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헬로, 굿바이 (1)
<불행으로 행복을 산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인생이다 - 주제 무리뉴>
- 선덜랜드 이 미친놈들ㅋㅋㅋㅋ
ㄴ 왜?
ㄴ 유로파 우승 기념으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까지 퍼레이드 한댄다. 근데 출발지가 공항이야.
ㄴ 뉴캐슬이 아주 뒤집어지겠네.
- 내 생각엔 미들즈브러가 훨씬 광분할 이벤트 같은데?
ㄴ 그러네. 뉴캐슬은 라이벌 취급이지만 미들즈브러는 안중에도 없다는 거잖아.
“···라고 하는데?”
SNS 반응을 생중계하는 희주를 흘끗 바라보며, 나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오해라고 전해 줘.”
물론 우리 최대 라이벌은 뉴캐슬이지만, 미들즈브러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니까? 이번엔 그저 동선이 안 나오는 것뿐이라고.
내일쯤 티스 강에 유람선을 띄울까, 아니면 노스요크셔에 열기구를 날릴까 고민하고 있으려니 희주가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오빠는 진짜···.”
이게 다 라이벌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라니까.
“구단주님, 미들즈브러 쪽도 지날까요?”
“아뇨, 조엘. 미들즈브러는 동선이 안 맞잖아요. 변명의 여지··· 아니, 명분이 없습니다. 일부러 퍼레이드 하러 가면 그건 도발이고요.”
그러자 조엘은 껄껄 웃고는 퍼레이드 행렬을 지휘하러 돌아갔다. 옆에서 희주가 다시 키득거린다.
“유람선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시끄러워.”
아무튼 명분이 중요하다. 이번엔 어디까지나 공항에서부터 우리 홈 경기장까지라는 명분이 있으니 뉴캐슬 옆을 지날 수 있는 것이다.
명분이 없으면 싸구려 도발이지.
내 명분이 잘 먹혀들었는지, 뉴캐슬어폰타인의 분위기는 그렇게까지 험악하지는 않았다.
“이게 안 험악하다고?”
귀를 메우는 야유, 버스 근처에 날아드는 계란과 토마토에 희주가 인상을 썼고, 애니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러게. 썬이 배짱 좋은 건 예전부터 알았지만···.”
“이 정도면 생각보다 안 험악한 게 맞습니다. 솔직히 버스 근처에 홍염 날아올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경호 인력은 물론, 경찰까지 불렀는데··· 이 정도면 양호하다. 날아드는 계란이나 토마토도 대충 도로 쪽이고, 기껏해야 타이어 근처에 조금 묻은 게 전부다.
음, 이 우승의 냄새.
터진 토마토는 마치 레드카펫 같았고, 길바닥에 뭉개진 계란 노른자조차 미끈한 벨벳처럼 보일 정도다. 무엇보다, 그 팀 팬들이 부들부들하는 모습은 우리에게는 오히려 포상이고.
실제로 잭과 요니, 해리슨 같은 유스 출신들은 마치 혈관에 탄산이 흐른다는 듯한 표정이다. 어찌나 황홀해하는지, 도핑방지기구에서 봤으면 약물검사 다시 해보자고 나올 것 같다.
“중증이다. 나중에 챔스 들면 아주 볼만하겠어. 참고로 오빠도 마찬가지인데.”
“왜냐면··· 나도 선덜랜드 유스 출신이거든.”
그렇게 뉴캐슬어폰타인을 의기양양하게 빠져나올 때쯤, 애니가 불쑥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긴, 격차가 꽤 벌어지긴 했지. 그래도 계속 라이벌 취급을 해 주면 오히려 고마워할지도.”
애니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덧붙였다.
“이제는 ‘라이벌’이라기는 살짝 민망한 성적이잖아? 그 팀은 순위가 두 자릿수인데, 우린 유로파 우승팀이니까. 상대전적도 압도적이고. 구단주 바뀌고 5전 4승 1무지?”
내 체감상으로는 4승 1패다. 승부차기는 공식적으로 무승부로 남지만, 4년 전에 탈락한 건 우리였으니까.
그것도 우리 홈에서··· 아, 갑자기 버스 돌리고 싶어지네.
크고 아름다운 유로파 트로피를 바라보며 안정한 다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성적만 보면 그렇겠지만, 라이벌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성적은 아주 부차적인 요소거든요.”
문득, 세인트 제임스 파크를 처음 찾았던 날을 떠올렸다. 당시의 나는 3부 리그 구단주였고, 우리보다 더 나은 설비를 자랑하던 ‘그 팀’을 벤치마킹하려고 스타디움 투어를 했었다.
[선덜랜드요? 물론 끔찍하게 싫죠.]
그날 우리를 안내하던 뉴캐슬 스태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선덜랜드가 싫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작 업무에 감정을 담지는 않았고, 투어를 마친 다음에는 그렇게 격려하기도 했다.
[프리미어리그에 돌아오세요. 다시 한번 타인위어 전체를 검게, 붉게 물들여야 하니까요.]
우리와 그 팀은 그런 사이다. 우리가 3부에 처박혔을 때에도 뉴캐슬의 라이벌이었던 것처럼, 유로파를 들어 올린 지금도 라이벌 관계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가 챔스를 들어도, 트레블을 해도 바뀌지 않을 거다.
둘 중 하나가 간판 내리기 전까진, 영원히.
* * *
그렇게 뉴캐슬어폰타인을 통과한 버스는, 당연하게도 게이츠헤드 또한 지났다. 그러자 갑자기 우리 1군 선수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갑자기 다리가 너무 아픈데. 뒤에 가서 쉬어야겠다.”
“어, 나는 갑자기 탈수증 올 것 같아.”
주장 잭이 갑자기 자기 허벅지를 주무르기 시작했고, 요니는 마실 것을 찾았다··· 좀 더 정직하게 표현하면, 다들 국어책을 읽었다.
희주가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갑자기 왜들 저래?”
“게이츠헤드니까.”
잠시 후 톰슨이 묵묵히 베리의 어깨를 잡아, 버스 앞쪽으로 내밀었다.
“베리 너 출세했다! 얼마 전까진 8부 리그였잖아.”
“그래도 결승전 1분도 안 뛰고 퍼레이드는 좀 그렇네. 다음 시즌엔 더 잘해라!”
“이야,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 유로파 우승 선수 나온 거잖아!”
얼굴을 알고 지내던 이웃들의 격려에, 베리는 표정 관리에 완벽히 실패했고, 눈물범벅으로 웃는 묘기를 선보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버스는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도착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바닥이 온통 붉다. 거리도, 건물도··· 하늘 이외의 모든 것이 붉고 희게 물들었다.
아니, 잠시 후에는 하늘까지 붉었다. 석양을 가르는 에어쇼 편대의 붉은 연기로.
팀 레플리카를 입은 채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도로에 뿌려진 붉은 색종이, 흩날리는 꽃가루, 건물 곳곳에 내걸린 현수막, 선덜랜드를 외치는 함성까지 온통 붉어서.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나는, 이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 * *
밤까지 이어진 우승 축하 파티에 이어, 송별회까지 치렀다. 이로써 또 한 시즌이 끝나고, 이제 진짜 시즌오프다.
선수들은 일제히 휴가를 받았다. 물론 휴가라고 해도 딱히 쉴 것 같지 않은 선수들이 널려 있지만.
나는 크리그와 잭, 그리고 요니 쪽으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셋이 슬슬 눈을 피한다. 아무래도 전담 메디컬 팀을 붙여야겠네.
옆에서 샐리도 한마디 보탰다.
“어휴, 감독님. 한 말씀 해 주세요!”
그러자 너털웃음이 돌아왔다.
“나는 이제 이 팀 감독이 아니니까.”
그렇게 껄껄 웃으며, 로저스 감독은 샘 아저씨와 건배했다. 얼핏 보니 두 사람 모두 취기가 꽤 올랐다. 그렇다고 정신 못 차리거나 혀가 꼬부라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내일부터는 뭐 하며 소일거리 할 생각인가?”
“우선 드라이브부터 다녀와야겠지. 어느 영감쟁이가, 런던 근처에 좋은 코스가 있다고 하던데.”
“그다음은?”
“글쎄··· 당분간 동네 애들 공 차는 거나 지켜볼까 싶은데.”
“지난달까지만 해도 은퇴하면 축구공은 쳐다도 안 볼 것처럼 말하더니만. 에잉, 이래서 늙은이들 말은 하나도 믿을 게 못 돼.”
두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축구인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내 은사는 누구보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분이 한때 축구와 거리를 두었던 이유는, 역시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은퇴 이후에도, 저분은 또다시 축구와 거리를 두려고 했던 모양이다··· 이제는 괜찮겠지만.
슬쩍 눈짓하자, 희주가 배시시 웃으며 접근했다.
“감독님. 애들 공차기가 보고 싶으시면, 좀 더 좋은 자리가 있는데요.”
“예를 들면?”
“리미트리스 유소년 리그죠. 이제 곧 개막인데요.”
그러자 로저스 감독의 입꼬리가 위로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썬, 이 친구가 못된 수작을 생각해낸 모양인데.”
작년 이맘때, 한동안 축구를 보지 못한 적이 있다. 유에파와 갈등을 빚은 당시의 일이었다. 당시 축구 중계를 TV에서 모조리 내려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드라마나 영화만 보던 시절.
그때 보던 드라마에, 조선시대 세종대왕 시절 사극이 섞여 있었단 말이지. 내가 세종대왕급 경영자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본받고 싶었다.
[세종 24년,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물러나길 원하나, 듣지 않다.] 같은 거.
참고로 브라이언은 가급적 종신시킬 계획이다.
* * *
그렇게 선수들을 떠나보내고 났더니, 희주가 만세를 외쳤다.
“드디어 나도 휴가!”
미안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얘는 학습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애초에 구단 인수한 이후, 내가 쉰 적이 있긴 했던가? 구단주가 쉬지 않는 이상, 구단주 비서의 휴가도 없는 건 당연한 거고.
물론 희주 쟤는 한 번 휴가를 받긴 했었지만, 그땐 상황이 조금 특수했다. 다미가 대신 왔었으니까.
가뜩이나 프리시즌은 축구단 스태프들이 가장 바쁜 시기인데, 이번 여름엔 특히 이벤트가 많다.
우선 감독의 교체가 걸려 있다. 물론 차기 감독은 이미 내정되어 있지만, 그래도 오피셜 띄우고, 브라이언에게 힘을 실어주려면 이것저것 바쁘단 말이지.
스태프도 일부 보강해야 할 거고, 어쩌면 선수도 추가로 영입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에 임대 나간 터너도 복귀해야 하고.
새로 출범하는 리미트리스 유소년 리그도 있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유치하는 문제도 다음 달에 마무리 지어야 하니, 당분간 나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한다.
뭐, 리미트리스 유소년 리그는 희주 업무가 아니라지만···.
···오호라.
“또 다미 불러다 일을 떠넘길 속셈이렷다.”
추궁하자 희주가 시선을 피했다. 말로만 듣던 동공지진, 진도 7쯤 되어 보인다.
“오해입니다. 갑부 오라버님. 어디까지나 다미 언니가 자발적으로 온다고 한 것으로···.”
“오해면 계속 근무하면 되겠네. 휴가 없이.”
희주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잠깐이었다. 탈주는 시도해도 요령은 안 피우는 게 희주의 장점 중 하나거든.
“자, 그러면 오피셜부터 띄워 볼까?”
“무슨 오피셜?”
“그야, 차기 감독이지.”
* * *
그때, SNS며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선덜랜드의 차기 감독 떡밥이 한창이었다.
- 무리뉴가 오지 않을까?
ㄴ 언제 적 무리뉴야. 내가 보기에 선덜랜드에는 클롭이 딱임. 마침 클롭 계약도 거의 막바지라던데.
“어휴, 축알못들 진짜. 이게 다 무슨 헛소리들이야.”
화면 속의 상대를 비웃으며, @김치_워리어는 차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 포체티노라니까 그러네. 근거는 차고 넘치지. 파리 스태프가 이직했잖아? 선덜랜드 감독이 바뀌는 시기에. 그럼 견적 나온 거 아니야? @김치_워리어
그러자 ‘포체티노 계약 한참 남았다’는 반론이 달렸지만,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김치_워리어의 의견은 그만큼 무게감이 있었던 것이다.
한때 이 바닥에서는 닉네임 @축잘알이 가장 파급력이 있는 편이었지만, @축잘알이 축구팀 스태프로 취직하면서, 관종왕 자리는 자연히 @김치_워리어에게 넘어왔다.
@김치_워리어 덕분에 SNS에서는, 선덜랜드 차기 감독이 포체티노로 낙점되는 분위기였다.
- 계약? 축구판 감독 바뀌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위약금 좀 주면 끝이지.
ㄴ 야, 파리 상대로 돈으로 후려친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이 축알못아.
ㄴ 리미트리스 사장이 겨우 축구팀 하나를 돈으로 못 후려치겠냐. 이 경알못아.
- 잠깐. 구단 오피셜 떴다.
[선덜랜드, 차기 감독으로 브라이언 선임해]
오피셜 기사를 본 @김치_워리어는 눈을 의심했다.
“아니, 브라이언? 이건 또 어디서 굴러먹던 듣보잡이야!?”
* * *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브라이언의 감독 선임은 SNS에서 꽤 화제가 되었다··· 주로 나쁜 쪽으로.
- 유로파 우승 감독 내보내고, 수석코치를 올려 쓰는 건 무슨 경우임?
ㄴ 선수 시절엔 벤치따리였던데.
ㄴ 실망스럽긴 한데, 현역 커리어로는 까지 말자. 그러면 썬도 같이 까야 하잖아.
ㄴ 썬 까면 사살이지.
개중에는 옹호 반응도 없진 않았다. ‘선덜랜드 전술은 원래 브라이언이 짰다.’ 같은 의견이. 물론 그런 의견은 곧바로 묵살당했는데, 반론은 주로 그런 식이었다.
- 걔가 그렇게 전술을 잘 짰으면 진작 빅클럽 감독 맡았겠지.
클롭이니 포체티노니 하는 이야기가 나돌다 보니, 사람들 눈이 너무 높아졌던 게 혹평의 원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확인 결과, 부정적인 여론은 대체로 해외에서 언급되는 모양입니다.”
전직 키보드워리어, 현직 선덜랜드 프레스팀 SNS 대응 책임자 아벨을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즉, 해외 팬들이라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아벨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평소 축구장도 안 오니까 모르는 거겠죠. 솔직히 경기장에 한 번만 와 보면 브라이언 코치님, 아니 감독님의 존재감을 알게 될 텐데요.”
아벨의 표정을 보아하니, 당장 키배라도 뜨고 싶은 모양이다. 하긴, 아벨은 입사 전까지 ‘@축잘알’로 이름을 떨친 유명인사다.
“일단, 해외에서 중계만 보는 사람들도 우리 팬입니다.”
“아, 네. 조심하겠습니다.”
아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으려는 줄 알겠네.
“뭐, 브라이언의 존재감이 방송 중계에 잡혔으면 오히려 큰일이죠. 그동안 브라이언은 주로 분석실과 훈련장에서 활동했으니까요.”
분위기를 풀어줄 겸 슬쩍 농담을 했더니, 아벨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렇군요. 하긴, 그랬으면 우리 전술이나 훈련 프로그램이 샜다는 뜻이 되겠죠.”
“다음 시즌부턴 해외 팬들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 모니터링은 계속하되,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로컬 팬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네, 고무적입니다. 경기장 주변엔 우리는 새 감독을 지지한다는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 있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컬 팬들의 지지만 있으면, 적어도 경기장의 열기가 식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브라이언에 대한 해외 팬들의 불만이나, SNS상의 반응 같은 건··· 금방 잠재울 자신이 있었다.
프리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