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프리시즌의 왕 (1)
<항상 만족감을 줘야 한다. 지역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영원한 목표다. - 마르셀로 비엘사>
선덜랜드의 유소년 선수 테오도르 헨슨, 일명 ‘테오’는 자신의 77번 유니폼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런 테오를 바라보는 유소년 동료들의 시선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아무리 봐도 틀림없는 친필 사인, 축구의 신이 남긴 흔적이 선명했기에.
테오는 마치 지폐를 햇빛에 비춰보듯 유니폼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품에 꼭 안은 채 휴게실을 굴러다니기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소년 주장 짐이 불쑥 끼어들었다.
“예의가 없어.”
“응? 아닌데? 나 완전 예의 있는데? 액자에 넣어서 소중하게 간직할 건데?”
“그게 아니라, 사인을 받을 거라면 사인보드나 축구공에 받았어야지. 네 유니폼이 아니라.”
“그치만··· 사인보드까지 챙기기는 힘든걸. 나 오늘 볼보이였던 거 알잖아.”
“그럼 하다못해 그쪽 유니폼을 준비했어야지. 바르샤 유니폼이 좀 그랬으면, 아르헨티나 국대 유니폼이라도.”
짐의 표정은 보기 드물게 엄격했다.
물론 그라운드 안에서는 항상 엄격한 캡틴이었지만, 평소에는 그냥 동네 친구 같은 느낌으로 지내던 중이었다. 짐이 이렇게까지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유소년 선수들이 조용해졌고, 심지어 테오는 살짝 주눅이 들고 말았다.
“주장··· 나, 혹시 뭔가 실수한 거야?”
“기자들이 엄청 떠들걸? 상식적으로 사인은 자기네 유니폼에 해 주는 거잖아. 자칫하면 루머가 돌 수도 있어. 메시가 선덜랜드 이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식으로.”
“루머가 아닐 수도 있잖아?”
“혹시 그렇더라도 조심해야지.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게 없으니까.”
짐의 어른스러운 말을 테오가 온전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자신이 뭔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충분했는지, 테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잘못했다고 해야겠다. 메시 선수는 이적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올래.”
“괜히 기름 부을 거 아니면 가만있어. 내 말은 다음부터 실수하지 말라는 뜻이야.”
“응!”
짐이 웃어주자, 테오는 금방 기운을 차렸다.
“난, 그냥 물어보려고 했었던 건데. 어째서 니어포스트가 아니었는지.”
무슨 소리인지 감이 오지 않아서, 짐은 쓴웃음을 지었다.
‘천재라는 건 이런 느낌이겠지.’
그래도 더 이상 테오를 부러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자신의 팔에 달린 주장 완장이 사이즈 이외에는 1군의 것과 완벽하게 똑같음을 알기에.
선덜랜드는 1군 경기에서 사용한 주장 완장의 사이즈를 수선해서 짐에게 주고 있다. 장차 선덜랜드의 1군 주장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
그리고 소년이 몸에 걸친 유니폼 또한, 크기와 스폰서 로고 이외의 모든 것이 과거 페르난데스가 쓰던 것과 똑같았다.
선덜랜드의 등번호 1.
4년 전까진 하퍼가 썼고, 그 이후에는 페르난데스가 사용했던 번호가 지금, 짐의 등에 매달려 있다.
팀 관계자가 짐에게 얼마나 기대하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물들이다. 그 생각을 하면, 절대 움츠러들 수는 없었다.
자세를 바로잡자, 테오가 아이답게 감탄했다.
“주장! 키가 좀 큰 것 같은데?”
“그야 성장기니까.”
겉으로는 무덤덤하게 대답하면서, 짐은 뿌듯함을 느꼈다. 축구는 다른 종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키가 덜 중요한 운동이지만, 그래도 골키퍼에게 신장은 곧 무기다.
“너도 잠 많이 자야 해. 그래야 키 커.”
“작아도 상관없어. 나는 필드 플레이어니까.”
테오가 자신의 77번 유니폼을, 그 위에 남은 축구의 신의 사인을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키가 작아도, 막을 수 없는 선수가 될 거야.”
* * *
우리가 바르샤를 잡아내자, SNS는 발칵 뒤집혔다.
- 브라이언 갓동님 제발 종신해주세요.
- 늦기 전에 선덜랜드 감독 잘라야 한다던 분들 다 어디 가심? 템즈강 수온 재러 감?
ㄴ 템즈는 무슨. 아이피 보니 한강이 유력함.
아무리 프리시즌의 비공식 대회라지만, 그래도 바르샤를 정면으로 잡아낸 것은 무척 임팩트 있는 결과라는 평이었다. 그것도 적잖은 상금이 걸린 대회였고, 브라이언에게는 생애 첫 감독 데뷔전이었다.
이보다 더 임팩트 있는 감독 데뷔전은 찾기 드물겠지.
정작 브라이언 본인은 이를 가는 중이지만.
“한 골은 상정범위인데, 두 골이나 내줄 줄은 몰랐어. 수비 블록을 좀 더 타이트하게 짜야지··· 이런 식으로는, 챔스에서 만나면 제대로 두들겨 맞는다니까?”
옆에선 샐리가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둘은 분석실에서 축구의 신이 보여준 첫 득점 장면을 다시 돌려 보는 중이었다.
“솔직히 이런 거 보면, 전술은 짜서 뭐 하나 싶고 그렇죠. 제대로 된 패스나 받으면서 들어왔으면 몰라. 세컨볼이 그냥 굴러온 건데···.”
샐리의 푸념을 들으며, 옆에서 희주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오빠, 브라이언 씨보다 샐리 씨가 훨씬 더 화난 것 같은데. 이건 혹시···.”
핑크빛 감정을 기대하는 모양이다. 여자들이 대체로 연애담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희주 얘는 정도가 심하다.
“글쎄, 내가 보기엔 그런 감정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그보다는 전술의 문제겠지.”
“전술?”
공간보다 시간을 중시한다는 답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샐리는 공격적인 축구를 선호하고, 점유율 위주의 전술을 짜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샐리가 세 골 먹고 네 골 따서 갚으면 된다는 마인드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희주의 호기심을 해결해줄 겸, 슬쩍 물었다.
“샐리, 이건 그냥 개인적 호기심인데요. 축구에서 수비는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이상적입니까?”
“그야 공을 우리 골대에서 가장 멀리 놔두는 거죠. 구체적인 방법은, 당연히 상대 진영에서 공격하는 거고요. 공은 우리가 가지고 있고, 혹시 뺏기더라도 우리 골대와 거리가 머니까 안전해요.”
예상했던 답변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희주 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유야.”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첫 실점은 샐리 씨 입장에선···.”
“응, 가장 완벽한 수비를 하고 있었던 상황인 거야. 그게 순수한 개인능력 한 방에 무너졌으니 당연히 분하겠지.”
마음에 둔 남자가 짠 전술이 허망하게 무너졌다는 핑크빛 이유는 아니니까, 꿈 깨라고.
그사이 샐리가 먼저 표정을 고쳤다.
“결승 준비나 하죠.”
“그래. 다음 상대는 인테르 아니면 뮌헨이지? 어느 쪽이 올라와도 괜찮도록 미리 대비를···.”
이대로 두면 둘이 무익하게 밤을 새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내일 경기 보고 나서 분석해도 안 늦어. 어차피 내일 되면 누가 올라올지 뻔히 알게 되는데. 그리고 결승은 다음 주고.”
“그럼 오늘은 쉬어도 되려나?”
“그럴까요? 사람들 반응이나 좀 보면서요.”
곧바로 둘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원래 브라이언과 샐리는 둘 다 SNS에 신경 안 쓰는 편이었다. 심지어 브라이언은 계정도 없었고, 샐리의 아이디 @반짝반짝_SQ도 활동을 중단한 지 4년이 되어간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틈만 나면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오빠, 사람들이 날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한 건 인지상정이라니까?”
“그래도 너처럼 알림 뜨게 만든 건 너무했고.”
그때 샐리의 감탄사가 들렸다. 슬쩍 보자, 테오에게 메시가 사인해주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경기장을 찾은 팬이 올린 사진이 SNS에 퍼진 모양이다.
- 훈훈하네. 이거 기대해도 되는 각이냐?
ㄴ 볼보이면 보통 팀 유소년이지?
ㄴ 안 그런 팀도 가끔 있지만, 선덜랜드는 전부 자기 유소년만 씀.
- 따라서 쟤는 축구의 신이 손수 사인해줄 정도의 유망주란 말이지. 대박이네.
- 이거 괜히 다른 팀에 하이재킹당하는 거 아니냐. 잘 키워라. 뺏기지 말고.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샐리와 브라이언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대답하는 것처럼.
뭐, 정상적인 축덕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우리 로컬 팬이라면 더욱 그렇고.
그런데 나는, 다른 쪽 시선이 신경 쓰였다.
“링크 좀 보내 봐.”
테오는 하필 선덜랜드 유니폼에 사인을 받았다. 물론,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볼보이가 그라운드에 사인보드를 챙겨 들어가긴 힘드니까.
굳이 따지자면 메시의 유니폼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불찰이지만, 상대가 어린 소년임을 고려하면 딱히 흠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메시 본인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사인해준 거겠지.
그런데··· 기레기들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일 장면이었다. 마침 테오는 볼보이 조끼를 벗어서 한 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에, 편집해서 잘라내기 좋은 구도다.
“브로, 뭐 해?”
“잠깐만.”
사진의 한쪽 구석을 엄지로 가리자, 기레기들이 설칠 게 뻔한 떡밥이 순조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은 소년 팬에게 웃으며 사인해주는, 바르샤의 에이스라는 그림이.
“프레스팀에 연락해서, 잠깐 내 방으로 오라고 해.”
* * *
“이거 그런 뜻이지? 찌라시 뿌리면 죽여버린다는··· 더러운 놈들.”
런던의 소형 일간지, 런던 튜브 편집장이 서류를 거칠게 집어 던졌다. 그 모습에 막내 기자 엘렌의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랜던은 태연했다.
편집장은 광분했지만, 랜던이 보기에 선덜랜드의 공문은 꽤 신사적이었고, 내용은 점잖았다. 그리고, 사실무근의 찌라시를 쓰지 말라는 요구 자체는 따지고 보면 아주 정당하다.
“흥, 이런다고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의욕을 불태우는 편집장 쪽을 흘끗 바라본 다음, 랜던은 빙긋 웃으며 노래하듯 읊조렸다.
“타인위어 지역 삼대장이 모조리 정리되었다던데요. 타인위어 스포츠는 사실상 간판 내릴 정도의 타격을 받았고··· 선덜랜드 데일리와 노스이스트 저널은 완전히 꼬리 내렸죠.”
“우린 그런 시골 언론과 달라.”
“그 시골 언론들, 전부 우리보다 큰데요.”
결국 편집장이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당분간 선덜랜드는 건드리지 마.”
목적을 달성한 랜던은 미소를 지으며 편집장실을 빠져나왔다. 옆에서 막내 기자 앨렌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이러면 이 사진도··· 못 쓰겠네요. 훈훈한 장면이라 실어주고 싶었는데.”
“뭐, 포기해야지. 그래도 찌라시를 쓰는 것보단 낫잖아? 어차피 우리 윗분들은 훈훈한 기사 따윈 쓰게 놔두지 않았을 거야.”
“선배님, 그렇게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아직 사무실 안인데요.”
엘렌의 걱정을, 랜던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뭐, 억울하면 너도 성장해야지. 나 잘리면 여기 문 닫아.”
“하긴···.”
“그보다, 일단 추측이나 해 봐. 선덜랜드가 갑자기 왜 이런 공문을 돌렸을지.”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엘렌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일단, 사실 여부를 떠나 부담스럽죠. 가뜩이나 새 감독이 새내기라는 인식에 고생하는 중이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거물 선수는 여러모로 다루기 힘들어요.”
계속해보라는 의미를 담아 랜던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렌의 목소리에도 점차 자신감이 붙었다.
“심지어 메시는 축구 역사상 몇 번째로 꼽힐지가 유일한 관건인 대선수니까요. 물론, 위상에 비하면 감독 말 정말 잘 듣는 선수지만··· 선덜랜드 감독에겐 부담스러울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게 다야?”
“만일 선덜랜드가 메시를 원치 않는다면 루머조차 돌지 않게 원천봉쇄하겠죠. 감독을 흔들게 될 테니까요··· 네. 구단에 데려올 돈이 있다는 건 명백하니, 원치 않을 이유는 감독밖에 남지 않아요.”
엘렌의 추측을 들은 랜던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메시를 데려오고 싶어 한다면?”
“그러면 공문을 돌리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이적 전에 남의 선수를 언플로 흔드는 건 상식이니까요.”
“그것도 어느 정도 급에서나 이야기지. 메시 같은 거물은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아. 오히려 잘못하면 선수의 반발만 사지.”
“그럼 선배님 생각에는···.”
“선덜랜드가 정말로 노린다면, 오피셜이 뜨기 전까지는 어떠한 루머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겠지. 이 판에서 선수의 이적은 언제 어떤 식으로 엎어질지 모르니까.”
이적 문제는, 도장 찍기 전까진 아무도 모른다. 축구계 관계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래서 선덜랜드는 지금까지 모든 이적을 항상 신속하게 처리했다. 대부분의 경우 루머가 돌 시간조차 주지 않았고, 타겟이 결정되면 구단주가 곧바로 움직여 계약을 끝냈다.
엘렌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선배님은··· 축구의 신이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게 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모르지. 당사자들 말고는 아무도.”
랜던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 있는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내가 너라면, 미리 대비는 해 둘 것 같은데? 선덜랜드는 틀림없이 프리시즌의 왕이거든.”
“프리시즌의··· 왕이요?”
“돈이 넘치도록 많은 팀이 오버페이조차 하지 않아. 데려오는 선수는 전부 이적료 이상의 활약을 펼치고. 이게 프리시즌의 왕이 아니면 뭐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