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30화 (230/422)

230화 서로의 역할 (2)

[로저스, 재계약 의사 없어··· 선덜랜드 떠나나? 차기 행선지 토트넘 유력.]

나는 잠시 기사 헤드라인과 로저스 감독을 번갈아 바라봤다.

“정말입니까?”

그러자 로저스 감독이 빙긋 웃어 보였다.

“샘 영감쟁이가 그러는데, 핫스퍼 스타디움 근처에 드라이브하기 좋은 코스가 있다더군. 시즌 끝나면 다녀올 계획이네.”

그런 의미의 ‘행선지’를, 마치 토트넘 차기 감독 후보로 포장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물론 이런 식의 흔들기성 찌라시는 어디에나 나오는 법이지만, 상대가 우리 프레스팀임을 고려하면 꽤 훌륭한 솜씨인 셈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는 애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거 누구 작품입니까?”

애니가 곧바로 프로필 서류를 내밀었다. 어디 보자··· 이름은 클라크, 성별은 남자, 런던에서 활동한 언론인 출신으로, 현재는 토트넘 홍보팀 소속이다.

“안경은 안 썼네요. 언론 관계자 클라크라서 혹시나 하고 기대했는데.”

주위의 반응이 영 싸늘하다. 1절만 해야지.

“역시 영국 언론을 움직이려면 런던에도 연줄이 있어야겠죠. 펠릭스, 우리 이 사람 데려옵시다. 직위는 프레스팀 부팀장, 약속할 수 있는 대우의 마지노선은···.”

나는 클라크의 서류, 정확히는 프로필 사진을 잠시 응시했다. 그렇게 이마에 숫자를 확인한 다음, 포스트잇에 조건을 슥슥 적어서 내밀었다.

애니가 쓴웃음을 지었다.

“꼭 내부 직원 승진시키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말한다?”

그러자 펠릭스가 대신 대답했다.

“선덜랜드는 파리의 헤드헌터를 역으로 영입할 수 있는 팀입니다. 토트넘 홍보팀에서 사람 빼는 게 어려울 것 같진 않군요.”

펠릭스는 이번에 우리가 새로 영입한 헤드헌터로, 파리 소속이었다. 완강히 거절하던 브라이언에게 계속 접촉한 끈기를 높게 평가했다.

물론 다른 꿍꿍이도 있었지만.

“그럼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펠릭스는 곧바로 서류를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애니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썬, 괜찮겠어?”

“네? 뭐가요?”

“파리의 스태프를 돈으로 빼돌릴 수 있나 싶어서. 상대는 카타르잖아?”

카타르를 언급하는 애니는, 마치 이름을 말해선 안 될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웠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정확히는 카타르 ‘투자청’의 자회사죠. 그리고 저는 ‘리미트리스’ 오너고요.”

다미가 좋아하는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내 회사 이름이 왜 리미트리스인지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단 말이지.

아무튼, 세계에서 제일 돈 많은 구단의 스태프를 빼돌리는 행동은 상징성이 크다. 그래서 나는 큰 고민도 없이 파리 스태프를 곧바로 헤드헌팅했다.

부유하기로 유명한 빅클럽 파리의 스태프, 그것도 헤드헌터를 역으로 고용한 것이니, 이보다 강렬한 메시지는 존재하지 않겠지.

[나하고 돈싸움 해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도전해라. 결과는 알아서 감수하고.]

선수의 영입에는 썩 효과적이지 않은 메시지다. 선수들은 꼭 돈만 보고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선수라면 팀의 성적과 위상, 주전 자리 같은 다양한 요소를 모두 고려해서 팀을 고른다.

반면, 스태프는 상대적으로 월급쟁이 회사원에 가까운 존재다. 주전과 후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만큼, 더 좋은 대우를 보장하면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다.

이제 당분간은 조용해지겠지. 결승전을 준비하는 브라이언의 집중이 방해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파리는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죠. 역사가 긴 명문으로, 오랜 침체기를 겪다가 외부 자본이 유입되면서 부활했다는 점에서요.”

내가 내세운 명분에, 애니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구단 운영 노하우에서 벤치마킹할 게 많을 것이다?”

“네. 앞으로 곶감 빼먹듯 한 명씩 빼 와야죠. 그러려고 펠릭스부터 데려온 겁니다. 헤드헌터들은 원래 인맥 관리 잘하는 편이니, 이득이죠.”

“흐음.”

애니는 다 알았다는 듯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희주는 본격적으로 입방정을 떨었다.

“여러분! 이미 아시겠지만, 우리 오빠가 이득을 운운할 때는···.”

“시끄러워.”

이게 다 구단주의 역할이라니까?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오로지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사이드라인 밖의 장애물을 모조리 치워버려야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고.

* * *

분석실에서는, 선덜랜드의 브라이언과 샐리가 머리를 맞댄 채 4강전 영상을 한창 돌려보는 중이었다.

“잘츠부르크도 원정 다득점으로 올라온 거군요.”

사실, 밀란의 탈락은 꽤 충격적인 결과라는 게 선덜랜드 내부 분석이었다.

구단주 비서의 저주가 작렬했던 4강전에서, 세비야는 틀림없이 최악의 상대였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누구나 잘츠부르크를 가장 원했을 것이다.

“만일 4강 상대를 지명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세 팀은 잘츠부르크의 이름을 적었을 게 분명하죠.”

“하긴, 잘츠부르크가 결승에 올라올 거라고는 예상 안 했지.”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이 달랐다. 일단, 잘츠부르크는 무척 합리적인 운영을 준비했다.

1차전을 홈에서 치른 잘츠부르크는 90분간 철저하게 잠그고 무실점 무승부를 노렸다. 그리고 밀란의 홈, 산 시로에서 치러진 2차전에서는 딱 한 골을 득점하며 게임을 끝내 버렸다.

밀란 역시 만회골을 넣었지만, 원정 다득점 규칙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저런 거 보면, 우리가 세비야 원정에서 한 골 넣어둔 건 정말로 다행이었네요.”

“맞아. 원정골이 없었으면, 한 골이 더 필요했겠지··· 만일 한 골을 더 넣었더라도 연장전을 치러야 했을 거고.”

“그리고 혹시라도 연장전에서 실점했으면 추가로 두 골이 필요해지는 거니까··· 어휴, 끔찍하네요.”

“그래서 폐지 이야기도 슬슬 나오는 것 같더라고. 뭐, 우리로서는 나쁠 게 없는 개정안이지.”

원정 다득점 규칙은, 바꿔 말하면 홈에서 적게 득점한 팀에게 메리트를 준다는 의미와 같다. 홈에서 극도로 강한 선덜랜드로서는 오히려 불리한 규칙인 셈이었다.

한편, 샐리는 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원정다득점 폐지는 우리처럼 홈에서 강한 팀에게 어드밴티지를 주는 제도죠. 그런데 홈에서 강한 팀은 당연히 팬심이 강하잖아요?”

“그렇지. 우리만 해도 홈 팬들이 칠만 명씩 몰려와서 미친 듯 소리치는 덕을 많이 보고 있으니까.”

“결국 인기 구단의 진출 확률을 높이려는 속셈 아닐까요? 그래야 대회의 흥행이 보장되니까요.”

“그럴지도.”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 브라이언은 내심 속으로만 감탄했다. 몇 년 전까지의 선덜랜드는, 그렇게까지 인기 구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FC 선덜랜드는 틀림없이 시티 오브 선덜랜드 주민들의 유일한 낙이자 즐거움이었고, 인생의 일부처럼 사랑받는 구단이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칠만 석을 꽉꽉 채울 정도의 인기는 절대 아니었다. 사만 구천 석을 채우지 못한 날도 부지기수라는 것을, 브라이언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팬은, 전부 브로가 채운 거지.’

시즌권을 꾸준히 사는 충성 팬들에게, 더한 팬서비스로 보답했다. 티타늄 재질의 고급스러운 시즌권을 지급했고, 입구에서부터 이름을 부르며 안내했다.

어린 팬을 끌어들이기 위해 아동용 상품과 굿즈를 팔았다. 그리고 최대한 로컬 보이, 유소년 아카데미 출신 선수를 중용하는 정책을 폈다.

그렇게 4년이 지났다.

지금의 선덜랜드는 칠만 석을 가득 채우는 인기 팀이고, 특히 십 대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덕분에 SNS나 커뮤니티에서의 화력은 이미 빅 6 못지않다.

이희성은, 이미 선덜랜드라는 팀의 구조 자체를 바꿔 놓았다. 이제 남은 건 팀의 성적과 위상뿐인데, 이것만은 아무리 뛰어난 구단주라도 직접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내 역할이지.’

브라이언의 속내를 눈치챘는지 샐리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네, 우리 역할은 잘츠부르크에 이기는 거죠··· 오늘도 잔뜩 야근할 것 같으니까, 미리 드링크나 한 캔 하실래요?”

브라이언의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은 채, 샐리가 구석의 상자에서 에너지 드링크 캔을 주섬주섬 꺼냈다.

붉은 황소 그림이 선명한 드링크 캔을 향해, 브라이언이 인상을 썼다.

“이렇게 무심코 사 마시는 드링크가 문제야. 잘츠부르크 놈들 구단 운영비로 쓰일 거 아니겠어?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다른 브랜드만 마셨지.”

“어련하시겠어요.”

샐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 신경 안 써요. 이 드링크값의 얼마가 잘츠부르크 구단 운영비로 들어갈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뭐 대수겠어요. 어차피 우리 구단주님 발끝에도 못 미칠 텐데.”

“하긴, 그러네.”

“싹 마셔버리자고요. 레드불 마시며 밤샘해서 만든 전술로 잘츠부르크를 깨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깨소금이잖아요?”

상상만 해도 통쾌했기에, 브라이언은 기쁜 마음으로 샐리가 내민 드링크 캔을 원샷했다.

* * *

분석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열띤 토론에, 로저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올 시즌은 로저스가 선덜랜드 감독으로 보내는 마지막 시즌이었고, 그는 사실상 이번 시즌을 인수인계 기간으로 정했었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가, 혹시라도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때 손을 뻗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브라이언은 그의 기대보다 훨씬 빠르게 적응했고, 그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끝까지 지켜보고 말없이 응원하는 것 정도가 자신의 역할임을, 로저스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로 향했다. 정확히는, 유소년 훈련장 쪽이었다.

“짐이 참 활발하군.”

그러자 벤자민이 냉큼 대답했다.

“네, 한때는 걱정했습니다. 너무 날이 서 있어서, 꼭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웠거든요. 그리고 클라라가 깨어난 후엔 긴장의 끈을 놓아 버릴까봐 염려했습니다만···.”

“지금은 딱 좋은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군. 저 아이는 요즘도 병원에 찾아가나?”

“그렇습니다.”

벤자민의 대답에 로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클라라는 며칠간 의식을 잃을 정도의 중태에 빠졌었다. 그러니 회복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병원 신세도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이었다.

어쩌면 그 회복과 재활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힘들고 고된 길일지도 모른다. 축구가 그런 소녀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줄 수 있다면, 무척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감독님!”

멀리서 로저스를 발견한 테오가 공을 몰고 뽀르르 달려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리운 모습에, 로저스는 무심코 미소를 짓고 말았다.

예전, 한국에서 온 소년이 아카데미에 처음 들어왔을 때 딱 저런 식으로 인사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인사는 점점 정중해졌지만, 대신 귀여운 맛은 사라졌다.

“그런 인사법은···.”

“관리인님한테 배웠어요. 감독님.”

리지가 가르친 모양이다.

하긴, 어렸을 때의 구단주 이희성의 모습을 아는 사람은 리지 아니면 브라이언 정도가 남는다. 브라이언은 애들이라면 질색하니, 자연히 테오에게 ‘썬의 인사법’을 가르칠 사람은 리지밖에 남지 않는다.

로저스는 천재 축구소년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그런데 네 감독님은 내가 아니라 벤자민 감독님이잖니.”

“그치만 감독님은 감독님인걸요.”

열 살짜리 테오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타고난 축구 재능으로는 U-14 팀에서 뛸 정도이지만, 1군 감독이 어떻고 유소년 팀 감독이 어떻다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만큼 조숙하지는 않다.

모두가 짐이나 과거의 이희성처럼 조숙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로저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인사하러 온 게냐?”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러니까, 오프사이드인데 오프사이드가 아닌 경우에 대해서···.”

테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수비가 어떻고, 공격이 어떻고, 하는 소년의 이야기에는 비약이 넘쳤고, 어린 나이 특유의 텐션과 천재성이 더해지자 알아듣기 퍽 난해해졌다.

실제로 유소년 감독 벤자민조차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을 정도다.

물론, 이런 타입의 소년을 여럿 겪은 로저스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이야기였다.

“오프사이드 위치에서 역이용하는 플레이구나. 나중에 1군 훈련장에 오거라. 요니가 종종 써먹거든. 요즘은 스티븐도 연습 중이니, 실제로 보면 도움이 될 게다.”

“정말요!? 감사함다!”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뽀르르 공을 몰고 달리는 테오를 바라보며, 로저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잭의 말버릇은 배우지 말고.”

그런 로저스를 향해, 벤자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감독님. 주제넘은 말씀일지도 모르지만··· 화내지 않고 들어주시겠습니까?”

말해보라는 의미로 시선을 보냈지만, 벤자민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랜 머뭇거림 끝에, 마침내 벤자민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를 맡아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자네는?”

“저는 코치로도 충분합니다. 물론 1군 감독에게 유소년을 맡으라는 건 모욕적인 제의가 되겠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네.”

로저스는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마음이 끌리는 제의이긴 했다. 비록 은퇴를 결정했지만, 그래도 축구 지도자 노릇이 질린 것은 아니었다. 선덜랜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실 1군 팀에서 이기기 위한 축구를 하는 것보다는, 어린 재능을 키워내는 게 자신의 적성에 딱 맞는 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를 다시 맡을 수는 없었다.

로저스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아이들을 키워내는 건, 이제 자네 역할이야.”

“······.”

“잘 키우게. 어린 재능들은 아주 조금만 잘못해도 금방 부서지거든. 그렇다고, 마냥 싸고돌다가 녹슬게 하지는 말고.”

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로저스는 개의치 않았다.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기에.

그리고 사실, 크게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가 버티던 예전과 달리, 지금의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한다는 걸 알기에.

최고의 메디컬 스태프가 있고, 육성단장 페르난데스 또한 아이들을 잘 키워낼 인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팀에는 구단주 이희성이 있다.

‘그러니, 내 역할은 이제 하나뿐이지.’

로저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신의 역할을 이미 결정한 노인의 발걸음은 느릿했지만, 그렇다고 흔들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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