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60화 (260/422)

260화 공을 차는 이유 (3)

카메룬의 축구 신동, 디아라의 눈은 스크린을 떠날 줄 몰랐다.

화면에서는 최근 선덜랜드의 리그 경기, 공격진의 환상적인 득점 장면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페널티 스팟까지 진입한 베리가 공을 뒤로 흘렸고, 뒤따라온 크리그가 곧바로 공을 걷어차는 모습. 완벽한 연계 플레이를 바라본 디아라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미드필더에서의 지원이 정말 훌륭해요! 움직임을 이렇게··· 이렇게···.”

고개를 까딱거리고 손가락을 허공에 휘휘 돌리며 득점 상황까지의 빌드업 국면을 복기하는 디아라를 바라보던, 로저스의 입에도 자연히 웃음이 떠올랐다.

“이전 경기에서, 99번도 멋졌어요. 저는 그런 패스길이 있다는 생각도 못 했는데요.”

“아마도, 곧 보이게 될 거란다.”

디아라는 아직 어린 선수고, 지금까지 체계적인 훈련 한 번 받지 못했었다. 해리슨에게 보이는 루트가 벌써 보일 리는 없다.

게다가 디아라의 최대 장점은 패스워크의 천재성이 아니라, 풍부한 활동량과 움직임, 그리고 위치선정 능력이다.

커다란 눈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디아라를 향해, 옆에서 바르카가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경기 그만 보고 공 차러 가자, 응? 오늘은 놀아준다면서!”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디아라와, 벌써 공을 발로 굴리기 시작한 바르카를 번갈아 바라보던 로저스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둘 다 재능 있는 유소년이지만 타입이 다르다. 어쩌면 스트라이커와 미드필더의 차이일 수도, 혹은 자라온 환경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르카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아무 걱정 없이 공을 차온 소년이지만, 디아라는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묻힐 뻔했으니.

물론, 이제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두 소년 모두 리미트리스 SM&C의 관리를 받으며, 체계적인 훈련을 거쳐 선덜랜드의 프로 선수가 될 테니까.

“그럼 조직위원장님, 잠깐 공 좀 차고 와도 괜찮을까요? 나중에 선덜랜드에서 뛰려면, 연습이 꽤 필요할 것 같아서요.”

경기 영상은 이제 충분히 봤는지, 디아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까지 목 늘어난 낡은 티셔츠를 입던 소년의 몸에는 이제 말끔한 트레이닝복이 걸쳐졌고, 발에는 낡은 플라스틱 샌들 대신 리미트리스에서 지급한 새 축구화가 반짝거렸다.

“그러려무나.”

로저스가 허락하자마자, 바르카가 이를 드러냈다.

“기다리다 목 빠질 뻔했어. 빨리 나가자.”

“졌다고 울지는 말고.”

“너나 울지 마.”

가벼운 입씨름으로 서로에 대한 호승심을 드러내는 소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로저스는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몇 년 후가 기대되는걸.’

무심코 상상하고 말았다. 프로가 된 이 아이들의 모습을.

디아라가 특유의 피지컬과 위치선정 능력을 살려 중원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테오가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 찬스를 점수로 바꾸는 것은 바르카의 몫이겠지.’

그런 모두의 등 뒤에서, 선덜랜드의 1번이 주장다운 듬직함으로 선수들을 독려하리라. 휘슬이 울릴 때까지 발을 멈추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고.

“···오래 살아야겠어.”

소년들의 재능은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예전의 자신과 달리, 지금의 선덜랜드는 절대로 선수를 망가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 모두가 무사히 프로가 되겠지만, 그래도 성장할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로저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숙소를 막 빠져나가려던 소년들의 시선이 쏠렸다.

“조직위원장님?”

“어, 할아버지도 같이하시게요?”

소년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은 로저스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 신경 쓰지 말거라··· 나는 그냥 운동 좀 하려는 거니까.”

* * *

한때 이슈가 되었던 리미트리스 유소년 리그, 카메룬 대회도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우리 선덜랜드는 한 달 내내, 참여한 모든 대회에서 무패를 이어가면서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행복의 정점에서··· 나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나비넥타이를 조였다.

오늘은 미루고 미루던 이벤트를 처리하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대영제국 훈장 수여식 말이지.

공식적으로는 이미 나는 서훈을 받은 상태지만, 그래도 실물 훈장을 직접 건네주고 받는다는 행위에 의미가 있다는 모양이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조용히 나 혼자 다녀오고 싶었다. 아니면 원격 수상도 괜찮을 텐데··· 하지만 인생은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선덜랜드 관계자들이 잇달아 참석을 선언했기 때문에.

선수단 대표는 주장단, 정확히는 주장 잭과 부주장 요니로 결정되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톰슨이었다.

원래 이런 순간엔 오랜 친구가 제일 얄밉다는 법칙을 충실하게 지키려는 모양인지, 이제 주장단도 아니면서 은근슬쩍 끼어든다.

“야, 썬. 얼굴 좀 펴라. 솔직히 동양 문화에선 연미복 입을 일이 잘 없어서 어색한 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나중에 결혼식에서 입을 거 아냐? 미리미리 익숙해져야지.”

“한복 입을 건데.”

방금 정했다. 이놈의 연미복은 나하고 안 맞아. 일반적인 넥타이와 정장 정도는 나도 편하게 입는 편이지만, 연미복에 나비넥타이 조합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한복, 한복···.”

기분 탓인지 구석에서 메모하는 리지의 눈이 사납게 빛나는 것 같다··· 확실히 리지는 후리후리한 편이라 한복이 꽤 잘 받을 것 같긴 하지만.

“괜찮슴다. 구단주님 정말 멋지심다.”

“네, 정말 멋지시네요.”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시도하는 잭과 요니를 향해, 나는 내뱉듯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연미복 안 입는데?”

옆에서 톰슨이 대신 대답했다.

“존경하는 썬 리 구단주님? 저희는 당사자가 아니라 관객 아닙니까? 우리까지 굳이 연미복을 입을 필요는 없지.”

“어··· 나중에 결혼식 하려면 미리미리 익숙해져야 한다면서?”

잭과 요니의 표정이 볼만해졌지만, 톰슨은 태연했다··· 사실은 나도 말하자마자 아차 싶긴 했다. 놈은 기혼자거든.

그래서 재빨리 태세를 전환했다.

“발롱도르나, 아니면 PFA 올해의 선수 시상식에서는 연미복 입어야 할 거 아니야. 빨리 갈아입어.”

“발롱도르? 내가? 이 나이에?”

이미 전성기가 지난 톰슨은 빙긋거리며 빠져나갔지만, 선수로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는 잭과 요니에게는 예외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주장과 부주장은 반강제로 연미복을 착용했다.

잠시 후 브라이언과 샐리··· 그리고 구단주 비서가 따라붙었다.

“아니, 선머슴 같은 샐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레이디께선 드레스 같은 거 입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 못지않게 연미복 차림이 안 어울리는 브라이언이 하소연하자, 희주가 곧바로 대답했다.

“오빠가 절대 입지 말라고 해서요.”

이런 자리에 입는 서양식 드레스는 아무래도 볼륨감이 필요한데, 희주 쟤는 영 볼 게 없단 말이지. 내 시력 보호를 위해서라도 안 돼.

그렇게 나와 선덜랜드 가족들은, 훈장 서훈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식장 입구에서는 리미트리스 가족도 추가되었다.

“아니, 다미 쟤는 대체 누가 오라고 한 거야?”

“갑부 오라버님, 다미 언니를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리미트리스 사장밖에 없는데요.”

희주의 지적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 내가 영국에 불렀었지. 디아라 문제로.

“알아. 안다고. 그래도 난 시상식엔 안 불렀어. 저렇게 입고 오라는 소리도 안 했고.”

오늘의 식장에서 가장 언밸런스한 존재는 연미복이 영 어색한 브라이언도, 바지 정장을 입은 희주와 샐리도 아닌, 바로 다미였다.

행사가 행사인 만큼, 다미는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그것도 아카데미나 칸 영화제 같은 데서나 입고 나올 만한 화사한 드레스 차림을.

한국인 여성이 소화하기에는 꽤 화려한 드레스코드였지만, 다미에게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원래부터 연예인을 해도 될 외모이기도 하거니와, 쟤는 키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서구적이거든.

문제는, 손에 들린 카메라였다. 다미는 기자들, 그것도 도촬 전문 파파라치들이나 쓸 것 같은 기다란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왔다··· 그것도 드레스 차림으로.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자, 다미가 흐드러지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사장님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찍어서 소장할 거니까요. 저, 사진도 미리 공부했어요.”

이상한 단어가 섞인 것 같은데··· 기분 탓이지?

* * *

훈장을 받고 기진맥진하게 늘어진 나를 향해, 축협 회장이 빙긋 웃으며 다가왔다.

“지친 모양이군요.”

“아, 회장님!”

얼굴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나는 재빨리 자세를 고쳤다.

“어, 혹시 오늘 행사는 왕실 일이니까 왕세손님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편한 대로 해도 됩니다. 어차피 나는 선물 주려고 온 거니까요.”

축협 회장이 내게 ‘선물’을 내밀었다. 왕실의 인장으로 봉인된 큼직한 편지 봉투다.

“아시다시피 회장이라고는 해도 명예직이라, 실권은 없어요. 별 도움은 안 될 겁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카메룬 일을, 영국 왕실에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쓴웃음을 짓는 축협 회장의 옆에서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긴···.”

나는 재빨리 희주의 발을 밟아서 제압했다. 사실 제3 세계에서 일어난 문제는, 대충 절반쯤 영국 책임이 맞지만, 그래도 영국 왕실 앞에서 거론하기엔 서로 불편한 이야기다.

다행히 축협 회장은 딱히 신경 쓰지 않은 채, 미소와 함께 떠났다.

“그래서, 뭔데?”

“들었잖아. 선물이라고.”

정확히는, 추천서였다.

이번에 카메룬 대회에서 우승한 축구 신동 디아라는, 유소년치고는 적지 않은 나이다. 머지 않아 프로 계약을 맺게 될 텐데, 그 경우 당연하게도 워크 퍼밋이 문제였다.

원칙대로라면 최새벽처럼 해외 임대를 다녀와야겠지만, 디아라는 최새벽과 달리 한 번도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선수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기초가 잡힐 때까지는 구단에서 키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가 떠올렸다. 이번에 디아라의 사연이 유명해지면서, 리미트리스가 카메룬의 아동 인권에 기여한다는 칭찬이 이어지는 중이라는 걸.

그런데 카메룬의 인권 문제는, 마침 영국이 군침을 흘릴 만한 소재였다. 영국과 카메룬은 역사적으로 꽤 복잡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훈장 수여식을 앞두고 슬쩍 찔러 봤더니, 아무래도 넙죽 받기로 한 모양이다. 아동 노동에 시달리던 유망주가, 영국에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운다는 스토리에 적극 협조하기로.

“즉 이 추천서는···.”

“디아라의 워크 퍼밋을 신청할 때 도움이 될 거야.”

“어쩐지··· 그렇게 싫어하던 훈장을 순순히 받으러 나온다 싶더니만. 다미 언니 말이 맞네.”

“왜, 다미가 뭐라길래?”

“오빠는 절대로 손해 보는 법이 없다고 하더라고.”

“그건 쟤도 마찬가진데.”

카메라 화면을 들여다보는 다미의 표정은, 마치 대량의 전리품을 획득한 점령군 사령관을 연상시켰다. 그런 다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리미트리스··· 욕심이 끝도 없구나.”

* * *

한편, 구단주가 훈장 받으러 끌려간 날, 선덜랜드에는 기쁜 소식이 추가로 들려 왔다.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소녀 팬 클라라가, 마침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한때 중태에 빠질 만큼의 사고였지만, 어린 나이라서 회복도 빠른 모양이었다.

“괜찮아?”

짐의 질문에, 클라라가 방긋 웃었다.

“응! 아직 깁스를 다 풀진 못했지만, 목발 짚으면 걸어 다닐 수 있어. 그동안 너무 오래 누워 있었으니까, 조금 외출하는 정도는 오히려 좋다고 의사 선생님도 말씀하셨어.”

“내 말은, 축구장에 와도 괜찮냐는 거였는데.”

그녀는 축구 관람 후 돌아가던 길에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어쩌면 트라우마가 남았을지도 몰라서 물어봤더니, 클라라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잠시 후, 옆에서 테오가 두다다다 달려와 짐의 옆구리에 팔꿈치를 찔러 넣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따가 우리 주장이 바래다줄 테니까!”

“정말? 고마워!”

방긋거리는 클라라를 바라보며, 짐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내가 왜.’라고는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사실, 짐은 클라라의 사고에 여러모로 죄책감을 느끼던 중이기 때문이었다.

괜히 경기 티켓을 준 것도, 경기를 보고 피가 끓어서 연습하느라 클라라를 혼자 돌려보낸 것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알았어. 집까지 배웅할게.”

“아하하, 고마워··· 그런데 모처럼 응원 온 거니까 다른 것도 필요할 것 같은데?”

짐이 대답하기도 전에, 테오가 또 끼어들었다.

“음료수? 아니면 양산? 말만 해. 전부 주장이 준비해 줄 거야.”

“정말? 그럼 클린시트가 보고 싶어.”

오랜 입원으로 조금 창백해진 클라라의 뺨이 보기 좋게 발그레해졌고, 연분홍색 입술 옆엔 예쁘게 보조개가 피었다. 어째서인지 짐은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린다고 느꼈다.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짐은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참고할게.”

아무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게 골키퍼의 미덕이라지만, 이렇게 호의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소녀 앞에서 태연하게 행동하는 것은, 사춘기 소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 하러 또 경기장에 와서는.’

그래도 짐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린다고 느꼈다.

“우리, 오늘 지면 큰일 나겠다. 그치?”

옆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테오를 향해, 짐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지지는 않을 거야. 최악의 경우라도 무승부겠지.”

골키퍼가 점수를 주지 않으면, 절대로 지지는 않는다. 축구계에서는 아주 당연한 진리이지만···.

어느새 자신이 클라라의 희망을 이루어주는 걸 전제로 삼고 있음을, 짐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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