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돌아보면, 바뀌어 있는 (1)
<축구는 돈을 벌 수도 없고 돈을 벌어서도 안 되는,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비즈니스다 - 사이먼 쿠퍼>
“보이스피싱을 방지하기 위해 제 생일을···.”
이쯤 되면 다미의 ‘생일’ 이야기는, 그냥 영상통화 하자는 신호로 이해하는 게 빠를 것 같다. 나는 재빨리 영상통화로 전환했고, 잠시 후 다미의 미소가 스마트폰을 가득 채웠다.
“프리시즌 컵 우승 축하드려요.”
“고마워.”
“음, 조만간 상장 수여하러 한번 영국에 가야 하려나요?”
“네가?”
“사장님은 상 받는 쪽 관계자니까 드리는 건 제가 해야죠.”
“내가 나한테 주는 방법도 있어.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사실, 프리시즌컵 우승 트로피는 이미 받았다. 그것도 꽤 근사한 놈으로.
유로파리그 우승컵 못지않게 크고 아름다운 트로피였다. 유일한 결점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바로 도착해버린 탓에 세인트 제임스 파크 앞에서 우승 퍼레이드를 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다.
“리미트리스 유소년 리그에선 내가 상장 주면 되겠네.”
“받는 건 선수들이겠지만요··· 사실 저는 사장님이 한국에 오시는 것만으로 만족해요.”
“그래서 내가 한국에 갈 만한 선수는 있고?”
그러자 다미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조직위원장님 의견으로는 재미있는 선수가 있다고 하셨어요. 우선 제일고등학교 최새벽, 17살인데, 조직위원장님은 앞으로 잘 키우면 대단할 것 같다고 하셨어요.”
잠시 후 다미가 태블릿을 꺼내 자기 앞에 놓았다. 태블릿에 선수 얼굴을 띄웠고, 나는 군침을 흘렸다.
내가 보기에도 ‘잘 키우면 대단할 것’ 같은 선수다. 한국인 센터백 이마에서, 에디나 이고르에 비견되는 숫자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지.
“혹시 영상 보여줄 수 있어?”
내 요구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다미가 곧바로 태블릿에 영상을 띄웠다. 그리고 나는 곧 감탄하고 말았다.
수비수, 그것도 센터백인데도 굉장히 예쁘게 공을 찬다.
물론 에디만큼 위력적인 킥의 소유자는 아니다. 타고난 재능은 비슷하지만, 에디는 프리미어리거이자 국가대표급 센터백이고, 최새벽은 아직 프로조차 되지 못한 일개 유망주니까.
그래도 자세만 보면 에디 못지않은 우아함이 느껴진다. 이 정도로 우아하게 공을 차는 선수는 우리 1군에도 드물다.
단단함이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최새벽은 아직 어린 유망주다. 장차 몸이 만들어지고 체격이 커지면···.
“프리미어리거가 되기에 손색없는 선수 같은데.”
특히 센터백은 수명이 긴 편이니, 한번 데려오면 오래오래 활약해 줄 것이다. 마침 열일곱, 이제 곧 프로 계약을 할 수 있게 될 나이라 더욱 좋다.
“선수에게 접근해 봐. 해외 진출에 관심 있는지.”
그러자 다미의 고운 얼굴이 찌푸려졌다.
“네, 접촉할게요. 하지만 어린 선수라 워크 퍼밋이 나기 어려울 텐데요. 물론 축구계 유력 인사의 추천장이 있으면 사정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놈의 워크 퍼밋··· 이게 다 브렉시트 때문이다.
“아! 사장님도 이제 사회적 지위와 체면, 물론 사회적 지위는 예전부터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이제 훈장도 받으셨잖아요?”
그놈의 훈장.
“그러니까 희성 더 그레이트 리, CBE의 이름으로 워크 퍼밋 특별 심사를 요청하시면···.”
“중간에 더 그레이트는 뭔데?”
조만간 마제스티 제너럴 이런 것도 붙이겠다?
“알았어요. 희성 더 갓 오브 인베스트···.”
제발.
“어, 그냥 CBE로 부탁드립니다.”
내가 두 손을 들자, 다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크로아티아? 아니면 체코?”
“크로아티아로 하지. 프라하보다는 오시예크와 좀 더 친하니까.”
바이백을 붙여서 오시예크에 이적시키는 방식이 나을지, 아니면 선덜랜드 신분으로 임대를 떠나는 게 나을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그런 디테일은 나보다 다미가 훨씬 나으니까, 굳이 참견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사실, 최새벽의 성장을 위해서도 오시예크가 프라하보다 나을 것 같다.
크로아티아는 유럽 최장신을 자랑하는 국가이다 보니, 축구에서도 힘과 높이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고르가 그런 것처럼, 크로아티아 출신 센터백들은 대체로 제공력과 투지로 정평이 나 있다.
크로아티아 프르바리가에서 싸워나가다 보면, 최새벽의 몸에도 단단함을 갖출 수 있게 되겠지.
이번에 오시예크 임대를 다녀온 터너가 그런 것처럼.
* * *
터너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십수 년간 살아온 동네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겨우 반년 만에 뭐가 되게 바뀐 것 같은데.”
일단 집이 바뀌었는데, 이건 알고 있었다.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8부 리거 시절에는 투잡까지 하며 버텼지만, 선덜랜드에 온 다음부터는 당당한 프리미어리거가 되었고, 주급도 엄청나게 늘었다. 덕분에 터너의 집은, 예전에 비하면 거의 궁전처럼 변했다.
물론 터너는 선덜랜드 영입 직후 오시예크에 임대를 나갔기에 그 궁전 같은 집에는 며칠 살아보지도 못했다. 사실상 가족들을 위한 서비스였다.
“동네도 엄청 달라졌고···.”
못 보던 건물이 잔뜩 늘었다. 새로운 가게도.
원래 동네를 오래 비우면 뭐가 많이 바뀌는 법이라는 건, 터너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단골 빵가게가 핸드폰 매장으로 바뀌거나, 서점이 자동차 가게로 바뀌는 일 정도는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그래도 딱 반년 사이에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바뀌어 있을 줄은 몰랐다.
“티엠씨 하나 들어온 건데 이렇게 다르구나.”
그때였다. 지나가던 청년 둘이 터너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터너?
“진짜 터너네! 야, 얼굴 못 알아보겠다.”
동네 친구들을 발견한 터너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동네가 너무 바뀌어서 정신이 없어.”
“야, 일단 사인부터 해 줘.”
“사인은 무슨. 친구 사이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터너는 아주 자연스럽게 펜을 꺼냈고, 친구들이 내민 수첩이며 티셔츠에 슥슥 사인했다.
“팬 서비스가 아주 몸에 뱄네.”
“팀 관계자분들께 따로 교육받거든. 오시예크에서도 많이 배웠고.”
“오시예크면 크로아티아지? 거기서도 너 인기 많았냐?”
터너는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선덜랜드가 인기였지. 그래도 사인은 원 없이 하고 왔다. 선덜랜드에서 왔다고 하면 다들 좋아했거든.”
그렇게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터너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친구들의 낮은 수군거림이 들렸다.
“동네가 많이 변하긴, 지가 제일 바뀌었구만.”
“그러게, 아우라가 장난 아니던데.”
“그래도 기분이 좋긴 좋다. 동네 친구가 프리미어리거가 되니까.”
웃음기 어린 덕담 사이에, 한편으로는 걱정의 목소리가 섞인다.
“올해는 터너도 팀에서 자리를 잡아야 할 텐데. 그래도 공격수라서 쉽지 않겠지?”
“바스티아노, 크리그, 베리, 마르틴, 스티븐까지··· 심지어 올 시즌엔 축구의 신도 있잖아?”
“그래도 올해는 가까이서 응원할 수 있겠네.”
“맞아. 임대는 더 안 나갈 것 같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시즌권도 샀고.”
호기심 반, 그리고 걱정 반에 옛 친구들이 고개를 돌려 돌아볼 때에도 터너의 발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뒷모습에서, 프로 선수다운 당당함이 느껴졌다.
* * *
오시예크 임대에서 복귀한 터너가 합류하면서, 선덜랜드의 여름 이적시장은 사실상 문을 닫았다.
비록 스쿼드의 선수는 딱 한 명 늘었을 뿐이지만, 팬들의 불만은 없었다. 0입이라는 둥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도 당연히 사라졌다.
지금의 선덜랜드엔, 축구의 신이 와 있으니까.
게다가 오시예크에서 돌아온 터너도 아우라가 상당하다. 예전의 터너가 이마의 숫자만 높게 붙은 유망주였다면, 지금은 어엿한 축구 선수다운 포스를 갖췄다.
이쯤 되면 우리 유망주들에게 오시예크 임대 코스를 필수적으로 넣어야 하나 싶을 정도다.
터너의 변모에, 이고르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크로아티아는 사람을 강하게 키우죠.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 밖에도 시즌 준비는 착실히 진행되었다. 시즌권을 알차게 팔았고, 각종 굿즈를 새로 찍어냈다.
개인적으로는 선덜랜드 모빌이 가장 마음에 든다. 아기를 키우는 부모에게, 잠깐이나마 축구 볼 시간을 만들어줄 수 있는 물건이니까.
게다가 저걸 보고 자란 아기들은 나중에 선덜랜드 골수팬이 되어줄 것 같거든.
물론 올 시즌, 가장 많이 팔린 건 유니폼이었다.
일단 축구의 신이 단일 시즌 최다 유니폼 판매량을 찍어 버렸고, 이에 지역 로컬 팬들이 잭의 유니폼을 추가로 구매했다. 덕분에 올여름, 우리 선덜랜드는 유니폼을 가장 많이 판 축구팀 타이틀을 가져왔다.
“이번에 준비하신 ‘입어서 응원하자’ 캠페인이 확실히 대박이었습니다. 비서님, 앞으로도 좋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어째 캠페인 이름부터 약간 맛이 간 느낌인데··· 좋은 의견이라고?
아드리안의 칭찬을 들은 희주가 가슴을 폈다.
“별거 아니었어요. 원래 덕질을 하려면 최소 세 장은 기본이니까요. 소장용, 포교용, 실사용!”
알고 보니 희주가 SNS에서 수작을 부린 모양이다. 아무리 상대가 축구의 신이라지만, 명색이 로컬 보이인 주장 유니폼이 그만큼 안 팔리면 되겠냐는 한탄성 여론을 이끌어내는 식으로.
이미 잭의 유니폼을 사들인 팬에게는 소장용이니 포교용이니 하는 명분을 내세웠을 테고. 덕분에 선덜랜드의 이번 프리시즌 유니폼 판매량은 역대 최고를 넘어, 기네스 기록에 도전하게 되었다.
한편, 기네스 기록 이야기에는 샐리가 보기 드물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기네스가 아일랜드 회사라 그런 거겠지.
“오빠, 샐리 씨 술 좋아하던가? 전에 같이 바에 갔을 땐, 자기는 술 약하다고 하던데···.”
“어디까지나 아일랜드인치고는 약하다는 뜻일 거야. 지난번 세인트 패트릭 데이 때는 굉장했었지.”
대작하던 톰슨과 브라이언이 차례차례 두 손 들었을 정도다. 오죽하면 혹시 술병에 미리 물을 담았나 의심의 시선이 쏠리기도 했었다.
참고로 나는 진작에 도전을 포기했다. 예전에 들은 적이 있거든. 그녀의 아버지도 어마어마했다고.
의미를 알아들은 희주가 키득거렸다.
“아, 그렇구나. 오빠가 한국인치고 매운 것 못 먹는 것처럼?”
나는 가볍게 응수했다.
“그야 네가 만드는 볶음라면은 지옥불맛이라 그런 거고.”
“영국인치고는 평범한 입맛인 브라이언 씨는 극찬했었는데.”
“어··· 걔는 영국인치고도 입맛이 별로야.”
축구 전술은 끝내주게 짜지만 말이지.
이번 프리시즌을 치르는 동안, 브라이언에 대한 평가도 적잖게 올랐다. 프리시즌 컵에서 우승하기도 했고, 특집 다큐멘터리 역시 호평이었다.
- 역시 투자의 신! 감독도 키워서 쓴다.
ㄴ 브라이언이 선수단 기강 못 잡을 거라던 사람이 많았는데, 애초에 브라이언은 로저스의 수제자잖아. 봐, 메시도 얌전하게 있는 거.
ㄴ 프리시즌 컵의 맞대결에서 이긴 것도 영향이 컸을 거야. 자길 이긴 감독 머리채를 잡고 흔들진 못할 테지.
뭐, 그런 영향도 없진 않겠지만, 사실 메시는 원래 드레싱룸에서는 꽤 조용한 타입이다. 커리어와 위상을 보면 어지간한 감독 머리채를 잡고 휘두르려 덤벼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도.
애초에 그래서 데려온 거지만.
덕분에 우리는 최고의 기세로 새 시즌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챔피언스리그는 당당한 1포트로, 바로 본선부터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유로파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슈퍼컵 참가가 확정되었으며, 프리미어리그 1라운드 경기는 우리 홈에서 치르게 되었다.
“세 시즌 연속 홈에서 개막전이라니, 운이 좋은걸?”
내 생각에는 푸드트럭 소시지가 열일한 결과였다.
우리 푸드트럭들은 경기장 앞에서 벌써 5년째 영업하고 있다. 맛은 보증수표고, 식재료 회전이 잘 되니 품질도 훌륭하고, 값도 싸다.
무엇보다 축구 보는 날 경기장 앞에서 파는 음식이라 휴대도 간편하고 별도의 식기 없이도 편리하게 먹을 수 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저주받은 입을 틀어막는 용도로도 아주 좋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선덜랜드 푸드트럭에,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아마 리그 사무국이 시즌 흥행 차원에서 여러모로 신경 써준 거겠지.”
브라이언이 건조하게 말하자, 샐리가 눈을 깜빡였다.
“어머, 신경 썼다면 좀 더 빅매치를 주지 않았겠어요?”
“아니지. 굳이 빅매치일 필요는 없어. 우리는 어차피 개막전에서 전 좌석 매진 확정이니까, 홈 경기만 주면 충분해.”
우리 선덜랜드도 이제 빅 7로 손꼽히는 빅클럽이 되었다. 특히 로컬 팬들의 지지가 무척 뜨거운 팀이다. 브라이언의 말처럼, 개막전 버프가 더해지면 칠만 석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정도는 간단하다.
“이제, 내가 기분 좋게 승리를 가져오기면 하면 완벽하지.”
브라이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사실, 성격을 고려하면 브라이언이 긴장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남몰래 손을 바지에 문지르는 모습만 봐도 그의 긴장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제 브라이언은 팀을 이끄는 감독이고, 코칭스태프나 선수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자리에 앉았다··· 스스로에게도 자각이 있는 거겠지.
그러니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을 것이다.
구단을 처음 인수했던 날, 잔디를 깎고 쉐이커를 흔들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데.
돌아보니, 내 친구는 어느새 진짜 감독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까다로운 1라운드 상대 에버튼도.
그리고, 그곳에 새로 부임한 감독 베니테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