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44화 (244/422)

244화 돌아보면, 바뀌어 있는 (2)

[보이스피싱을 방지하기 위해 생일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브라이언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11월 1일생이셨죠? 감독님, 그런데 생일과 보이스피싱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겁니까?”

[나도 모르겠네. 썬과 다미 씨가 늘 그렇게 하더군··· 대충 이런 다음에 영상통화로 바꾸던데.]

입맛을 다신 다음, 브라이언은 영상통화로 전환했다. 로저스의 주름진 얼굴이 스마트폰 화면을 메웠다.

그 뒤로는 푸른 하늘이 보였고, 아래는 아무래도 축구장인 것 같았다. 그런데도 관중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 아마 유소년 대회일 것이다.

“경치 좋네요.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내가 치매에 걸린 게 아니라면, 전화는 자네가 한 것 같은데?]

브라이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제 곧 데뷔전이었지?]

“그렇죠.”

[뒤에 배경으로 보아하니 자네는 사무실일 테고?]

“네, 감독님은 축구장 구경 중이시고요.”

[그럼 바꿀 텐가?]

“솔깃하네요. 리미트리스 부사장은 엄청 미인이던데요. 게다가 여기선 썬이 저를 엄청 갈아넣는단 말이죠.”

[솔직히 추천은 안 해. 다미 씨는 썬에게 일을 배웠거든. 그리고 지금은 썬 대신 리미트리스를 지키는 중이고.]

“이해했습니다. 사람 험하게 쓰는 건 똑같을 텐데, 추가로 ‘나는 했는데 너는 왜 못 하니?’ 같은 이야기가 나올 확률이 높겠군요.”

브라이언은 잠시 몸을 떨었다. 가뜩이나 요즘 들어 ‘Sunderland ’til I die’라는 응원가가 조금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죽을 때까지 놓아 주지 않을 것만 같아서.

“선덜랜드가 좋네요. 적어도 감독님은, 내가 한 걸 너는 왜 못 하냐고 윽박지르는 분은 아니시니까요.”

그러자 화면 너머에서 로저스 감독이 껄껄 웃었다.

[경험상 내가 했던 일을 자네가 정말로 못 할 가능성은 거의 없거든. 자네는 나보다 훨씬 나은 감독이 될 거야.]

“말씀 감사합니다.”

[빈말 아닐세. 만일 자네가 나보다 못한 감독감이면, 썬은 내 후임으로 절대 자네를 뽑지 않았을 테니까.]

“······.”

[다만, 사무실은 슬슬 옮기는 게 어떤가?]

뜻밖의 이야기에 브라이언은 눈을 깜빡거렸다. 브라이언의 사무실은 코치 시절부터 그가 줄곧 쓰던 방이었는데, 비록 감독용으로 지은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격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선덜랜드는 원래 비품에 돈을 아끼는 팀이 아니고, 브라이언은 일찍부터 차기 감독으로 내정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덕분에 지금 브라이언은 여느 팀 감독 사무실 못지않은 방을 사용한다.

하지만, 로저스 감독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늙은이가 쓰던 방이 싫은 게 아니라면 당장 옮기게. 선덜랜드의 감독들이 내가 쓰던 방을 가장 선호한 이유가 있거든.]

“위치가 좋아서인가요? 선수나 코치들이 언제나 찾아올 수 있도록.”

[그렇기는 한데, 가장 방음이 좋아서 그래. 구조상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고.]

“······.”

[이제부터 울고 싶은 날도, 화내고 싶은 날도 많을 거야. 패배의 아픔을 곱씹을 날도 많겠지. 세상에 그 어떤 감독도 무패는 아니잖나? 혹은 상대의 강력함에, 두려워 떠는 순간도 있을 테지.]

로저스는 그렇게만 말했지만, 브라이언의 귀에는 스승이 하지 못한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처럼.’

“··· 전화는 드려도 괜찮습니까.”

[물론. 아니면··· 바도 괜찮지. 블랙캣츠의 스태프는 프로니까.]

그 밖의 장소에선 절대로 티 내지 말라는 의미에, 브라이언은 표정을 고쳤다.

“명심하겠습니다.”

* * *

샐리가 차갑게 웃었다.

“안첼로티의 후임이 하필 베니테스라니, 에버튼도 참 재미있는 짓을 하는데요?”

“음?”

“베니테스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순간은 이스탄불의 기적이었잖아요? 그 경기의 패배자는 안첼로티였고요.”

이스탄불의 기적.

밀란 팬들에게는 이스탄불의 비극으로 불릴 경기로, 전반을 세 골 차로 뒤진 리버풀이, 5분 만에 세 골을 몰아넣으며 게임을 원점으로 돌린 것으로 유명하다.

경기의 흐름만으로도 충분히 드라마틱했지만, 무대가 챔스 결승전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심지어 당시의 밀란은, 리버풀보다 훨씬 우세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팀이었다.

“모양새가 그렇잖아요. 베니테스가 안첼로티를 밀어내는 그런 모양새요.”

“정작 안첼로티는 좋은 데 갔잖아. 레알.”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 브라이언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샐리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느껴졌겠지만, 브라이언의 소감은 달랐다.

그저, 베니테스는 토너먼트의 절대강자라는 안첼로티를 상대로 결승전에서 세 골 차이의 승부를 뒤집어버릴 정도의 감독임을 확인했을 뿐이다.

루벤이 열없이 거들었다.

“베니테스는 전에 ‘그 팀’도 맡았었죠? 이거, 개막전 지면 난리 나겠는데요?”

“그렇잖아도 CS팀에서 이야기하더라? 뉴캐슬어폰타인에서 단체로 몰려오려던 것 같다고.”

뉴캐슬과 선덜랜드 사이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상대가 삽질할 때, 단체로 관람 와서 조롱하는 식으로.

물론 이번엔 미수로 그친 시도였다. 선덜랜드 개막전 티켓은, 정말로 구하기 쉽지 않은 물건이기에.

* * *

[프리미어리그 1라운드, 선덜랜드 대 에버튼]

소녀 팬 앨리스는, 휘파람을 불며 티켓을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새로운 시즌을 알리는 경기, 개막전 티켓이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 구입했는지 스스로 알기 때문이었다.

시즌권은 올해도 사지 못했다. 벌써 몇 년째 예약이 한참 밀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손해 보는 기분은 아니었다.

선덜랜드는, 십 대 팬들에게 입장료 할인을 해주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티켓값이 싼 선덜랜드는, 십 대 팬들 대상으로는 정가의 반값 이하의 파격적 세일을 실시하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앨리스조차 한 번 물어봤을 정도다.

“대체 이렇게 팔면 뭐가 남기는 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던 CS 직원의 목소리를, 앨리스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팬이 남습니다.]

축구의 신, LM 7의 마킹이 들어간 한정 유니폼을 집 액자에 넣어둔 채, 앨리스는 천천히 응원용 레플리카를 몸에 걸쳤다.

등번호 대신 하트를 넣고, 자신의 이름을 마킹으로 넣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갈 때마다 입는 그녀의 전투복이다.

“싸우러 가야지.”

물, 그리고 목캔디를 꼼꼼하게 가방에 챙겼다. 그래도 경기 끝난 직후엔 말 한마디 쉽게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앨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목이 쉴 때까지 외칠 거니까.

I know I am. I’m sure I am.

혼자여도 외롭지는 않았다.

그녀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수많은 맥켐즈가, 블랙캣츠가 경기장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Sunderland ’til I die.

* * *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그라운드를 내려다보자, 흥분과 기대, 긴장이 섞인 기묘한 고조 상태가 되었다. 개막전 특유의 감정에, 올 시즌엔 한 가지 이유가 더해졌다.

브라이언의 데뷔 경기이기 때문이다.

경험은 충분히 쌓았다. 그리고 이번 프리시즌에는 실력도 입증해 보였다. 그래도 첫 공식전은 조금 느낌이 다르긴 하다.

그가, 첫 데뷔전부터 잘할 수 있을까?

옆에선 희주가 낮게 투덜거렸다.

“에버튼 진짜 돈도 많다. 감독도 턱턱 바꾸고. 그것도 챔스 우승 감독으로만 돌려 데려오네?”

“감독을 턱턱 바꾼다는 논리는 우리도 똑같이 적용될 텐데.”

“우리는 괜찮지. 우린 실제로 돈 많은 팀이잖아? 게다가··· 우리는 나름대로 절약하고 있고. 감독도 키우고, 선수도 대부분 키워서 쓰니까. 그리고 여유자금은 팬들에게 재투자되는 중이고.”

희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번에 오빠가 시작한 틴에이저 할인 프로젝트처럼.”

틴에이저 할인은 두 가지 이유에서 계획한 프로젝트였다.

우선, 세계적으로 축구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현상 때문이었다. 아마 즐길거리가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비디오 게임과 이스포츠의 존재는, 축구에게서 착실히 십 대 팬들을 빼앗아 갔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선덜랜드를 보고 자란 청소년들이, 다른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축구를 보게 할 수 있다면, 정말로 죽을 때까지 선덜랜드를 외칠 팬들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이.

물론, 스포츠 구단의 모든 마케팅 중 가장 좋은 기법은··· 성적이지만.

그리고 올 시즌, 우리 팀의 성적은 이제 브라이언의 손에 달렸다. 그래서일까? 경기장에 들어오는 브라이언에게, 그리고 베니테스에게 자꾸만 시선이 간다.

언론에서 말하는 ‘새 감독 더비’ 떡밥 말고도, 사실 브라이언과 베니테스는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선수단 관리 능력보다는 전술로 유명하고, 둘 다 실점이 적은 축구를 한다. 가장 재미있는 포인트는, 둘 다 수비 축구를 선호하는 타입은 아니라는 점이다.

성격적으로도 닮은 구석이 있다. 둘 다 세상에서는 흔히 괴짜, 축구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불릴 타입의 인물이기에.

브라이언은 말할 것도 없지만, 베니테스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에 베니테스는, 자기 딸이 다니는 학교의 아이들을 코칭해준 적이 있다.

여기까지 들으면 흔한 재능기부나 훈훈한 미담처럼 들리겠지만, 이 이야기에서 가장 재밌는 점은 베니테스의 지도를 받은 아이들이 아마추어 축구 대회에서 무쌍을 찍으며 우승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상대는 프로 감독이 애들 상대로 끼어든다며 항의했지만, 베니테스는 쿨하게 반응했다. 자기는 그냥 학부모라고.

뭐, 당시엔 무직이긴 했지만.

“되게 잘 아네?”

설명을 들은 희주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혹시··· 그때 패배한 상대팀 선수가 오빠나 브라이언 씨 아니야?”

“나이가 안 맞잖아. 베니테스 딸은 기껏해야 리지 또래라고.”

“흐음.”

“그리고 당시의 우리는 클럽 유스팀 소속이라, 저런 아마추어 대회에 선수로 나갈 수 없었어.”

“흐음···.”

내 논리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희주가 자꾸만 수상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귀신같은 녀석.

사실, 희주가 눈치챈 것처럼 이 이야기에는 다른 백그라운드가 있긴 하다.

* * *

후배들을 지도하겠다는 이야기를 브라이언이 처음 꺼냈을 때,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옆에서 헨도는 쓴웃음을 지은 채 검지로 관자놀이 옆을 휘저었다.

“야, 그게 되겠냐?”

“유스 선수가 뛰면 큰일 나겠지만, 애들 코칭하는 건 문제 없지.”

“너 코치 라이센스도 없잖아.”

“코치 라이센스 있으면 큰일 나게? 나는 그냥 졸업생 신분으로 애들 도와주는 거라고.”

정식 코칭 교육을 받기 전이었지만, 브라이언은 원래 어릴 때부터 남다른 전술 센스를 가진 소년이었다. 그에 더해 현역 유소년 선수답게, 자신이 받은 훈련 프로그램을 응용해서 아이들을 훈련시켰다.

덕분에 선덜랜드 프라이머리 스쿨은 대회에서 무쌍을 찍었다··· 머지사이드의 어떤 학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날, 브라이언이 준비했던 전술은 완벽하게 읽혔고, 경기의 흐름마저 넘어갔다. 상대의 손바닥 위에서 농락당했던 그날.

상대팀 벤치에는 불과 몇 년 전 챔스를 들어 올린 명장, 베니테스가 앉아 있었다.

프로 감독이 이래도 되느냐는 항의에, 그는 브라이언 쪽을 한번 흘끗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었다.

“나는 그냥 학부모인데.”

* * *

“오랜만입니다.”

경기를 앞두고 브라이언은 일부러 그렇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다는 말 대신, 굳이 오랜만이라는 표현을 쓴 새내기 감독을, 이제 노장의 반열에 접어들기 시작한 베니테스가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베니테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 혹시 그때 그 졸업생?”

“기억하고 계셨군요.”

“솔직히 얼굴은 기억 못 했지만, 경기는 기억하고 있었거든. 아마추어인데도 재미있는 축구를 하는 팀이라고··· 딱 봐도 소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감독이 되었군.”

베니테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바라보며, 브라이언이 마주 웃었다.

“그때 말씀하셨죠. 본인은 그냥 학부모라고요.”

“애들도 다 키워서··· 지금은 학부모가 아니야. 프로 감독이지.”

“다행이군요. 저도 그렇거든요.”

짧은 악수를 주고받은 다음 브라이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미소라고는 아주 작은 조각조차 남지 않았다.

‘나는 이제 프로 감독이야. 그리고, 당신을 쓰러뜨리는 게 오늘의 내 업무고.’

처음으로 ‘전술’이라는 게 뭔지 알려줬던 상대를 다시 만난 브라이언은 더 이상 무력한 아마추어가 아닌, 선덜랜드의 지휘관이었다.

사람의 모습은 언제나 그렇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바뀌어 있는.

휘슬이 울렸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언제나처럼 쏟아지는 뜨거운 함성 속에서, 마침내 브라이언이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섰다.

감독으로서의 첫 번째 공식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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