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45화 (245/422)

245화 돌아보면, 바뀌어 있는 (3)

축구의 신은 조용히 자신의 왼팔을 쓰다듬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장 완장이 매달려 있던 자리를.

그러자 손끝에서 조금 낯선 홀가분함이 전해졌다. 동시에, 이제 자신이 팀의 주장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낯설었다.

‘참···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까.’

이제 에이스 넘버를 내려놓았다. 주장 완장도 풀었고, 오래 입던 블라우그라나 유니폼도 벗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팀에서, 익숙하지 않은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래도 바뀌지 않은 것들이 있다.

딱 하나뿐인 공을, 상대보다 더 많이 골대에 넣은 팀이 이긴다. 규칙이 몇 번이나 바뀌었고, 패러다임도 바뀌었지만, 축구라는 스포츠의 본질만은 바뀐 적이 없다.

그리고 축구의 신은 공을 다루는 재주와 찬스를 만드는 능력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탁월한 선수였다.

‘오늘은 공을 차는 날이지.’

스물두 명의 사내들이, 90분간, 공을 따라 달리는 그런 날. 이제 그런 날들이 다시 1년간 이어질 것이다. 새로운 시즌은 항상 그렇게 찾아오기에.

휘슬이 울렸고, 뜨거운 함성이 고막을 가득 메웠다. 캄 노우 못지않은 영국 북동부의 뜨거운 열기가 몰아쳤다.

그 한가운데에서.

아르헨티나가 낳고 바르셀로나가 키운 축구의 신이, 천천히 공에 발을 가져다 댔다.

* * *

선발 라인업을 접한 선덜랜드의 팬들은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브라더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톰슨이 빠지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어. 메시가 나오는 날은 평소보다 중원의 기동성이 더 중요해질 테니까··· 하지만 톰슨은 베니테스식 축구를 깨기에 가장 적합한 선수 아닌가?”

“하긴, 끈질긴 전방압박은, 상대를 끌어들인 다음 롱 패스로 넘겨버리는 게 축구계의 오랜 정석이지.”

핫도그 사내와 맥주집 사장의 이야기에, 브렌든이 곧바로 핀잔을 줬다.

“자네들이 떠올릴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를, 브라이언 같은 전술가가 모를 리 있어? 당연히 베니테스 본인도 알고 있을 테고.”

“하긴, 베니테스는 전방압박 상대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니까.”

실제로 베니테스가 지휘하는 에버튼 선수들은, 마치 자기들 홈인 것처럼 당당하게 전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바스티아노까지 빠진 건 의외로군. 나는 스티븐이 빠질 줄 알았는데.”

메시의 출전으로, 선덜랜드의 쓰리톱 중 누군가가 빠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주전 공격수 바스티아노일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대부분의 팬들은 쓰리톱 중 가장 존재감이 떨어지는 스티븐이 빠질 거라고 생각했고, 일부는 메시와 역할이 겹치는 마르틴의 결장을 예상했다.

바스티아노가 빠질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때, 옆자리의 소녀가 슬그머니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입었는데, 등번호 자리에는 하트를 마킹한 모습이 특이했다.

“제 생각엔 기동성을 중시한 결정 같아요. 바스티아노는 좋은 공격수지만, 빠른 선수는 아니니까요.”

“빠른 선수가 아니다?”

브렌든은 문득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선덜랜드 팬으로서는 신참이지만, 그래도 브렌든은 십 년 넘게 축구를 봐 왔었다. 그가 처음 축구를 접했을 때, 옆자리의 소녀는 기껏해야 유치원에 다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소녀의 이야기는 논리적이었고, 축구를 잘 아는 것처럼 느껴졌다.

“축구의 신 본인은 활동량이 좋은 선수가 아니죠. 그만큼 팀의 동료들이 메워 줘야 해요. 대신 그는 상대 수비에 균열을 내고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선수니까, 잘 뛰는 스티븐을 내보낸 게 아닐까요?”

“일리가 있어. 그렇지만 메시 같은 선수를 상대할 때는 텐백이 유효하잖아? 그리고 바스티아노는 텐백을 부수는 데 아주 탁월하고.”

그러자 소녀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대꾸했다.

“베니테스는 텐백을 잘 안 쓰잖아요?”

소녀의 조리 있는 대답에 브렌든은 물론, 옆에서 지켜보던 브라더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축구판이 바뀌어 가는군.”

인터넷엔 정보가 넘치고, 양질의 칼럼과 분석 영상을 찾아보기도 쉬워졌다. 덕분에 팬들의 경기 보는 눈도 점점 좋아지는 추세다.

‘이거, 나도 분발해야겠는걸.’

내심 소녀의 지식에 감탄하면서, 브렌든은 슬쩍 떠보듯 물었다.

“하지만 스티븐은 공수 전환이 빠른 트랜지션 게임에 강하지만, 지공에는 불리한 선수 아닌가? 피지컬은 좋아도 로지컬에는 약점이 있었으니까.”

“그 부분은 경기를 끝까지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여전히 피지컬만 갖춘 선수인지, 아닌지는요.”

소녀의 의연한 태도에, 브렌든은 물론 브라더스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경기를 지켜보는 게 팬들의 일이지.”

“그럼, 같이 응원하자구요!”

때마침 울려 퍼지기 시작한 함성에, 브라더스도, 소녀도 함께 입을 모았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 * *

에버튼의 수비수 홀게이트는, 묵묵히 자신의 매치업 상대를 응시했다.

이제 더 이상 10번이 아닌, 축구의 신을.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

축구의 신이 그동안 선수로서, 그리고 축구인으로서 쌓아온 모든 것에는, 홀게이트 역시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일 이곳이 경기장이 아니고, 오늘이 1라운드 경기일이 아니었다면, 그는 정중히 사인을 부탁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같이 찍은 투 샷 사진을 건진다면 보물로 간직했을 것이며, 악수한 손은 당분간 씻지 않을 것이다.

눈앞의 사내는 틀림없이 살아 있는 전설이었으니.

하지만, 지금의 메시가 대전 상대로서 무서우냐고 하면··· 조금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솔직히, 이제 무섭지는 않지. 이따금 느껴지는 위압감이나, 칼날 같은 긴장감은 아직도 건재하지만··· 활동량이 너무 적잖아?’

프리시즌 컵에선 틀림없이 마술을 보여줬고, 여전히 한순간의 폭발력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축구의 신도 이제 나이를 먹었고, 원래부터 약점이던 활동량은 더욱 줄어들었다. 거의 같은 자리를 걸어 다니는 선수를 마크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뭐, 그만큼 선덜랜드의 다른 놈들이 뛰고 있긴 하지만··· JJ 듀오는 원래 죽도록 뛰어다니는 놈들이고.’

잭과 요니의 헌신적인 움직임 덕분에, 선덜랜드는 에버튼의 전방압박에 꿋꿋하게 맞서는 중이었다.

미들 서드 부근에서의 빠른 공수전환, 서로 공을 뺏고 뺏기는 흐름 속에 어느새 공은 선덜랜드의 99번, 해리슨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홀게이트는 기다렸다는 듯 기세 좋게 외쳤다.

“라인 올려!”

축구의 신을 트랩에 빠뜨리기는 간단할 거라고 믿었다. 그는 이제 활동량이 아주 줄어들었고, 다시 말하면 늘 같은 자리에 위치하는 선수가 되었다. 따라서 오프사이드 트랩에도 잘 걸린다는 뜻이다.

실제로 축구의 신은 완벽하게 함정에 걸렸다. 홀게이트가 돌아보자, 라인 아래쪽에 홀로 남은 축구의 신과 눈이 마주쳤다.

홀게이트는 섬뜩함을 느꼈다.

‘어째서··· 눈이 마주쳤지?’

축구의 신이 골대를 등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떠올린 순간, 홀게이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공격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설령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더라도 오프사이드가 아니다. 선덜랜드에서는 요니가 전매특허처럼 그 움직임, 그리고 축구의 신이 커리어 내내 수없이 보여준 장면이기도 했다.

축구의 신이 패스를 외면하는 사이, 공은 한발 늦게 침투한 스티븐에게 전해졌다.

“이런 빌어먹을··· 막아!”

입술을 깨물며 달리는 홀게이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절망적인 풍경이었다. 뛰쳐나오는 골키퍼, 일제히 몸을 돌려 복귀하는 에버튼의 포백 라인, 그리고··· 어느새 골대를 향해 달려드는 축구의 신의 뒷모습.

골키퍼까지 제쳐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스티븐의 컷백 패스를 받아낸 축구의 신을 가로막는 수비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프린트 한 번의 시간 동안, 여전히 그는 세계 최고의 드리블러였다. 골키퍼 혼자서 막아내기는 불가능하다.

[선덜랜드 1 - 0 에버튼]

‘빌어먹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아주 악명 높은 원정 지옥이다. 이곳에서 선제골을 내주었으니, 이제 선덜랜드 홈 팬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할 것이 뻔하다.

홀게이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서 있는 자신들의 보스를 향해.

눈이 마주치자, 짧은 수신호가 돌아왔다.

[방침에 변함없음.]

* * *

득점 직후, 희주가 환호했다.

“스티븐 움직임 진짜 쩔던데? SNS 반응도 장난 아니야!”

- 맨날 트랩 걸리던 그 찐따 같은 스티븐 맞냐?

ㄴ 뇌지컬 별로라고, 차라리 바스티아노 내라던 놈들 다 어디 감? 모조리 템즈 다이빙 갔음?

ㄴ 템즈 멈춰! 스티븐은 선덜랜드 선수니까 타인 강을 애용하라구!

ㄴ 멍청아. 선덜랜드 팬이 스티븐 까겠냐?

ㄴ 그래서 ‘타인’ 강이라고 했잖아.

우리의 강은 위어 강이고, 타인 강은 뉴캐슬에 흐른다.

“비결이 뭐냐는데? 스티븐 움직임이 예전하고 다르다면서···.”

“시간이 비결이지.”

사실, 스티븐은 축구 지능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다. 특히 비교 대상이 해리슨이나 요니 같은 선수가 되면 명함도 못 내밀겠지.

그래도 스티븐이 팀에 합류한 지도 벌써 4년째를 맞았다.

그동안, 스티븐은 수시로 분석실에 끌려갔고, 샐리에게 들들 볶였다. 덕분에 이적 초반에는 입 밖으로 영혼이 빠져나올 것처럼 멍하던 스티븐도, 점차 움직임을 몸에 익혔다.

스스로 오프사이드 트랩을 역이용하지는 못하지만, 동료의 움직임에 맞출 수는 있는 선수로 성장한 것이다.

“하긴, 오빠가 사 온 선수니까 대박 터지는 게 당연한 거지.”

“네가 웬일로 내 칭찬을 다 하냐?”

“아닌데? 스티븐 칭찬한 건데?”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의심스러운 눈으로 여동생을 바라보자, 희주가 눈을 슬슬 피했다.

“아무튼, 이제 한 골 넣었으니 숨 돌렸네. 우리 팀의 필승패턴이잖아? 선제골 넣은 다음, 실리 축구 하는 거지. 감독님이 좋아하던 축구고, 브라이언 씨도 특기잖아.”

“그렇지. 하지만 오늘은 다를 거야.”

벤치에 앉은 브라이언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오늘의 우리가, 겨우 한 골로 경기 플랜을 바꾸지는 않을 거라고.

에버튼을 맡은 베니테스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역전승을 거둔 감독이고, 실제로 드라마틱하게 경기를 뒤집는 경우도 적지 않다.

플랜 B에 능한 변화무쌍한 감독은 아니지만, 남다른 저력을 가진 감독이라는 뜻이다.

“어설프게 지키려 들면, 그 순간 곧바로 잡아먹힌다는 걸 브라이언은 아마 알고 있을 거야.”

이후 내 예상대로 브라이언은 라인을 내리지 않았다. 에버튼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경기는 치열한 난타전으로 흘렀다.

추가 득점은 서로 없었지만, 날카로운 슛을 주고받았고, 서로 쉼 없이 공을 뺏고 뺏기는 흐름이 후반까지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양 팀 감독 사이에서는 끊임없는 지략 싸움이 벌어졌다.

우리가 메시를 빼자마자 에버튼은 곧바로 수비를 한 명 줄이며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자 브라이언은 오히려 공격수를 교체 투입하며 위협을 가했다.

결과는, 양 팀의 슈팅 수가 서른 개를 넘어갈 정도의 치열한 공방이었다.

그 와중에도 스코어보드는 90분간 움직이지 않았다.

[선덜랜드 1 - 0 에버튼]

* * *

휘슬이 울린 순간 브라이언은 성큼성큼 에버튼 벤치를 향해 걸었고, 베니테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베니테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그냥 프로 감독이라고 했었나?”

“네.”

“그 표현은 잘못된 것 같군. 자네는 아주 스페셜해. 내가 만난 감독 중 손꼽힐 정도로.”

스페셜 원은 원래 다른 감독의 별명이지만, 그 별명의 주인과 베니테스는 사이가 썩 좋지 않기로 유명하다.

브라이언은 그저 담담하게 반응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겸양의 말도, 위로도 입에 담지 않았다. 스승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울고 싶은 날도, 화내고 싶은 날도 많을 거야. 패배의 아픔을 곱씹을 날도 많겠지. 세상에 그 어떤 감독도 무패는 아니잖나?]

베니테스 역시 위로를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브라이언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린 다음 몸을 돌렸다.

돌아서는 뒷모습은 무척이나 꼿꼿했다.

베니테스는, 브라이언이 태어나기 전부터 코치로 일했던 사람으로, 지금까지 치른 경기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긴 경력에는, 수많은 패배 또한 붙어 있었을 것이다.

분하지 않을 리는 없었으리라. 나이로 보면 자식뻘이고, 경력으로 따지면 데뷔전을 치르는 상대에게 패배한 것이니.

‘울고 싶거나, 화내고 싶겠지. 돌아가면 혼자 패배의 아픔을 곱씹을 거야. 하지만 그라운드 위에서는 드러내지 않겠지.’

자신이 이끄는 선수들 앞에서, 혹은 언젠가 다시 적으로 만날 상대 감독이 보는 자리에서는 절대로··· 그의 스승 또한 똑같이 행동했었기에, 브라이언은 확신할 수 있었다.

베니테스의 저 꼿꼿한 뒷모습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래도 이제 두렵지는 않았다. 외롭지도 않았다.

Over and over, We will follow you.

언제나 팀을 지지하는 서포터가 있고, 스태프가 있으며, 같은 꿈을 꾸는 친구가 있다는 걸 알기에.

브라이언은 잠시 고개를 들어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쏟아지는 환호와 갈채, 넘실거리는 붉은 유니폼의 물결에 가려, 익스클루시브 박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았다.

‘이제 첫 승이야, 브로.’

가벼운 미소와 함께, 브라이언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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