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영웅이 되는 방법 (2)
4강 일정을 확인한 우리 코칭스태프는 일제히 쓴웃음을 지었다.
“세비야라, 힘든 상대가 되겠군.”
“예전부터 느낀 건데, 브로는 대진운이 참 나쁜 것 같아.”
그러자 희주가 곧바로 호들갑을 떨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작년 EFL컵 4강전에선 하필 맨시티를 뽑더니··· 탈락했죠.”
다른 사람이 대진운 드립을 치면 모르겠는데, 희주 너는 좀 조용히 하지? 돌이켜 보면 작년 EFL컵 4강전도, 네가 추첨 앞두고 입 털었던 기억이 나는데 말이지.
내가 희주를 슬쩍 노려보는 사이, 샐리가 웃었다.
“뭐, 잘됐잖아요? 물론 세비야는 유로파의 최강자고, 이번 4강 상대 중 가장 까다로운 적이에요. 하지만··· 지금의 우리가 세비야보다 약한 팀인가요?”
그러자 다들 일제히 고개를 흔들었는데, 특히 희주가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나도 동의한다. 세비야 구단주는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그사이 샐리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세비야는 확실히 까다로운 상대긴 해요. 그렇기에 오히려 세비야를 4강에서 만나는 건 이득이 될 수도 있어요. 4강까지는 홈 앤 어웨이니까요.”
“하긴, 결승전은 단판이라 변수가 많지. 하지만 홈 앤 어웨이는 두 번이지. 그리고 우리가 두 번 다 질 리는 없고.”
브라이언의 대답에, 희주 또한 재빨리 끼어들었다.
“맞아요. 게다가 2차전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인걸요. 원정팀의 지옥! 무패의 경기장!”
전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희주 네가 무죄가 되는 건 아닐 텐데. 나는 슬쩍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샐리의 얼굴에는 고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평소의 구단주님이라면 전부 짐작하셨을 이야기 아닌가요?”
대답하기 전, 나는 무심코 브라이언 쪽을 흘끔거렸다. 마침 브라이언 또한 내 쪽으로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사실, 나와 브라이언은 이미 이야기를 마친 적이 있다.
[유로파리그 우승컵을 드리면··· 감독님은 거의 컵 대회의 왕이 되는 거지, 브로?]
[맞아. 참가한 모든 컵 대회에서 전부 한 번씩 우승하는 거니까.]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은퇴시켜 드리고 싶었다. 은사의 커리어에 생긴 13년의 공백은, 분명히 나 때문에 생긴 것이었으니.
조금이라도 메워 드리고 싶었다. 이번 유로파리그는 반드시 우승하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 당황했었던 모양이다.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조건이 붙으면, 사람의 판단력이 흐려지기 마련이니까.
로저스 감독의 앞에서는 밝힐 수 없는 이유다.
“징크스 때문에 잠깐 당황했던 모양입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나는 차분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 * *
세비야 원정을 준비하던 우리에게 악재가 도착했다.
해리슨의 부상 소식이었는데, 사유가 황당했다.
“레고를 밟았다고? 농담이겠지.”
“그게··· 밟은 건 아니었고요.”
오른발에 붕대를 감은 채 머뭇거리는 해리슨의 옆에서, 메디컬 팀장 버드가 대신 설명을 시작했다.
“듣자니 완성한 레고를 떨어뜨려서···.”
“이해했어요. 발을 찧었다는 거군요?”
희주가 호들갑을 떨자마자 나는 조용히 핫도그를 꺼냈다. 아무래도 희주 입이 영 방정인 모양이니, 군것질이라도 제공해서 입을 틀어막으려는 이유였다.
희주는 곧 조용해졌다.
“발을 찧은 게 아니라, 반사적으로 발로 걷어찼다고 합니다. 트래핑하려고요.”
슬슬 상황이 이해된 나는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아프다. 보아하니 다들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로저스 감독은 무표정했지만, 자세히 보면 눈썹 주위가 꿈틀거리는 중이다. 브라이언은 입을 쩍 벌렸고, 샐리는 고운 손을 이마에 댄 채 인상을 쓰고 있다.
“레고 삼킬 나이는 아니니까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해리슨? 쉬는 동안 페르난데스에게 물어봐. 어떻게 스무 살부터 월드컵 주전으로 발탁되었는지.”
원래 주전이던 선수가 향수병을 발로 트래핑하려다 다쳤기 때문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다.
“그래도 향수병이 아니라 레고라 다행입니다. 2주 정도만 쉬면 괜찮을 거예요.”
이로써 해리슨은 이번 유로파리그 4강전에 완전히 빠지게 되었다.
“아니, 대체 레고가 시즌 중에 즐기기 안전한 취미라고 누가 그런 거야?”
“누구긴 누구야. 오빠지.”
희주의 지적에 반박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핫도그 한 개를 더 꺼냈다.
어, 오늘따라 핫도그가 조금 쓰네.
* * *
해리슨의 부상으로 자연히 미드필더진의 부담이 커졌는데, 아무래도 가장 큰 피해자는 톰슨이었다.
톰슨은 이제 노장 축에 드는 선수였고, 우리 스쿼드 최고령자이기도 했다. 요즘은 큰 문제가 없다지만, 원래 무릎이 좋지 않은 선수이기도 하다.
정작 톰슨의 태도는 쿨했다.
“괜찮아. 이럴 때 버티려고 주급 받는 거지. 어차피 2주만 지나면 해리슨 돌아온다면서.”
사실은 사소한 부상이었다. 일반인 같으면 아마 며칠만 지나도 붕대 풀고 걸어 다닐 정도로.
다만 해리슨은 어린 선수고, 축구선수라는 직업 특성상 발등의 상처는 안전하게 치료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 2주간 아웃시킨 것이다.
“그나저나··· 코리안 비프 니 수프 엄청 맛있더라.”
톰슨이 말하는 ‘비프 니 수프’는, 도가니탕이다.
우연히 한국에서 재료가 좀 들어왔는데, 혹시라도 무릎에 좋을까 싶어서 톰슨에게 줬었다. 다행히 입에 맞는 모양인지 요즘은 하루에 한 끼를 도가니탕으로 먹는다고 한다.
“더 없냐, 썬? 뭐··· 안 주면 안 뛰겠다는 건 아니지만.”
톰슨의 반응에 희주가 한숨을 쉬었다.
“그거 엄청 귀한 거예요. 한우 도가니, 투쁠.”
도가니에 무슨 투쁠이 있어. 아닌가? 있··· 나? 잘 모르겠다. 음식을 만들어 봤어야 알지. 게다가 영국 소 무릎에도 끓여 먹을 연골은 있긴 할 텐데.
뭐, 한우가 입에 맞으신다고 하니 구해 와야지. 톰슨이 드러눕는 것보다는, 한우 도가니를 조달하는 비용이 훨씬 싸게 먹힌다.
“토가뉘? 해누?”
“그냥 넘어가죠. 아무튼 그거, 리미트리스에서 보낸 건데.”
“다행이네. 그럼 구하기 쉽겠어.”
“오빠 먹으라고 보낸 도가니를 선수들 준 걸, 다미 언니가 알면 아주 기겁할 텐데··· 신경 좀 써.”
전부 내가 먹었다고 해야지 뭐. 덕분에 무릎이 요즘 아주 쌩쌩하다고 말해 주면, 다미는 군소리 없이 한우 몇 마리 더 잡아다 보낼 게 틀림없다.
당신의 한우, 선수의 무릎 연골로 대체되었다··· 이 말이지.
도가니탕을 신나게 흡입하는 톰슨을 향해, 잭이 신기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마침 해리슨의 부상은 같은 미드필더인 잭의 부담 또한 가중시키게 된다.
“잭 너도 한 그릇 먹어 둬. 미리미리 예방해야지.”
“전에 한 번 먹어봤는데, 식감이 물컹거려서 저는 좀 그렇슴다. 근데 무릎에 정말 좋은 검까?”
“속설로는 그렇다고 하더라고.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그러자 옆에서 희주가 엣헴, 하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동양 사상이죠. 무릎이 안 좋을 때는 무릎을 먹고, 내장이 안 좋을 때는 내장을 먹어서 그 기운을 보충한다는···.”
일종의 미신 같은 느낌이지만, 세상에는 플라시보 효과라는 게 있으니 굳이 설명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칼로리나 영양소는 우리 메디컬 팀에서 철저히 체크하니 문제가 되진 않겠지.
“어, 그런데 비서님은 뭐 드시는 검까?”
“잘 모르겠어요. 오빠가 줬거든요. 일단 고기니까 무조건 옳을 거예요··· 음, 맛있어.”
희주에게는 우설구이를 먹이는 중이다. 쟤는 혀가 아주 나쁘니까.
부디 이번 기회에 저 악마의 혓바닥이 좀 낫기를.
* * *
유로파리그 4강 1차전, 세비야 대 선덜랜드.
세비야의 홈, 에스타디오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에서 열린 원정 경기는, 시작부터 무척 치열하게 흘렀다.
그 와중에도 초반의 분위기는 우리가 확실히 가져온 상태였다. 샐리의 분석과 브라이언의 전술은 틀림없이 세비야를 압도하고 있었고, 선수단의 사기도 훌륭했다.
결과는 선제골로 이어졌다.
[(1) 선덜랜드 1 - 0 세비야 (0)]
하지만 좋았던 분위기가 뒤집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을 걷어내는 경합 과정에서 잭이 세비야 선수와 뒤엉키고 만 것이다.
“어떡해!”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꼭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나는, 우리 선수의 부상에는 민감한 편이니까.
다행히 잭은 곧 툴툴 털고 일어났고, 전반전을 무사히 치러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희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큰 부상은 아닌가봐.”
“그렇겠지.”
하지만, 다치지 않은 것도 아닐 거라는 말을, 나는 가슴 속으로 삼켰다.
내가 아는 선덜랜드의 주장은, 절대 그라운드 위에서 시간을 끌지 않는다. 일부러 드러눕지도 않는다. 그런 잭이 쓰러졌다는 것은, 틀림없이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잭은 하프타임에 교체 아웃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주장을 잃어버린 우리는 세비야의 끈기와 저력에 흔들리고 말았고, 후반에만 세 골을 내주며 원정 1차전을 패배로 마쳤다.
[(1) 선덜랜드 1 - 3 세비야 (3)]
* * *
부상 정도가 좀 어떠냐고 물었더니, 반사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끄떡없슴다. 지금 당장 뛸 수 있슴다.”
“너한테 물은 거 아닌데.”
그러자 옆에서 메디컬 팀장 버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일주일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나는 안도했다. 일주일이면, 큰 부상과는 정말로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물론, 잭 본인은 내 소감에도, 메디컬 팀의 진단에도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전혀 다행하지 않슴다. 일주일이면, 세비야와의 2차전을 치르지 못한다는 뜻이잖슴까?”
“그렇게 되겠지.”
“곤란함다. 선덜랜드가 절 필요로 함다. 나을 검다. 낫게 하겠슴다. 그러니 꼭 선발을 부탁드림다.”
나는 대답 대신 잭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잭이 곧바로 고쳐 말했다.
“제 말씀은 그러니까, 출전시키지 않겠다고 선을 긋지는 말아 달라는 뜻이었슴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다친 선수를 뛰게 하는 건 내 신조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정도 부상은 축구선수에게는 아주 흔한 수준이고, 고작 일주일 쉬는 정도로 경기 감각이 현저히 떨어질 정도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잭의 경우, 성격상 출전을 아예 금지하면 오히려 회복이 늦어질 타입이다.
결국 나는, ‘컨디션 봐서.’라는 애매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잭은 하루 세끼 전부를 코리안 비프 니 수프··· 그러니까 도가니탕으로 때웠다. 실제로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회복 자체는 빨랐다.
게다가···.
“팬레터임까? 고맙슴다. 꼭! 뛰겠슴다!”
고작 일주일 드러눕는 정도로 쾌유를 비는 팬레터와 선물이 쇄도하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잭이 지역 팬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흐뭇했다.
아주 조금은 부럽기도 하고 말이지.
* * *
[유로파리그 4강 2차전, 선덜랜드 대 세비야.]
우드 부부는 오랜만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찾았다.
원래는 축구 관람을 자제하던 중이었다. 수잔의 출산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익스클루시브 박스를 이용한다 치더라도, 축구장의 열기는 만삭의 임산부에게 썩 유익한 환경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드물게도 수잔이 고집을 부렸다.
“이런 날 경기를 안 보여 주면, 우리 애기가 나중에 우리를 얼마나 원망하겠어요?”
결국 마일즈도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수잔의 성격상 오늘 경기를 못 보게 하면, 나중에 결승전을 보겠다며 비행기에 몸을 실을 가능성도 있었다.
‘오늘 경기는 불리한데···.’
마일즈는 한결같이 팀을 응원하는 사람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오늘의 선덜랜드가 유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대 세비야는 유로파리그의 최강자인 반면, 선덜랜드는 유로파리그에 처음 나오는 신예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정에서도 두 골 차로 졌다.
게다가 오늘은 잭도 벤치에 앉아 있었다. 선덜랜드 제일의 클러치 플레이어, 주장 잭의 공백은 지금처럼 불리한 경기에서 특히 크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그날의 경기는 시작부터 팽팽했다. 단순한 홈 버프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수들의 사기는 오히려 최상이었고, 코칭스태프의 전술 또한 날카로웠다.
부족해진 중원의 중량감을 메우기 위해 에디가 미드필더 자리까지 올라갔고, 최전방의 선수들 또한 끊임없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헌신적으로 뛰었다.
그런 선수들의 움직임에 호응하듯, 관중들의 함성 또한 점차 커졌다. 수잔은 물론, 마일즈 또한 어느새 목 놓아 외치는 중이었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1) 선덜랜드 0 - 0 세비야 (3)]
여전히 스코어보드의 숫자로는 선덜랜드가 불리했다. 이 정도를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고 하면, 누군가는 과대망상이라고 답할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유로파의 왕, 뱃지 오브 아너의 주인 세비야. 절체절명이라는 건 딱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이야기임을, 마일즈는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알고 있었다. 선덜랜드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까지는.
그런 결의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아웃, 26번 와이트. 인, 18번 맥그리거]
···후반 50분, 세상에서 클러치를 잘 넣는다는 주장이 천천히 사이드라인 옆에 섰다.
* * *
“뛸 수 있겠나?”
메디컬 팀의 체크는 이미 마쳤고, 의학적으로 큰 문제는 없다는 답변도 함께 받았다. 다만, 어디까지나 문제는 없다는 것일 뿐, 출전을 썩 권장하지는 않는다는 단서가 뒤를 따랐다.
그래도 선수에게는, 반드시 뛰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네, 문제 없슴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두 골을 더 넣지 못하면 선덜랜드는 떨어진다. 그래서일까? 함성 소리가 유난히 처절하다.
그래도 함성이 그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 모인 팬들은 차라리 눈물을 흘릴지언정 결코 포기하지는 않는다.
잭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자랐으며, 줄곧 이곳에서만 뛰었기에.
I know I am. I’m sure I am.
선덜랜드의 주장은 천천히 사이드라인에 섰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팬들의 목소리가 더욱 뜨거워졌다. 마치 무언가를 호소하듯이, 부탁하듯이.
I’m Sunderland ’til I die. Sunderland 'til I die.
그 함성에 답하듯이, 잭은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뛸 수 있슴다.”
’til I d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