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26화 (226/422)

226화 영웅이 되는 방법 (1)

<영웅이 될 기회를 잡아라 - 라파 베니테즈>

샤워를 마치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온 짐의 모습은 꽤 말쑥해 보였다. 물론 눈가는 여전히 붉었지만, 그 정도는 지적하지 않는 게 어른스러움이겠지.

리지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도 그러고 다니면 인기 많을 텐데··· 아, 그러면 혹시 클라라가 싫어하려나?”

그러자 짐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긴, 짐은 또래보다 훨씬 조숙하고 어른스러운 소년이다. 의식을 회복한 클라라를 웃음으로 맞이해 주라는 리지의 의도를 모를 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슬쩍 손수건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썬.”

“알고 있습니다. 애도 아니고, 이럴 때 분위기 파악 못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저, 눈에 뭐가 들어간 거 같아서···.”

“그거, 유명한 핑계잖아요?”

“핑계 아닌데.”

진짜 아니다. 그저 나는, 정말로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병원까지는 선덜랜드 로드스터를 이용하기로 했다. 1초라도 빨리 병원에 가고 싶을 짐의 마음을 배려한 선택이었다.

물론 핸들은 리지가 잡았고, 구단주 전용 세단은 따로 병원에 부르기로 했다.

도착한 직후, 우리는 곧바로 클라라의 병실 앞으로 안내받았다.

“아이고, 구단주님!”

“저희 딸을 살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클라라의 부모님 두 분은 나를 보자마자 손을 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아니라 의사가 살린 거지만, 굳이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따님이 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옆에서는 리지가 의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용태는 어떤지, 면회가 가능한지, 그런 과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우리는 클라라의 얼굴을 잠깐 볼 수 있었다.

“절대 울지 말아요, 썬. 그리고 짐, 너도 환하게 웃어주는 거야. 할 수 있지?”

리지의 다짐에 나와 짐은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짐은 꽤 의젓하게 굴었다. 비록 목소리가 갈라지긴 했지만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줄 수 있었다.

정작 클라라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린 사람은 리지였다. 덕분에 손수건이 두 장 필요했다. 한 장은 내가 써야 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울었던 건 아니다.

그저, 나는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째서 짐의 이마에 적힌 숫자 40이, 아까부터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인지.

혹시 내 시력에 문제가 생겼나? 그런 것치고 다른 사람들 숫자는 정상적으로 잘 보이는데. 의사의 가치도, 리지와 에이미의 숫자도 아주 선명하고 또렷하다.

그런데 어째서, 짐의 숫자만 흐릿한 걸까?

* * *

[타인위어 전체를 공분하게 한 뺑소니 사고의 범인이 마침내 붙잡혔다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범인을 잡는데, 축구팀의 협조가 결정적이었다고 하는데요.]

TV에서 흘러나오는 지역 뉴스 앵커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드 부부는 서로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건넸다.

“다행이야. 그런 못된 놈이 지금이라도 잡혀서.”

“그러게요. 다친 아이도 이제 눈 떴다고 하던데요? 무사하대요.”

“그래? 겹경사군.”

[이에 타인위어 경찰청에서는 FC 선덜랜드에 감사패를 수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소를 짓던 마일즈는 문득 의문을 느꼈다.

“그런데 축구팀이 범인을 어떻게 잡은 거지? 무슨 만화처럼 축구공으로 범인을 때려잡은 것도 아닐 텐데.”

마일즈의 의문에 수잔이 키득거렸다.

“구단주가 투자의 신이니까 특별한 안목이 있는 거 아닐까요? 용의자 쭉 훑어보고 잡아낸 거죠. 범인은 너다!”

그쯤 되면 투자의 신이 아니라 오컬트의 신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일즈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수잔은 이미 만삭이었고, 예정일까지는 두 달도 남지 않았다. 세상에 정말로 신이 있다고 하면, 임산부는 틀림없이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존재였다. 적어도 남편에게는 그렇다.

‘망고가 있으라 하니 망고가 있었고··· 뭐 그런 거지.’

다행히도 뉴스에서는 사건의 해결에 선덜랜드가 어떻게 기여했는지 친절하게 안내하는 중이었다.

[선덜랜드가 보유한 영상 분석 프로그램이 사건 해결의 핵심이었습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차량을 모조리 식별해, 용의자의 폭을 대폭 좁힐 수 있었습니다.]

그때, 뉴스의 자료 화면은 마침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비췄다. 순간 마일즈는 직감처럼 깨달았다. 선덜랜드의 홈 경기장 옆에는, 그의 아내가 마치 소울푸드처럼 취급하는 음식을 판다는 것을.

수잔이 푸드트럭 핫도그를 먹고 싶어 할 가능성을 느낀 마일즈는 재빨리 선수를 쳤다.

“그나저나 로커 애비뉴 사거리 되게 위험하네. 전부터 사고 잘 나게 생겼다 싶더라니···.”

“그러게요. 이상하게 핫도그가 먹고 싶었는데··· 위험하니까 참아야겠다.”

예상대로였기에 마일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뉴스의 멘트 때문이었다.

[한편, 사고가 일어난 로커 애비뉴 사거리는 오늘부터 신호체계를 전면 개편했습니다. 또한 CCTV가 설치되었는데요. 실시간 영상 분석 기술을 통해, 이상 발생 시 자동으로 999를 호출합니다.]

이제 위험하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게 되었다. 기술을 못 믿겠다는 명분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신형 CCTV 구석에 붙은 선덜랜드 엠블럼을 보면 누구 작품인지 뻔해서였다.

마일즈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핫도그 사러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오세요··· 사랑해요!”

* * *

한편, 노스이스트 저널 편집부 사무실에서는, 마감을 앞두고 막바지 회의가 한창이었다.

“편집장님, 이제 슬슬 기사로 걸어도 되지 않을까요? 뺑소니범도 잡히고, 여자애도 깨어났다면서요.”

기자의 질문에, 노스이스트 저널 편집장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무슨 기사?

“이거요. 유소년 골키퍼의 애절한 소원.”

노스이스트 저널은 선덜랜드 유소년 골키퍼, 짐의 사진을 확보한 상태였다. 로열 병원 앞에서 스코어보드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을 퍽 감동적인 앵글로 담아냈다.

사진에 더해, 기자는 이미 주변의 취재까지 마친 상태였다. 이번에 사고당한 소녀가 짐과 같은 반 친구라는 것부터, 쾌유를 빌며 무실점 행진을 벌인 짐의 이야기까지.

“독자들 반응도 괜찮을 거고, 무엇보다 일종의 미담이니까 선덜랜드의 보도지침에도 위배 안 되겠죠. 그 무서운 누님이 들이닥칠 일도 없을 기사고···.”

보고하면서, 기자는 잠시 리미트리스 부사장, 최다미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예인 뺨치는 미녀인데도 어쩐지 몸에 한기가 도는 것 같았다.

편집장 또한 마찬가지 심정이었는지, 무서운 누님 이야기에는 마치 마시던 커피에 누가 레몬즙을 뿌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잠시 고민하던 편집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건 쓰지 말자.”

“네?”

“자칫하면 어린 선수를 망가뜨릴 수 있어. 이러면 우리에게도 손해야. 거위 배 가르는 짓이니까.”

“악성 루머나 찌라시도 아니고, 이런 미담 기사로 선수가 망가진다고요? 아무리 요즘 우리가 리미트리스 관계사 광고 받아먹고 산다지만 그건 좀···.”

“광고 때문은 아니고, 자네가 그랬잖나? 이 골키퍼는 사고 난 이후 쭉 무실점이었다고.”

“그랬죠.”

“보통은 대량실점을 하는 게 정상이야. 하물며 짐 하워드는 어린애잖아.”

“그렇죠. 그러니까 특종 아닙니까? 보통 멘탈이 아니잖아요.”

“내 말은, 크게 될 선수라는 뜻이야. 그러니 괜히 일찍부터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놔두는 게 좋지 않을까? 게다가, 보통 선수들은 이런 계기로 급성장하기 마련이거든.”

“그럴까요?”

“껍질을 깨거나, 자기 몸을 깨먹거나··· 둘 중 하나겠지. 주위에서 괜한 관심을 줄수록 후자의 가능성이 커지고.”

편집장의 이야기에, 기자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특종을 찾아다니는 직업이라지만, 그래도 어린 유망주가 자기 몸을 깨먹은 결말을 다루고 싶진 않았다.

기자는 곧바로 준비한 원고를 폐기했다.

“어··· 그러면 지면이 비는데···.”

마감 전 지면이 비는 건 원래 대형사고에 해당하지만, 편집장은 무척이나 침착했다.

“다행이군. 대영제국 훈장 수여식 특집 기사를 넣을 자리가 필요했거든.”

“훈장 수여식이요? 그런 게 요즘 기삿거리가 되겠습니까?”

“될걸.”

시큰둥한 기자와 달리, 편집장은 진지했다.

“선덜랜드 구단주가 받는다는 모양이니까.”

* * *

전화통을 붙잡고 한참을 떠들던 희주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갑부 오라버님. 훈장 받으러 오라는데요?”

“드립 치지 말고.”

“아이참, 내가 업무 시간에 그런 드립 치겠어? 진짜래.”

실화냐.

“전에 봤었잖아? [썬 리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위한 모임] 결성된 거.”

“어··· 그거, 청원이 몇만 개 모이면 재경기 한다는 그런 드립성 게시물 아니었냐?”

그러자 희주가 엣헴, 하면서 가슴을 폈다.

“예전에 영국 살아봤다는 사람이 나보다 더 모르네. 원래 그런 모임에서 후보자를 내면 그 후보들을 대상으로 심사하는 거야.”

그야, 예전에는 훈장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으니까. 유소년 선수한테 훈장 주는 나라가 세상에 어딨냐.

“정 받기 싫으면 모임이 결성되게 놔두지 말았어야지.”

지금이라도 박살 내면 어떻게 안 되려나? 나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썬 리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위한 모임]의 게시물을 훑었다.

- 구단주로 취임한 이래,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지역발전에 이바지한 바가 큽니다. 경제적 효과만 따져도 대략··· @da0_0mi

- 15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늘 한결같은 ‘썬’의 서훈을 지지합니다. @forever9mysun

아이디가 많이 친숙한데, 기분 탓이지?

“게다가 이거, CBE라는데? 엄청 높은 거잖아?”

희주의 설명에 따르면 CBE는 3등급 훈장으로, 그 위에는 GBE, KBE가 있다는 모양이다. 그런데 애초에 축구계 관계자가 GBE나 KBE를 탄 사례가 없다는 것 같으니, 사실상 최고 등급이라는 모양이다.

“관심 없는데··· 거부하면 안 되나?”

“그야 본인 자유지만, 여러모로 귀찮지 않을까? 괜히 유명세도 탈 거고. 게다가 명목상 훈장은 영국 왕실에서 주는 거니까···.”

“제길, 그럼 받아야겠네.”

나는 입맛을 다셨다. 축협 회장 자리는 대대로 영국 왕족이 맡는 것이 관례인 모양인데, 현재는 왕세손이 하고 있다. 물론 실질적 권한은 회장이 아닌 의장에게 있지만, 그래도 괜히 왕실과 척져서 좋을 건 없겠지.

그런 내 반응을 보던 희주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는 정말··· 축구 말고는 아무 관심도 없구나? 축협 회장 기분 상할까봐 CBE를 받아 주겠다는 사람은 세상에 오빠밖에 없을 거야.”

“뭐, 그렇지.”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만일 내가 훈장이나 작위 같은 것에 관심이 있었으면, 축구단이 아니라 영국 산업에 투자했을 거야. 그리고 지역 인프라를 개선하고···.”

“어··· 그거 완전.”

“나도 방금 깨달았어.”

희주의 얼굴에 번진 미소를 보며, 나는 얼굴을 구겼다. 그러게, 전부 지금까지 내가 했던 거네.

* * *

다시 말하지만, 나는 훈장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유로파리그 우승컵이 훨씬 탐나지. 그렇다고 선덜랜드에 우승컵 주고 시작할 리도 없으니, 그냥 대진운이나 좀 따랐으면 좋겠다.

“오늘이 유로파 4강 추첨이었지?”

“응. 중계도 해 준대··· 슬슬 하겠네.”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희주를 향해, 나 또한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냐. 안 틀고.”

“리모컨 거기 있잖아. 오빠 앞에.”

투덜거리면서도, 희주는 재빠른 손길로 4강 추첨식 중계를 구단주실 스크린에 띄웠다.

사실 대진운 드립은 가벼운 하소연이었다. 어차피 4강쯤 오면 누굴 만나도 딱히 달라질 게 없다. 만만한 상대는 진작에 다 탈락했고, 지금까지 남은 팀은 전부 강적들이다.

잘츠부르크, 세비야, 밀란··· 어휴, 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히네. 어째 거를 타선이 없다.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세비야는 피하고 싶은 심정이다.

세비야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비야보다 확실히 강한 팀들은 전부 챔스에서 뛴다.

바꿔 말해, 유로파의 세비야는 저승사자 같은 팀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로파리그 뱃지 오브 아너를 착용할 수 있는 축구팀이니까.

세비야 유니폼의 뱃지야말로 유로파 3연속 우승, 5회 우승이라는 대기록의 증명인 것이다.

희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안심해, 오빠. 세비야는 아닐 테니까.”

“그럼 다행이지만··· 근거는?”

“징크스 있잖아. 선덜랜드는 컵 대회 결승전에서 해당 대회 최다 우승팀과 싸워 우승한다. 하지만 지금은 4강이니까, 아직 세비야와는 만나지 않을 거야.”

“그건 무슨 또 해괴한 소리야.”

내 반론에 희주가 장난스런 눈웃음을 지었다.

“아니라고 말 못 할걸? 생각해 봐.”

잠시 나는 생각에 빠졌다.

EFL컵 결승 상대는 리버풀, 대회 최다 우승팀이었다. FA컵 결승 상대는 아스널, 마찬가지로 대회 최다 우승팀이다··· 어, 진짜로 징크스인가?

유로파 컨퍼런스는 신생 대회니까 ‘최다 우승팀’ 같은 걸 따지는 의미가 없을 테고.

“따라서, 징크스 때문에 우리는 세비야를 결승에서 만나야 해. 그러니 4강 상대는 잘츠부르크나 밀란이겠지?”

설득력이 있어서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사람은 믿을 만한 이야기보다는 믿고 싶은 이야기를 믿는다는 오랜 격언을 잠깐 망각한 상태였다.

[선덜랜드]

음, 우리가 제일 먼저 뽑혔네. 그러니까 다음은 [잘츠부르크] 아니면 [밀란] 이 나온다는 거지?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커뮤니티 실드는 맨유가 아니라 맨시티하고 붙었잖아. 그러니까 징크스가 꼭 들어맞는다는 보장은···.”

그때, 나는 세상에는 더 강력한 징크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절대적인 징크스,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빗나간 적이 없는 바로 그런 징크스가 있는데.

축구에 관해, 희주 말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맞은 적이 없다.

“에이, 그거랑은 다르지. 맨유는 이번에 커뮤니티 실드에 못 나왔잖아? 하지만 세비야는 유로파에 나왔으니까···.”

“이희주! 당장 입 다물···.”

황급히 외쳤지만, 조금 늦었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 화면 속의 진행자가 추첨을 마쳤다.

[세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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