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23화 (223/422)

223화 휘슬이 울린 뒤 (3)

[유로파리그 8강 2차전, 선덜랜드 대 자그레브]

경기 당일, 브라더스는 여느 때처럼 사이좋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로 향하는 길이었다.

“오늘은 꽤 힘들겠어.”

핫도그 사내의 혼잣말을, 맥주집 사장이 곧바로 거들었다.

“힘들어야지. 모처럼 원정에서 이겼으니.”

원정에서 상대를 세 골 차로 손쉽게 잡아낸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지금의 선덜랜드는 자그레브보다 분명히 한 체급 우위에 있는 팀이었다.

다만 선덜랜드로서는 유로파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리그가 소중했다. 3, 4위 사이를 오가는 역대급 호성적을 뽑는 중이었으니.

마침 유로파 8강 1차전에서 대승을 거뒀으니, 이 기회에 주전 싹 빼고 체력관리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괜히 무리하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지.”

“일단 마르틴은 꼭 뺐으면 좋겠는데. 지난번 원정에서 사포니 넛맥이니 이것저것 먹이고 왔으니까··· 자그레브 애들 감정도 안 좋을 거야.”

“맞아. 이 시기의 부상은 줄부상으로 이어지기 좋으니까, 조심해야지.”

시즌이 막바지로 향하는 시기다 보니, 어느 팀이든 피로가 누적되는 중이었다. 체력적으로도 부담스럽고, 아무래도 폼도 저하된다.

로테이션으로 휴식을 취하면서 버텨야 하는데, 한 명이 부상으로 빠지면 그 공백을 메울 다른 선수에게 부담이 쏠린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선수들이 줄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흔하다.

물론 선덜랜드는 선수 관리에는 무척 철저한 구단이지만, 세상에 다치지 않는 선수는 없다.

그래서 브라더스는, 오늘 경기에서 선덜랜드가 로테이션을 많이 돌리기를, 그래서 경기가 아주 힘들기를 바랐다.

“아예 오늘은 골키퍼 킷 입고 응원할까? 골키퍼가 활약해야 할 경기니까.”

“에이, 그래도 골키퍼 킷은 너무 나갔지.”

축구 팬들이 응원용 유니폼을 챙겨입고 응원하는 경우, 보통은 필드 플레이어용 유니폼을 선택한다. 골키퍼 킷을 입으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아무래도 통일감 있는 분위기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때 브렌든이 불쑥 말했다.

“골키퍼 킷 입은 애도 있네.”

브라더스의 시선이 한 곳에 향했다. 아무래도 골키퍼 킷을 입고 응원하는 사례가 워낙 드물다 보니 브렌든이 지목한 대상이 누군지는 금방 눈에 띄었다.

셋의 얼굴에 아빠 미소가 번졌다.

“귀엽네.”

“나도 저런 딸 있었으면 좋겠다.”

“조카로 만족해. 마일즈네 딸 있잖아.”

“그 집 애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아들일 가능성도 있어.”

“딸이어야 해. 마일즈 닮은 아들이면 큰일이야.”

잠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브라더스는, 골키퍼 킷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특이한 애네. 보통 골키퍼 킷은 잘 안 입지 않나?”

“그 무슨 축알못 같은 소리. 선덜랜드는 골키퍼 킷도 잘 나가. 페르난데스 시절엔 유니폼 판매량 1, 2위 다툰 것도 모르나?”

“그 페르난데스는 진작에 은퇴했어.”

“하퍼도 생각보다 인기 많을걸. 오랫동안 헌신해준 선수라서 올드팬도 많아.

“하지만 저 여자애는 올드팬이라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데?”

브렌든의 지적처럼, 골키퍼 킷을 입은 소녀는 기껏해야 십 대 초반 정도였고, 올드팬이라는 단어와는 퍽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니면 리델 팬이겠지. 리델은 젊고 잘생겼으니까.”

“리델은 오늘 안 뛰잖아. 유로파는 하퍼가 나온다고.”

가벼운 입씨름 끝에, 브라더스는 조심스럽게 소녀의 등에 시선을 보냈다. 마킹을 확인하면 누구 팬인지는 간단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팬들이 마킹 레플리카를 입는 건 아니지만, 굳이 골키퍼 킷을 챙겨 입을 정도면 마킹도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12번이면 하퍼, 23번이라면 리델의 팬이다.

그런데 소녀의 등에 붙은 마킹은 1번이었다.

“1번? 우리 지금 1번이··· 비어 있지 않았었나?”

“페르난데스 거겠지. 자, 우리도 슬슬 들어갈까.”

“그러지.”

브라더스는 차례로 시즌권을 내밀며 경기장에 입장했고, 기대감에 젖은 채 대형 스크린에 라인업이 뜨기를 기다렸다.

“레프트백이 프랭크라고!?”

“바스티아노를 뺐어··· 그런데 왜 크리그까지 같이 뺀 거야?”

“마르틴 대신 베리가 선발된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로테이션 세게 돌렸는데! 이거, 버틸 수 있나?”

* * *

경기장 출입구 근처에서, 짐은 초조한 마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계기는 티켓이었다. 원래 구단 관계자들은 홈 경기를 볼 권리가 있지만, 특히 선덜랜드 유소년의 경우 관계자 1명을 추가로 동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주로 부모나 가족을 위한 용도였지만, 가끔은 친구를 데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데뷔를 앞둔 십 대 중후반의 선수들은 여자친구를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짐은 자신의 ‘동반 티켓’을, 가족을 위해 쓸 생각이었지만···.

[미안해, 엄마가 너무 바빠서··· 하지만 너는 예전부터 혼자서도 경기 보러 잘 다녔잖니?]

그렇게 동반 티켓 한 장이 남았다. 무려 유로파리그 8강전의 티켓이. 너무나 아까운 일이라, 짐은 그만 학교에서, 혹시 축구 같이 보러 갈 사람 있냐고 물어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원래는 친한 남자애들을 염두에 두고 꺼낸 이야기였지만, 하필이면 뻔뻔하게도 클라라가 손을 들었고, 반의 남자애들은 모조리 꼬리를 내렸다.

그렇게 해서 선덜랜드 유소년팀의 주장은, 같은 반 여자애를 데리고 축구를 보는 이벤트에 휘말렸다.

“기다렸어?”

클라라와 마주한 짐은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녀의 복장 때문이었다.

“어··· 얼굴 빨개졌다. 그렇게 예뻐?”

예쁘다는 단어에 반응을 보이면, 유니폼 이야기였다고 잡아뗄 게 뻔하다. 그 정도는 짐도 이미 알고 있는 수법이었다. 그래서 짐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왜 그 유니폼을 입었어? 남들처럼 정상적인 걸 입지.”

클라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비정상이야? 누가 경기마다 입길래 고른 건데.”

한 방 먹은 짐의 얼굴이 구겨졌고, 클라라는 기분 좋은 듯 키득거리며 먼저 걸어 나갔다. 덕분에 짐은 클라라의 등을, 정확히는 그곳에 들어간 마킹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Howard>

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야, 그거는···.”

“응원하는 팀 유니폼을 입은 건데, 왜?”

“그러니까···.”

“내가 응원하는 팀은 선덜랜드 유스팀인걸?”

생긋 웃어 보이는 클라라를 향해, 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왜 1군 경기를 보러 온 거야?”

“어라? 그럼 앞으로 유스팀 경기 계속 보러 가도 괜찮다는 뜻이야?”

“말을 말자.”

짐은, 새삼 자신이 꽤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라라는 짐이 상대하기엔 너무 강력하고, 축구선수는 원래 입놀림보다는 발재간이 중요한 직업이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된 직후, 짐은 클라라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날, 선덜랜드는 90분 내내 수세에 몰렸다. 점유율을 모두 빼앗겼고, 유효슈팅 또한 전부 자그레브의 것이었다.

평범한 팬이라면 답답했을 전개지만, 팀의 유소년 골키퍼에게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였다.

물론, 어느 정도 예정된 결과이기는 했다. 선덜랜드는 두 골 차이로 져도 올라가지만, 자그레브는 세 골 이상을 넣고 이겨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절박함의 차이도 있었지만, 유리한 선덜랜드가 로테이션을 돌린 것도 원인이었다.

그래도 선덜랜드는, 쉽게 점수를 내주지는 않았다. 주장 잭, 그리고 골키퍼 하퍼의 활약 덕분이었다.

주전 대부분이 로테이션으로 빠진 상태에서 선발로 나선 주장 잭은, 사냥개라는 자신의 별명처럼 그라운드 곳곳을 누볐다. 저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염려스러울 정도의 전력 질주를 몇 번이나 보였다.

그런 주장의 분투에 선덜랜드 팬들이 뜨거운 함성을 보냈고, 잭은 유니폼이 땀으로 흠뻑 젖은 와중에도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며칠 전, 짐에게 해준 이야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하퍼 또한 분투했다. 점유율이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게 잭의 공로였다면, 무실점은 어디까지나 하퍼 덕분이었다.

[하퍼는 곧 돌아올 거야. 묵묵하게 훈련하고 있으니까.]

유효 슈팅을 몇 개나 내줬는데도, 점수는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집념이 느껴지는 선방이었다.

그렇게 잭과 하퍼는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은 채 오늘 경기를 무승부로 막아냈고, 동료들에게 귀중한 휴식을 안겼으며, 팀에게는 4강 진출권을 건넸다.

[(3) 선덜랜드 0 - 0 자그레브 (0)]

‘나는··· 저 사람들처럼 될 수 있을까?’

둘의 분투에 짜릿함을 느끼는 동시에, 짐은 가슴 한편에 시큰한 통증을 함께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되새긴 가르침이었기에.

묵묵하게 훈련하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손의 떨림을 두꺼운 골키퍼 장갑 아래에 감추기··· 하지만 오늘의 짐은 그라운드가 아닌 스탠드에 있었고, 골키퍼 장갑은 가져오지 않았다.

그리고 짐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지도 못했다. 손등에서 느껴지는, 한없이 부드럽고, 조금 차가운 감촉을 뿌리치지 못했기에.

“괜찮아.”

짐은 그날을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 누구보다 주장다운 캡틴과, 자랑스러운 골키퍼의 모습을.

하지만 가장 잊지 못할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저기, 데려다주지 않아도 괜찮아? 늦은 시간인데?”

“괜찮아. 이제부터 연습할 거잖아?”

“어떻게 알았어?”

“얼굴에 다 나왔답니다.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면 좀 더 노력해야겠네?”

해맑게 웃어 보인 다음, 클라라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작은 등에 매달린 자신의 마킹, <1. Howard>를 바라보던 짐은 천천히 주먹에 힘을 넣었다.

잠시 후, 짐은 빠른 걸음으로 아카데미에 돌아갔으며, 곧바로 테오를 불러내 연습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의 연습은 길지 않았다.

[뉴스입니다. 로커 애비뉴 사거리에서 한 소녀가 뺑소니 차량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유로파리그 8강전을 관람하고 돌아가던 소녀에게 일어난 참사였습니다.]

[가해자는 현장에서 도주했으며, 아직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피해자 C 양은 의식불명의 중태에···.]

* * *

카메라에 잡힌 잭의 표정은 무척이나 침울했다. 오늘 4강전 진출을 확정한 팀의 주장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조금 전 저희 팬이 귀가 도중 차량에 치여 의식불명이라는 소식을 들었슴다. 팀의 주장으로서 슬프기 그지없슴다.]

충격이 컸기 때문일까. 잭은 말투를 고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 팀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던 아이가, 경기 끝나고 돌아가던 길에 뺑소니를 당했으니, 팬을 사랑하는 잭으로서는 슬프고 분할 일이었다.

[사고는 누구나 낼 수 있슴다. 중요한 건 그다음의 대처임다. 어린 소녀를 차로 치어 놓고도 무책임하게 도주한 범인은, 지금이라도 마땅한 대가를 받아야 함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넘어갔다. 무심코 욕설이라도 내뱉은 모양이지만, 나무랄 기분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잭이 이번 인터뷰 때문에 벌금 물게 되면, 내가 대신 낸다고 전해.”

희주에게 그렇게 말해 둔 다음, 나 또한 마이크 앞에 섰다.

“선덜랜드 팬 여러분. 이희성입니다. 클라라 양을 위해 성금을 내겠다는 분들이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척 고마운 일이지만, 치료비는 전액 제가 부담할 것입니다.”

카메라를 응시하며, 몇 번이고 간곡하게 말했다.

“기부는 제가 하면 됩니다. 그 대신, 여러분은 부디 기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아이가 무사히 일어날 수 있도록.”

다음 날.

클라라가 입원한 선덜랜드 로열 병원 주차장에는 힘내라는 포스트잇이 빽빽하게 붙었고, 경찰서에는 자신의 블랙박스 영상을 제공하겠다는 운전자들의 제보가 쏟아졌다.

* * *

“너무 걱정하지 마. 썬이 나섰으니까, 범인은 금방 잡힐 거야. 그리고 클라라는 반드시 회복할 거야.”

“네.”

리지의 위로에, 짐은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하려 노력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은 선덜랜드 유스팀인걸?]

회복될 거라 믿고 싶었다. 그래서 짐은, 클라라는 원래부터 썩 건강한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아, 그리고 오늘부터 우리 1군 팀은 언더셔츠를 통일하기로 했대. 쾌유를 비는 메시지로. 골을 넣을 때마다···.”

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클라라가 말하던 ‘선덜랜드 유스팀’이 사실은, 짐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이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뇨. 제 일이에요.”

“네··· 일이라고?”

“저도 축구선수니까요.”

몇 번이나 들었기에, 짐은 이미 알고 있었다. 축구선수가 할 수 있는 일을.

[사인해주고, 눈 마주치면 웃어주고,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비록 사인을 만들 기분은 아니었지만, 다른 것은 전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애를 보면 환하게 웃어주고, 그리고···.’

[경기에서 이기면 더 좋아.]

“계속 이길 거에요. 그 애가 일어날 때까지.”

주먹이 으스러지도록 힘을 넣으며, 짐은 그렇게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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