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프리시즌의 왕 (5)
에이미는 자신의 상사, CS팀장 린다를 바라보았다.
린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매 시즌 초마다 린다가 보여주는 표정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긴장하는 것은 드물었다.
물론 에이미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오늘은 축구의 신의 유니폼이 메가스토어에 풀리는 날입니다.”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창밖으로 향했다. 북동부 최대의 메가스토어, 선덜랜드 메가스토어 앞에는 유니폼 판매를 기다리는 고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일부는 밤을 새웠는지, 행렬 사이사이엔 텐트나 침낭 같은 것들이 보인다.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전쟁의 예감, 혹은 폭풍전야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 상황이었다.
“버틸 수 있을까요?”
“어··· 죽진 않을 거야. 4년 전에도 한번 대란을 치른 적이 있긴 하거든.”
“아뇨 그게 아니라··· 물량이요. 저도 갖고 싶어서···.”
“직원 판매용은 따로 빼놨어. 인당 딱 한 개씩이지만.”
“그렇다면 아무 미련도 없습니다.”
선덜랜드 CS팀원들은 폭풍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에이미가 대표로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도 선덜랜드 메가스토어를 찾아주신 고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유니폼 판매가 시작될 예정이오니···.]
그리고, 메가스토어는 곧 전쟁터가 되었고, CS팀 신입들은 반나절 만에 파김치로 변했다. 물론 노련한 에이미는 이 정도 수라장에는 익숙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준비된 물량이 전부 매진되었습니다. 오프라인 매장에는 모레부터 다시 입고될 예정입니다. 온라인에서 주문하시면 다음 주에 발송됩니다.]
실망한 팬들을 달래기 위해, 선덜랜드는 곧바로 온라인 샵 전용 할인 쿠폰을 뿌렸다.
대부분의 팬은 납득하고 돌아갔지만, 개중에는 실망을 이기지 못한 팬들도 있었다.
“아! 다 팔렸어! 어떡해!”
울음소리가 나서 바라보니 십 대 소녀 팬이 눈물을 훔치는 중이었다.
“오늘 꼭 사고 싶었는데···.”
에이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대중으로 소녀 팬의 체형을 스캔했다.
자신보다 키가 조금 작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체중도 엇비슷해 보인다. 맵시는 좀 덜 나겠지만, 그래도 같은 사이즈를 입을 수는 있을 것이다.
“실은, 유니폼이 한 장 있어요. 고객님 사이즈로요.”
팬 서비스는 선덜랜드의 경영 신조고, 고객 만족이 CS팀의 철학이다. 에이미 또한 목숨처럼 지키는 원칙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후회는 없었다. 그래도, 축구의 신의 유니폼을 바로 구하지 못하는 것은 살짝 아쉬웠기에··· 에이미는 입맛을 다셨다.
‘나도 온라인에서 주문 넣어야겠네.’
* * *
확실히 슈퍼스타는 슈퍼스타인 모양이다. 선덜랜드에서, 잭의 유니폼 판매량을 넘어설 선수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오프라인에서는 여전히 우리 주장 유니폼도 인기입니다만, 온라인에서는 압도적입니다. 유니폼만 팔아도 매출이 어마어마하겠는데요?”
물론 유니폼만 팔 리는 없다. 실제로 신상품개발팀장 아드리안은 아주 입이 귀에 걸렸다.
“온라인 판매는 아무래도 글로벌 팬이고, 따라서 영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축구의 신 폰케이스, 축구의 신 스마트폰 거치대···.”
“이쯤 되면 축구의신 SNS 프사도 팔겠다고 할 기세네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아니, 좋지 않아. 누가 저 양반 좀 말려 봐.
아무튼, 축구의 신이 합류하면서 팀 전체에 활기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주로 긍정적인 쪽으로.
특히 젊은 선수들이 많은 우리 팀에서는, 축구의 신을 우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훈련장에서도 한층 열기가 넘쳤다.
“나이스 패스, 넘버 99!”
“가, 감사합니다!”
메시의 칭찬 한마디에 해리슨은 감격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할 정도였고.
“오프더볼이 아주 좋은데? 호흡이 좀 더 맞으면 아주 파괴적이겠어.”
“감사합니다.”
평소 무뚝뚝하던 요니도 오늘은 아주 입이 귀에 걸렸다. 그 옆에서는 잭이 살짝 삐진 것처럼 고개를 흔든다.
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짝을 뺏긴 기분이라 서운한 걸까?”
“그렇다기보다는···.”
아마 자기는 축구의 신에게 칭찬받을 일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다행히 축구의 신은 답을 찾아냈다.
잠시 후 재개된 훈련에서, 잭이 특유의 헌신적인 질주로 공을 되찾자마자 메시가 박수를 보냈다.
“나이스 무브, 캡틴!”
잭이 환한 미소로 응수했다.
* * *
분석실의 분위기도 조금 바뀌었다.
“마르틴과 메시를 좀 더 알차게 써먹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모처럼 특급 드리블러가 둘이나 있는 건데···.”
브라이언과 샐리, 루벤이 머리를 맞댔다.
“둘이서 휘젓는 동안, 요니가 특유의 오프더볼로 파고드는 거죠. 바스티아노를 전진 배치하고요.”
“상대 수비라인을 강제로 밀어내는 용도지? 그렇다면 스티븐은 바깥쪽으로 벌려서···.”
셋 다 눈이 반짝거린다. 업무량은 오히려 늘었을 거고, 수면시간은 별 차이 없을 텐데도 느껴지는 생기가 다르다.
“진짜 피로회복제는 훈련장에 있었나 보네.”
감탄하는 희주의 곁에서, 나 또한 흐뭇한 미소를 보냈다.
비록 전성기가 지났다고는 해도, 메시는 명색이 축구의 신으로 통하는 역대급 선수다.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최고의 소재를 얻은 셈이겠지.
특히 브라이언이나 샐리 같은 전술가에게는,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그야말로 무궁무진할 거다.
“빨리 시험해보고 싶어요. 내일부터 A팀과 B팀으로 나눠서···.”
“그것도 좋지만.”
샐리의 이야기에 슬쩍 끼어들었다.
“모처럼 프리시즌이니까, 연습 경기를 더 잡으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좋은 생각이세요, 구단주님!”
샐리가 대놓고 환호했고, 브라이언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옆에선 희주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그렇구나! 모처럼 축구의 신을 영입한 거니까, 연습 경기를 늘릴수록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나겠네. 팬도 많아질 거고. 그리고 팬들은 굿즈를 사 주고, 티켓을 끊고···.”
“뭐, 그런 셈이지.”
우리 선덜랜드는 로컬 팬들의 충성도는 확실하지만, 그래도 글로벌에서 인기 있는 구단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이번에 모처럼 빅네임을 영입했으니, 구단 인지도를 더욱 높여야지.
“그래서 갑부 오라버님, 연습경기는 언제 누구와 하나요?”
“그건 너님이 알아서 잡으셔야죠.”
* * *
선덜랜드의 경기력은 그야말로 날이 서 있었고, 구단주 비서는 마치 한이라도 맺힌 것처럼 경기를 잡아댔다. 덕분에 노스이스트 잉글랜드에서는 한 달 내내 잔혹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선덜랜드, 반즐리 대파! 진짜로 ‘프리시즌의 왕’ 되나?]
[프리시즌 무패행진 이어가··· 축구의 신, 폭풍 2도움!]
[프리시즌에도 뜨거웠던 위어티스 더비! 선덜랜드, 미들즈브러에 역전승!]
선덜랜드의 소녀 팬, 앨리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기사를 바라보았다.
“최고의 시즌이 될 것 같아!”
앨리스는 타인위어 지역 토박이였지만, 몇 년 전까지는 선덜랜드에 대해 그렇게까지 큰 호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알던 선덜랜드는 기본적으로 약팀이었기 때문에.
축구에 대해 알면 알수록 실망하게 하던 팀, 그게 몇 년 전까지 선덜랜드에 대한 인상이었다.
이제는 달라졌다. 축구에 대해 알면 알수록, 팀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진다.
“운영하는 사람들이 애정 넘치기 때문일 거야.”
직원용으로 배정된 유니폼 레플리카를, 팬을 위해 기꺼이 양보하는 스태프가 있는 팀이다. 훈련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기다리던 팬들 앞에서 멈춰서는 선수들이 있는 팀이기도 하다.
90분간 끝까지 발을 멈추지 않는 팀, 그 위에 이제는 축구의 신까지 더해졌다.
실제로 일부 언론에서는 올 시즌의 선덜랜드가 한 건 할 거라는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선덜랜드, 프리시즌의 왕>
[선덜랜드는 지금까지 스쿼드를 젊게 유지했다. 물론 재능 있는 선수를 싸게 데려오기 위한 방편이었겠지만, 기자는 이에 한 가지 가설을 덧붙이려 한다.]
[이 스쿼드는, 앞으로 3, 4년간은 계속 전성기를 유지할 수 있는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만큼 젊은 스쿼드다.]
[그 위에 노련함이 더해졌고, 역대급 재능의 주인공이 함께한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언제나 재능은 다른 재능의 개화를 부른다. @엘렌]
물론, 세상에는 이 팀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메시는 선덜랜드와 안 맞아. 선덜랜드는 많이 뛰는 팀인데, 메시는 젊은 시절부터 많이 안 뛰는 선수잖아? @김치_워리어]
앨리스는 곧바로 반론을 펼쳤다.
[축구의 신은 팀에 부족한 창조성을 메워 주고, 팀은 그가 갖지 못한 활동량을 채워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이상한_나라의_블랙캣츠]
@김치_워리어에게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 님이 이긴듯.
ㄴ ㅇㅇ. 추하게 블라튀 무엇?
앨리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프리시즌이 끝나갈 무렵, 선덜랜드는 역대 기록을 또 한 번 경신했다.
시즌권 판매 기록이다.
호성적에 이어, 챔스 1포트라는 화려한 출발점, 그리고 은퇴를 앞둔 ‘축구의 신’이 합류했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팬이 늘어나다 보니 부작용도 있었다. 아무래도 뜨내기 팬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구단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애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과 함께 티켓박스에 나타난 청년.
“내가 어릴 때부터 선덜랜드 충성팬이야. 하부 리그 있을 때부터 응원했다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작 그의 시즌권은 아직도 플라스틱이다. 따라서 시즌권을 끊은 지 아직 5년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부 리그 있을 땐··· 집에서 응원하셨겠네. 아니면 사커 매니저에서 응원하셨거나.’
물론 에이미는 프로답게, 친절하게 응대했다.
그때였다.
드르륵, 바퀴 구르는 소리가 울렸다. 티켓박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에 주위의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티켓박스의 왕이 나타났다.
선덜랜드 유니폼을 커플티처럼 입은 아빠와 엄마. 그리고 유모차 안에는 마찬가지로 선덜랜드의 레드 앤 화이트 유니폼을 입은 아기의 조합이었다.
특히 아기가 눈에 띈다. 손에 장난감 대신 선덜랜드의 티타늄 시즌권을 기세 좋게 흔드는 중이었기에.
선덜랜드 골수팬, 우드 부부와 그 아들 크리스 우드의 등장에 조금 전까지 ‘어릴 때부터 선덜랜드 단골’을 자처하던 청년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옆에선 그의 여자친구가 키득거렸다.
“야, 너 어디 가서 단골 팬 소리 하면 큰일 나겠다.”
주위에서 웃음이 터졌다. 물론 에이미는 프로답게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살짝, 아주 살짝 사이다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티켓박스 앞에 선 부부가 조심스럽게 용건을 꺼냈다.
“이 아이의 시즌권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티켓박스 직원은 나름 프로답게 표정을 관리했지만, 그래도 얼굴 한구석에는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까다로운 주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에이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장이라도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은 꾹 눌러 참기로 했다.
그녀도 이제 CS팀 부팀장으로 승진했고, 신인을 키워야 할 입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티켓박스 직원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7세 이하의 아동은 부모 동반 시 무료 입장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시즌권을 발급하지 않습니다.”
규정대로라면 모범 답안이지만, 선덜랜드 CS팀이 요구하는 정답은 아니다. 결국 에이미가 끼어들려는 찰나···.
티켓박스 직원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다만, 저희 재량으로 시즌권 모양의 티켓을 증정하고자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증정이요?”
“네, 정식 시즌권이 아니므로 효력은 없습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준비하겠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던 에이미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우드 부부 역시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 아버지가 가진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VIP용 티타늄 시즌권이 부부의 눈앞에 놓였다.
[크리스토퍼 우드, 모태 블랙캣츠]
뒷면에는 Sunderland ’til I die가 선명하게 각인된 카드를 바라본 우드 부부가 환호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일평생 이 팀의 일원이 되는 거군요.”
“정말 멋져요! 이건 아직 나도 없는 건데.”
“나중에 이 아이에게 정식으로 시즌권을 발급해줄 때는···.”
“네, 그 티켓을 갖고 다시 방문해주시면 등록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욘석아, 아빠 티켓 그만 탐내고···. 아빠도 시즌권 연장해야 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티켓을 회수하려던 마일즈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크리스는 새 티켓에 무한한 관심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원래 쥐고 있던 마일즈의 티켓을 순순히 내줄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손이 두 개 있다.
“당신 걸 미끼로 해서 한 개를 놓게 만들면 어떨까?”
“내 건 관심 없더라고요. 플라스틱이라 그런가 봐요.”
그 풍경을 잠시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에이미가, 단골 부부와 아기에게 다가갔다.
“올 시즌에도 선덜랜드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일즈 우드 고객님, 그리고 수잔 우드 고객님··· 제가 잠깐 도와드려도 괜찮을까요?”
얼굴에는 친절한 미소, 손에는 신생아용 굿즈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