.
요니는 언제나처럼 클럽하우스에 위치한 자기 숙소에서 소시지와의 전쟁에 돌입했고, 잭은 곧바로 사인펜 한 자루 부여잡고 풋볼 스퀘어를 향해 달렸다.
크리그가 곧바로 개인 연습에 돌입하려고 해서 공을 압수하는 사소한 부작용도 있었지만, 대체로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다들 기분 좋아 보이는데.”
“그야, 이긴 다음의 휴식일이니까.”
그냥 이긴 게 아니라, 원정 3-0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대로면 다음 주 예정된 자그레브와의 2차전 홈 경기에도 훨씬 숨통이 트인다. 로테이션을 돌릴 수 있다는 뜻이다.
후보 선수들에게 기회가, 주전들에게는 천금 같은 휴식이 되겠지.
“그리고 우리 코칭스태프들도 조금 숨 돌릴 기회고.”
특히 과로사 직전까지 몰린 브라이언, 그리고 샐리는 조금 쉬게 해줄 필요가 있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게 설명했더니 희주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찬성! 그런 의미에서 본인 방금 휴가 가는 상상함. 당일이니까 너무 멀리는 좀 그렇고··· 파리 어때?”
“어림도 없지. 너는 쉬었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희주에게는 절대 휴가 못 준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희주에게는 얼마 전, 본의 아니게 임시 휴가를 준 적이 있다. 일전에 다미가 영국에 왔을 때의 일이다.
그때의 휴가 신청서에 잉크도 아직 안 말랐을 거다. 그리고 여동생이 탱자탱자 노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내 눈물도 아직 안 말랐다··· 희주에게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리고 두 번째, 좀 더 직접적이고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구단주가 안 쉬는데 구단주 비서가 어딜 쉬려고···.”
그러자 희주가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아니, 사람이 쉴 땐 쉬어야지. 세상에는 축구 말고도 챙겨야 할 게 많다니까? 오빠는 취미도 없어?”
“취미? 있잖아. 축구.”
“축구가 무슨 취미야. 선덜랜드 구단주 업무지.”
“그럼 투자.”
뭘 그리 뻔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희주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리미트리스 사장님이라면···.”
“업무가 투자고, 취미는 축구라고 답하겠지.”
물론 리미트리스에서라면, 그런 얼빠진 질문을 내 앞에서 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다미에게 곧바로 입구컷 당할 테니.
잠시 후 희주가 백기를 들었다.
“에휴, 말을 말자. 바랄 걸 바랐어야지··· 그래서 선수단도 코칭스태프도 쉬고, 시즌 중이라서 선수도 못 사오는 이 시국에, 구단주 오라버니는 도대체 어떤 업무를 하고 싶은 건데?”
“뭘 뻔한 걸 묻고 그래. 유소년 보러 가야지.”
구단에 무려 가치 700짜리 유소년이 들어왔는데, 이걸 안 보고 싶을 리가 있겠어?
그리고 나는 잠시 후, 흐뭇한 표정으로 유소년 훈련을 지켜보는 로저스 감독을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감독님도 좀 쉬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세상에는 축구 말고도 챙겨야 할 게 많을 텐데요.”
기분 탓인지 여동생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뭐 어쩌겠어.
* * *
“그렇게 말하며 나를 쫓아내지 뭔가? 에잉, 몹쓸 친구 같으니라고.”
로저스의 불평을 들은 샘 윌리엄슨의 주름투성이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썬 말이 맞지 뭘 그러나. 자네도 쉬긴 쉬어야지.”
“벌써부터 쉬긴 뭘 쉬어. 이제 몇 달 후면 푹 쉬게 될 텐데.”
로저스 입장에서는 비장의 한 수를 꺼낸 셈이었다. 지금까지 이 화제를 꺼내면 상대는 숙연해졌기에. 하지만 자신보다 한발 앞서 은퇴한 샘 노인 상대로는 어림도 없었다.
“의외로 그렇지도 않아. 그만두기 전엔 앞으로 도대체 뭘로 소일거리를 해야 하나 고민이지만, 막상 그만두고 나면 할 일이 많거든.”
정원의 잔디를 능숙하게 커트하는 샘 노인을 바라보며 로저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어째 은퇴한 뒤에도 하는 일이 변하지 않는구먼. 예전엔 리지 양이 정원 만지지 않았나?”
“원래 쉐프들이 집에서는 요리 안 한다잖나. 잔디 관리인도 마찬가지거든. 그러니 예전엔 리지가 우리 집 정원을 관리했고, 지금은 내가 하는 게지··· 조금만 기다리게. 금방 끝낼 테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샘 노인은 정원의 잔디며 나무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보낸 다음에야, 잔디 깎는 노인은 카트를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로저스가 보기에는 진작에 되어 있던 잔디다.
“몸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어서 관둔다더니, 다 핑계였어.”
“요즘은 괜찮네. 로열 병원이 아주 잘 봐주거든. 선덜랜드 관계자는 병원비도 공짜고.”
잠시 후, 로저스는 샘의 안내를 받아 거실로 향했다.
“자네도 소일거리 하나 찾게나. 설마 쉬는 날마다 날 찾아올 생각은 아니겠지.”
“그래서, 소일거리 삼아 피규어를 모으기 시작했나?”
로저스의 시선이 거실 뒤편으로 향했고, 잠시 후 샘 노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내 거 아니야. 리지 거지.”
“꽤 성실히 모았구먼.”
“말도 말게, 나는 손도 못 대게 해.”
거실 곳곳에 선덜랜드 피규어가 놓였는데, 대부분 구단주 이희성의 피규어였다.
한정판도 빠짐없이 구했고, 일반 피규어는 몇 개씩이나 사들였다. 덕분에 메가 스토어에서 구단주 피규어가 품절이 났을 정도다.
비록 모은 피규어의 개수나 들어간 비용을 따지면 리지보다는 여의도의 최다미가 훨씬 더하겠지만, 그래도 종류를 따지면 리지가 딱 한 개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선덜랜드 챌린지 특별상의 부상, 전 세계에서 딱 한 개 존재하는 피규어다. 리미트리스 본사에서 알면 피눈물을 흘릴 전리품을, 리지는 자랑스럽게 유리 케이스에 넣어 두었다.
“그래서 리지 양은?”
“일하러 갔지. 유소년은 오늘 안 쉬잖나.”
* * *
리지는 카트를 조심스럽게 멈췄다. 훈련장 울타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소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십 대 초반, 많아야 중반으로 보였는데, 마치 인형으로 보일 만큼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다만, 리지가 보기에는 몇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쟤, 여기서 밤새우겠네.’
모든 프로팀의 훈련장이 마찬가지겠지만,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보안은 철저하다. 지금 소녀가 서 있는 울타리 너머에선 절대로 선수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아무리 해도 그쪽에선 선수가 안 보이는데. 연습 끝난 다음에나 그 앞으로 지나갈 거야.”
“죄, 죄,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라는 소녀를 향해, 리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경계심을 풀어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선수들 안 나오는 날이야. 기다려도 아무도 못 볼걸?”
딱히 기밀은 아니었기에 리지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 정도 정보는 주차장 근처를 살피면 곧바로 알 수 있는 일이고, 소녀가 딱히 스파이처럼 보이지도 않았기에.
소녀의 반응은 조금 뜻밖의 것이었다.
“그, 그게··· 나왔어요.”
수줍어하는 소녀를 바라보던 리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었다.
‘아하.’
휴식일이라고 알려주는 선덜랜드 직원 앞에서 선수가 ‘나왔다.’고 단언하는 점이나, 그리고 단순한 팬이라기엔 지나치게 수줍어하는 모습, 그리고 십 대 초중반의 나이를 보면 뻔한 일이었다.
“유소년 팀?”
“네? 네···.”
“누구?”
“그, 그게···.”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소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아마 리지의 상냥한 대응이 한몫했을 것이다.
“짐 하워드요.”
“보는 눈이 있구나! 그래, 그 아이 참 괜찮지.”
리지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짐은 선덜랜드 스태프들 사이에서 무척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특히 린다나 에이미, 조엘 같이 축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스태프일수록 더욱 예뻐하는 편이었다.
리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말 모범적이지. 성실하고, 어른스럽고, 의젓하고··· 또래들과는 비교가 안 돼.”
그러자 울타리 너머 소녀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떠올랐다.
“혹시···.”
소녀의 얼굴에서 경계심을 발견한 리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짐을 무척 예뻐하는 것과 별개로, 소녀의 의혹은 그녀와는 아무 관계 없는 이야기였다. 굳이 따지자면 리지는 연상 취향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열세 살 소년에게 연애 감정을 느낄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리지는 그렇게 설명하지는 않기로 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 눈에는 그냥 어린애란다, 라니. 아무리 사실이라도··· 소녀의 꿈을 짓밟는 짓이잖아?’
찰나의 고민 끝에, 리지는 어른스러운 대답을 찾아냈다.
“아마 비슷한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가 봐.”
“비슷한 사람?”
“응.”
“내게는 세상 누구보다 멋있게 공을 차던··· 그리고, 몸이 망가질 때까지 한결같이 노력하던 사람.”
“그렇구나. 다행이에요.”
소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그래도 표정은 퍽 누그러졌다. 안심한 것처럼.
그런 소녀를 향해, 리지가 살짝 윙크를 보냈다.
“잠깐 구경하고 갈래? 원래는 안 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팬서비스가 우리 경영 신조거든. 아, 그래도 사진 찍으면 안 된다?”
물론 리지가 아무 생각 없이 소녀를 훈련장에 들인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1군 선수의 연습이 없는 날이라, 만에 하나라도 정보가 샐 가능성은 없었다.
잠시 후, 리지는 소녀를 ‘특등석’으로 안내했고, 그곳에서 소녀와 나란히 앉아 유소년 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봤다.
‘참 닮았단 말이지.’
아무리 봐도 짐은, 그녀가 아는 사람들을 닮았다.
경기장에 들어올 때의 걸음걸이나 주장답게 모두를 이끄는 모습은 페르난데스와 똑같았고, 골마우스 앞에서 자세를 낮춘 채, 한쪽 손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독려하는 모습은 하퍼를 닮았다.
‘사소한 자세 하나까지 닮을 만큼 노력했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유소년 골키퍼의 모습에 자꾸만 겹쳐 보인다. 15년 전 이곳에서 뛰던 유소년 윙포워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축구선수의 모습이.
게다가 아직 애정이라기에는 풋풋하고 동경이라기에는 뜨거운 소녀의 시선에서, 리지는 어릴 때의 자신을 발견했고···.
‘잘됐으면 좋겠네. 짐도, 그리고 이 아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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