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서로의 역할 (3)
브라이언의 눈빛에는 피로감이 역력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완성했어. 잘츠부르크를 격파할 방법을. 이 정도면 거의 완벽하다고 볼 수 있지.”
샐리도 곧바로 동의했다.
“시뮬레이션 결과도 아주 좋군요. 우수한 성과인데요.”
“그 시뮬레이션이 설마 사커 매니저 20 같은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최신은 23··· 농담이니까 그런 눈 하지 말고요.”
이야기를 주고받는 둘의 얼굴이 퀭하다. 분석실 구석엔 빈 캔이 굴러다닌다. 잘츠부르크의 모기업이 자랑하는 히트 상품, 에너지 드링크 캔인데, 수량이 상당하다.
이러다 몸 상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바닥의 빈 깡통을 눈대중으로 헤아리자, 브라이언이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브로, 나는 원래 다른 브랜드를 마시고 싶었는데··· 샐리가 우긴 거야.”
“알아. 어차피 구단에서 지급하는 건데. 나는 그저, 이러다 몸 상하지 싶어서···.”
브라이언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기에, 슬쩍 덧붙였다.
“그렇게 따지면, 다른 팀 관계자는 넷플릭스 끊어야 하게? 아, SNS도 함부로 못 하겠다.”
“그, 그렇지?”
브라이언이 안심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선 어째서인지 샐리가 무척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극적인 변화라, 요즘은 리미트리스에서 축구화 회사 주식을 한창 사들이는 중이라는 건 비밀로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밤샘한 두 사람의 심장 건강에 썩 좋을 것 같지는 않았거든.
“그래서 잘츠부르크를 상대할 전술이 나왔다고?”
그러자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고, 샐리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들으셨어요? 아주 완벽해요. 물론 공은 둥그니까 필승을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제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우리가 이길 확률은 약 6할 정도를 예상하고 있어요.”
나는 만족했지만, 생각보다 숫자가 낮아서인지, 희주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그래서 슬쩍 덧붙였다.
“제 옆의 축알못을 위해, 질 확률이 얼마였는지도 좀 알려주시죠.”
“그야 2할 미만이죠.”
축구에는 무승부가 있단 말이지. 물론 결승전은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내지만, 저런 분석은 정규시간 90분에 대해서만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희주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아, 그런 거구나. 다행이네요!”
“그래서 두 분은 분석실까지 어쩐 일로···.”
“영상 찾으러요!”
“옛날 영상이 필요해졌습니다. 감독님 은퇴식에 쓰려고요.”
내 대답에 샐리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어머, 구단주님이 직접 준비하시게요?”
“그러고 싶더군요.”
내가 직접 편집 툴을 만지지는 않겠지. 그런 건 영상팀의 역할이다. 그래도, 이번 일만은 남에게 맡긴 채 손 떼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생일에 직접 미역국 끓이는 것과 마찬가지인 감상이죠. 참고로 오빠는 제 생일에 미역국 끓여 줘요.”
그건··· 네가 끓인 미역국이 너무 맛이 없어서 그런 건데.
아무튼, 생일날 미역국을 먹어야만 한다는 희주의 표현은, 영국인 코치와 아일랜드인 분석관에게도 먹혀든 것 같았다.
비록 두 사람은 미역국이라는 생소한 음식에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생일날 음식을 차려 주는 문화는 지구 어디에나 있을 테니까.
“브로, 그러면 나도 도와줄까? 감독님은 나한테도 은사시니까.”
“너는 좀 쉬는 게 낫겠는데.”
나는 단호하게 브라이언의 제의를 거부했다. 잠시 후 브라이언이 터덜터덜 분석실 구석의 안마의자로 향했다.
“아 맞다. 그런데 오빠. 38라운드에는 뭐 안 할 거야? 우리 홈팬들한테는 그날이 감독님과의 마지막 경기잖아. 혹시 그날 지기라도 하면···.”
희주의 이야기에, 안마의자로 향하던 브라이언이 우뚝 멈춰 섰고, 역재생하는 듯한 뒷걸음질 끝에 스크린 앞까지 돌아왔다. 샐리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봐도 잘츠부르크와의 유로파 결승에 정신이 팔려, 그 전에 프리미어리그 38라운드 경기를 치른다는 사실을 잠깐 잊었던 모양이다.
“뭐, 우리가 웨스트브롬 상대로 홈에서 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경기 준비는 코칭스태프의 역할이죠. 웨스트브롬의 경기부터 다시 돌려볼까요?”
“그러자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쉬엄쉬엄해.”
최고의 은퇴식을 해드리고 싶지만, 그렇다고 우리 코칭스태프들이 과로로 입원하는 모습을 바라지는 않거든.
* * *
[프리미어리그 38라운드. 선덜랜드 대 웨스트브롬]
펀딧들은 보통 이런 경기는, 흥행이 어렵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가 강팀인 것도, 더비 라이벌인 것도 아니었고, 오늘 경기 결과가 다음 시즌에 미치는 영향도 희미했다. 선덜랜드는 오늘 지더라도 4위로, 다음 시즌 챔스 진출을 확정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만석이었다. 홈에서 치르는 로저스 감독의 마지막 경기에, 선덜랜드 팬들은 적극적인 티케팅으로 호응한 것이다.
팬들의 뜨거운 반응에, 구단 또한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경기장 곳곳엔 땡큐, 굿바이, 페어웰 같은 메시지가 잔뜩 내걸렸고, 경기장 입구에서는 선덜랜드 스태프들이 응원용 머플러를 나눠 주었다.
또한, 풋볼 스퀘어에서는 지금까지 로저스가 팀을 맡고 치렀던 모든 경기의 하이라이트 영상이 흘렀다.
[십수 년 전 팀을 떠났던 감독이 돌아왔을 때, 이 팀은 리그 원에 머물러 있었고, 관중석은 군데군데 비어 있었죠.]
[너희가 하던 걸, 세상에서는 보통 포기라고 부른다. 혹은 배신이나 도피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절대로, 저런 행위를 축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리기 전까진 죽어도 멈추지 마라.]
“이렇게 보니 정말로 팀이 많이 발전했어.”
“누구는 바지 감독이라고 비웃는 놈들도 있었지만, 바지면 어때? 결과가 보여주는데!”
“기강관리 원툴이라고? 기강 때문에 무너진 팀이 얼마나 많은데.”
선덜랜드 팬들은 지난 4년간 팀을 성공적으로 이끈 감독을 향해 무한한 애정을 보냈고, 이 감독의 마지막 홈경기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마일즈 우드 또한 그런 팬의 하나였다.
비록 만삭인 배우자 수잔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마일즈 본인은 기꺼이 경기장을 찾았다. 그리고 오늘은 익스클루시브 박스 대신 시즌권 보유자 좌석을 선택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예정일이 이제 코앞이잖아.”
브렌든의 이야기에, 마일즈가 곧바로 대답했다.
“팬의 역할은 이런 날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거지. 나는 아무래도 바르샤바까지는 따라가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남편의 역할은 예정일 앞두고 붙어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도 망설였는데, 수잔이 다녀오라더라고. 예정일까진 아직 며칠 남았다고.”
그러자 옆에서 빌리 노인이 끼어들었다.
“그거 바가지감이야.”
어깨를 으쓱하고는, 빌리 노인이 유머러스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우리 와이프는 죽을 때까지 트집을 잡았지.”
“수잔은 안 그럴 겁니다. 평소에 마일리지도 많이 쌓아 놨고요. 먹고 싶다던 것도 다 사다 줬었고, 보고 싶다는 것도 다 보여줬고···.”
대답하면서, 마일즈는 수잔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게 축구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선수들이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에, 마일즈, 그리고 브라더스가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왜 애들이 옆에 없지?”
평소의 선덜랜드 선수들은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 경기장에 입장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늘 있던 단골 행사, 플레이어 에스코트가 없었다.
게다가 경기장에 들어온 선덜랜드 선수들의 모습도 평소와는 달랐다. 센터서클 향하는 대신, 입구 앞에 두 줄로 늘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마일즈의 입에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가드 오브 아너···.”
보통, 리그 우승팀을 상대할 때 해주는 예우로 유명해진 입장 방식이지만, 팀의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날에도 가드 오브 아너를 하는 경우가 있다.
잠시 후, 로저스가 힘찬 걸음으로 걸어 나왔고, 두 줄로 늘어선 선수들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마일즈도, 브렌든도, 빌리와 브라더스도 뜨거운 박수로 호응했다.
이윽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그날, 선덜랜드 선수들은 이제 팀을 떠나려는 감독과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에게 최선의 경기력으로 보답했다.
바스티아노가 선제골을, 그리고 크리그와 마르틴이 각각 추가골을 뽑아내며 점수 차를 벌렸고, 그때마다 이들은 차례로 감독에게 달려가 뜨겁게 포옹했다.
[선덜랜드 3 - 0 웨스트브롬]
그렇게 경기는 선덜랜드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소수의 원정팬을 제외하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이 로저스와의 영원한 이별은 아니다.
감독이 아니게 되더라도 팀과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하물며 그는 아직 선덜랜드 감독이며, 선덜랜드에게는 유로파리그 결승전이 남아 있다.
하지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벤치에 앉은 로저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렇기에, 로저스가 경기장을 떠나기 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그렇게, 선덜랜드 팬들의 노랫소리는 마치 영원처럼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 * *
그때, 로저스는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평소였다면 브라이언이나 샐리가 함께했을 것이다. 경기를 복기하기 위해서. 가끔은 선수들이 찾아와 경기 이야기를 할 때도 있다.
혹은 메디컬 팀의 보고를 받거나, 구단주 이희성과 시즌 운영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로저스는 혼자였다.
“잠시 혼자 있고 싶네.”
홈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른 감독의 요구를, 선덜랜드 관계자 전원은 부드러운, 그리고 따스한 미소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로저스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와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짐은 천천히 꾸려도 되겠지. 다음 주에도 경기가 하나 있으니까.”
애초에 딱히 챙길 것도 많지 않았다. 노장들이 대체로 그런 것처럼 로저스는 디지털 장비보다는 아날로그를 선호했다.
집무실에 가득한 대량의 서류들은, 보안 때문에라도 그가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리고 구색을 갖추기 위해 놓여 있는 컴퓨터는 어차피 팀에서 지급한 물건이라 딱히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태블릿은···.
“태블릿?”
못 보던 태블릿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쪽지가 올려져 있었다.
<로저스 감독님께>
로저스는 서툰 손길로 태블릿을 열었다. 그러자 잠시 후 십 대 초반의 소년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화면이 아주 말끔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세월의 흐름 탓일까. 벌써 십수 년 전에 찍은 영상은, 요즘 태블릿으로 보기에는 해상도가 너무 낮았고, 도트가 튀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도 로저스의 눈에는 생생했다. 이 소년의 모습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기에.
그가 망가뜨렸던 재능, 유소년 아카데미 시절의 이희성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요즘 매일 보는 사람인데, 그런데도 이 소년의 얼굴은 로저스에게는 항상 아픈 상처다.
그 와중에도 영상은 계속 흘러갔다. 화면 속의 소년 이희성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서툰 영어로 더듬더듬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희성입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꼭 선덜랜드의 프로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로저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소년이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로저스는 알고 있다. 이 소년이, 앞으로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조금만 더 하면 피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이따금씩 보여주던 재능의 편린이 너무나 눈부셔서, 망가져가는 걸 알면서도 막지 못했던 그 시절의 일이 지금까지도 로저스의 가슴 한구석에 가시처럼 남아 있었다.
잠시 후, 현재의 이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로파 결승에서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공은 항상 둥글고, 혹시라도 진 다음에 이런 이야기를 드리면 또 다른 느낌이 될 것 같아서요.]
[마지막 경기, 유로파 결승전의 승패에 상관없이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예전의 저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꿈꾸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선덜랜드와 함께하고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축구인으로 만들어 주셔서.]
그와 동시에, 화면 속의 어린 이희성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줄곧 가슴 속에 박혀 있던 가시 한 개가 쏙 빠져버린 것만 같아서, 로저스는 조용히 두 손을 눈가에 가져다 댔다.
I hope that I'm making you proud.
아직도 그치지 않은 경기장의 함성이, 노랫소리가 노장의 집무실에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