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다시 뛸 수 있을 때까지 (4)
브렌든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본인 스스로도 원인은 확신하기 어려웠다. 숙취 때문이 아니면 오늘의 경기 때문일 텐데, 대개 이런 경우는 두 가지 이유가 복잡하게 섞여 있기 마련이다. 마치 보험사에서 주장하는 교통사고 과실율처럼.
“왜 하필 브라이튼인데.”
브라이튼을 가리켜, 도깨비팀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의 순위는 틀림없이 하위권이지만, 그래도 강등권보다는 확실히 위쪽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상대인 셈인데, 가끔씩 빅 6을 종종 잡아낸 실적까지 있다 보니 꼭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하물며 오늘의 선덜랜드는 슈퍼컵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상태가 아닌가?
“왜 이런 팀을 이제 만나는 건데?”
차라리 강팀이 상대였다면, 선덜랜드는 대놓고 골대 앞에 버스를 세웠을 것이다. 순위권 경쟁자와의 무승부는 결코 나쁜 결과가 아니기에.
하지만 상대는 브라이튼이고, 경기장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였다. 라인을 내리고 무승부를 노리는 선택은 불가능하다.
“감독도 마음에 들지 않고.”
브라이튼의 감독, 그레이엄은 유능하다는 평가가 많은 감독으로, 선덜랜드의 새 감독 브라이언과 유사한 커리어를 가졌다.
선수로서는 별 볼 일 없었지만, 은퇴 후 빠르게 지도자 테크를 밟으며 능력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양 팀 감독의 커리어에는 비슷한 점이 엿보였다.
“저런 타입의 감독이 의외로 무섭거든.”
아무리 봐도, 지금의 선덜랜드가 만나기엔 여러모로 부적절한 상대인 셈이었다.
“이런 날은 침대에서 잠이나 자는 게 제일 좋지. 마침 몸도 안 좋으니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응원용 유니폼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늘 입고 가려고 미리 손질까지 마쳤던 유니폼이.
그 아래 걸린 응원용 머플러가, 정확히는 머플러의 문구, 죽어도 선덜랜드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래, 내가 간다. 가. 경기장 앞에서 쓰러지면 될 거 아니야.”
쉽지는 않았다. 술기운이 남아 있었기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 두 번 굴렀고, 벽에 걸린 옷을 내릴 때 한 번 넘어졌다.
이후에도 고난은 이어졌다. 바지 한 쪽에 다리 두 개를 넣거나, 응원용 유니폼을 거꾸로 입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브렌든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을 나설 수 있었다.
* * *
[프리미어리그 3라운드, 선덜랜드 대 브라이튼]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리 팬들은, 슈퍼컵 준우승에도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는 것.
보통 우승에 실패하거나, 주요 경기에서 패배하면 일시적으로 관중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팬들 입장에서는 축구를 보기 싫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팬들은 달랐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당연하다는 듯 칠만 석 모두 매진되었고···.
“에이미 씨의 보고! 풋볼 스퀘어 폭발 직전이래.”
“제휴 펍은?”
“진작에 수용 불가 상태라는데?”
희주가 자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가슴을 폈고, 나 또한 부드럽게 웃으며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관중석 곳곳에 걸린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끝까지 뛰는 게 선수의 의무. 끝까지 믿는 건 서포터의 사명!]
[죽을 때까지 선덜랜드인데, 슈퍼컵 한 경기로 돌아설 리 있겠어?]
잠시 후, 스크린이 관중석 곳곳을 비췄다. 아기를 데려온 부부. 유니폼을 입은 소년, 소녀들. 그 옆에는 언제나처럼 팀을 응원해 온, 영국 북동부의 거친 사내들이 보인다.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부터 입을 모아 노래하고, 호흡을 맞춰 박수 치며, 일제히 허공을 가리키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정말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 칠만 명 관중 앞에, 마침내 우리 선수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구성으로.
최전방에는 터너가 섰고, 양쪽 날개는 베리와 스티븐이 출전했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2선 플레이메이커 자리에는, 당연하게도 축구의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4-2-3-1.
올 시즌 들어 처음 꺼내는 포메이션에 관중석이 살짝 소란스러워졌다.
“아무래도 다들 놀란 모양이네?”
“그렇겠지. 나도 처음엔 놀랐거든.”
슈퍼컵 결승 직후 가진 술자리에서 샐리가 떠든 적이 있다. 이제, 우리 공격진은 대략 70가지 방법으로 조합할 수 있다고···.
당시에는 ‘아일랜드인도 취하긴 취하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부터 브라이언과 샐리는 굉장히 진지하게 돌림판을 준비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오늘의 라인업이다.
* * *
- 메디컬 팀이 어쩌고 떠들어도, 역시 원정 피로는 못 이기죠?
- 근데 이건 아무리 봐도 게임 던지는 거 아니냐? 바스티아노는 빼버리고, 메시는 아예 2선에 세운다고?
- 돌림판도 정도가 있지. 이러다 브라이튼에게 발목 잡히면 재밌을 거야. 실력 다 뽀록나겠지.
SNS의 반응과 관중석의 열기를 번갈아 확인하며, 선덜랜드의 소녀 팬 앨리스는 생각했다.
‘내가 보기엔 전술적 묘수 같은데?’
베리는 측면에서 뛸 수 있지만, 본업은 스트라이커다. 그리고 터너와의 호흡도 나쁘지 않다. 스티븐 또한 올 시즌 좋은 폼을 보여주고 있으니, 세 명 모두 골을 노릴 수 있는 선수들인 셈이다.
그 세 명의 골잡이를 조율하는 플레이메이커 자리에 축구의 신을 세웠으니, 적어도 공격력이라는 측면에서는 흠잡을 데 없다.
[유일한 결점은 미드필더 인원이 줄면서 중원 장악력이 약화된 거지만, 피터 톰슨이 단단하게 메워 줄 거라고 생각해. @이상한_나라의_블랙캣츠]
호응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실드가 지나치다는 평가였다.
물론 앨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녀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굳이 반박글도 달지 않았다.
‘니들이 허접한지, 내가 허접한지는 결과가 말해줄 거야.’
* * *
[홈팀 선덜랜드로서는 답답한 흐름인데요. 몇 차례의 슈팅이 계속 빗나가고 있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터너··· 터너! 아, 이게 뭔가요! 또 골대를 때렸습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브렌든은 라디오 중계를 듣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머리가 더 아픈 것 같았다.
“잔돈 됐습니다.”
경기장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브렌든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대신, 축구 펍 [죽어도 맥켐즈] 를 향해 걸었다.
물론 그는 시즌권이 있었지만, 이미 경기가 시작한 지 오래 지나, 입장이 안 될 것 같았다. 마침 오늘은 브라더스의 다른 멤버들 또한 펍에 모여 있다고도 했다.
그렇게 펍에 향한 브렌든의 눈앞에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골! 브라이튼의 득점입니다! 코널리의 그림 같은 중거리가, 선덜랜드의 골마우스를 꿰뚫었습니다!]
“기어이 먹혔구나. 어째 흐름이 영 안 좋더라니.”
머리를 감싸쥐는 브렌든과 달리 브라더스는 차분했다. 핫도그 사내가 낮게 웃었고, 맥주집 사장은 침착하게 자리를 권했다.
“이봐, 자네들 너무 침착한 거 아니야? 아무리 믿고 응원하는 게 팬들의 의무라지만···.”
“그 전에 스코어부터 확인하는 게 어떤가, 브렌든.”
브렌든은 스크린 구석의 스코어를 확인했고, 눈을 비볐다.
“찬물 좀 부탁해. 술이 확 깰만한 놈으로.”
얼음물 한 컵을 머리에 쏟아부은 다음에도 점수는 바뀌지 않았다.
[선덜랜드 3 - 1 브라이튼]
“말도 안 돼! 분명히 택시에서 내릴 때까진 영 대 영이었는데!”
“그만큼 자네가 많이 취했던 거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나?”
“10분 정도 헤매긴 했는데··· 그사이 서로 네 골이 터졌다고? 이게 가능해?”
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브렌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축구사에서는 이미 몇 차례 일어난 적 있는 기록이기에.
멀리는 리버풀이 이스탄불에서 5분 동안 세 골을 몰아 넣었고, 가깝게는 축구의 신이 이끄는 바르셀로나가 후반 88분부터 세 골을 몰아 넣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경기는 보통 기적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단기간 연속 득점은 쉽지 않은 일이다.
“라디오로 들으면 답답했겠지만, 경기 내용은 나쁘지 않았어. 주도권을 완전히 쥐고 있었으니까··· 필요한 건 골 뿐이었는데··· 결국 터진 거지.”
댐이 터지기 전엔 물을 아무리 부어도 변화가 없지만, 일단 수문이 열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순식간에 흘러나오는 것처럼, 선덜랜드의 선제골 이후 경기의 흐름이 움직였다는 게 핫도그 사내의 설명이었다.
“누가 해낸 거야? 베리? 터너? 아니면···.”
“우리 조카가.”
“조카? 아, 혹시 아서 말인가?”
“걔는 아서가 아니라 크리스라니까. 자네 술 덜 깼구만.”
혀를 차는 맥주집 사장을 향해 브렌든이 항변했다.
“술이 덜깬 건 자네들이지. 그 애가 어떻게 골을 넣어!”
“이따가 리플레이 보면 알게 될 거야.”
* * *
이날 경기는, 힘들 거라는 사전 예상과는 다른 양상으로 흘렀다. 시종일관 몰아치는 선덜랜드와, 꿋꿋하게 버티는 브라이튼으로.
우리 선덜랜드의 경기력은 킥오프 직후부터 날이 서 있었고, 단 한 순간도 주도권을 내주지 않은 채 일방적인 경기를 펼쳤다.
마치 슈퍼컵 준우승의 후유증 같은 건,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고 외치는 것처럼.
유일한 아쉬움은 득점이었는데, 기본적으로는 지독한 불운 탓이었다. 잘 만든 찬스가 마지막에 살짝 빗나가거나, 혹은 상대 키퍼의 기적적 선방에 걸렸기 때문이다.
답답하던 상황이 바뀐 건 경기 후반 70분을 넘어설 때쯤, 우리가 코너킥을 준비할 때의 일이었다.
그때, 스크린은 관중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기도하듯 손을 모은 팬들 사이에서, 숨 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경기에 몰입한 아기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세상에 아기가 이렇게 집중할 수도 있구나 놀랄 만큼.
잠시 후, 키커로 나선 축구의 신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 때문일까? 줄곧 얌전하던 아기가 거칠게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골이 터진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니어포스트에 깔리는 짧은 코너킥을, 선덜랜드의 주장이 다이빙 헤더로 마무리한 것이다.
[선덜랜드 1 - 0 브라이튼]
“우연이겠지?”
“응. 그야 당연히 우연이지.”
경기의 흐름을 미리 읽을 수 있는 게 아니고서야. 물론 세상엔 사람의 몸값이 보이는 능력자도 있으니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갓난아기가 뭘 알고 저랬을 리는 없다.
우연이겠지.
다만, 우리는 오늘 그 우연을 애타게 필요로 하던 중이었다. 운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 이외의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경기를 펼치는 중이었으니.
그 선제골 한 방이 컸다. 70분간 잘 버티던 브라이튼 수비의 집중력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우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추가골을 뽑아냈다.
스티븐의 컷백 패스를 축구의 신이 다이렉트로 문전에 보냈다. 완벽한 로빙 스루, 마무리는 베리의 발리슛이었다.
[선덜랜드 2 - 0 브라이튼]
그리고 세 번째 골 또한 그 직후에 터졌다. 멘탈이 나갔는지, 브라이튼 선수들은 킥오프를 다소 느슨하게 처리한 것이다. 잭이 곧바로 공을 빼앗았고, 요니에게 스루 패스를 보냈다.
요니에게서 축구의 신에게, 다시 스티븐에게 패스가 이어졌다. 물 흐르는 듯한 패스워크의 끝을, 이번에는 터너가 마무리 지었다.
[선덜랜드 3 - 0 브라이튼]
이후 반격으로 추격골을 내주긴 했지만, 이미 대세는 완벽하게 우리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프리미어리그에서 맞이한 세 번째 시즌. 이제 우리 스쿼드도 상당해졌다. 특히 공격진은 양과 질 모두를 갖췄다고 자부한다.
그 위에 브라이언의 전술과 샐리의 분석, 그리고 축구의 신이라는 마스터피스가 더해진 거니까···.
“유벤투스 상대로 두 골 뽑은 시점에서, 공격력은 일단 검증이 끝난 거지.”
그날, 우리는 브라이튼 상대로 시원한 대승을 거두며, 슈퍼컵 후유증에 대한 불안을 일축했다.
[선덜랜드 3 - 1 브라이튼]
그리고 이어진 4라운드, 스탬포드 브릿지 원정에서는 첼시와 한 골씩을 주고받으며 무승부를 기록했다.
리그 4라운드 무패, 아직 시즌 초반이지만, 페이스가 정말 좋다.
슈퍼컵이 끝난 직후, 언론에서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 팀이 다시 뛸 수 있게 되려면, 그래도 시간이 조금 필요할 거라고. 탈락의 아픔을 털어버리고, 팀을 추스르는 게 먼저일 거라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즌 시작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기에.
우리는 이미 뛰고 있다. 전속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