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천재를 상대하는 법 (5)
원정에서 세 골을 꽂아 넣으며 승리한 우리 선덜랜드의 경기력에 대해, 그리고 팀을 이끈 새 감독 브라이언에 대해 팬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 커리어 무패 실화냐? 감독 미쳤네.
퍼거슨의 재림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는 클러프의 환생이라며 난리였다.
개인적으로는 클러프의 환생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2부 리그에 머물던 노팅엄을 유럽의 챔피언으로 만들어 낸 감독이니까… 마침 이름도 둘 다 똑같이 브라이언이고.
- 아니, 어디서 이런 감독을 찾아냄?
ㄴ 투자의 신께서 말씀하시길 감독이 있으라 하니 감독이 있고….
ㄴ 원래 코치였는데 승격한 거. 근데 애초에 코치로 만든 사람도 지금 구단주임.
- 바에서 농약맛 칵테일이나 만들던 스태프가 역대급 전술 천재였다고? 안목 실화냐?
ㄴ 나는 사커 매니저 하던 여자를 분석팀장으로 삼았더니 A급 라이센스 만점 받아오는 게 더 무서운데.
ㄴ 나는 님들 능지가 더 무서움. 듣보잡 스타트업에 돈 넣어서 천문학적 수익률 올리는 사람이 구단주 하고 있는데, 그깟 인재 발굴이 뭐 어렵겠음?
ㄴ 그런데 프리시즌 때… 감독 바꿔야 한다고 떠들지 않았음?
SNS의 반응을 확인하던 희주가 얼굴 가득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그만둬! 걔들의 라이프는 이미 제로야!”
뭐, 내가 보기엔 그들은 곧 돌아올 것 같긴 하다. 아무리 우리 팀 분위기가 아주 좋아도, 언젠가는 패배를 경험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지면 곧바로 물어뜯겠지.
이거 보라는 둥,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둥, 아직 안 늦었으니 커리어 괜찮은 감독으로 바꾸라는 둥… 안 봐도 뻔하다.
아무튼, 브라이언은 이제 감독으로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모양이지만 인터뷰 스킬만은 도저히 낫지 않았다.
[두 팀을 합쳐 네 골이 전부 후반에 나왔습니다! 하프타임에서의 변화가 주효했다고 생각되는데, 혹시 득점을 위해 전술적으로 따로 변화를 준비하신 게 있을까요?]
“네, 그야 골을 원하지 않는 감독은 없을 테니까요.”
지켜보던 애니의 얼굴이 구겨졌고, 희주가 한숨을 쉬었다. 개인적으로는 말을 더듬지 않은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하지만.
브라이언 본인도 아차 싶긴 했던 모양인지, 이번엔 xGC 같은 각종 분석지표 이야기를 꺼내 수습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저 기자를 더욱 당혹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한결같이 처참하고 참혹한 인터뷰였지만, 다행히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 천재성이 느껴지지 않음?
희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사람은 일단 성과를 내고 봐야 하는 거구나.”
“그런 셈이지.”
아무튼 이기면 전술 천재, 풋볼 지니어스다. 다소 이상한 헛소리를 해도 천재성으로 포장되곤 한다. 반대로 아무리 정상적인 인터뷰를 해도 성적이 안 따르면 비웃음 한 사발을 퍼먹을 뿐이다.
물론 언론의 입장으로는, 브라이언의 인터뷰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아냐고?
[투자의 신! 선덜랜드의 썬 리 구단주님을 모셨습니다!]
이번엔 나한테도 마이크를 들이밀더라고.
[승리 축하드립니다! 오늘, 선덜랜드는 드디어 챔스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두셨는데요. 창단 이래 처음 있는 역사적 승리에 대해, 먼저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척 기쁩니다. 승리는 언제나 기쁘거든요. 하지만, 챔스에서 첫 승을 거뒀기 때문은 아닙니다. 우리는 유럽 대항전의 강자임을, 지난 두 시즌 내내 입증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기쁘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으니 정말로 댄스 타임을 하진 않겠지만.
“선덜랜드는 앞으로 계속 챔스에서 싸워 나가고, 또 승리할 팀입니다. 그러니 첫 승에 의미를 두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기대해 주신 팬 여러분께 보답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기뻤습니다.”
[그렇군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덜랜드는 첫 승 기념 씰을 발매합니다. 그리고 구단 역사상 첫 득점을 기록한 요나스 뮐러의 유니폼이 특별 할인 판매 중이오니 많은 애용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 첫 승에 의미를 안 둔다던 분 어디 가심?
ㄴ 기쁘지 않기는 개뿔. 신나 죽는구만.
ㄴ 이미 SNS에 영상 돌았음. 허공에 어퍼컷 제대로 먹이던데?
ㄴ 시티 오브 선덜랜드 주민입니다. 경기 종료 직후 곧바로 비행선이 떴네요.
[구단주님께서는 선덜랜드를 인수하신 이래, 매 시즌 트로피를 팀에 안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혹시 올 시즌도 기대해 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러려고 이곳에 와 있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어느 트로피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챔스냐, 90년 만의 1부 리그 우승이냐를 두고 선덜랜드 팬들은 물론, 축구팬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나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참여한 모든 대회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덜랜드의 방침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유에파에서 준비한 회견장이군요? 이 정도면 답변이 되셨길 바라겠습니다.”
내 이야기의 의미를 짐작한 인터뷰어가 미소를 지었다.
[잉글랜드에 돌아가시면 다른 이야기를 하시겠다는 말씀처럼 들리는데요.]
“저는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습니다… 축협 회장이신 왕세손님께서도 이 방송을 보고 계실 테니까요.”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하나 마나 한 답변임은 알고 있었지만, 별수 있나.
설령 내부적으로는 챔스와 리그 사이에서 명확한 우선순위를 정했더라도, 한 대회를 버리고 다른 대회에 올인하겠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사례는 없단 말이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팬 여러분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인터뷰어의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올 시즌에도 선덜랜드는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함께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 * *
당연하게도,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뉴캐슬 국제 공항에서 리미트리스 하이웨이로 진입하는 게이트 위에 곧바로 [This is Sunderland] 현수막이 내걸렸고, 도시 곳곳에는 엠블럼과 플래카드가 붙었다.
주위에 돌아다니는 행인의 절반쯤은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입었을 정도로,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챔스에서 거둔 첫 승리에 한껏 취해 있었다.
앨리스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응원용 유니폼을 입고 풋볼 스퀘어에서 목청을 높였고, 경기가 끝난 다음에도 줄곧 다른 팬들 사이에 섞여 축제를 즐겼다.
비록 나이 때문에 펍에 기웃거리지는 않았지만, 그 밖에도 즐길 거리는 많았다.
[유로파의 챔피언, 마침내 챔피언스리그에 서다]
비행선 아래에 펄럭이는 문구를 올려다볼 때마다 자꾸만 입꼬리가 같이 위로 올라간다.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에 흥분해 고개를 들면 전투기가 머리 위를 날았다.
[FC 선덜랜드에서 알려 드립니다. 금일, 일몰 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불꽃놀이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빛의 경기장을 수놓을 아름다운 불빛을, 팬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메가스토어에 챔스 첫 승 기념 씰이 입고되었습니다!]
“첫 승 기념 굿즈가 경기 당일에 풀렸다고? 미리 찍어 뒀다는 이야기잖아?”
혹시라도 졌으면 모조리 폐기하는 리스크까지 감수했다는 뜻이다… 그나마 씰이라 부담이 적었겠지만, 그렇다고 인쇄비가 안 들지는 않았을 텐데.
“반쯤은 배짱이었겠지? 글라드바흐를 무조건 이기겠다는.”
무척이나 갖고 싶었다. 팬이라면 당연한 심리다. 마침 선덜랜드 씰은 어린애들 용돈으로도 살 수 있는 가격이고, 앨리스의 주머니 사정으로도 몇 개쯤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유일한 문제는 메가스토어가 폭발 직전이라는 것이었다. 요니의 유니폼을 사겠다는 사람들로 미어터져서.
잠시 망설이던 앨리스의 귀에 또다시 방송이 들렸다. 이번엔 클럽 박물관 쪽이었다.
[클럽 박물관에서 알려 드립니다! 오늘의 기념비적인 승리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모처럼이니까 박물관부터 가 볼까?”
별생각 없이 결심한 일이었다.
바야흐로 시즌 초. 마지막 더위에 팬들의 열기까지 섞이다 보니 에어컨 바람이 살짝 그립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인파 사이에서 메가스토어에 줄을 서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클럽 박물관에는 메가스토어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선덜랜드의 일부 팬들에게는 ‘지옥문’ 이니, ‘마계의 입구’라는 흉흉한 별명으로 불리는 장소였지만….
“그야, 내가 충동구매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어차피 난 돈도 없는걸.”
하지만 앨리스는 곧, 자신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었다.
타임라인을 따라 선덜랜드의 주요 사건이 쭉 나열된 사이에, 오늘의 승리가 기록된 곳에서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FC 선덜랜드, 챔피언스리그 첫 승리!]
[기념비적인 첫 득점자는 요나스 뮐러]
문구만이었다면 그냥 뿌듯하고 말았겠지만, 그 옆에 놓인 무언가가 앨리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 이건 뭔가요?”
앨리스의 질문에 CS 팀원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네. 오늘 득점한 요나스 뮐러 선수의… 등신대 피규어랍니다.”
“등신대군요. 당연히 비매품이겠고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와 완전히 똑같은 형태로, 스케일만 축소한 미니 피규어가 곧 발매될 예정이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전혀 안심이 안 되는데요.’
그녀의 심정을 요약하면, 갖고 싶어 죽겠다는 문장이 된다.
앨리스는 입가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등신대 피규어를 바라보았다.
오늘 경기 중계에서 본 득점 장면 그대로, 간결한 동작으로 공을 슬쩍 밀어 넣는 요니의 모습을 재현한 상태였다.
“어떻게… 당일에 바로….”
“그 부분은 영업비밀입니다.”
“그래서 판매용 피규어는 언제 나오는 거죠?”
“다음 달에 발매됩니다. 오늘부터 열흘간 예약 선주문을 받을 거고요.”
“알겠습니다.”
앨리스는 표정을 굳혔다.
용돈이 거의 아슬아슬한 상태이긴 했다. 모든 홈 경기마다 입장권을 샀고. 시즌 초에는 메시 유니폼까지 질렀기 때문에.
아무리 선덜랜드가 십대 청소년의 입장료를 깎아 준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용돈 타서 쓰는 입장에서는 꽤 아슬아슬하다. 피규어까지는 도저히 살 형편이 못 된다.
하지만, 갖고 싶다.
‘알바를 해야겠네.’
결의를 다지며, 앨리스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녀는 무심코, 마계의 통로라 불리는 제5 게이트에 진입했다. 메가스토어로 연결되는 통로를.
나름 이성적인 그녀였지만, 충동구매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전통 있는 명문 선덜랜드의 옛 역사와, 최근 화려하게 부활한 팀의 승승장구하는 행보, 그리고 트로피들 사이를 지나 메가스토어에 향한 이상 필연적인 행보였다.
“챔스 첫승 기념 씰 다섯 장하고, 요니 피규어 예약할게요!”
* * *
선덜랜드의 축제 분위기는, 한국인 유망주 최새벽에게도 무척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축구에 미친 동네라는 건 진작에 듣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한국에서는, 연고지 축구팀이 이겼다고 도시 전체에 플래카드를 붙이거나, 유니폼 입은 팬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지 않기 때문에.
덕분에 최새벽은 강렬한 동기 부여를 느꼈다. 워크퍼밋 문제를 해결하고, 언젠가 반드시 이 팀에서 뛰겠다는 의욕이 타올랐다.
하지만, 최새벽에게 있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붉게 물든 도시도, 요니의 챔스 첫 골도 아니었다.
후반, 교체 투입된 프랭크의 활약이 가장 대단했다.
프랭크는, 최새벽과는 나이 차이도 별로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두세 살 차이에 불과한 차이다. 그런데도 프랭크는 챔스에 교체 투입되어 맹활약을 펼쳤고, 그는 워크퍼밋조차 따지 못해 당분간 임대를 전전해야 한다.
‘99번 해리슨의 활약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래도 해리슨과는 포지션이 다르다는 위안이 되었지만, 프랭크는 그와 포지션이 겹치는 선수다.
“진짜 잘하던데.”
최새벽의 혼잣말에, 옆에서 테오가 불쑥 끼어들었다.
“프랭크는 센터백으로도 뛸 수 있어.”
“응. 보면 알아… 정확히 말하면, 원래 센터백인 선수지?”
최새벽은 확신하고 있었다. 프랭크는 원래 센터백인 선수라고. 같은 센터백이라면 알 수 있는 몇 가지 디테일 때문에, 눈치채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오늘 보여 준 것처럼, 프랭크는 풀백 자리에서도 준수하게 활약할 수 있다. 발이 빠르고, 킥이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도 킥 연습을 해야겠는데.”
선덜랜드의 센터백은 하나같이 발재간이 준수하다. 에디는 아예 미드필더로 뛰어도 될 정도의 패스워크를 자랑하고, 이고르도 나쁘지 않은 수준은 된다.
레프트백 베넷이나 라이트백 브루노는 말할 것도 없다.
골키퍼에게 빌드업 능력을 그다지 요구하지 않는 대신, 선덜랜드는 포백라인 전체에 패스워크가 좋은 선수들을 배치한 것이다.
장차 이 팀에서 뛰려면 자신도 빌드업 능력을 갖추어야 함을, 최새벽은 확신했다.
“연습 도와줄까? 패스 받아 줄 사람 필요하잖아?”
“그럼 고맙지만, 사실은 압박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최새벽의 대답에, 테오가 히죽 웃었다.
“마침 잘됐네. 나도 센터백 상대로 전방압박하는 연습이 필요하던 참이거든.”
“너 같은 천재 꼬맹이도 연습을 하는구나.”
무심코 말하자, 테오에게서 어이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한 거 아니야? 요니도 해리슨도… 축구의 신도 훈련하는걸?”
“하긴, 그렇더라.”
최새벽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훈련장을 향해 걸었다.
그날, 챔스 첫 승리를 기념하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위를 밝히는 동안….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