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61화 (261/422)

261화 공을 차는 이유 (4)

선덜랜드 유소년은 그날, 당연하다는 것처럼 승리했다.

“클린시트 축하해! 멋있었어, 마지막 선방!”

사이드라인 밖으로 걸어 나오는 짐에게, 클라라가 이온 음료를 내밀었다.

원래 이런 역할은 메디컬 팀 스태프들의 역할이었고, 실제로 짐 이외의 다른 선수들은 당연히 스태프들에게서 음료를 받았다.

다만 목발까지 짚고 선수를 응원하러 온 소녀의 손에서, 이온 음료 캔을 빼앗을 만큼 사악한 선덜랜드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유소년 전담 스태프들은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근데, 다칠까봐 조마조마했어. 혹시··· 보였던 거야?”

마지막 선방 당시, 몸을 날리던 짐은 하마터면 골포스트에 충돌할 뻔했다. 클라라가 비명을 지르게 만든 장면이었다.

물론 짐의 대처는 능숙했고, 골포스트에 충돌하는 일 없이 무사히 클린시트를 지켜냈다.

“안 다쳐. 골키퍼는 자기 등 뒤에 뭐가 있는지 알거든.”

“그런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클라라를 향해, 짐은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매일같이 지키고 있으니까.”

“그렇구나. 등 뒤에 있는 걸 지키는 게 골키퍼의 일인 거네?”

“비슷해.”

짐의 롤모델인 페르난데스와 하퍼라면 조금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팀의 패배를 막고 동료의 등 뒤를 지켜내는 게 골키퍼의 일이라고.

하지만 아직 그 정도 경지에 오르지 못한 소년 골키퍼 짐에게는, 자기 등 뒤의 골마우스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자, 그럼 돌아갈까?”

“응!”

목발에 의지하는 클라라의 걸음은 느렸지만, 텐션은 높고 경쾌했다.

“그러고 보니, 혹시 사인 같은 거 연습은 하고 있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클라라가 사고를 당한 직후,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축구선수가 팬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조언을. 최선을 다해 뛰기, 웃어주기 같은 목록 사이에는, 분명히 사인도 들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 오늘은 웃어줬던가?’

짐이 자신의 얼굴 표정을 조심스럽게 고치자 클라라가 폭소했다.

“아하하, 표정 이상해. 그게 뭐야!”

“어··· 직업병이라고 쳐 줘.”

그라운드 위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연습 중인 소년 골키퍼는, 특성상 자연스러운 웃음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다.

웃어주기는 당분간 빼자고 결심한 짐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미안. 사인 연습은 아직 못 했어.”

“음··· 누구한테 해준 적도 없어?

“응.”

“그렇구나.”

당분간 사인을 해줄 수 없다는 이야기에도, 클라라는 퍽 기분이 좋아 보인다. 짐이 조심스럽게 떠보자

“그야, 사인 받은 사람이 많으면 값어치가 떨어지잖아?”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가던 길에서, 클라라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호흡도 살짝 가쁘다. 아무래도 병원 침대에 오래 누워 있어서 근력이 약해진 소녀에게 목발까지 짚고 돌아다니는 것은 아무래도 운동량이 너무 과하다.

“안 되겠다. 업어줄까?”

“어···? 저, 정말?”

기본적으로 짐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클라라였지만, 이번만은 조금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다. 무겁다고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면서도, 클라라는 퍽 기분 좋은 것처럼 보였다.

‘음··· 혹시 업어줘서 그런 건가?’

오늘, 자신과 클라라가 골키퍼의 역할에 대해 정의했기 때문임을··· 짐은, 이번에도 눈치채지는 못했다.

* * *

사인을 여기저기 해주면 값어치가 떨어진다는 클라라의 논리가 사실이라면, 선덜랜드에서 가장 값어치 없는 사인은 주장 잭의 사인일 것이다. 그리고 잭은 그 순간에도 자기 사인의 가치를 절찬리에 떨어뜨리는 중이었다.

“아탈란타 원정? 문제 없슴다. 컨디션 최상임다!”

사인펜을 든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에도, 입은 조금도 쉬지 않았다.

“아, 그렇다고 응원 안 하심 안 됨다? 풋볼 스퀘어에 모이시는 검다. 기왕이면 저희 제휴 펍들 매상도 올려 주심 더 좋슴다··· 감사함다.”

잭의 손길은 경쾌했고, 시선은 꼼꼼했다. 심지어 근처의 CS팀원들도 발견 못 한 숨은 팬들까지 끌어내서 기어이 사인해주는 연쇄사인마의 면모를 보였다.

“사인이요? 고맙긴 한데··· 이거 요니 레플리카인데요.”

“그렇슴까? 그럼 요니 사인을···.”

“진짜요? 불러 주실 건가요?”

환호하는 요니 팬에게, 잭은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

“바로 해 드리겠슴다. 걔 사인은 단순해서 흉내 내기 쉽슴다··· 제가 또 걔하고는 오랜 친구 아님까?”

“아니, 그건 좀···.”

그런 우여곡절 끝에, 오늘도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 몰려든 선덜랜드 팬들은, 잭의 사인을 대량으로 획득했다.

지켜보던 에이미가 쓴웃음을 지었다.

“캡틴, 팔은 괜찮아요?”

“괜찮슴다. 축구선수는 팔을 쓰지 않슴다.”

“그 변명, 축구단 관계자에게도 통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 몸싸움이나 스로인 같은 때 팔 사용하잖아요?”

“그건 쓰는 근육이 다름다. 진짜임다. 메디컬 팀에 물어본 검다··· 어, 쟤들은?”

대답하던 잭의 눈이 빛났고, 에이미가 몸을 떨었다. 선덜랜드 주장은 숨은 팬들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고성능 시야의 소유자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소녀 팬 클라라, 그리고 클라라를 업고 돌아가는 유소년 주장 짐을 발견한 잭의 눈이 마구 반짝거렸다.

“저러고 가면 몸 축날 텐데, 차로 데려다··· 읍! 으읍!”

“잠깐만요, 잠깐만요. 캡틴.”

잭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은 에이미가, 잠시 후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저렇게 분위기 좋을 땐, 괜히 주위 어른들이 끼어들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슴까? 잘 모르겠슴다. 연애 안 해봐서 잘 모름다.”

“음, 그건 저도 마찬가지지만··· 캡틴은 운전도 자신 없잖아요, 그쵸?”

아픈 데를 찔린 잭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일단 면허는 있지만, 그는 전형적인 장롱면허의 소유자였다. 그는 평소 집과 훈련장, 클럽하우스 사이를 걸어 다니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구단에서 지급한 미끈한 로드스터는 주차장에 방치된 지 오래라, 시동이 걸리기는 할지도 살짝 의심스러울 정도다. 잭이 자신의 차량 상태를 떠올리는 사이, 에이미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보니 다음 주부터 아카데미에 견학을 온다던데요? 이번에 리미트리스 유소년 리그에서 발탁된 선수들이요.”

합류 시점은 자체는 선수마다 조금씩 달랐다. 유망주의 해외 이적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유소년 시절에는 해외 이적 자체가 제한되고, 프로 계약을 맺을 무렵엔 워크 퍼밋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덜랜드 경기를 직접 지켜보거나,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시설을 체험하는 정도는 지금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이미의 기대대로 짐과 클라라의 모습은 슬슬 시야 밖으로 사라졌고, 잭의 눈에는 광채가 돌아왔다.

잭 자신이 그런 것처럼, 클럽 유소년 출신은 대체로 클럽의 팬이다. 프로 선수라면 주전 여부나 감독의 성향, 주급 등의 다양한 이유로 팀을 고르지만, 그런 요소가 덜 중요한 유소년 시절엔 그냥 좋아하는 팀을 고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이번에 견학 오는 유소년들은 높은 확률로 선덜랜드의 팬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데다 재능 있는 축구 소년이기까지 하니, 팬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선덜랜드의 주장이 당연히 흥분할 키워드였다.

“그렇슴다. 듬뿍 예뻐해줄 검다.”

‘이놈의 연쇄사인마가 또.’

속으로 투덜거린 에이미가, 특유의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말투 고치는 건 이제 포기한 거예요? 애들이 따라 하는 게 싫다면서요.”

“포기했슴다. 감독님도 그다지 말씀 잘하는 분이 아니잖슴까? 그러니까 이 기회에 말주변 없는 팀컬러를 만드는 검다.”

“제발, 그런 이상한 팀컬러 만들지 말고요.”

“농담임다. 우리 팀컬러는 딱 한 가지면 충분함다.”

“발을 멈추지 않는 축구죠?”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잭이, 대량의 사인을 품에 안고 돌아가는 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번 다시 저 사람들을 울리지 않을 검다.”

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이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마음이 맞네요. 저도, 팬들의 웃음만 보고 싶거든요.”

* * *

[챔피언스리그 조별 3경기, 아탈란타 대 선덜랜드]

“아탈란타는!”

앨리스의 외침에, 브라더스의 시선이 몰렸다.

“세리에 A에서 가장 성과 좋은 유소년 팀으로 유명해요. 그리고, 가장 화려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팀으로 거듭났죠.”

앨리스의 설명은 거침이 없었다. 원래부터 축구를 잘 아는 편이었는데, 최근에는 선덜랜드 데일리에 기고하며 지식의 깊이가 더욱 커졌다.

일설에 따르면 선덜랜드 프레스팀과 분석팀이 물밑에서 쟁탈전을 벌이며 그녀가 졸업하기만 기다리는 중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지금처럼 브라더스와 어울리며 수다를 떠는 것을 훨씬 즐겼다.

“누군가는 유럽 최강의 창이라고 부른다던데요?”

“무시무시한걸.”

“물론, 아탈란타를 유럽 최강의 팀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의미를 짐작하시리라 믿을게요.”

의미를 이해한 브라더스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탈란타의 종합 전력은, 팀의 공격력에 미치지는 못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런 타입의 팀은 의외로 점수 쟁탈전에 취약한 경우가 많다.

“물론 우리 선덜랜드의 공격력도 뒤지지는 않죠.”

보란 듯 호들갑을 떠는 앨리스를 바라보는 브라더스의 얼굴에 일제히 삼촌 미소가 번졌다. 잠시 후 브라더스가 합창처럼 대답했다.

“축구의 신, 프라하의 악마, 이탈리아의 적.”

메시, 마르틴, 바스티아노의 별명을 차례로 읊은 브라더스를 바라보던 앨리스가 인상을 썼다.

“이탈리아의 적이라고 하지 말아요. 바스티아노는 그 별명 싫어하는 거 모르세요?”

잭이 ‘살인마 잭’이라는 별명을 들을 때마다 치를 떠는 것처럼, 바스티아노 역시 ‘이탈리아의 적’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아무래도 별명이 붙은 계기가 영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월드컵 16강전에서의 실축에서 비롯된, 매국 드립이 원인이었으니.

“그래도 기본적으로 되게 세 보이는 별명이라서··· 아니, 안 그럴게.”

도끼눈을 뜨는 앨리스를 향해 핫도그 사내가 고개를 젓는 사이, 맥주집 사장이 스크린을 가리켰다.

“어? 그런데 라인업이 조금 이상한데?”

“네?”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축구의 신 메시는 출전했지만, 하지만 마르틴과 바스티아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 선발은 크리그와 베리인데?”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로테이션’이라는 단어를 지우려, 앨리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선덜랜드는 당당한 챔스 B조 1포트 팀이지만, 그래도 아탈란타를 한 수 아래로 깔아볼 정도의 격차는 당연히 아니다. 하물며 홈도 아니고, 아탈란타 원정이라면.

“카운터 축구를··· 하겠다는 걸까요?”

“그러게. 하필이면 유럽 최강의 창이라는 팀을 상대로 말이야.”

“그냥 점수 쟁탈전을 벌이면 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원정이니까 역습으로 딱 한 골만 넣겠다는 뜻이지?”

“원정다득점이 없어진 마당이라, 큰 의미는 없겠지만요.”

투덜거리는 브라더스와 불안해하는 앨리스의 시선에 선덜랜드 라인업이 계속 스쳐 지났다.

[선덜랜드 감독 : 브라이언]

문장조차 되지 않은 단어의 나열이, 앨리스를 안심시켰다.

비록 티셔츠 디자인은 엉망으로 하고, 일상생활에서의 면모는 거의 폐급 수준인 브라이언이지만, 사이드라인 안에서는 축구 천재를 충분히 자처할 정도다.

그리고 브라이언을 보좌하는 샐리의 분석력은, 절대로 상대의 역량을 잘못 재지 않는다.

따라서, 저들이 카운터 축구를 고른 이유는···.

“아탈란타의 공격력을 셧아웃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죠?”

* * *

[아탈란타의 공격력을 셧아웃할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까?]

내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샐리가 호흡을 가다듬던 모습이 떠오른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아탈란타의 공격력을 셧아웃할 정도가 아니면, 챔스를 노리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아탈란타 원정을 앞두고 우리 코칭스태프가 내린 결론에, 나도 곧바로 동의했다.

세상에는 화끈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축구 팀이 몰려 있다. 파리, 레알, 바르샤, 뮌헨, 맨시티 같은 팀들이. 그리고 서로 빠른 템포로 치고받는 난타전이 되면 리버풀도 엄청 무섭다.

챔스에 나간다는 건, 그런 팀들을 상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챔스를 노린다는 건, 그들 모두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우승권 전력이 아닌 아탈란타의 공격력을 통제하지 못해, 그들과 점수 쟁탈전을 벌여야 할 정도라면 올 시즌 목표를 일찌감치 수정하는 게 현명할 것이다··· 유럽 대회는 내버리고, 그냥 국내에서 내실을 다지자는 식으로.

물론 올해의 우리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다.

“애초에 오늘의 우리 공격력이 약하지도 않고.”

바스티아노와 마르틴이 없는 만큼, 시종일관 주도권을 가진 채 찍어누르는 축구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대신 오늘은 베리를 앞세운 빠른 전환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최전방에는 크리그가 있다. 지난 시즌부터 주로 처진 스트라이커로 출전했는데, 오늘 경기에서는 당당하게 최전방에 섰다.

최근 공격 자원이 늘어나며 팀에서의 입지가 좁아지는 와중에도, 불평 하나 없이 자신의 역할에 늘 충실해온 크리그를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Loyal through and through. Over and over, We will follow you.

잠시 후, 휘슬이 울렸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Vinci per noi, Magica Atalanta.

경기장을 메우는 홈 팬들의 함성과, 원정까지 따라온 우리의 목소리가 충돌하는 사이, 선덜랜드의 레드 앤 화이트 유니폼이 일제히 돌격했다.

우리의 상징색과 정반대인, 검고 푸른 네라주리 유니폼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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