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영웅이 되는 방법 (3)
관중석에 앉은 오클리 샌더스는 일평생을 카나리아로 살았다. 영국에서는, 노리치 팬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그런 오클리가 오늘 선덜랜드의 레플리카를 몸에 걸친 이유는 전적으로 톰슨 때문이었다.
오클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톰슨이 무척 대단한 선수라고 생각했다. 톰슨이 첼시에서 뛰던 순간부터의 일이다.
파워 넘치는 중거리 슛이 무척 호쾌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골을 꽂아넣은 직후, 두 팔을 펼치고 달리는 톰슨 특유의 세레머니를 오클리는 무척이나 멋지다고 평가했었다.
그래서 오클리는, 톰슨이 노리치로 옮겼을 때는 뛸 듯이 기뻐했고, 선덜랜드로 떠나갔을 때는 분노했으며, 붉은 유니폼을 입은 톰슨에게는 그만 모진 비난을 퍼붓고 말았다.
[유다 같은 배신자 새끼]
돌이켜 생각하면 무척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톰슨은 오히려 미소로 응수했었다.
그날부터 오클리는 노리치에 더해, 선덜랜드 또한 응원하는 중이었다. 노리치와 붙지 않는 리그 서른여섯 경기는 물론, 유럽 대항전은 티켓까지 구해서 따라 다녔다.
지금까지 선덜랜드는 오클리의 응원에 시원한 경기력으로 보답하는 팀이었고, 톰슨 역시 매번 맹활약을 펼쳤다.
그런데 오늘만은 달랐다. 선덜랜드는 전반 내내 무기력했고, 톰슨은 그가 알던 선수가 아니었다.
‘왜 저러지?’
통렬한 중거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특유의 롱 패스도.
자꾸만 공을 짧은 패스로 되돌리는 톰슨의 모습이 어쩐지 무척 무기력해 보여서, 오클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톰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공을 잡은 순간, 코스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니는 철통같은 마크에 시달리고 있었고, 스티븐은 꽁꽁 묶였다. 그렇다고 다 건너뛰고 바스티아노에게 냅다 지르는 플레이는 너무 도박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르틴이 틀어막힌 게 너무 크다. 만일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세비야의 16번은 MOM이 되기 충분한 활약을 펼치는 중이었다.
혀를 차며, 톰슨은 짧은 패스를 선택했다.
‘그 꼬맹이라면, 이 와중에도 패스 루트를 찾아냈으려나.’
어차피 해리슨은 오늘 뛸 수 없다. 부상 때문이다. 명단에도 들지 못한 선수를 그리워해도 의미는 없음을, 톰슨은 이미 알고 있었다.
피터 톰슨이 자신의 자질에 처음으로 의심을 품은 것은, 유소년 시절의 일이었다. 한국에서 온 자그마한 소년에게 완벽하게 농락당한 날.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처음엔 위안을 삼으려 했었다. 그저 상대가 너무 대단했을 뿐, 자신도 그리 나쁜 선수는 아니라고. 하지만 톰슨을 꺾은 한국인 소년은 프로조차 되지 못했다.
그래도 그날의 톰슨은, 자신은 주인공이라고 믿었다. 그저 장르가 조금 바뀌었을 뿐이라고. 먼치킨물이 아니라 열혈 근성물일 뿐이라고.
‘원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어릴수록 특히 그렇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믿음이 착각임을 깨닫게 된다. 물론 개인차가 있다. 그리고 프로 스포츠 선수쯤 되는 재능의 소유자라면, 꽤 오랜 시간 주인공으로 행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첼시에서 챔스 트로피를 들어 올리던 순간의 톰슨은 틀림없는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결국 조연만이 남게 된다.
결국 자신이 주인공감은 아니었다는 걸 깨닫거나, 혹은 다음 세대에게 주인공 자리를 넘겨주기 때문이다.
스포츠 선수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언젠가는 전성기의 기량을 잃어버리게 된다. 팬들이 기억하던 모습과 점점 멀어지고, 몸에 새겨진 반짝임을 재현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축구’를 계속하고 싶다면, 팀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조연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하프라인 너머의 상대는, 틀림없이 그 이야기에 들어맞는 존재였다.
‘헤수스 나바스.’
한때 세비야의 보석이라 불리던 특급 크랙이었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세비야의 핵심은 아니다. 톰슨보다도 다섯 살이 많은 선수,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노장이었으니.
하지만 나바스는 아직 세비야의 주장이고, 활동량과 헌신이 요구되는 풀백으로 뛴다. 그리고 자기보다 어린 선수들을 뒷받침하는 명품 조연으로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순간, 톰슨은 자신의 왼팔이 화끈거린다고 느꼈다. 결장 중인 잭 대신 착용한, 선덜랜드의 주장 완장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지난 1차전에서, 선덜랜드의 부주장은 선제골의 리드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 반면, 세비야의 주장은 그날 어시스트 두 개를 추가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오늘, 톰슨이 전반전을 아무 성과 없이 보내는 동안, 나바스는 마르틴을 완벽하게 틀어막으며 소속팀 세비야를 결승전 직전까지 데려간 상태였다.
‘빌어먹을!’
언제부터인지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톰슨은 이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더 이상 팀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도.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팀의 주역이 되기에는, 그는 이제 너무 나이 든 선수다.
‘나는, 이제 조연이지··· 저 사내가 그런 것처럼.’
그래도 그라운드 위에는 아직 조연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나바스가 이번 4강에서 완벽하게 증명해 보인 것처럼.
사이드라인을 넘어 들어오는 선덜랜드의 주장에게, 톰슨은 천천히 팔의 완장을 풀어 건넸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떠나는 약간의 아쉬움에 홀가분함이 섞인 것 같았다.
“왜 웃으심까. 지고 있잖슴까.”
“엄밀히 말하면, 우린 아직 지고 있는 건 아닌데.”
대답하면서 톰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웃었다고?’
“대충 넘어가십쇼. 총합 스코어는 불리하잖슴까.”
“썬이 언젠가 그러더라고. 팀이 지고 있을 때 웃고 있는 선수가 일류라고··· 게다가 너도 웃고 있는데.”
“그렇슴까? 기대돼서 그런가 봄다. 견딜 수가 없슴다. 어떻게 갚아줄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뜀다.”
톰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마음껏 갚아주고 와. 내가 받쳐줄 테니까.”
* * *
세상에는 주장 완장으로부터 힘을 얻는 타입의 선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 주장, 잭은 틀림없이 그 타입에 해당하는 선수였다.
잭의 움직임이 썩 가볍지는 않았다. 투입 직후 잭은 곧바로 통렬한 중거리 슛을 날렸지만, 그의 슛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평소의 잭이라면 찾아보기 힘든 실수다.
슈팅 직후, 잭은 발목에 위화감을 느낀 것처럼 그라운드를 고쳐 밟기도 하고, 발목을 땅에 세워 살짝 돌리기도 했다.
잭의 컨디션이 만전이 아니라는 증거다.
애초에 잭의 컨디션 문제는 처음부터 뻔한 거였다. 로저스 감독은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서 주장을 후반까지 아껴두는 타입이 아니니까. 만일 잭의 컨디션이 좋았으면, 당연히 스타팅이었겠지.
그래도 우리는 잭을 출전시켜야만 했다. 세상에는 희주의 입방정 못지않게 강렬한 징크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덜랜드의 주장은 틀림없이 클러치 플레이어고, 홈 팬들이 점수를 필요로 할 때마다 골을 만들어내는 선수다.
게다가···.
“톰슨 선수 움직임이 엄청 가벼워 보여! 도가니탕이 효과가 있었나 봐.”
환호하는 희주 쪽을 흘끗 바라보며, 나는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랬으면 좋겠네.”
사실 도가니탕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톰슨의 무릎은 현재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는 상태까지 회복했고, 필요한 건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효과였다.
효과가 있어야 하는 건 우설구이 쪽인데···.
뭐, 오늘은 희주의 입방정에 대비해 핫도그와 소시지를 비롯한 간식을 대량으로 준비했다. 그러니 별일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주가 말한 것처럼, 잭의 투입 직후 톰슨의 움직임이 부쩍 좋아졌다. 어쩐지 나는, 원인이 조금 짐작될 것 같았다.
‘부담스러웠던 거겠지. 주장 완장도. 부주장이라는 자리도.’
객관적으로 보면, 피터 톰슨은 주장 완장이 잘 어울리는 사내다. 이제 우리 팀에서 제일가는 베테랑이며, 선수단의 누구보다 위대한 커리어를 보내기도 했다.
가뜩이나 우리는 최근, 선수단의 평균 연령이 꽤 어려진 상태라, 톰슨 같은 베테랑은 그 존재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래도 톰슨 자신은, 줄곧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너에게 족쇄를 채우고 있었던 거구나.”
톰슨은 언제나 톰슨일 거라 믿었다. 팀의 방침은, 피터 톰슨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저 진지한 사내의 성격까지 고려하지는 못했었다. 그의 지독한 책임감은, 자신이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동안 겪었던 패배를 쉽게 털어내지 못했을 테니.
그래도 이제는 괜찮을 것이다. 이제, 그의 짐을 대신 짊어질 사람이 경기장에 섰기 때문에.
그러니까···.
“뛰어.”
마치 내 말이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톰슨이 주위에 공을 짧게 뿌리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 * *
잭의 투입 이후, 경기의 흐름이 분명히 바뀌었다. 선덜랜드의 경기력에는 더욱 물이 올랐고, 팬들 또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오클리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톰슨이 차고 나왔던 주장 완장이 잭에게 넘어간 것도, 잭이 나오자마자 날뛰기 시작한 선덜랜드의 팬들도.
‘이러면 꼭, 전반전은 톰슨이 못해서 불리했다는 것 같잖아.’
게다가, 여전히 톰슨은 특유의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한 상태였다. 호쾌한 중거리는 물론, 롱패스도 실종되었다.
아니, 그뿐이 아니었다. 톰슨의 역할 자체가 오클리의 기억과는 달랐다.
빌드업의 중심은 5번 에디가 맡았고, 찬스 메이킹은 19번 요니가 전담했다. 그리고 중원을 장악하는 역할은 18번, 잭에게 넘어갔다.
톰슨은 그저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요소요소의 공백을 메우고, 동료들의 패스를 받아주기 위해서.
분명히 멋진 플레이였지만, 톰슨의 활약을 바라는 오클리로서는 살짝 아쉽게 느껴졌다. 게다가 오클리가 아는 톰슨은 무릎이 썩 튼튼하지 못한 선수였다.
‘이래도 되는 건가?’
그런 오클리의 우려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톰슨은 그라운드 곳곳을 누볐고, 팀에서 코너킥을 따냈을 때는 세트피스 공격에 가담하기도 했다.
페널티박스 안에서 톰슨의 몸이 솟구쳤다. 마치 자신의 무릎은 이제 괜찮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잠시 후, 공중에서 수비를 완전히 따돌린 톰슨의 머리가 공을 내려찍었다. 천금 같은 헤더를 성공시킨 톰슨이 두 주먹을 움켜쥐며 포효했다.
[(2) 선덜랜드 1 - 0 세비야 (3)]
문득 오클리는 톰슨과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칠만 석 경기장이고, 오클리는 애초에 노리치의 팬이다. 절대로 얼굴을 알아볼 리가 없는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오클리는 자신이 착각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말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톰슨이 곧바로 두 팔을 펼치며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니, 사실은 다시 보고 싶어져서 그랬던 거야. 네 골 세레머니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톰슨과의 거리는 꽤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오클리는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너는 정말.”
내 영웅이야, 라는 말을 입 안에 삼키며, 오클리는 주위 팬들과 함께 목청에 힘을 주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 * *
수잔 베일리 우드는 경기장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물었다.
“이제, 딱 한 골이 필요한 거 맞죠?”
“그래.”
총합 스코어는 2 - 3이지만, 선덜랜드는 1차전 원정에서 득점한 적이 있다. 만일 한 골을 더 넣는다면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선덜랜드가 결승에 올라간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세비야 또한 결사적인 방어를 펼쳤다.
세간에서는 텐백, 혹은 골대 앞 버스 주차라고 부를 정도로 내려앉았고, 선덜랜드의 슛을 몇 번이고 몸으로 막아내며 육탄 방어도 서슴지 않았다.
“아깝다···!”
요니의 슛이 센터백의 몸에 맞고 흘러나온 순간, 수잔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리고 크리그의 슛을 골키퍼가 펀칭했을 때는 마일즈가 깊게 탄식했다.
주도권은 완벽하게 선덜랜드에게 넘어왔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딱 한 골이면 된다는 이야기는, 다시 말하면 한 골이 없으면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경기는 90분을 향해 달려갔고, 사이드라인 밖에서는 인저리 타임 5분을 알리는 팻말이 올라왔다.
“어머?”
“응? 왜 그래?”
“우리 애기도, 차고 싶은가 봐요.”
경기의 흐름은 답답했지만, 몸 안에서 느껴지는 발길질의 진동만은 수잔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수잔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부풀어오른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얘는,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선덜랜드의 팬이 되는 거네.’
다시 발길질이 느껴졌다. 꼭 신호를 보내려는 것처럼. 그 순간, 수잔은 공이 선덜랜드의 18번 앞에 도착했음을 인지했다.
“차!”
잭의 발이 힘차게 휘둘러졌다.
여전히 그의 감각은 100% 돌아오지는 않았고, 슛은 평소보다 조금 높았다. 크로스바 아래, 무척 빠듯한 궤도로.
그래도 골대를 넘어가지는 않았다. 크로스바 아래쪽을 때리며 굴절된 공이 그라운드를 강타한 다음, 세비야의 골네트를 확실히 흔들었다.
선덜랜드의 결승 진출을 확정하는 득점이었다.
[(3) 선덜랜드 2 - 0 세비야 (3)]
잭이 두 주먹을 움켜쥐며 포효하는 순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폭발할 것처럼 뜨거워졌다.
수잔은, 문득 이날을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경기장의 함성도, 그에 호응하듯 힘차게 움직이는 아기의 발길질도.
“빨리, 이 아이와 함께 경기장에 와야겠어요. 벌써부터 이렇게 좋아하는데.”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남편 마일즈의 따스한 손길에 몸을 맡기며, 수잔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