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휘슬이 울린 뒤 (2)
리지와 소녀는 어느새 꽤 친해졌고, 서로 통성명까지 마쳤다.
“짐하고 같은 학교 친구라고?”
“네, 같은 반이에요.”
“그렇구나. 그건··· 부럽네.”
“앞으로도 이 시간에 오면 연습을 볼 수 있나요?”
“어··· 그건 좀 힘들 거야, 클라라. 오늘은 1군 팀이 쉬는 날이라 괜찮지만, 평소에는 외부인 출입금지거든.”
곧바로 시무룩해진 소녀 클라라를 향해, 리지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지만 경기는 볼 수 있을 텐데··· 어때?”
“경기요?”
“유소년 리그. 규모는 적지만 관중도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있고, 입장료도 따로 받지 않아. 시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맞출게요!”
클라라의 눈이 초롱초롱해졌고, 창백하던 뺨에도 혈색이 돌았다.
그날부터 클라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충실히 지켰고, 선덜랜드의 유소년 경기 날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원정 경기에 따라오지는 못했지만, 홈 경기에는 거의 출근도장을 찍었다.
그런 클라라의 존재가, 선덜랜드 관계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셔틀버스, 혹은 부모님의 차량을 이용하는 다른 유소년들과 달리, 짐은 보통 걸어서 집에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만큼 집이 가깝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역 출신의 로컬 보이라는 점이 컸다. 즉,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팔고 남은 사과를 한 알씩 던져 주는 과일 가게 아주머니, 매일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는 생선 가게 아저씨···.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짐에게는 친숙하고 편안한 장소였고, 이곳에서 선덜랜드의 유소년 선수를 해코지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짐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소년의 상식을 초월한 존재가 있다. 예를 들면, 선덜랜드 1군 팀 주장 같은.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감히 선덜랜드 1군 팀 주장을 가로막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그가 자기 팀 유소년을 강제로 끌고 가는 중이더라도.
그렇게 짐은, 잭과 요니에게 사이좋게 붙들린 채 클럽하우스에 끌려왔다.
“너 연애한다며?”
“네?”
“숨길 생각 마. 우리도 다 듣고 있으니까.”
짐은 억울함을 느꼈지만, 눈앞의 청년들은 하소연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잭과 요니는, 곧바로 짐을 무시한 채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도박, 여자, 술은 안 되는데··· 곤란하단 말이지.”
“그래도 골키퍼니까 연애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예전에 캡틴··· 그러니까 너 말고 페르난데스 단장님한테 들었거든.”
“연애가 아니라 그냥 같은 반 애라니까요?”
짐의 항변은 썩 효과적이지 않았다.
“단장님이? 뭐라고 하셨길래?”
“골키퍼는 모두를 지켜야 하는 포지션이니까, 지켜야 할 가정이 있으면 오히려 강해질 수 있다고. 그러니까··· 오히려 밀어줘야 하는 것 아닐까? 가정을 꾸리도록.”
요니는 퍽 진지해 보였고, 짐은 기막힌 심정이 되어 버렸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헛소리야.’
가정을 꾸리라니, 도대체 몇 단계를 뛰어넘은 이야기인지 벌써부터 어질어질하다. 열세 살 소년에게 결혼은 너무나 먼 미래의 이야기다. 그리고 애초에 짐은 클라라와 연애 중인 것도 아니었다.
짐에게는 다행하게도, 주장 잭은 요니의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가정은 무슨, 얘들은 아직 너무 어리잖아.”
그래도 캡틴은 이해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잭의 이야기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너는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마치 드라마에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딸의 남자친구를 윽박지르는 오래된 클리셰처럼. 샷건이라도 하나 들려주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 생각하냐고 하셔도··· 그냥 같은 반 친구라니까요.”
“좀 더 소중히 여겨야지! 우리 팬이잖아. 유소년 경기를 찾아와 주는 고마운 팬! 아, 그래도 연애는 안 된다.”
“저보고 대체 어쩌라는 거예요.”
견디다 못한 짐이 하소연하자, 주장 잭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어쩌긴 뭘 어째. 축구선수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걱정 마. 그리 많지도 않으니까. 사인해주고, 눈 마주치면 웃어주고,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경기에서 이기면 더 좋아.”
짐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의 두 가지는 자신이 없었다. 사인은 아직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예쁘장한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태연하게 웃어주는 건, 열세 살 소년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였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뛰라는 것은··· 짐에게는 전혀 어려운 요구가 아니었다.
그리고 짐의 포지션은 골키퍼, 팀을 지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역할이다.
* * *
“저기 들어봐. 오빠. 속보야 속보!
호들갑을 떠는 희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얘가 별거 아닌 일로 설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말이지. 물론 아주 가끔은 제대로 된 속보를 가져올 때도 있으니, 일단 들어볼 필요가 있다.
눈이 마주치자 희주가 가쁜 숨에 섞어 단숨에 이야기를 꺼냈다.
“짐이 연애한대!”
“어, 그래.”
기대한 내가 바보지.
“아니, 오빠는 반응이 뭐 그래?”
“선수에겐 사생활이 있으니까. 혹시 네 연애 소식이었으면 조금쯤은 반응했겠지만.”
“하긴, 여동생은 소중하니까!”
그보다는 상대 남자를 애도하기 위해서인데. 늦기 전에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유도 해보고.
“그래서, 오늘 경기는 몇 시였지?”
그렇게 묻자 희주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내가 물어보는 ‘경기’ 가 유소년 경기 일정임을 눈치챘기 때문에.
“결국 오빠도 궁금한 거지. 그치?”
“무슨 헛소리야. 원래 일정에 있는 거잖아. 유소년 경기 참관.”
“갑부 오라버님. 저는 오라버님의 비서입니다만··· 제가 모르는 일정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칠십 점.”
정답이지만, 최선의 대응은 아니었다. 다미였으면 모르는 척해줬을 텐데.
그렇게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 향한 나는, 곧바로 화제의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힘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녀 팬 클라라가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클라라는 응원용 레플리카를 입었는데, 우리 선덜랜드의 레드 앤 화이트는 아니었다. 대신 보란 듯이 골키퍼 킷을 입었다.
짐의 마킹까지 들어간 복장을 보면, 저 소녀에게는 연애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짐의 반응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우리 유소년 선수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수들의 사기는 높아 보였다. 사춘기라기엔 조금 이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십 대 소년들에게 예쁘장한 또래 여자애의 응원은 치트키나 마찬가지니까.
정작 짐 본인은 무표정했지만.
“오빠도 예전에 여자애들한테 응원받고 그랬어?”
“그게···.”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이는 사이, 같이 구경하던 브라이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브로는 주로 동네 어른들한테 인기가 폭발했죠. 그리고 동네 꼬맹이들도 많이 따랐고요. 그치만 여자는 없었어요. 전부 남자애들이었죠.”
“남자애···.”
기분 탓인지, 리지의 안색이 영 좋지 않다. 그리고 희주 녀석은 어째서인지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고.
그리고 짐은 오늘, 놀라운 경기력을 선보였다.
눈에 띄는 선방은 별로 없었다. 상대에게 내준 유효슈팅 자체가 드물었고, 그나마 전부 짐의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니 짐의 팬, 클라라로서는 조금 아쉬웠을지도 모르겠지만···.
“포지셔닝이 아주 좋은데요. 커맨드도요.”
“저 아이의 리더십은 이미 정평이 나 있으니까요.”
“그도 그렇지만, 상대가 어디로 공격할지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착각입니까?”
그러자 샐리가 웃었다.
“매일 분석실에 와서 공부하니까요. 유소년 수준의 공격 전술을 읽어내는 건, 저 애에게는 꽤 간단한 일이죠.”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저렇게 잘하고, 저렇게 노력하는 아이가 고작 사십억이라니.
태어나서 두 번째로, 나는 내 눈이 틀렸기를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다.
* * *
“오늘은 전방에서의 공격 작업을 공부해 볼 시간이었지?”
마침 샐리는 자그레보 원정의 영상을 준비한 상태였다. 해리슨에게서 바스티아노를 거쳐 크리그로 이어지는 첫 번째 득점, 선덜랜드의 아름다운 공격이라고 유명해진 장면이었다.
하지만 짐으로서는 마냥 마음 편히 지켜볼 수는 없는 영상이기도 했다. 해리슨이 패스하기 전, 길을 미리 읽어낸 테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계속 울렸기 때문에.
[99··· 9··· 22··· 좋았어!]
잠시 망설이던 짐은 샐리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팀장님은 혹시··· 저 패스길이 미리 보이셨나요?”
“아니.”
어쩌면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인데도, 샐리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세상엔 이런 패스길을 미리 보는 선수가 있어. 그런 게 타고난 재능이겠지. 하지만 그건 내 영역이 아니야. 그리고 아마 네 영역도 아닐 거야.”
“네, 저는 그런 재능이 없는 선수라서···.”
“오해하지 마. 포지션의 이야기니까. 골키퍼가 저 위치에서 공을 잡고 상대에게 포위당하면 끝장이지.”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엄청 혼날 거라며 웃는 샐리를 향해, 소년 짐은 어색한 미소를 보냈다.
잠시 후 샐리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저런 루트가 미리 보이지 않아도 싸울 방법은 있어. 미리 약속된 움직임, 수비를 끌어내고 공간을 만드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찬스가 오거든.”
짐은 자신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앞의 여성은 브라이언과 함께 1군 팀의 전술을 짜는 담당자이고, 공격 상황에서의 약속된 움직임을 설계하는 장본인이다.
패스길을 미리 볼 수 있는지는, 샐리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샐리가 낮게 웃었다.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해리슨은 너보다 나이가 많잖아?”
‘하지만, 테오는 저보다 어린걸요.’
“그리고 나는, 네가 해리슨에게 크게 뒤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물론 어린 선수의 잠재력을 보는 안목은 없으니까 그냥 흘려들어도 돼.”
“네.”
짐은 표정을 고치며 미소를 지었다. 무조건 좋은 선수가 될 거란 무책임한 장담보다는, 지금 샐리의 이야기가 훨씬 더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샐리의 아름다운 눈동자 가득히 장난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연애할 때는 책임감을 가지고···.”
견디다 못한 짐은, 학교에 가자마자 클라라를 불러내고 말았다. 주위에서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눈치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대로 가면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경기장 같은 데 자꾸 오면 안 되잖아.”
“어째서?”
“어째서냐면···.”
자꾸 이상한 소문이 나서 곤란해지니까, 라고 쏘아붙일 생각이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는 클라라를 보니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짐은, 다른 핑계를 댔다.
“너는 몸이 약하니까.”
클라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해 주는 거야?”
“그렇다고 하면, 앞으로 안 올 거야?”
“글쎄, 앞으로도 축구장에 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은데.”
‘말이 안 통하네.’
딱 봐도 허약해 보이는 여자애를 윽박지르는 것은, 선덜랜드 유소년팀 주장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대가 지역 주민이라면 더욱 그렇다. 팀의 팬이라는 뜻이니까.
결국 짐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 * *
소녀 팬 클라라의 가세로 유소년 선수들이 사기가 올랐다. 여기까지는 내 예상대로였지만, 의외로 1군 선수들 또한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톰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식이었다.
“요즘 유스들이 아주 날아다닌다는데··· 1군이 그보다 못하면 말이 안 되겠지?”
톰슨의 냉정한 멘트에 이어, 주장 잭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기자들이 매일 말하더라. 우리는 사실상 유로파 4강 진출을 확정했다고. 하지만, 축구에는 이런 열세를 뒤집은 사례가 널려 있지. 보통은 기적이라고 부르던데.”
기적이라는 단어에서, 우리 선수들이 어느 경기를 떠올렸는지는 나로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안필드의 기적을, 누군가는 암스테르담의 기적이나 리아소르의 기적을 떠올렸겠지.
그사이, 잭의 목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절대로, 기적을 만들게 허락하지 말자. 내일은 단 한 골도 내주지 말자. 내일 싸우는 장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어떤 경기장인지를, 똑똑히 보여주자.”
주장의 독려 덕분에, 우리 선수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저 모습이야말로 소년 짐이 걸어야 할 길일지도 모르겠다고.
지금의 우리 팀에, 잭보다 나은 선수는 여럿 존재한다. 타고난 재능을 따지면 마르틴이나 바스티아노가 훨씬 낫고, 요즘 들어선 요니도 잭보다 조금 더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팀에, 잭보다 나은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프리미어리그 전체를 놓고 봐도 찾기 힘들 것이다.
누구보다 팀을 사랑하고, 팀과 팬들에게 사랑받는 주장을, 나는 부드러운 눈으로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