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서로의 역할 (5)
비록 브렌든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브라더스’는 바르샤바 국립 경기장까지 따라와 경기를 관람했다.
“이거 참, 티켓값이 아깝지 않은 경기야.”
맥주집 사장의 말처럼, 이날 경기는 기본적으로 명경기라고 불릴 만한 요소를 두루 충족한 상태였다.
일방적인 공세와 결사적인 수비의 충돌. 결과는 스코어보드가 70분간 움직이지 않을 만큼 팽팽한 승부였다.
선덜랜드 팬으로서는 살짝 답답한 흐름이었지만, 그래도 축구 팬의 한 사람으로서 잘츠부르크에게도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만한 허슬 플레이도 계속되었다.
특히 선덜랜드의 언더독 시절을 기억하는 두 사람으로서는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솔직히, 저렇게 버티는 심정도 모르는 게 아니거든.”
“맞아. 그리고 감개무량하기도 하고. 다른 경기도 아니고 결승전에서, 우리가 상대를 가둬놓고 패는 팀이 되었구나 싶어서.”
그렇게 흐뭇하게 경기를 바라보던 와중에, 마침내 골까지 터졌다.
이로써 두 사람에게는 정말로 ‘최고의 결승전’이 되었다. 결승전에 어울리는 아슬아슬한 접전 끝에, 마지막엔 응원하는 팀이 이긴다는 최고의 전개를 꿈꿀 수 있게 되었으니까.
선제골을 뽑아낸 마르틴의 세레머니를 지켜보며, 맥주집 사장과 핫도그 사내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경기가 더 치열해지겠군.”
“그러게. 지고 있는 팀은 버스를 세울 수 없으니까.”
경기 종료까지는 딱 20분 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선덜랜드는 원래 수비가 강한 팀이다. 하지만, 그래도 잘츠부르크가 이대로 앉아서 패배를 맞이하진 않을 테니···.
“잘츠부르크 놈들, 벌써 공격수 내는 것 좀 보소.”
“이거··· 괜찮을까.”
분명히 상황은 선덜랜드가 유리했지만, 그래도 축구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역전당하는 사례도 흔하다.
결승전 특유의 긴장감도 있거니와, 혹시라도 동점골을 내줄 경우 ‘다 잡은 승리를 놓쳤다’는 생각 때문에 팀 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지기도 한다.
결승전에서 흔히 ‘기적’이 종종 나오는 이유다.
“괜찮을 것 같아. 저기 봐.”
잘츠부르크의 교체에, 선덜랜드 또한 곧바로 교체로 응수했다. 언제 몸을 풀었는지, 크리그와 톰슨이 나란히 사이드라인에서 투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교체 팻말 두 개가 올라왔다.
- 26번 스티븐 아웃, 22번 크리그 인
- 99번 해리슨 아웃, 6번 톰슨 인
핫도그 사내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대응 빠르네!”
심지어 완벽한 대응이라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무척 명확한 의미의 교체였다. 이제는 선덜랜드가 말할 차례였기 때문에.
[뒷공간 안 털릴 자신 있으면 계속 라인 올려 보시고요.]
“미리 읽고 있었던 거 맞지?”
“맞아. 미리 몸도 풀었잖아. 그랬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딱!”
브라더스의 시선이 저절로 선덜랜드 벤치 쪽으로 향하고 말았다. 선수들보다도, 완벽한 대응을 보여준 코칭스태프의 모습에 그만 시선을 빼앗긴 것이다.
“더 뛰어! 요니, 고개 떨어뜨리지 마! 잭, 올라가! 더 높게!”
지난 4년간 늘 그랬던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운 채 격정적으로 지휘하는 감독 로저스와, 그 뒤에서 묵묵하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라운드 곳곳을 노려보는 브라이언과 샐리의 모습을 바라보던 브라더스의 입가에 아쉬운 미소가 번졌다.
“이 모습도 그리워지겠어.”
“다음 감독이 누가 오려나··· 뭐, 썬이 알아서 잘하겠지만.”
이후에도 잘츠부르크는 몇 차례 반격했지만, 그때마다 선덜랜드 벤치는 미리 읽고 있었다는 것처럼 척척 대응했고, 마지막에는 오히려 바스티아노가 추가골까지 뽑아냈다.
[선덜랜드 2 - 0 잘츠부르크]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선덜랜드 팬들의 환호가 울려 퍼지는 바르샤바의 하늘 아래에서, 두 사내가 하이파이브했다.
“기다려 봐. 브렌든에게 사진 보내 주자. 이런 경기를 놓쳤으니, 인생 절반 손해 본 거라고.”
하지만 핫도그 사내의 결의는 미수로 그쳤다.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니, 브렌든이 먼저 사진을 보낸 것이다.
갓 태어난 마일즈와 수잔의 아이, 행복하게 미소짓는 산모. 감격의 눈물을 훔치는 마일즈의 사진을 확인한 맥주집 사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면, 두 배로 축하해야겠네.”
* * *
공은 둥글고, 축구에는 항상 변수가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모습도 존재한다. 대회의 마지막 장면 역시 그중 하나였다. 언제나 대회는, 우승팀 주장이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끝난다.
경기장에 마련된 단상에 일제히 도열한 선덜랜드 선수단 앞에 유로파 트로피가 놓였다. 이제 선덜랜드의 주장 잭이 트로피를 힘차게 들며 포효할 차례였다.
벌써부터 선덜랜드 주장의 트로피 세레머니를 기대하는 듯, 카메라가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잭은 트로피를 꽤 맛깔나게 드는 편이었기에.
하지만 선덜랜드의 주장은 트로피에 손을 뻗으려 하지 않았다.
“왜, 무거워서 자신 없어? 하긴, 유로파 트로피는 30파운드가 넘는다더만.”
“알았다. 핸드폰 찾는 거지? 세레머니 녹화해둔 거 보려고! 그래서 나처럼 미리미리 연습했어야지··· 기다려 봐. 나중에 내가 주장이 되면 맛깔나게 트로피를 든다는 게 어떤 건지 보여줄 테니까.”
히죽거리는 에디를 향해, 선덜랜드 선수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에디 너는 그럴 일 없어 보이는데.”
“왜, 내가 쟤보다 한 살 많아서? 괜찮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센터백은 원래 미드필더보다 선수 수명이 길거든.”
“그게 아니라, 네 트로피 세레머니는 더럽게 구려. 아마 우리 팀에서 에디 네가 제일 못 들걸.”
선수들이 그런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잭이 단상 아래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뭐 놓고 왔어? 알았다, 폴란드어 컨닝 페이퍼지?”
동료들의 농담에도, 관중들의 웅성거림에도 반응하지 않은 채, 잭은 곧바로 선덜랜드 스태프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잭의 손이 늙은 감독의 손을 붙잡았다.
관중석의 웅성거림이 뚝 멈췄다.
“같이 들고 싶슴다.”
“아니, 우승 트로피를 누가 감독에게 먼저 들게 시키나.”
“미리 찾아봤슴다. 사례가 있었슴다.”
단호하게 말하며 잭은 반강제로 로저스를 단상에 인도했다. 결국 로저스는 잭과 함께 단상에 올라, 트로피 한쪽씩을 붙잡아야 했다.
그렇게, 마침내 선덜랜드의 감독과 주장이 동시에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순간.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바르샤바 국립 경기장은, 틀림없이 붉은빛으로 가득 물들었다.
* * *
한편 유로파 결승전이 끝난 직후, SNS는 당연히 뜨거워졌다. 자칭 SNS 와치걸, 타칭 구단주 비서 희주의 스마트폰 진동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쟤는 선덜랜드 태그 붙으면 알림 오게 해 놨더라고.
눈이 마주치자 희주가 내 눈치를 살살 살피며 폰을 등 뒤로 숨겼다.
“괜찮아. 오늘은 우승했으니까.”
“진짜?”
“뭐, 언제부터 네가 내 눈치 봤다고.”
그러자 희주는 기쁘게 SNS 반응을 확인했고, 그중 몇 개는 내게 중계하기도 했다.
- 세상에서 제일 근본 넘치게 트로피 드는 법 : 은퇴하는 감독과 사이좋게 들기.
ㄴ 솔직히 잭이 혼자 들었으면 훨씬 맛깔나게 들었겠지만, 오늘보다 멋지진 않았을 것 같음.
ㄴ 가장 놀라운 점은, 주장이 대놓고 트로피 앞에서 자리 비웠는데도 아무도 스틸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 이 팀이 4년 전 리그 원에서 빌빌대던 그 선덜랜드 맞냐.
그러게, 나도 가슴이 웅장해질 것 같은데.
- 아, 공항도 없는 거지들이 축구라도 잘해야지 어쩌겠음.
너 뉴캐슬 팬이지. 기억했다.
곧바로 희주가 키배를 벌이려 들길래, 슬쩍 제지했다.
“괜찮아. 마침 공항도 없는 우리들이 꼭 할 게 있으니까··· 그런데 그 사진은 뭐냐?”
폰 화면에 낯익은 얼굴 사진이 보여서 물었더니, 희주가 배시시 웃었다.
“오빠 얼굴! 잘 나왔네?”
그래, 내 얼굴이다. 경기 중계에 잠깐 구단주 얼굴이 잡혔던 모양인데 그걸 또 누가 잘라다가 움짤로 돌렸다.
보니까 제목도 달려 있다.
<돈을 무제한으로 퍼부은 팀이 70분째 골을 못 넣고 있을 때, 구단주가 지었던 표정>
내가 보기에도 감정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평온한 얼굴로 찍혔는데, 하필 바로 옆의 희주가 다 죽어가는 표정을 지은 바람에 유명해진 모양이다.
- 겁나 침착하던데.
ㄴ 역시 투자의 신! 사소한 일로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이거지?
- 하긴, 주식 장기투자도 하는 양반이 경기 70분 못 참을까.
- 아무리 그래도 너무 차분한데? 꼭 선덜랜드가 이길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ㄴ 그러게, 이 인간 혹시 미래가 보이는 거 아님? 어쩐지 수익률이 너무 좋더라니.
아뇨, 고객님. 제 눈에 보이는 건 사람의 가치입니다.
아무튼, 내 침착함은 이번에 꽤 화제가 되었다. 오죽하면 인터뷰에서도 물어볼 정도로.
[우승 축하드립니다!]
몇 가지 상투적인 인사가 오갔다. 대충 구단 첫 유로파 우승을 축하드린다는 인터뷰어의 인사와, 다 관계자 여러분의 성원 덕분이라는 나의 답례가.
[한편, SNS에서는 구단주님이 정말로 미래를 아시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기본적으로는 농담인데, 보니까 약간 진지 드셨다. 대충 3할에서 4할 정도? 아무래도 내가 투자의 신이기 때문이겠지.
물론, 내게는 명확한 핑곗거리가 있고.
“결과를 알면 뭐 하러 매 경기 쫓아다니겠어요.”
[그러고 보니, 마르틴의 선제골 당시 리액션이 또 일품이셨죠. 거의 난간에 매달리다시피 하셨는데요.]
“맞습니다. 만일 결과를 미리 알고도 이 정도 리액션이면, 솔직히 제가 직업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배우로요.”
[음, 개인적으로 배우는 별로 추천드리고 싶지 않은데요.]
- 아나운서 진짜 보는 눈 없네! @da0_0mi
- 안경이 필요할 것 같은데 @forever9mysun
이어진 질문은 상식적이었다. 다음 시즌의 포부 같은 무난한 질문들. 마찬가지로 무난하게 대답하고 나니, 마침내 인터뷰어가 본론을 꺼냈다.
[한편, 이번에 선덜랜드의 로저스 감독님이 은퇴를 선택하셨는데요. 유로파 우승 직후 물러나시는 거라 팬들의 아쉬움이 많습니다. 성적을 확실히 내는 감독이니, 붙잡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인데요.]
“성적 내는 동안은 은퇴할 수 없다고 하면, 감독님은 선덜랜드에 종신하셔야겠죠.”
슬쩍 농담으로 분위기를 돌린 다음, 진지하게 덧붙였다.
“사실 저 스스로도 했던 고민입니다. 앞으로 몇 년쯤 더 팀을 지도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본인의 의사를 최우선적으로 존중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하자면, 박수 칠 때 보내드리고 싶었다. 명장으로 칭송받는 동안에 떠나보내길 원했다.
인터뷰로 할 말은 아니라, 가슴속에만 담아두겠지만.
[알겠습니다. 다음 시즌 선덜랜드는 어느 감독이 지휘하게 될까요?]
아마, 이게 이번 인터뷰의 진짜 본론이었겠지.
“그 부분은··· 곧 오피셜이 날 테니 기다려 주시죠.”
나는 차분하게 인터뷰를 마쳤다.
* * *
선덜랜드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버스 퍼레이드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2층이 오픈된 투어버스에 ‘유로파리그 챔피언, FC 선덜랜드’라는 문구를 준비하라는 내 지시에, 선덜랜드에 남아 있던 조엘이 곧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클럽하우스에 대기시킬까요?]
“아뇨. 비행기 도착 시간에 맞춰 공항 앞으로 보내주세요. 가능하겠습니까?”
그러자 조엘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였다.
[문제는 없습니다만··· 리미트리스 하이웨이는 퍼레이드하기 적당한 구간은 아닌 것 같은데요.]
“네. 그래서··· 리미트리스 하이웨이로 이동 안 할 겁니다.”
그러자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전화기 너머에서 조엘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아주 숨넘어갈 것처럼.
[알겠습니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치자, 옆에서 희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갑부 오라버님,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겠습니다만.”
“우리가 이용하는 공항 이름이 뭐지?”
“뉴캐슬 국제 공항··· 아!”
리미트리스 하이웨이를 타지 않을 경우, 공항에서 선덜랜드로 돌아가는 길에는 필연적으로 뉴캐슬어폰타인 옆을 통과하게 된다.
일부러 버스 퍼레이드까지 하면서 말이지.
“그 팀 팬들 아주 뒤집어지겠네.”
그렇지. 이러려고 심시티 목록에서 공항을 빼고, 대신 고속도로를 낸 거라고··· 설마 그깟 공항 지을 돈이 없었겠니?
이게 바로 더비 라이벌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다. 그러니까 제 결론은요.
얘, 트로피가 멋지단다. 느 팀엔 이거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