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다시 뛸 수 있을 때까지 (1)
<지저분한 경기나 부당한 골을 얻어 이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패배를 택할 것이다 - 텔레 산타나>
“어··· 그러니까···.”
데뷔전을 치른 브라이언의 인터뷰를 요약하면, 대략 저런 느낌의 이야기가 된다.
정말이지 참담한 인터뷰에 기자들은 하나같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머리를 감쌌으며, 옆에서 희주는 ‘어’가 몇 번 들어갔는지, ‘그러니까’는 몇 번인지 세기 시작했다.
신나게 손가락을 꼽는 희주를 노려보자, 뻔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오빠 잘못이잖아. 브라이언 씨 인터뷰 엉망인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대책을 세웠어야지!”
“이보다 더 좋은 대책은, 쟤 인터뷰 안 시키는 수밖에 없어.”
뒤통수를 망치로 내려치는 거지. 공식적으로는, 선덜랜드 감독은 경기 종료 후 탈진하여 입원했습니다··· 같은 식으로.
사실 대책은 이미 세웠다. 우리 프레스팀이 전부 달라붙어서 인터뷰의 예상 질문과 답변을 꼼꼼하게 미리 정리했으니까. 실제로 브라이언의 손에는 컨닝페이퍼가 달라붙어 있다.
아니, 정확히는 컨닝페이퍼였던 것이라고 표현해야겠지. 긴장으로 땀에 젖은 손에 종이가 반쯤 젖었고, 힘이 들어가서 구깃구깃해졌거든.
지켜보던 애니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엔 코팅 용지를 준비해줘야 하는 걸까.”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무선 이어폰! 그다음은 오빠가 적절한 대답을 불러 주는 거죠··· 어때?”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딨냐고 반문하려던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우리 1군 경기를 항상 직관하고, 선수단과 같이 움직인다. 브라이언이 인터뷰할 때 나 또한 근처 현장에 있으니, 희주의 의견은 일단 물리적으로는 실현 가능하다.
절대 안 할 거지만.
이어폰 끼고 인터뷰하는 감독과, 모범 답안을 불러주는 구단주라니··· 무슨 시트콤 찍냐?
애니가 웃었다.
“하긴, 썬은 예전부터 인터뷰 스킬이 대단했으니까··· 그래도 남이 대신할 거면, 프레스팀이 해야겠지.”
“다음부터는 회견장 테이블에 태블릿을 올려두는 걸 검토하죠. 프레스팀에서 답변을 화면에 띄워 줄 수 있도록.”
“그런데 썬, 회견장 테이블에 스폰서 물건 아닌 거 놔둘 수 있어?”
애니의 의문에,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테이블 상판을 화면 형태로 바꿔도 되고, 아니면 태블릿 회사를 하나 사도 그만이긴 하죠.”
“···브라이언 감독의 인터뷰 스킬을 훈련시키는 게 제일 싸게 먹히겠네. 노력할게."
한편, 베니테스의 인터뷰는 깔끔했다. 브라이언의 참혹한 인터뷰와 대조적일 정도로.
[내 생각을 완전히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경기 중의 변화에 모조리 대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늘의 패배는 전적으로 감독 차이였다.]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른 브라이언에 대한 축하에 더해, 자기 선수단을 보호하는 것을 잊지 않은 베테랑 감독이 유머러스하게 덧붙였다.
[선덜랜드의 새 감독은, 인터뷰 스킬 이외의 모든 면에서 스페셜한 존재다.]
이어진 축구의 신의 인터뷰 또한 브라이언에게 힘을 실었다.
[솔직히 말하면, 회견장에서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훈련장의 브라이언은 정말로 완벽한 감독이었기에.]
[밖에선 저런 모습만 보이겠지만, 내가 겪어본 우리 감독은 적어도 기자회견장에서 보이는 모습보다는 훨씬 훌륭한 사람이다.]
- 실드 쩌네. 초짜 감독이라 상대하기 편해서 그런가?
ㄴ ㄴㄴ. 축구의 신은 감독 휘두르는 타입 아님.
- 애초에 축구 역사상 손꼽힐 선수 상대로, 감독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지시 하면 씨알도 안 먹히지 않을까?
ㄴ 아무튼 순순히 따른다는 건, 적어도 전술적으로는 딱히 틀린 지시가 아니라는 거잖음.
- 근데 솔직히 메시 데리고 있는 팀은, 공격 전술은 발로 짜도 되지 않냐?
ㄴ 다음 경기 보면 알겠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음 경기에서도 브라이언의 인터뷰 스킬은 별로 낫지 않았다.
원정 경기라 태블릿을 설치하지도 못했고, 궁여지책으로 준비한 무선 이어폰은 아무래도 너무 티 나서 기각당했다.
[예상 밖의 로테이션을 돌리셨던데, 이유가 있나요?]
“어, 그러니까··· 선수 보호의 철학은 선덜랜드··· 가 아니고, 반대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저희가 선수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고··· 그러니까···.”
애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희주는 차마 못 볼 걸 봤다는 것처럼 눈을 가렸다. 그리고 샐리는 허공에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기분 탓인지 꼭 뒤통수를 망치로 때리는 동작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터뷰 외의 모든 면에서, 경기는 완벽했다.
- 선덜랜드 이 미친놈들, 공격진을 싹 다 바꿨다고?
포메이션은 4-4-2. 바스티아노와 크리그가 투톱을 섰고, 베리와 터너가 양쪽 날개로 출전했다. 그리고 중원에는 잭과 톰슨이 선발 출전했다.
- 하긴 축구의 신도 이제 노장이니 로테이션을 시켜 줘야···.
- 아무리 그래도, 이게 무슨 돌림판이냐?
ㄴ 선수 선발을 추첨으로 하는 거 아님?
ㄴ 내가 볼 땐 지금 얘들 시위하는 거임. 메시 있으면 공격 전술은 발로 짜도 된다는 소리 보고 발끈했나 봄.
ㄴ 이러다 지면 개망신 쩔겠네.
개망신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경기였다. 바스티아노는 그날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크리그도 득점을 올렸으며, 베리와 터너는 각각 어시스트를 추가하는 시원한 경기력을 뽐냈다.
결과는 4-1 대승이었고, 언론에서도 호평을 쏟아냈다.
[코앞으로 다가온 슈퍼컵 일정을 대비하기 위해, 선덜랜드는 주전 공격진에게 휴식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 패배했으면 조롱거리가 되었겠지만, 선덜랜드는 훌륭하게 승리를 따냈다. 빅클럽다운 면모다.]
- 선덜랜드가 무슨 빅클럽임? 세상에 리그 우승 없는 빅클럽이 어딨다고.
리그 우승을 들먹이는 SNS 반응에, 희주가 곧바로 이를 드러냈다.
“아니 왜 우리가 리그 우승이 없어!? 70년쯤 전에 우승했는데···.”
“그 소리는 안 하는 게 나을걸.”
마지막 우승이 70년 전이라는 건, 절대로 자랑이 아니거든.
봐, 바로 올라오네.
- 솔직히 프리미어리그 개편 전 우승은 치지 말자 좀.
ㄴ 갑자기 가만있던 토트넘 패지 마라.
- 역사가 쩔어야 빅클럽이지. 솔직히 선덜랜드 역사는, 맨유나 리버풀 정도는 아니잖아?
ㄴ 맨유나 리버풀급 역사만 빅클럽이라는 논리대로면, 맨시티도 첼시도 빅클럽에서 같이 빠져야 할 텐데.
ㄴ 진작에 밀린 아스널, 토트넘 팬들 오열 중.
- 팬서비스를 잘해야 빅클럽이지. 솔직히 선덜랜드 팬서비스가 좋다던데, 이해 안 감.
ㄴ 그건 그냥 외워. 솔직히 팬서비스로는 다른 팀 비비기 힘들어.
다행히 화제가 팬서비스로 돌아가자, 미담이 쏟아졌다.
경기 끝나고 팬들에게 인사하는 장면이나, 훈련 마치고 돌아가다가 멈춰서 사인해주는 우리 선수들 사진이 쏟아져서.
- 오죽하면 선덜랜드 주장 사인보드는 엄청 싸잖아. 5파운드도 안 할걸?
잭이 들으면 시무룩해지겠지만, 사인보드가 싸게 거래된다는 건 일종의 훈장이다. 그만큼 많이 사인해줬다는 뜻이니까.
- 사회공헌을 잘해야 빅클럽이지.
거, 빅클럽 되기 더럽게 힘드네.
내가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사이, 우리 팬들이 선덜랜드 심시티 현장을 뿌려대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로열 병원을 방문하는 우리 선수들 사진을 올렸다.
- 축구 팀이면 지역 병원 방문은 당연히 하는 건데, 선덜랜드는 찐임.
ㄴ ㅇㅇ. 팀 팬이 뺑소니 당하니까 구단주가 치료비 전액 부담하고 범인까지 잡았잖음.
ㄴ 아, 그거 기억남. 범인은 어떻게 됨?
ㄴ 집이 돈 좀 있었나 봄. 그래서 빽 쓰면서 버티려다가··· 선덜랜드 구단주한테 참교육당했다던데?
- 다행이네. 사고 난 애는 어떰?
* * *
선덜랜드 로열 병원, 입원실.
“뭐 해?”
짐의 질문에, 클라라는 명랑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SNS 하는데? 선덜랜드 유스팀 주장이 매일 문병 온다고 적으려던 참이야.”
실제로 클라라는 이미 SNS 메시지를 올린 상태였고, 내용은 짐에게 밝힌 것과는 조금 달랐다.
[요즘 회복 중! 곧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응원 고마워요!]
물론 클라라의 스마트폰을 훔쳐볼 수 없었던 짐은 그저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만 했다.
그런 짐을 바라보던 클라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언더셔츠에 메시지 썼다며? 보고 싶어.”
“안 썼어.”
“다 들었는데?”
“다 듣긴 뭘 들어. 진짜야. 어차피 나는 언더셔츠를 남한테 보여줄 일도 없잖아?
“어째서?”
클라라의 집요한 추궁이 이어졌지만, 짐에게는 확고한 명분이 있었다.
“나는 골키퍼고, 골 세레머니를 할 일이 없거든.”
득점한 선수가 카드 한 장 먹고 유니폼을 벗어 던지는 것은 용인되지만, 득점하지도 못한 선수가 유니폼 상의를 벗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는 이유를 내세우자, 클라라는 일단 납득한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병실을 빠져나온 짐이 이를 갈았다.
“테오 이 자식.”
사실, 클라라의 쾌유를 비는 메시지를 언더셔츠에 적긴 했다.
[다시 뛸 수 있을 때까지]
하지만 그건 클린시트에 대한 결의이지, 득점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딱히 세레머니할 생각도 없었다.
훈련 때 공격수로 뛴 적은 있다. 페널티 킥을 차는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키커의 심리를 이해해, 더 잘 대응하려는 의도였지만, 반쯤은 승부차기에 대비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래도 짐은, 자신의 본업을 골키퍼라고 믿었다. 득점을 올리는 게 아니라 실점을 막는 자리,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게 아니라 패배를 막는 역할이라고.
하지만, 유니폼 상의를 벗을 기회는 짐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선덜랜드 U 2 - 0 웨스트햄 U]
이미 선덜랜드 유스가 두 골 차로 앞서 있던 경기였다. 짐은 그날도 몇 번의 선방을 선보이며 팀의 위기를 막았고, 어린 에이스 테오는 웨스트햄 유스 수비를 초토화했다.
그렇게 경기 종료를 딱 5분 남긴 순간.
또다시 웨스트햄 진영에 파고들던 테오가, 수비의 태클에 걸려 데굴데굴 굴렀다. 휘슬이 울렸고, 주심이 곧바로 페널티 스팟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니에요! 닿지 않았어요!”
웨스트햄 유소년 선수들이 항의했지만, 심판은 단호했다. 원래 유소년 경기는 프로에 비해 항의에 좀 더 엄격한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심판의 권위를 존중하도록 교육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집요한 항의에도, 페널티 킥은 번복되지 않았다. 그러자 테오가 곧바로 손을 흔들며 외쳤다.
“주장! 주장이 차!”
골대를 떠나 페널티 스팟으로 향하며, 짐은 테오의 얼굴을 살폈다. 심하게 구른 것치고는 너무 멀쩡해 보이고, 표정도 밝다.
‘아무리 봐도 아파 보이지 않는데.’
프로 선수들은 통증을 참으며 뛰는 경우가 많지만, 유소년 선수에게서 그런 인내심은 보기 드물다.
다이빙을 확신한 짐이 테오를 노려보자, 테오는 오히려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클라라한테 보여줘야 하잖아? 그 언더셔츠. 이게 다 주장을 위해서 한 거야.”
짐은 대답하지 않은 채 페널티 스팟에 섰다. 그리고 짧은 심호흡 후, 공을 힘차게 걷어찼다.
크로스바를 한참 넘긴 공이, 관중도 몇 없는 스탠드에 떨어졌다. 고의적인 실축이었다.
상황을 눈치챈 상대팀 관계자들이 박수를 보내는 사이, 짐은 테오를 바라보며 굳은 얼굴로 속삭였다.
“마음은 고마운데, 그래도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어째서?”
속임수로 따낸 페널티 킥을 넣고 클라라에게 세레머니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가장 컸지만, 그건 사춘기 소년의 입으로는 도저히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짐은 조금 다른 이유를 꺼냈다.
“우리 1군은 다이빙하지 않잖아.”
축구의 신은 다이빙과는 거리가 멀기로 유명하고, 마르틴도 시뮬레이션 액션은 하지 않는다. 잭이나 요니는 아예 말할 것도 없다.
다이빙도 경기의 일부라는 반응을 보이는 선수는 기껏해야 에디 정도인데, 정작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센터백이라 애초에 다이빙할 기회조차 없다.
의연한 짐의 표정에, 테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짐은 죽도록 골마우스를 향해 달렸다. 페널티 킥을 실축한 골키퍼의 숙명이다. 물론 웨스트햄 유소년 역시 그가 골마우스에 복귀하기를 기다려 주는 스포츠맨십을 발휘했다.
그런 짐을 향해, 경기에 참여한 선덜랜드 관계자들이 따스한 시선을 보냈다. 육성단장 페르난데스나 감독 벤자민은 물론, 잔디 관리인 리지까지 무척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작 짐 본인은, 이번 일로 사소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다 들었어! 시뮬레이션으로 따낸 페널티 킥을 넣고 세레머니하고 싶지는 않았다면서? 멋있더라.]
“테오 이 자식이 진짜···.”
선덜랜드 유소년 팀 주장은, 클라라가 가진 정보원의 정체를 끝까지 눈치채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