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데이터로는 알 수 없는 것 (3)

오늘의 익스클루시브 박스는 평소보다 훨씬 화사했고, 다소 답답한 경기 흐름과는 대조적인 청량감이 느껴졌다. 원인은 간단하다. 희주가 없기 때문이지.

그 자리를 대신, 영국을 방문한 다미가 메웠다.

희주에게는 몇 가지 몹쓸 습성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다미만 보면 일을 떠넘기고 탈주하는 습관이다··· 물론 나로서는 크게 불만은 없었다.

다미를 안 부를 거면 모를까, 일단 영국에 부른 이상 당연히 다미가 낫다. 하다못해 사과 하나 깎는 것도 다미가 훨씬 잘 깎으니까.

토끼, 체크, 리본··· 심지어 사과를 가지고 선덜랜드의 상징, 레드 앤 화이트 스트라이프까지 만들어 놨네.

“어··· 예쁘게 잘 깎았네.”

“연습했거든요! 희주 씨가 평소에 내놓는다던 영국식 디저트는 아무래도 섬유질이나 신선함이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요.”

나는 잠시 묵념했다. 다미의 성격을 고려하면, 이제 희주는 틀림없이 들볶일 테니까··· 아, 그래서 도주했나?

“비행기 타고 오면서 잠깐 공부했는데, 재미있더라고요. 브렌트포드는 데이터 축구를 하는 팀이라면서요?”

다미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그러고 보니 마침, 여기도 한 명 있었네. 데이터 신봉자가.

“그렇다더라.”

“흥미롭던데요. 마침 사장님도 데이터 분석을 중시하시잖아요? 리미트리스에서도, 그리고 선덜랜드에서도.”

“뭐, 그런 셈이지.”

아무래도 본업이 투자자라서, 나 또한 데이터 분석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3부 리그 시절부터 분석팀에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을 정도로.

그래도 나는, 축구에는 데이터 이외의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경기 내내 틀어막혔던 선덜랜드의 99번, 해리슨이 공을 간신히 건드렸다 싶은 순간, 답답하던 경기의 흐름이 갑자기 바뀌었다.

공은 어느새 브렌트포드 포백라인을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고, 마치 홀린 것처럼 공을 향해 달려드는 붉은 유니폼이 보였다.

등에는 18번이, 왼팔에는 주장 완장이 매달린 선수, 잭이다. 오늘은 줄곧 3선 부근에 머물다가, 지금 기습적으로 공격에 가담했다.

내가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선 것과 동시에, 다미의 새된 목소리가 울렸다.

“어!?”

뒤늦게 합류한 수비가 공을 걷어내기 위해 발을 가져다 댔지만, 잭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공과 함께 붉은 유니폼이 그대로 브렌트포드 골네트에 처박혔다.

[선덜랜드 1 - 0 브렌트포드]

잘 짜인 수비 조직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마법 같은 패스나, 축구화 스터드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머리를 들이미는 투혼은··· 아마 경기 기록에는 남지 않을 것이다.

그저 해리슨의 도움, 잭의 득점이라고만 적히고 말겠지.

브렌트포드 분석팀은 지금의 장면을, 어떤 데이터로 기록할까?

“꼭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같았어요! 축구는 헬멧도 안 쓰니까 다칠 수도 있을 텐데요. 이번에 보니까 축구화 바닥이 위험하게 생겼던데···.”

“그래서 축구화 옆에 머리를 내미는 저런 플레이를 권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팀에는 꼭 필요한 장면이었던 거네요. 관중들도 호응하는 것 같고요.”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잠시 후 경기장이 폭발할 정도로 끓어올랐다.

세상에는, 클러치 능력은 허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반쯤은 동의한다. 필요한 때를 골라서 점수를 내는 그런 편리한 능력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건 일종의 초능력일 테니.

우리 주장은 그저 응답했을 뿐이다. 골을 간절히 원하는 팬들의 목소리, 그 뜨거운 열망에.

내밀어진 스터드 같은 것은 아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그런 마음가짐은, 데이터에는 나오지 않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함성도.

“함성이 정말 대단하네요. 상대팀은 조금 기가 죽어 버릴 것만 같아요.”

“맞아. 빅클럽일수록 홈에서 강한 이유지.”

제대로 된 분석팀이라면, 홈과 원정의 승률 차이를 비교하는 정도는 당연히 했겠지만, 그래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함성이 승률 몇 퍼센트짜리에 해당하는지 계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축구 관계자라면 누구나 아는 진실이, 데이터에는 잡히지 않는다. 홈 팬들의 함성이, 그 뜨거운 목소리가 경기를 얼마나 흔드는지··· 그라운드 위에서 한 번이라도 뛰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데.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거든.”

“손을 쓸 수 없는 규칙이니까, 죠?”

“그렇지.”

전성기의 메날두조차 당연히 턴오버를 하고, 차비의 패스 역시 100% 성공하지는 않았다. 전설의 골키퍼 야신도 실점 기록이 있으며, 심지어 베켄바워가 알까기 당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동영상이 돌아다니는 마당이다.

뭐, 베켄바워의 경우 상대가 나쁘긴 했다··· 보니까 펠레더라고.

아무튼, 선수라면 누구나 그라운드 위에서 크고 작은 실수를 한다.

그때마다 울려 퍼지는 팬들의 함성과 야유가,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뛰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다.

“이해해요. 저도 모를 뻔했거든요··· 축구는, TV와는 아주 다르네요. 반할 것 같아요.”

“네가 축구 팬이 되면 곤란한데.”

레알이나 바르샤면 그래도 낫지, 혹시라도 다미가 뉴캐슬을 응원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까딱하면 여의도 리미트리스 본사가 전쟁터가 될 거다.

“걱정 마세요. 저는 이미 선덜랜드 팬이거든요. 온라인 스토어 우수 고객이고요.”

다미의 해맑은 미소에, 내 입가에도 저절로 웃음기가 돌았다.

* * *

브렌트포드 신입 분석관 토마스는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경기 전부터 그렇게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사실 골이 들어가기 얼마 전부터 잭의 움직임이 위험하다고 직감했지만, 대책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는 분석관이고, 축구 전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업무는 경기장에서 일어난 일을 수치와 통계로 바꾸는 것이었고, 전술이나 선수단 지휘는 그의 업무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선수단에게 닿지 않는다. 그는,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설 수 없는 일개 분석관이기에.

애초에 토마스는 원정팀 벤치에도 들어가지 못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겠지.’

그는 무심코 보고서를 구겨 바닥에 팽개쳤다.

‘읽어 주지 않았어. 정확한 데이터를 꼼꼼하게 만들라고 해 놓고서는.’

분석팀장의 지적에, 데이터를 다시 뽑았다. 선덜랜드의 주장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어떻게 뛰는지. 원정일 때와는 히트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팀이 골을 필요로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각각 스프린트를 얼마나 자주 시도하는지.

‘이런 게 뭐 대단하겠어. 경기를 보면, 당연히 아는 건데. 어린애들도 알잖아. 선덜랜드 주장이 클러치 플레이어라는 걸.’

그래도 데이터를 전적으로 믿는 상사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토마스 역시 데이터를 준비해야 했다. 물론 새 데이터 또한 거부당했지만.

그 결과가 지금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펼쳐진 것이다. 순간적인 침투에 대응하지 못한 채, 무방비 상태로 실점한 자신의 팀이.

‘못 해먹겠네.’

선수 출신도 아니었고, 스스로는 공 한번 차본 적 없지만, 그래도 토마스는 자신이 축구를 무척 좋아한다고 믿었다. 모처럼 통계를 전공하기도 했으니, 일목요연한 데이터 속에 축구의 가슴 떨림을 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분석팀장 밑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천천히 몸을 돌리는 그의 발을, 또다시 귀를 찢어버릴 듯한 거친 환호가 잡아 세웠다.

LM 7, 축구의 신을 연달아 외치는 목소리가.

[출전하지 않아.]

[저는 약 40% 정도로 출전 확률을 예측했습니다만···.]

사이드라인에서 몸을 푸는 선덜랜드의 7번, 메시의 모습이 대형 스크린에 클로즈업된 순간, 토마스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 * *

“숫자를 뽑아보니 재미있는 경향성이 보이긴 했어요! 선덜랜드는 지금처럼 주중에 유럽 대항전을 앞둔 경우, 나이 많은 주전 선수는 반드시 쉬게 하더라고요?”

다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사장님의··· 개인적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선덜랜드는 유럽 대항전을 앞두고 베테랑을 리그에 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팀이라는 것도 짐작하겠죠.”

“그것도 비행기 타고 오는 길에 파악했어?”

“네. 출전기록은 포털 사이트만 봐도 나오니까요. 그 정도는 그냥 보면 아는 거 아닌가요?”

보통은 엑셀 같은 걸 쓰거나, 하다못해 메모라도 하면서 정리할 일이다. 눈으로 훑어보고 판단하는 건 보통 사람에게는 꽤 어려운 일이고, 일단 나하고 브라이언은 못 한다.

혹시 샐리나 루벤은 할 수 있으려나?

“그런데··· 저쪽 팀 반응을 보니 잘못 짚은 모양이네요. 사장님의 진짜 원칙은 선수를 혹사하지 않는다는 건데. 혹사만 아니라면, 낼 수 있는 거였죠?”

“그렇지.”

황혼을 맞이한 축구의 신을, 우리는 여러모로 각별히 관리하는 중이었다.

메시는 어지간해서는 풀타임을 뛰지 않는다. 승패가 갈리고 나면 바로 빼버리는 식으로 체력을 관리해 왔다.

그리고 오늘은, 후반 70분까지 기다렸다가 기습적으로 투입했다. 챔스를 앞두고 그의 경기 감각을 유지하려는 목적이었는데, 사실 브렌트포드의 허를 찌르려는 목적도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스크린에 비친 브라이언을 보면 안다.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거든.

상대적으로 브렌트포드 벤치는 당혹해하는 중이고.

“짐작이 가네요. 투자업계도 결국 똑같으니까요. 데이터에만 너무 의지하면, 예상 밖의 일에 당황하죠. 혹시라도, 미리 준비한 시나리오나 분석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게 아니었을까, 하는.”

“그렇게 되겠지.”

다미 말처럼, 고약하게도 세상에는 모범 답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일단 하나라도 틀리기 시작하면, 준비한 다른 분석에 대해서도 확신이 사라진다.

과연, 하나만 틀렸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우리 팀의 경향성은 우리 분석팀도 당연히 뽑아볼 수 있다. 그리고 명확한 경향성은, 역이용할 수도 있다.

잠시 후, 기습 출전한 메시가 수비 세 명 사이를 꿰뚫는 로빙 패스를 넣었다. 부심의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고, 브렌트포드의 수비진도 아직 대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도 가로막는 이 없는 완벽한 위치에서, 바스티아노의 다리가, 공중에 떠오른 공을 그대로 강타했다.

[선덜랜드 2 - 0 브렌트포드]

그 득점이, 그대로 쐐기골이 되었다.

* * *

경기가 끝난 후, 샐리는 가장 늦게 벤치를 떠났다.

새 감독 브라이언은 이미 드레싱 룸에 향했지만, 그녀는 경기 종료 후의 드레싱 룸에는 따라가지 않는 편이었다. 필연적으로 반나체가 된 선수들이 드글거리는 특성 때문에.

그렇다고 바로 퇴근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그녀는 분석실로 향할 것이고, 그곳에서 오늘 경기를 복기하고, 선수들의 폼을 점검하며 다음 경기에 대비할 것이다.

이미 영상팀은 경기 비디오를 다각도로 편집하는 중이었고, 메디컬 팀은 선수들이 착용한 각종 장비로부터 컨디션을 분석하고 있다.

이제 그 날것의 데이터를, 유의미한 전술로 바꾸는 게 그녀와 루벤의 업무다.

“저,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생소한 목소리에, 샐리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스토커?”

“아뇨, 그게··· 선덜랜드의 샐리 퀸 분석팀장님이시죠?”

생각해보니 그녀는 아직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안에 있었고, 심지어 관계자 통로를 이용 중이었다. 선덜랜드 CS팀이나 시설관리팀의 업무 능력을 고려할 때, 스토커가 기웃거릴 리는 없었다.

샐리는 재빨리 표정을 고치며 미소를 지었다.

“안목이 있는 팬이시군요. 사인이 필요한가요? 마침 팬 서비스가 선덜랜드의 경영 방침이라서···.”

“저는 토마스라고 합니다. 브렌트포드의 분석관이었죠.”

“과거형?”

“네, 조금 전 사표를 냈으니까요.”

시무룩한 청년을 바라보며 샐리가 잠시 입맛을 다셨다.

“아깝네요. 꽤 재미있는 분석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수 싸움에서 완벽히 지고 시작했죠··· 그래서 여쭤보고 싶었던 겁니다. 결국은 실력 차이겠지만, 그래도··· 저하고 팀장님은 뭐가 그렇게까지 달랐던 걸까 해서요.”

샐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누군가에게는 무례하게 느껴질 청년의 질문이, 그녀에게는 퍽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결과로부터 원인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분석가다운 사고방식이기에.

“아마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이 아닐까요? 아, 노오오오력이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그냥 노력.”

“노력···.”

“선수 출신이 아닌, 우리 같은 비선출 분석관의 입을 막아버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잖아요? 마법의 주문이 있으니까요.”

잠시 후 샐리의 고운 입술 사이에서 마법의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당신이 축구를 알아? 해 본 적은 있고?”

“확실히 마법 주문이긴 한데, 그건 코칭스태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일단, 분석관은 선수들을 직접 통제하는 역할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말에 권위가 안 생기는 거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니까요.”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짓는 토마스를 향해, 샐리는 차분하게 덧붙였다.

“사이드라인 안에서 싸우는 역할은 선수의 것, 그리고 경기의 승패는 감독의 몫이죠. 그렇다면 데이터를 만지는 사람은 뭘 책임져야 하는 걸까요?”

“······.”

“앞으로도 분석관 일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한번 고민해 보세요. 어떻게 해야 나보다 훨씬 더 축구를 잘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팀장님 밑에 들어가면 배울 수 있는 겁니까?”

반짝이는 토마스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리며, 샐리가 애매하게 웃었다.

“그건 대답하기 힘들겠네요. 채용 문제는 내 소관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 분석팀 부팀장은 아직 부하직원이 생기기엔 너무 일러서···.”

“정말로 사표 쓰고 온 거 맞으면, 채용하죠.”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에서 들려온 친숙한 목소리에 샐리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구단주님, 이력서도 안 보시고요!?”

“지금 보고 있습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구단주 이희성의 손에는 구깃구깃한 레포트가 들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력서라기엔 부적절해 보이는 종이 뭉치를 발견한 토마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거 제···.”

“네, 재미있는 분석 자료더군요. 이 자료의 소유주가 토마스 씨인 것도 확인했고요.”

어떻게 확인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선덜랜드 관계자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은 기껏해야 화장실과 샤워실, 아니면 원정팀 벤치 정도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깝네요. 루벤을 더 부려먹어야 했는데··· 뭐, 구단주님은 경력 없는 사람들 깜짝 채용하시는 게 특기시니까요.”

샐리는 별 뜻 없이 말했지만, 그녀는 곧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게 되었다. 구단주 이희성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기 때문에.

“전직 브렌트포드 분석관이라면 아주 훌륭한 경력입니다··· 이력서에 SM 몇천 시간을 경력으로 적은 사람보다는 훨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