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서로의 역할 (4)
출국 직전, 나는 구단주실에서 TV를 보는 중이었다. 마침 코앞으로 다가온 유로파리그 결승전 이야기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스크린 안에서, 네빌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내 생각인데, 선덜랜드의 유일한 불안 요소는 아무래도 동기부여가 아닐까?]
[동기부여라.]
언제나 그런 것처럼, 캐러거는 네빌의 의견에 대해서는 일단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뭐, 더비 라이벌 출신이란 항상 저런 거지.
[들어 봐, 제이미. 선덜랜드는 이미 챔스 진출을 확정했잖아?]
[그건 잘츠부르크도 마찬가지인데.]
[걔들은 예선을 치러야 하잖아. 그런데 유로파에서 우승하면 챔스 진출권이 생기지. 그것도 본선 직행! 당연히 잘츠부르크가 훨씬 간절하지 않겠어?]
네빌은 잘못 짚었다. 잘츠부르크의 입장까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다음 시즌 챔스를 유리하게 시작하려고 유로파리그 우승을 노리는 건 아니었다.
뭐, 현역 시절 리그에서 3위 이하를 해본 적 없는, 따라서 챔스에 못 나간 시즌이 없는 네빌 같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같은 심정이었는지, 캐러거가 인상을 썼다.
[목요일에 축구 안 해본 사람들은 이게 문제란 말이지. 물론 자네 말대로 잘츠부르크도 이 악물고 뛰겠지. 그래도 선덜랜드 동기부여에 문제가 있을 것 같진 않아. 그쪽은 감독의 은퇴전이니까.]
TV 스크린 쪽을 향해, 희주가 영 미심쩍다는 시선을 보냈다.
“저 아저씨가 웬일이래? 우리 편을 다 들고.”
“저 아저씨는··· 목요일에 축구 해 봤거든.”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이, 유로파리그의 소중함을 아는 캐러거가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나는 조금 다른 이유로, 잘츠부르크가 썩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해. 선수 발굴 하나는 기막히게 하는 팀이잖아?]
[그러게. 홀란드, 마네··· 셀 수 없이 많은 스타들이 잘츠부르크를 거쳤지. 그렇다면 이건 안목의 대결이 되나?]
희주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었다.
“안목 대결이래.”
“그렇게도 엮을 수 있겠지··· 그런데 왜 웃냐?”
“안목 문제라면 오빠가 질 리가 없으니까.”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불안한데.”
아무튼, 희주의 입에는 다년간 검증된 실적이 있단 말이지. 펠레 이상 가는 저주의 실적이.
희주는 잠시 불만스럽게 투덜거렸지만, 곧 표정을 고쳤다.
“그러면 갑부 오라버님. 슬슬 내려가실까요. 출국하실 시간이라서요.”
“음.”
원정지원팀은 이미 며칠 전부터 바르샤바에서 준비하고 있고, 이제 선수단과 코치진, 그리고 내 이동만이 남았다.
잠시 후, 우리는 언제나처럼 리미트리스 고속도로를 지나, 뉴캐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옆에 내걸린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공항도 없는 게 까불어 @조르디 일동]
양 팀의 상황을 고려하면 꽤 귀여운 도발이었다.
우리는 올 시즌을 4위로 마치며, 결승전 결과와 상관없이 다음 시즌 챔스 진출을 확정했다. 반면 뉴캐슬은···.
그쪽도 프라이버시가 있으니까 굳이 구체적인 순위를 언급하고 싶진 않다. 그냥 두 자리였다고만 해두자. 참고로 강등은 안 당했다.
그래서 나도, 우리 선수들과 스태프들도 여유로운 웃음으로 넘겼지만, 우리 팬들은 웃어넘기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유럽대회도 못 나가는 게 까불어 @맥켐즈 일동]
뭐, 더비 라이벌이란 이런 거지.
나는 웃으며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 * *
수많은 선덜랜드 팬들이 바르샤바 원정에 동참했지만, 정작 선덜랜드의 단골 팬 우드 부부는 유로파리그 결승전을 관람하지 못했다.
바르샤바 직관은커녕, 중계를 보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공교롭게도 유로파리그 결승전 당일이 수잔의 출산 예정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수잔은 분만 도중 TV 중계를 보여달라고 요구했고, 안 되면 하다못해 라디오를 틀어달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수잔의 요구는 당연하게도 묵살당했다.
“산모님, 죄송하지만 아마 중계를 보실 정신도, 기력도 없으실 겁니다. 그런데 방송을 틀어놓으면 아무래도 의료진에게는 방해가 되니까요.”
수잔은 무척 원통하다는 표정으로 병원 침대에 누운 채 분만실에 향했다.
“꼭 응원해요. 알았죠?”
수잔이 떠난 자리를 한참 동안 묵묵히 응시하던 마일즈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목적어가 빠졌는데.”
수잔의 성격을 고려하면, 아마 선덜랜드를 응원하라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최근의 그녀는 마일즈 못지않은 열성팬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요즘의 선덜랜드는 성적부터 이적 시장의 행보까지, 모든 면에서 응원할 맛이 나는 구단이었다. 게다가 우드 부부는, 구단의 배려로 결혼식장마저 제공받을 정도로 대우를 받았다.
이 정도면 누구라도 혹할 상황인데, 원래 일 이외에 다른 취미가 없었던 수잔은 축구에 깊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남편의 역할은, 출산하러 떠난 아내를 응원하는 것이기에, 마일즈는 한참 동안 병원 복도에서 분만실 쪽을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마일즈의 어깨에,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브렌든이 웃고 있었다.
“자네, 바르샤바 안 갔나? 표 끊었다더니.”
“취소했어. 친구들만 갔지. 오늘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도 경기를 볼 수 있으니까.”
유로파 결승을 맞아, 선덜랜드는 평소보다 훨씬 싼 입장료로 경기장을 개방했고, 대형 스크린으로 경기를 중계하기로 안내했다.
비록 직관만은 못하지만, 박진감은 이미 FA컵에서 검증된 상태였다. 게다가 풋볼 스퀘어에서도 똑같은 중계를 공짜로 볼 수 있다.
맥주를 곁들이며 보고 싶으면 제휴 펍에 가면 되니, 지금의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축구 보기 참 편한 도시가 되었다.
브렌든이 미소를 지었다.
“굳이 바르샤바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었어. 오늘 우리 역할은 응원하는 거니까.”
“나야 내 와이프 애 낳는 걸 응원한다 치고, 자네는···.”
“그야, 친구를 응원하는 거지. 누구 씨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거든. 응원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같이 싸우려는 거라고.”
대답하면서 브렌든은 복도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뒤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맥주집 사장이 챙겨준 땅콩이며, 스마트폰 받침대 같은 것들이 잔뜩 튀어나왔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보는 거 아니었나?”
“그냥, 오늘은 여기가 좋을 것 같아.”
브렌든이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탁탁 두들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일즈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 * *
킥오프 직후부터 잘츠부르크는 잔뜩 내려앉기 시작했고, 조직적인 두 줄 수비로 응수했다. 흔히 말하는 골문 앞 버스 주차, 혹은 텐백이라 불리는 방식이다.
“역시 그렇게 나왔나.”
사실, 리그에서 우리 선덜랜드는 내려앉은 팀을 썩 잘 잡아내는 팀은 아니었다.
바스티아노라는 대형 스트라이커를 영입했고, 크랙 마르틴을 앞세워 세련된 사이드 체인지로 흔들기도 하지만, 싸울 의사조차 없이 대놓고 무승부를 노리는 상대를 쉽게 잡아내기에는 약간 부족한 느낌이었다.
일방적인 반코트 게임은, 우리 선덜랜드의 특기인 기동성을 살리기 어려운 전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장전이 있는 토너먼트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장까지 끌고 가고도 탈락한 적은, 4년 전 뉴캐슬과의 FA컵 경기가 마지막이었을 정도니까.
이유는 두 가지였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승부차기에서 무척 강하다는 이미지 때문에, 연장에 가면 심리적 우위에 서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체력과 기동력의 우위 때문이다.
우리는 평균적으로 상대보다 젊은 팀이고, 메디컬 스태프나 설비도 최상급으로 갖춰 놓았다. 연장전으로 흘러가면 아무래도 체력 싸움이 되는데, 그 경우 우리 선덜랜드가 우위에 서기 쉬웠다.
그래서, 내려앉는 잘츠부르크를 본 희주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니, 토너먼트의 선덜랜드 상대로 대놓고 연장전을 노린다고?”
반면 내 표정은 희주만큼 밝지는 않았다. 우리가 장기전에 유리한 이유의 절반쯤은, 잘츠부르크 상대로는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대는 우리 못지않게 젊은 팀이었다. 변방리그 팀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잘츠부르크 또한 전형적인 셀링 클럽이기 때문이다.
이적료 장사는 당연히 젊은 선수들로 해야 한다.
그리고 잘츠부르크가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편안한 시즌을 보냈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였다.
챔스권 사수를 위해 리그에서 전력을 다해야 했던 우리와 달리,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상대적으로 힘 빼고 돌릴 수 있는 경기도 우리보다는 많았겠지. 애초에 경기 수도 훨씬 적고 말이지.
[연장전?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가봅시다. 싫으면 좀 더 공격적으로 해보시든지.]
잘츠부르크의 태도는,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희주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아, 진짜! 짜증 나게!”
“응원이나 해.”
발을 구르기 시작한 여동생을 향해,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게 우리 역할이야.”
* * *
마일즈는 초조한 듯 손을 비볐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분만실 쪽에서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기의 흐름 또한 답답했다.
선덜랜드는 시종일관 우세했고, 점유율은 물론 경기의 주도권까지 전부 가져온 상태였다. 하지만 점수를 내지는 못했다. 그만큼 잘츠부르크 수비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브렌든이 발을 굴렀다.
“아니, 이게 뭐야. 분석팀이 쩐다고 그렇게 자랑했잖아. 브라이언은 투헬이나 펩에 필적하는 전술가로 클 거라고 했고. 그런데 이게 뭐야? 맨날 들고나오던 전술 또 들고 나왔다가 상대에게 완전히 읽혔잖아!”
“믿고 응원이나 해. 그게 오늘 우리 역할이야.”
마일즈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세상에는 결승전만 되면 기기묘묘한 새 전술로 자기 손발을 묶어버리는 감독도 있잖나?”
“하긴, 그건 그렇지.”
“차라리 선덜랜드가 가장 잘하는 축구를 하는 게 나아. 견실하게 나오면, 전력으로는 우리가 유리하니까.”
마일즈의 태도에 브렌든이 솔직한 감탄을 표했다.
“역시 15년 넘게 같은 팀을 응원하다 보면 배짱이 생기는 모양이군. 하긴, 응원해야지.”
하지만 브렌든의 감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마일즈가 초조한 표정으로 자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중계 보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웹서핑 중이었다.
[분만 소요 시간] [의료사고 확률] 같은 키워드를 확인한 브렌든이 쓴웃음을 지었다.
“믿고 응원이나 해. 그게 자네 역할이야.”
“수잔을? 아니면 의사를?”
“둘 다.”
* * *
전반은 물론, 후반에서도 일방적인, 하지만 성과는 없는 경기가 이어졌다. 덕분에 희주의 인내심은 거의 동나기 직전까지 몰렸다.
“아 왜! 맞춤 전술도 짜고 그랬잖아.”
“그랬지.”
누군가는 말할 거다. 평소에도 늘 하던 전술 아니냐고.
실제의 디테일은 조금 다르다. 평소였다면 톰슨이 담당했을 포백 보호를 잭의 역할로 삼았고, 대신 요니와 해리슨이 중원에서의 조율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자랑하는 공격진은 마르틴과 바스티아노, 스티븐을 앞세운 쓰리톱으로 구성했다.
희주가 볼멘소리를 냈다.
“이럴 거면 크리그를 넣지···.”
“상대를 좌우로 흔들기 위한 거야. 내려앉은 상대를 잡아내려면, 우선 체력과 집중력을 고갈시키는 게 가장 좋거든.”
구체적으로는, 좌우로 흔드는 게 좋다. 한쪽에서만 밀면 버티기 쉽지만, 좌우 양쪽에서 번갈아 흔들면 쉽게 넘어지는 법이니까.
그런 내 설명에도 희주는 쉽게 만족하지 못했다. 자꾸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길래, 슬쩍 보니 커뮤니티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 던졌죠?
ㄴ 넣어야 할 때 못 넣으면 보통 지던데··· 선덜랜드의 패배를 미리 위로합니다.
“아무리 봐도 이거, 뉴캐슬 팬들이 놀리는 건데··· 다 아는데··· 짜증 난단 말이야.”
“뭐, 그게 더비 라이벌의 역할이니까.”
“오빠, 진짜 속도 좋다. 오늘 왜 이래? 평소엔 이 정도로 느긋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글쎄.”
어쩌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지난주에 이미 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선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축구인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구단주의 수명은 선수보다 훨씬 길다.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전혀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래.”
이제 보니 잘츠부르크엔 좋은 선수가 많긴 하다. 잘 키우면 앞으로 4대 리그에서 활약할만한 선수가 널려 있었고, 개중에는 300짜리 선수도 보였다.
그래도 잘츠부르크의 라인업이 우리 선덜랜드만큼 뛰어나지는 않다.
동기부여는 물론, 선수의 질은 우리가 앞서 있다. 선수단의 호흡도 우리가 유리할 것이다. 우리는 셀링 클럽이 아니고, 팀의 에이스를 돈 때문에 빼앗기지 않으니까.
감독과 코치진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그때 경기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안쪽으로 파고드는 마르틴에게, 해리슨의 천금 같은 패스가 전해진 것이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오늘 우리가 맞이한 가장 좋은 찬스에 나는 무심코 주먹을 쥐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때려.”
그런 내 독백에 희주가, 그리고 바르샤바에 함께한 우리 선덜랜드 팬들이 호응했다.
“때려!”
잠시 후, 간결한 킥 페인트로 마지막 수비를 벗겨낸 마르틴의 오른발이 불을 뿜었다.
[선덜랜드 1 - 0 잘츠부르크]
* * *
“넣었어! 넣었다고!”
펄쩍펄쩍 뛰는 브렌든의 외침은 마일즈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이유의 반쯤은, 밖에서 들려오는 함성 때문이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와 풋볼 스퀘어에서 시작된 외침이, 이곳 병원까지도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축하드립니다. 건강한 왕자님이네요.”
“수잔은··· 산모는 괜찮습니까?”
“아기와 엄마 모두 건강해요.”
벅차오르는 감격과 기쁨에, 마일즈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그런 마일즈의 곁에서, 브렌든이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이야기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들아, 네가 태어났을 때 온 선덜랜드가 환호했단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