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천재를 상대하는 법 (1)
<뛰는 것은 일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다 - 파벨 네드베드>
졸지에 분석관을 주웠다.
통로에서 계약 이야기를 운운하기는 아무래도 좀 그래서, 우리는 일단 토마스를 구단 사무실로 안내했다.
중간에 우릴 안내하던 에이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줍줍의 달인···.”
안 들린다, 안 들린다.
한편 다미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뭐, 다미는 원래 내 말이라면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타입이지만.
“유능한 사람인가 보네요? 사장님이 뜬금없이 채용하는 분들은 성과가 아주 좋았거든요!”
유능한 인재긴 하지. 이마에 40이 붙은 분석관이거든.
심지어 토마스는 샐리나 루벤과 달리 축구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마추어이므로, 이 숫자는 전적으로 데이터를 다루는 능력에만 붙은 가치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브렌트포드에서는 중용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경력이 짧고 경험도 부족해서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었을 테니.
중간관리자들 눈에 들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인재라도 성장에 한계가 생긴다.
선덜랜드에서는 그런 부분도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 인사권은 항상 내가 직접 행사하고, 브라이언이나 샐리 같이 젊은 리더의 권위를 존중할 수 있는 사람만 뽑는 식으로 내부 트러블을 억제하는 식으로.
다미는 환한 미소와 함께 토마스를 환영했고, 언제 준비했는지 금방 계약서까지 내밀었다.
“안심하고 서명하셔도 괜찮아요. 독소조항은 별로 없어요.”
독소조항 같은 건 애초에 없어야 정상 아닌가?
물론 다미가 하는 일이니 법률상 하자는 없을 것이다. 아마 어지간한 로펌에 계약서 사본을 보내 검토받아도 문제없다는 답변이 돌아오겠지.
그나저나 희주가 독소조항 드립을 어디서 배워 왔는지 궁금했는데, 범인은 최다미 씨였군요.
한편 루벤은 미묘한 불만을 표시했다.
“이거, 코치 라이센스도 없는 사람을 즉흥적으로··· 구단주님 안목이야 워낙 유명하니 장래성은 있겠지만, 당장 써먹을 데가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그러자 샐리가 환한 미소와 함께 응수했다.
“너는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니지. 너는 내 수료식 날, 구단주님이 주워오신 거니까.”
“으음··· 그건 그렇군.”
아무래도 샐리는 자기 이력서 건에 대해서는 싹 묻어버리기로 한 모양이다.
토마스가 웃었다.
“분석팀이 정상적인 채용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경향성이 되려나요? 아직 표본이 적긴 하지만···.”
그런 거 분석하라고 뽑은 거 아닌데.
* * *
선덜랜드가 브렌트포드를 무너뜨리며 리그 2위로 도약한 날, 한국의 축구 유망주 최새벽 역시 경기를 관람하는 중이었다.
이번에 선덜랜드와 프로 계약을 맺기 위해 영국에 날아온 그는, 마침 모처럼의 기회를 살려 경기를 직관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장소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였는데,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최신 관중석, 나이얼 스탠드를 이용했다.
“저도 언젠가 이 함성 속에서 뛰게 되는 거군요··· 멋지네요.”
경기가 진작 끝났는데도, 승리의 함성은 그칠 줄 모른다. 언제나처럼 노랫소리가 울리는 사이, 몇몇 선수들은 아직도 경기장에 남아 팬들에게 손을 흔드는 중이었다.
“감사함다! 챔스에서도 이기고 오겠슴다!”
“컨디션은 문제없습니다. 최상입니다.”
“출전기회가 줄었지만, 교체로라도 팀에 기여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선덜랜드 선수들의 당당한 모습을 바라보던 최새벽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옆에는 선덜랜드 구단주 비서, 이희주의 모습이 보였다.
영국까지는 리미트리스 관계자 최다미가 안내했지만, 경기장 투어는 구단주 비서 이희주가 담당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대해서는 최다미보다 이희주가 훨씬 잘 알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이었다.
물론 다른 사정도 있었다. 모처럼 영국에 온 최다미가 오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해주려는 이희주 나름의 배려였다.
“관계자용 좌석을 준비할 수도 있었지만, 기왕이면 이 열기를 느껴보길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때요, 마음에 들었나요?”
“모든 면에서 최고입니다. 경기장의 시설도, 팬들의 열정도요. 저는 아직 이런 경기장에서 뛰어보지 못해서··· 정말 멋지네요. 좀 불안하기도 하지만···.”
“불안해요?”
“긴장되죠. 그야 누님께서 너무 예쁘시니까.”
이 정도면 열일곱 살 청소년치고는 꽤 능글맞은 대응이었지만, 이희주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응수했다.
“그랬으면 비행기에선 질식사했겠네. 다미 언니와 같은 항공편이었으니까.”
“하하. 산소호흡기가 추가로 필요했죠··· 죄송합니다. 긴장한 건 맞아요.”
“이해해요. 해외 진출에 실패하는 사례도 적지는 않으니까요.”
차분하게 말하며, 이희주는 조용히 덧붙였다··· 입 안에서만.
‘우리 오빠도 그랬었고.’
그라운드를 내려다보며, 최새벽이 담담하게 말했다.
“프로가 될 자신은 있지만, 그래도 우선 국내에서 데뷔하는 게 좋다는 조언도 많이 들었거든요. 실력을 키운 후 차근차근 해외로 나가는 게 좋다는 식으로요.”
“하긴··· 선수로서 한창 성장할 시기에 해외에 나섰다가, 적응에 실패하면 곧바로 성장이 막히죠. 그래서··· 돌아가고 싶어졌어요?”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최새벽이 결연하게 선언했다.
“아뇨. 도전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최새벽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떠올랐다.
“99번은 저와 딱 두 살 차이였죠? 그런데도 프리미어리그에서 선발로 뛰는 모습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 함성도요.”
Shall I stay? Would it be a sin.
If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데이터에는 잡히지 않는 뜨거운 외침.
선덜랜드가 이긴 날이면 경기장은 물론, 풋볼 스퀘어와 근처의 축구 펍들이 전부 인산인해를 이루고, 팬들의 노랫소리는 밤새 끊이지 않을 것처럼 이어진다.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소음이겠지만, 축구인에게는 가슴을 뛰게 하는 소리다. 하물며, 이제 막 프로가 되려는 축구 유망주로서는 더더욱.
“힘든 길이 될 거라는 걸 압니다. 영국은 워크 퍼밋이 까다로운 나라니까요.”
워크 퍼밋을 발급받으려면, 기본적으로는 피파 랭킹이 높은 나라 대표팀 소속으로, 2년간의 A매치에 참여한 실적이 필요하다.
한국의 피파랭킹은 조건을 채우기 충분해졌다. 지난번 카타르 월드컵 8강 진출의 저력으로 랭킹이 많이 올랐던 것이다. 다만 최새벽은 아직 어린 선수라, A매치 출전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유럽의 다른 클럽에서 머물며 정기적으로 출전하여 실적을 쌓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몇 년간 임대를 전전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반드시 적응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이 경기장에.”
“무슨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우리,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 아니에요.”
“네?”
“이제 겨우 프로 계약을 할 수 있는 청소년을 곧바로 임대부터 보내지는 않아요. 당분간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게 될 거고요.”
“하지만 워크 퍼밋은···.”
“워크 퍼밋이 나오지 않으니 스쿼드에는 당연히 포함되지 않죠. 하지만 해외 생활에 적응할 시간은 필요하잖아요? 임대를 다녀오는 건 적응이 끝난 다음 일이고요.”
“어··· 그렇게까지 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그야 선수 망가뜨리는 걸 오빠··· 아니, 구단주님이 끔찍하게 싫어하거든요.”
“알겠습니다.”
최새벽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덜랜드와 계약하겠습니다.”
* * *
토마스의 가세로, 분석실에서 김장 담그는 일이 대폭 줄어들었다. 다시 말해, 파김치가 덜 생긴다는 뜻이다.
각종 숫자 속에서 유의미한 데이터를 뽑아내는 작업을 토마스가 전담하면서, 샐리와 루벤의 업무량에 여유가 생긴 덕이다.
“이 친구 일 잘하네! 브렌트포드에선 대체 왜 잘린 거야?”
“잘린 게 아니라 제가 사표 낸 겁니다.”
토마스의 항변에도, 루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찬가지야. 팀에서 사랑받았으면 사표 냈을 리 없잖아.”
루벤의 이야기에 토마스가 침울해지려는 찰나, 옆에서 샐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그 전제라면 너도 진작에 사표 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봐, 나는 팀에서 존중받는 인재잖아.”
“아닌데? 축알못인데?”
예전에는 주로 브라이언 상대로 축알못이라며 매도하던 샐리는, 브라이언이 감독이 된 이후에는 자제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대신 루벤을 희생양으로 삼은 모양이다.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브라이언과 달리 루벤의 축구 전술 지식은 샐리와 논쟁할 만큼 뛰어나지는 않고, 직책 또한 샐리의 부하였기 때문에.
다행히 루벤 본인은 축알못 이야기에도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이었다.
“루벤 부팀장님도 축구 잘 아시는 분 아닙니까?”
“너랑 비교하면 그렇겠지만··· 옆에 괴물들이 둘이나 있다 보니.”
샐리가 데이터를 훑어보는 사이, 루벤이 목소리를 낮췄다.
“저 인간··· 우리 팀장은 정말 괴물이야. 성격은 거지 같아도 실력은 확실하지. A급 라이센스 만점이라는 건, 최소한 축구 이론만 따지면 무려 그 투헬과 동급이라는 뜻이니까.”
“하긴, 팀장님이 전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브라이언 감독님이나 메시 선수 아니면 대화가 성립 안 되던데요. 그런데 정작 감독님은 A급 만점이 아니셨다고 하던데···.”
“아, 그건 채점자가 포기해서 그래. 답안 읽어보면 구구절절 맞는 말 같긴 한데, 자기가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다고.”
“무섭네요···.”
질린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토마스를 향해, 루벤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천재들을 그냥 ‘주워’ 오는 구단주님이 제일 괴물이지만.”
“그 논리대로면 부팀장님도 천재 아닙니까? 이번 A급 라이센스 차석이시고, 구단주님이 곧바로 발굴하셨으니까···.”
“나야 그냥 흔해 빠진 엘리트, 기껏해야 수재로 끝나겠지. 오히려 나는 토마스 너한테 기대하고 있는데.”
“저도 전혀 천재가 아닙니다.”
“하긴, 천재가 발에 챌 정도로 흔하진 않겠지. 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진짜 천재들 사이에서 일하려면 힘들 거야. 같이 분발하자고.”
다정한 목소리로, 하지만 전혀 다정하지 않게도 루벤은 에너지 드링크를 꺼내 내밀었다.
“어, 이건···.”
“우리 팀장 애용품이야. 알다시피 우리 팀장은 여자잖아? 처음엔 경력도 없고, 축구판에서 이야기가 먹힐 스펙이 아니었지. 구단 레전드 딸이라 최소한의 발언력은 있었지만···.”
“아··· 이해합니다.”
“지금은 실력으로 입증했지만··· 대신 지독한 워커홀릭이 되어버렸지. 그러니까 내 말은.”
“저런 천재도 드링크 중독이 되도록 일에 몰두한다는 거군요.”
“그렇지, 그렇지.”
루벤의 충동질에, 토마스가 눈을 반짝이며 드링크를 땄다. 잠시 후 둘이 에너지 드링크 캔으로 건배하려는 찰나···.
“신입한테 아주 좋은 거 가르친다.”
샐리의 싸늘한 목소리가 쏟아졌고, 드링크는 순조롭게 몰수되었다.
사실 에너지 드링크가 꼭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선덜랜드 분석실은 예전과 비교하면 개인의 업무량이 극단적으로 줄어든 상태였고, 그 여유는 자연히 코칭스태프에게도 번졌다.
분석실에 여유가 생기자 샐리가 전술에 관여할 시간이 늘어났고, 루벤 또한 선수단의 컨디션 관리, 트레이닝에 더 많이 기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원정행 비행기에 오를 때는, 모처럼 아무도 다크서클이 없었고, 다들 윤기가 반들반들 흐르는 상태가 되었다.
선덜랜드 코칭스태프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맞이할 상대는 글라드바흐.
역사 깊은 독일 전통의 명문으로, 언론에서는 선덜랜드와 닮은 팀으로 평가했다.
과거의 강자이지만, 이후 암흑기를 맞았다는 점, 지금은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점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빠른 전환과 기동력을 무기로 삼는다는 점에서도.
* * *
1군 선수단이 원정 비행기에 올랐지만, 최새벽은 동행하지 않았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머무르며 해외 생활에 익숙해지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불만은 없었다.
‘클럽하우스 기숙사라길래 긴장했는데, 방이 무슨 5성 호텔급이고···.’
덕분에 모처럼 꿀잠을 잔 그는, 아침 식사를 위해 클럽하우스에 딸린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영양사가 미소를 지으며 안내했다.
“헬로! 오늘은 수프 코너에 코리안 비프 니 수프가 나왔는데.”
“고맙습니다만, 괜찮아요.”
“영국 식당에서 나오는 한식이라 미덥지 못한 건 이해하지만, 믿고 먹어 봐. 우리 구내식당 한식 메뉴는, 구단주님과 비서님 검수를 거친 완벽한 정통 한식이거든.”
“아뇨··· 그게 아니라, 한식은 집에서도 잘 안 먹어서요.”
“안 먹는다고?”
눈을 깜빡이는 영양사를 향해, 최새벽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해외 진출에 대비해서, 글로벌한 식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거든요. 일찍부터 영어도 배워 뒀고요.”
한국인 구단주가 있는 팀에 와버린 덕분에 최새벽의 노력이 살짝 빛이 바래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영 허사까지는 아니지 싶었다. 그는 머지않아 임대를 떠날 몸이었기에.
현재로서는 크로아티아의 오시예크 임대가 유력했고, 아니면 체코의 프라하로 향할 것 같았다. 어느 쪽이건 한식을 자주 먹을 가능성은 없는 팀들이다.
영양사가 미소를 지었다.
“기특한 생각이네. 그럼 글로벌한 영국 요리는 어떨까? 해가 지지 않던 시절부터 유명했던 요리니까, 역사상 가장 글로벌하다고 할 수 있지.”
영양사가 곧바로, 외국인에게 악명 높은 장어 젤리와 정어리 파이를 내밀었다.
먹어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장어 젤리야말로 진짜 함정 카드라는 평가가 따르지만, 비주얼로는 일단 정어리 파이가 압도적이었다. 바삭해 보이는 파이 도우 사이로 머리를 내민 생선 대가리를 바라본 최새벽이 몸서리를 쳤다.
“어··· 오늘은 그냥 한식 먹겠습니다.”
다이어트계에 유명한 명언처럼, 글로벌 식성은 내일부터 하자. 그게 최새벽의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